# 52
16. 지난 일은 흘려보내고(1)
김일교 교수의 분향소는 많은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양 옆으로 화환이 너무 많아 화환의 리본만 떼어내 복도 벽에 붙였는데 벽도 부족할 정도다.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의 수가 그 사람 인생을 모두 말해주는 건 아니겠지만 추모 행렬이 이어지는 것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산 건 분명해 보였다.
‘괜히 겁을 먹었나 보네.’
예상대로 아는 얼굴이 많았다. 한데 그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긴 교수님들의 경우 한 해 100명이 넘는 인원을 가르치고, 학생들의 경우 자신이 속한 학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지 않는 이상 동기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도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으니 설령 서로 안면이 있는 사람조차도 지나치기 쉬웠다.
‘봉투가······?’
이제 보니 돈만 달랑 챙겨왔다.
분향소 입구에 봉투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후 구석으로 갔다.
두 장을 가져왔는데 두 다발의 돈이 한 봉투엔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수표가 있었으면 좋았을걸.’
두툼한 두 개의 봉투를 내밀자 책상에 앉아 돈을 받던 이의 눈이 커졌다.
봉투의 열어볼 필요도 없이 열려 있어 얼마가 들어있는지 확인을 한 모양이다.
다행히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어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분향실로 들어갔다.
분향 차례를 기다리면서 분향실 한쪽 의자에 앉아 멍하니 은사님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사모(師母)를 봤다.
은사님과 두 번 같이 중국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사모도 동행을 해서 잘 알았다.
두삼의 차례가 됐다.
향을 꽂으며 영정 사진 속 빙긋이 미소 짓는 은사님을 봤다.
‘평소에 그렇게 웃으시지··· 이제야 찾아와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절을 하는데 눈물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참으려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가장 무난한 말로 상주인 은사님의 두 아들과 딸에게 위로를 전한 후 맞절을 했다.
김일교는 의사라는 직업을 자식들이 잇기 바라진 않았는지 세 자녀 중 한의사는 없었다.
사모께 인사를 드려야 하나 싶어 돌아보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다가갔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사모님.”
“아니다··· 힘들게 살았던 게지. 잘 지내니?”
“선생님 덕분에 사람답게 살고 있습니다.”
“간혹 네 얘길 하곤 했단다. 자신이 조금만 더 엄격하게 했더라면 훌륭한 한의사가 됐을 거라고.”
“···선생님만큼 저한테 잘해주신 분이 어디 계시다고요. 평생 가슴에 품고 살 겁니다.”
“좋아하시겠구나. 그래 요즘은 뭘 하니?”
“장충동 근방에서 마사지 숍을 하고 있습니다.”
“침은 손에서 놓은 거니?”
“······.”
“선생님이 염려하던 대로구나. 지금은 바쁘니 좀 이따 얘기하자. 밥 먹고 기다리렴.”
“···네.”
인사만 드리고 가려고 했는데,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으니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구석자리에 앉자 도우미가 와서 육개장과 음식을 세팅해 준다.
밥을 말아 몇 숟갈 먹어보지만 입맛이 없었다.
‘한 잔만 마실까.’
상에 놓인 녹색 병이 마시라고 유혹한다.
사모와 얘기해야 해서 많이 마실 순 없지만 반병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까득! 어느새 뚜껑을 따고 종이컵에 술을 따랐다.
두 잔 연거푸 마셨지만 약간 쓴 맛 나는 물을 마시는 기분이다.
목표(?)로 했던 반병을 비우고 마저 마실까를 고민할 때였다.
“형! 두··· 삼이 형 맞죠?”
사람들을 의식했는지 ‘삼’는 거의 들리지 않게 부르며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류현수?”
류현수는 잘 따르던 1년 후배였다. 얼굴을 익숙한데 몸은 예전에 비해 1.5배로 불은 모습이다.
“헐? 방금 의문형? 날 못 알아보다니 서운한데요.”
