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14. 바쁘다, 바빠(4)
책은 손님이 없을 때 보기로 하고 아침을 먹고 바로 한강대학병원으로 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연섭인 아침 잘 먹었고?”
유모에게 인사를 하고 나연섭을 보며 물었다.
“네, ···형.”
“불편한 곳은?”
“없어요.”
사흘째부터 나연섭은 두삼을 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쳐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는지 병실도 옮겼다.
“화장실 가자.”
같이 화장실로 들어가서 그가 좌변기에 앉으면 조임근을 풀어줬다.
첫날 항문을 완벽하게 닫는 방법은 알아낸 건 유모의 질끈 묶은 포니테일 머리를 보고서였다.
항문조임근을 직접적으로 누르지 않고 피하외괄약근, 치골직장근과 심부외괄약근, 표재성외괄약근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묶어서 해결했다.
똑똑!
화장실 안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진한 방향제 냄새가 반긴다. 냄새 때문에 나연섭이 뿌린 것이다.
“적당히 뿌려라. 코가 남아나질 않겠다.”
“다른 냄새보다 낫잖아요.”
“조금만 뿌려도 되거든. 그러다 그게 오히려 병된다. 손 줘. 두 곳 다 막게.”
떠날 땐 항문만 막고, 치료를 할 땐 둘 다 막았다. 물론 아직까진 치료라기 보단 검색에 불과했지만.
한 시간쯤 살펴보다가 손을 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오늘은 빨리 가네요?”
“원장님이 봐달라는 환자가 있어서 가봐야 해.”
“···무슨 환잔데요?”
“환각지라고 신체의 일부가 없음에도 그곳이 간지럽거나 아픈 병이란다.”
“······.”
나연섭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직 어려서인지 아님,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겪어서 아이 같아진 건지 좋고 나쁨이 금세 드러났다.
“연섭아, 형도 가급적 너한테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싶어. 근데 가게도 있고 다른 할 일도 있어서 그럴 수가 없다. 네 옆에 있지 않다고 해도 틈틈이 책도 보고 고민하고 있으니 서운해하지 마라. 대신 현재 맡은 사람을 빼고 급한 일이 아니면 더 맡지 않을게.”
“···몇 명인데요?”
“너 포함해서 둘.”
“그 사람도 병원에 있어요?”
“아니. 어제 퇴원해서 특별한 일 없으면 가게로 오게 될 거야.”
“마사지 가게에서 치료를 해요?”
개인적인 얘기도 가끔 오갔기에 마사지 가게를 하고 있음을 나연섭도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만. 치료는 가급적 병원에서 하기로 했거든. 내일 보자.”
시무룩하던 표정이 좀 풀린 것 같아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리며 돌아섰다.
한데 막 나가려는데 나연섭이 불렀다.
“형, 형이랑 저랑은 어떤 관계예요?”
“하하! 왜? 다른 환자랑 더 친한 것 같아 샘나? 당연히 형이랑 아우 관계지.”
어린애는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병실을 나와 원장실로 갔다. 최근 자주 드나들어서인지 비서실 사람들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연섭이 만나고 온 건가?”
“네. 일찍 간다니까 서운한 모양이더라고요.”
“음! 그 아이에게 미안하군. 자네가 병원으로 들어오면 지금과 같은 고민이 없을 텐데 말이야.”
“제 가게에도 달린 사람들이 있어서요.”
“이해하네. 그래 치료는 잘되어가고 있나?”
민규식은 틈틈이 병원으로 들어오라는 얘기를 했지만 길게 말하진 않았다. 언젠가 미끼를 물 거라고 생각하는 낚시꾼 같달까.
부담스럽게 하지 않았기에 그냥 웃고 넘겼다.
“아직 내부를 파악하기에도 벅찹니다.”
“내가 우물 앞에서 숭늉을 찾았군. 아무쪼록 최선을 다해주게. 끝내고 가게에 가야 할 테니 얼른 환자에게 가세나.”
민규식은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태블릿을 건네며 간단히 설명했다.
“2년 전쯤에 병원에 온 환자인데 가벼운 상처를 방치해 썩어가는 바람에 왼발 절단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네. 한데 수술 후에도 수술 전과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고 호소하더군.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서 결국 퇴원을 했었지. 자네가 환각지를 고쳤다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올라 다시 병원으로 모셨네.”
“수많은 환자를 보셨을 텐데 용케 기억을 하고 계셨네요?”
“글쎄,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난 다 나아 퇴원한 환자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네.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던 이들만 기억 속에 남더군.”