척하니 옆자리에 앉는다. 그는 서글서글한 성격 탓에 누구에게든 살갑게 굴어 싫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알아보는 게 용한 거 아니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쪘어?”
“저 전문의 과정 전에 군에 갔었거든요. 전문가 과정 때 체력이 달린다니 체력이나 키우자고 열심히 운동했는데 그게 살이 됐어요. 그나저나 오랜만인데 술 한 잔 주세요.”
“근무 중 아니야?”
연한 푸른색 의사 옷을 입고 있었다.
“저 올해 전문의 과정 4년차예요. 내년 시험을 위해 업무에서 손 떼고 공부하고 있어요.”
한의사도 전문의 과정이 있다.
1년 인턴, 3년 레지던트. 전체 한의사 중 전문의는 2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술은 줄 수 있지만 저기 있는 친구들은 내버려 둬도 괜찮고?”
류현수와 함께 온 세 명이 어찌할 바를 몰라 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얘들아, 앉아. 여긴 너희들 3년 선배, 한두삼. 얼굴 알고 있지 않냐? 형, 얘들 몰라요?”
“글쎄.”
“···안녕하세요, 선배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를 필두로 셋은 인사를 하며 앉았다.
“반가워요. 좋은 말이었기를 바라요.”
“형, 애들이 불편해하잖아요~ 말 편하게 해주세요!”
“밀어붙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그나저나 전문의 따면 이곳에 남는 거냐?”
“경해대는 TO가 항상 부족하잖아요. 얜 이곳에 남을 거 같고, 쟨 고향에 내려가서 아버지랑 같이 일한대요. 나랑 은수는 한강대학병원에 지원해 보려고요.”
“···한강대학병원?”
“거기 이번에 한방의학과 신설하잖아요. 며칠 전에 정식 공고가 났어요. 확실히 큰 병원이라 그런지 엄청 많이 모집하더라고요. 근데 형은 요즘 뭐 하세요?”
“나야··· 조그마한 가게.”
“오! 한의원 냈나 보네요. 어디에요? 잘돼요?”
“장충동 근처에. 그럭저럭.”
류현수만 있었다면 솔직히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처음 보는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오! 밥 얻어먹으러 가도 돼요?”
“와라. 그거 뭐 못 사주겠냐. 근데 교수님은··· 어쩌다 돌아가신 거냐?”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었다. 차마 사모에게 물어볼 수 없었는데 마침 물어볼 상대가 생긴 것이다.
“올 초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어요.”
“매년 건강검진 받으셨을 텐데?”
“위 외부에 암이 자랐대요. 그래서 매년 하던 내시경으로 발견할 수 없던 거죠.”
“경해대병원에서 치료하신 거야?”
“아뇨. 말기 암인 걸 알고는 신경절단술만 받으시고 퇴원을 하셨대요.”
죽음에도 행복한 죽음이 있다고 강조한 분다운 선택이었다.
‘조금 일찍 찾아뵀으면······.’
자신이 치료를 한다고 해도 배영옥처럼 완치가 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치료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아쉬움이 남았다.
“한 잔 드세요.”
분위기를 알았을까 류현수가 잔을 내밀었다.
“상갓집에선 건배를 안 하는 거야.”
“···그래요? 형한테는 매번 가르침만 받는 것 같네요. 모든 선배가 다 형 같았으면 좋을 텐데.”
“누구 괴롭히는 사람이 있나 보네.”
“네. 있어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
“···임동환 선배?”
잘난 척이란 말에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었다.
“왜 아니겠어요. 그 인간이 있다고 했을 때 다른 병원으로 갔어야 했는데, 아! 그랬으면··· 험! 아무튼 2년간 죽을 뻔했습니다.”
은수라는 아가씨를 흘낏 보며 말을 바꾸는 걸 보니 둘이 사귀는 모양이다.
“명령받는 입장에서 보면 좋을 수만은 없는 거야.”
“와아~ 대박! 형이 그 인간 편드는 거예요?”
“편을 드는 게 아니라······.”
“그 인간이 형 보건의로 근무할 때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해인이 누나한테 엄청 찝쩍댔어요. 그러다 형이 그 일 당한 다음에··· 흡!”
은수가 옆구리를 찌르자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안 듯 말을 멈추고 눈치를 본다.
“···다음에 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 사람이 사귀게 됐다고?”
“···알고 있었어요?”
“응. 근데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해인이랑은 내가 공중보건의 6개월 정도 됐을 때 헤어졌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내가 시간 좀 갖자고 했어.”
거짓말이다. 오늘에서야 알았다.
정신없을 때 주해인은 이별을 통보했고 섬을 벗어날 수 없을 때라 그냥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탓하려면 공중보건의 기간을 기다려 줄 거라는 생각한 자신의 오만을 탓해야 했다.
이 거짓말은 주해인을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이만 일어나야겠다.”
“가야 해요?”
“사모님이랑 얘기하기로 했거든.”
핸드폰을 건네는 류현수에게 번호를 찍어주었다.
사모가 분향실에서 나와 손짓을 하고 있었기에 얼른 마무리를 했다.
사모와 함께 자리를 옮긴 곳은 장례식장 입구 중에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계단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진 푸르른 나무를 잠시 보다가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
두삼이 아까 냈던 부의금 중 하나였다.
“미안해한다는 건 잘 알았으니까. 이건 가져가. 너무 많이 주는 것도 실례야.”
“아, 아닙니다.”
“다음에 돈 많이 벌면 그때 맛있는 거 사서 집에 한 번 와. 얼른 받아.”
“···저 요즘 돈 많이 벌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네. 그래도 이건 받아. 얼른!”
엄한 목소리에 결국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건 선생님이 너한테 주라고 남긴 거야. 사람을 써서 찾아야 했는데 와줘서 쉽게 전달하네.”
사모는 비단 보자기에 쌓인 뭔가를 건넸다. 일단 받아 들고 물었다.
“이게 뭔데요?”
“네가 직접 확인하렴. 그리고 그것과 함께 유언도 한마디 남기셨어.”
유언이라는 말에 자세를 바로 했다.
“‘말 같지도 않은 약속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나에게 했던 약속을 지켜라!’ 라고.”
“······.”
기억난다.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양의학 책을 보는 자신을 보고 은사님이 왜 양의학 책까지 보느냐고 말했다.
‘한의학을 발전시켜 양의학 못지않게 많은 환자들을 구하려고요! 그러려면 양의학에 대해서도 알아야죠.’
‘네가 그럴 수 있겠냐?’
‘음, 너무 거창하죠? 하지만 목표를 높이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느냐?’
‘당연하죠! 하늘에 대고 약속합니다.’
분명 치기 어린 대답이었다.
한데 돌이켜보면 은사님은 제자가 그 꿈을 이루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부터 실력이 좋은 중의학 의사들을 소개시켜 주거나, 중국 책을 해석해 주는 등 여러모로 도움을 줬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비단 보자기를 풀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랐지만 고급스러움은 여전한 나무상자였다.
“아!”
상자만 보고도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교수님이 침술 실습을 할 때 항상 볼 수 있었던 침 세트가 든 상자였다.
보물처럼 아끼던 침 세트로, 수업 시간에 동기 중 한 명이 만졌다가 30분 가까이 잔소리를 듣고 수업 시간 내내 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제가 이걸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뭔지 아는 것 같네. 자격은 무슨, 원주인이 주면 그걸로 된 거지. 대신 아껴서 잘 써줘. 제 기능을 못 하고 구석에 박혀 있으면 슬퍼하실 거야.”
“······.”
“선생님이 앞에 안 계신다고 대답도 안 하니?”
“···네.”
“안 계시다고 내외하지 말고 가끔 놀러 와도 돼.”
대답을 듣고 나서야 사모는 기쁜 듯 빙긋이 웃었다. 그리곤 어깨를 토닥여 준 후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후··· 끝까지 어려운 숙제를 내주시는군요.”
두삼은 다시 상자를 비단 보자기에 싼 후 장례식장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