평소 웃는 상이던 민규식의 표정이 깊어졌다.
자신은 한 번 겪은 죽음도 버거운데 실패한 사례만 기억하고 있다니 존경심마저 생겼다.
물론 따라 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힘들게 사시네요.”
“팔잔 걸 어떻게 하겠나.”
“근데 환자 이름 옆에 있는 이 작은 점은 뭡니까?”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무거운 얘긴 싫었다. 그래서 화제를 바꿨다.
“눈이 꽤 날카롭군.”
“할아버지의 환자 차트에 이런 표식이 많거든요.”
“할아버님께서 의사셨나?”
“시골에서 의원을 하셨습니다.”
“그런가?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
“한에 언자 수자 쓰셨습니다. 원장님은 모르실 겁니다. 면허증도 없으셨는데요.”
“그런가······? 아무튼 그 붉은 점은 병원에서 치료비를 제공하는 이들일세.”
“무료 의료 지원을 한다는 말이군요?”
“비슷하지. 자네 진료비도 병원에서 지급할 걸세. 전에 천만 원을 받았다고 했지?”
공짜 진료를 받으려던 이 때문에 그 다음 환각지 환자에겐 천만 원을 받았을 때쯤 치료를 완료했었다.
“아닙니다. 자원봉사를 한다고 생각하겠습니다.”
“훗! 자네가 우리 병원을 위해 자원봉사를 한다고? 현재 우리 병원의 작년 매출이 얼만지 아는가? 부담 없이 받게. 정 돕고 싶으면 자네가 돕고 싶은 사람을 돕도록 해.”
꼭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데 병실 앞에 이르렀다. 민규식은 문을 열려다 말고 말했다.
“참! 그리고 바로 고칠 수 있다 해도 최소한 열흘쯤 걸리게 해주게.”
“그건 왜요?”
“진맥을 해보면 알겠지만 쉴 틈 없이 일하는 양반이라 고치는 즉시 다시 일을 할 걸세. 병원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쉬게 해야 다른 병이 안 날 걸세.”
두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병실로 들어갔다.
혹시 기존과 다른 새로운 타입의 환각지일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운을 막고, 몇 곳의 막힌 세맥을 뚫어 기가 몸 내부에서 순환하도록 하는 것만으로 치료가 가능했다.
물론 첫날은 3분의 1쯤 막는 것으로 끝냈다. 나머지는 9일 동안 천천히 막으면 됐다.
“점심 같이하고 가게.”
가게로 가려는데 민규식이 말했다.
“아닙니다. 예약 손님 마사지할 시간이 다가와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 그 다음엔 효원이 훈련하는 곳에도 가봐야 하고요.”
“굶고 하려고?”
“빨리 도착하면 대충 비벼 먹으려고요.”
“바쁘게 사는 거 좋지. 근데 다른 사람의 건강을 위하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의 건강을 해치는 일은 없도록 하게.”
옳은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두삼 스스로가 선택했어도 일이 갑자기 늘어난 데엔 민규식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는가?
그 점을 말해주려다 그럴 시간에 빨리 집에 가기로 했다.
“왔어요?”
“어서 와요, 사장님.”
신혜경과 한미령은 와 있었다.
“식사는요?”
“요 앞에서 순대국 먹고 왔죠. 사장님은요?”
“전 아직요. 2층 비밀번호 가르쳐 드릴 테니까 혹시 제가 없으면 차려 드세요. 전 얼른 식사 좀 하고 내려올게요.”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가 간단히 식사했다. 그리고 샤워를 한 후 내려오자 예약 손님이 딱 도착했다.
“총각 나 왔어! 친구도 데려왔는데 얼굴마사지는 서비스로 해줄 거지?”
“하하! 물론이죠. 들어가세요.”
올해 마흔아홉 살인 그녀는 갱년기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마사지를 한 번 받고 난 후부터 단골이 됐다. 올 때마다 혼자 오는 법이 없었는데 가게 입장에선 최우수 고객이었다.
발마사지를 마치고 마사지실로 들어갈 때 단골 아주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 주 동안 콩이랑, 양배추, 석류 많이 먹었어. 그러니 처음처럼 해줄 거지?”
“상태 봐서 해드릴게요.”
처음 왔을 때 우울증이 심해서 음의 기운을 격발시켜줬었다.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은지 올 때마다 해달라고 했지만 없는 기운을 북돋아 줄 방법은 두삼에게도 없었다.
그에 여성호르몬에 좋은 음식들을 권했는데 말대로 잘 따른 모양이다.
“가급적이면 해줘. 마치 아가씨 때처럼 활력이 넘치는 기분 다시 느끼고 싶어. 호르몬 주사를 맞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 알았지?”
갱년기엔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거나 약을 복용하는 이들도 제법 많다. 인위적이긴 하지만 갱년기를 무사히 넘기기 위한 좋은 방편이었다.
그러나 억지로 호르몬을 자극하는 일이라 자궁과 유방에 암을 유발할 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예요. 음의 기운이 많으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해드릴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워낙 간곡히 부탁하니 자신의 기를 소모해서라도 해줘야 하나 싶었다.
‘단골이니 서비스 차원에서 해줄까. 근데 문제가 되진 않겠지?’
양의 기운과 음의 기운이 만나면 어떤 효과가 나는지 악양에서 겪었기에 잘 참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워낙 털털하고 솔직한 분답게 자신의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마사지를 시작한 지 10분이 되지 않아 마사지실인지 영화 촬영장인지 헷갈리는 분위기가 됐다.
“저··· 마사지는 뭐예요?”
“···그러게요. 저도 한번 받아보고 싶네요.”
옆에서 같이 마사지를 받던 단골 아주머니 친구와 신혜경의 대화가 심장을 쿡 찔렀다.
마사지가 끝나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두 분은 다음 주 예약을 하고 떠났다.
그리고 다음 예약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신혜경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좀 전에 한 마사지는 언제 가르쳐 줄 거예요?”
“···혜경 씨는 할 수 없는 마사지예요.”
“왜! 왜 안 되는데요?”
“···화를 낼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무튼 웬만한 사람은 불가능한 거예요.”
불가능하다는 말에 나라 잃은 사람처럼 실망하며 중얼거렸다.
“···예약이라도 해야 하나?”
“···네?”
“아, 아무것도 아녜요. 손님 오시네요. 준비합시다!”
후다닥 현관으로 가는 신혜경을 보다가 두삼도 일어났다. 아직 예약 손님 두 명이 더 남아 있었다.
***
세 번째 예약 손님을 끝내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가게를 나섰다.
오늘부터 재활 훈련에 들어간 이효원을 만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향한 곳은 고구려대학 아이스링크.
도착하고 나니 해가 지고 있었다.
적당한 곳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들어가려 하자 경비원이 막았다.
“현재 선수들이 훈련 중이라 일반인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효원이 재활 훈련을 보러 왔습니다. 의사입니다.”
“혹시 한두삼 선생님?”
“네.”
“오면 들여보내라는 얘기 들었습니다. 신분증 확인 좀 하겠습니다.”
주민등록증을 보여준 후 통과했다.
이효원은 아이스링크 한쪽에서 스트레칭과 가볍게 뛰며 몸을 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알아채곤 반갑게 맞이해 준다.
“오빠! 어서 와요.”
“너무 빨리 훈련하는 거 아냐?”
“다 나았는데요. 러닝 훈련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밝은 표정과 말투를 보아하니 오후에 있었던 러닝 훈련의 결과가 괜찮았나 보다.
“어땠는데?”
“하루밖에 하지 않아 확실하다고 할 수 없지만 보통 한두 번은 힘이 안 들어갔는데 이번엔 그런 일이 전혀 없었어요.”
“다행이네.”
“이제 오빠 왔으니 스케이트 타보려고요.”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무리하진 마.”
“당연하죠. 오랫동안 타지 못해서 오늘은 가볍게 몸만 풀 생각이에요”
“오케이. 손 좀 줘봐 어떤지 보게.”
킥! 웃으며 손등이 위로 가게 손을 내민다.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모양이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국민요정님.”
장난을 받아주며 기를 다리 쪽으로 보냈다.
수술할 때 워낙 솜씨 좋게 절개를 하고 봉합을 해서인지 완벽하게 아물었다. 다만 발 내부는 전과 별다를 게 없었다.
“다 아물었네. 시작해도 되겠다.”
오늘 방문한 이유는 스케이트를 타기 전과 후를 비교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비교해 본 후 치료를 할지 말지 결정할 생각이다.
사고 이후 오랜만에 링크에 오르는 이효원의 얼굴은 꽤 상기되어 있었다. 장난감을 기다리는 꼬마의 표정과 비슷했다.
‘발목이 부러질 때가 생각나 트라우마가 생길 법도 한데 빙판 위가 그리 좋은가.’
빙판 위에 올라 잠깐 서 있던 그녀는 천천히 스케이트를 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빨라졌다.
깨끗하던 빙판 위에 어지러운 그림이 그려졌을 때 몸이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이효원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연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