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14. 바쁘다, 바빠(3)
컵이 날아오는 게 빤히 보이는데 맞는 것도 우스웠다. 손을 뻗어 턱! 하고 잡았다.
“···이 씨발······! 꺼지라고!”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나연섭은 상처 입은 고양이가 지레 겁을 먹고 달려들 듯이 뛰어왔다.
손을 치켜들었던 그는 막상 때리려니 망설여지는지 머뭇거리다 멱살을 잡았다.
“치료하지도 못하면서 또 이것저것 검사하러 왔어? 싫어! 이젠 싫다고! 싫다는데 왜 자꾸 들어오고 지랄이냐고! 그냥 날 좀 내버려 둬! 죽든 말든 내버려 두란 말이야! 이 새끼야!”
누구한테 하는 말일까.
실수를 한 의사? 치료를 하다가 실패한 의사? 그것도 아니면 이 세상?
손을 들어 붕대가 감긴 그의 팔을 잡았다.
‘손목을 그은 모양이군.’
안쓰러웠지만 일단은 무력화시켜야 했다. 손이 은은하게 빛나며 두삼의 기가 나연섭의 팔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곧장 온몸을 마비시킬 수 있는 혈로 향했다.
“···어? 이게 무슨···.”
스르르 무너지는 그를 잡아 푹신한 바닥에 눕혔다.
“너···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내 몸 왜 이래?”
“검사를 하기 위해 잠깐 마비시킨 거야. 그러니 호들갑 떨지 않아도 돼.”
“누가 호들갑을 떨었다고······! 가만, 검사? 무슨 검사? 검사 받기 싫다고 했잖아! 당장 풀어. 당장 풀라고, 이 개새끼야!”
“거참, 시끄럽네. 입도 못 움직이게 해줄까?”
“이, 이··· 씨바······!”
성대까지 마비시켰다. 그러자 입만 벙긋거릴 뿐이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바닥이 푹신하다곤 하지만 침대로 가서 검사하는 게 낫겠지?”
“······!!”
겁먹은 눈빛으로 아무리 인상을 써봐라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가볍긴 왜 이렇게 가벼운 거야.’
짐작은 했지만 해도 너무했다. 쌀 한 포대 무게는 될까 모르겠다.
“어떻게 한 거죠?”
침대에 눕히고 있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잔뜩 걱정하는 표정의 유모가 서 있었다.
“잠시 몸을 마비시켰습니다. 진맥을 해보고 원래대로 돌려놓을 거니 너무 걱정 마세요.”
“···한의사신가요?”
“네. 원장님께서 부탁해서 왔습니다.”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을까 그녀는 간절함이 가득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원래는 세상 누구보다도 착한 애랍니다. 부디··· 이 아이가 다시 웃을 수 있게 해주세요, 선생님.”
아버지도, 유모도 왜 이렇게 부담을 주는지 모르겠다. 무심한 척했지만 심장에 커다란 돌덩이 두 개가 자리한 것 같다.
마음만으론 꼭 치료해 주겠노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의사로서 가장 해서는 안 될 일이 바로 희망 고문이다.
100퍼센트 고칠 자신이 있지 않는 이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주세요. 그리고 방해가 안 된다면 연섭이 머리를 만져줘도 될까요? 조금이나마 진정이 될 거예요.”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이네요. 진맥을 할 때 안정이 중요하거든요.”
기운이 날뛰면 밀어 넣는 자신의 기운 역시 날뛰는 기운에 휩쓸려 제대로 살펴보기 어려웠다.
유모는 나연섭 쪽으로 가서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쓸며 중얼거렸다.
“진정하렴. 어제 원장님도 좋은 분이셨잖아. 한 번 더 믿어보자. 네가 슬퍼하면 나도 슬프단다.”
쓰다듬는 손길 때문인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눈빛과 목소리 때문인지 모르지만 흥분해 있던 나연섭의 기운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갓난아이 때부터 돌보았다더니 엄마와 아들 같네.’
잠깐 엉뚱한 생각을 하던 두삼은 시선을 돌려 나연섭의 손목 맥에 손을 올렸다.
팔을 시작으로 서서히 퍼져 나간 기운은 나연섭의 몸 내부 지도를 만들어 나갔다.
‘으음··· 성형수술을 이런 식으로 보니 정말 할 게 못되는구나.’
마사지를 하면서 성형을 한 사람들을 제법 봤지만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몸에 이물질을 넣거나 칼을 댐으로써 당연하게도 성형 부위에 있는 맥이 끊기거나 막히고 모세혈관이 망가지지만 일부에 불과했고, 수술 없이 살아가도 차츰 막히는 걸 감안하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성형수술을 하는 이유가 미용을 위해서든,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든 중독 수준으로만 가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한데 나연섭의 수술 부위를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대부분의 맥과 모세혈관들이 망가져 있었다.
젊으니 살다 보면 모세혈관이야 새롭게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맥의 경우 얼굴에 위치한 십이경맥의 맥과 혈이 모두 망가져서 차츰 주변의 혈까지 막히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맥에 신경 쓸 시간이 아니지.’
맥이 망가진 것이 안타깝긴 했지만 맥이 망가졌다고 조임근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은 낮았다.
속항문조임근은 불수의근(의지와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근육)이고 외항문조임근은 수의근(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근육)으로 불수의근은 호르몬에 의해, 수의근은 중추신경의 영향을 받는다.
즉, 나연섭의 증상은 중추신경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이 또한 일반론에 입각한 추측에 불과했다.
수술 중 안면신경을 건드려 뇌신경을 자극했고, 하필이면 그 뇌신경이 조임근에 문제를 일으켰다?
지나친 상상력이다.
차라리 미각을 상실하거나, 감각 기능에 이상이 생기거나, 그것도 아니면 안면마비가 왔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모르겠다.’
검사만으로 이상을 찾아내기엔 시간도, 실력도 부족했다. 아무래도 배영옥이나 백희진을 고칠 때처럼 긴 시간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환자의 의지인데······.’
세 번의 자살을 시도했는데 네 번째 시도가 없을까.
일단 살 의지를 만들어줘야 했다.
요도조임근 부근과 항문조임근 부근에 기운을 놔두고 나머지 기운은 회수했다. 그리고 두 곳을 중점적으로 살폈다.
‘기운으로 조임근을 눌러야 하나.’
중추신경의 기능이 작동을 하지 않으니 방법은 그냥 틀어막는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기운을 만들어 양쪽에서 누르는 식으로 요도, 항문조임근을 붙였다. 혈관이나 맥과 달리 제법 많은 기운이 소모됐다.
‘이걸로 될까?’
테스트를 해봐야 했다.
유모 덕분에 얌전해진 나연섭을 보며 말했다.
“흥분하지 말고 들어. 이제 몸의 마비를 풀 거야. 현재 네 요도와 항문을 막아둔 상태야.”
“······!”
“제대로 막혔는지 확인해야 해. 완벽해야 어느 정도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지 않겠어? 흥분을 해도 좋아 그 역시 테스트의 일종이니까. 푼다.”
마비시켰던 몸을 풀었다.
흥분이 가셨는지 그는 자신의 몸 상태를 천천히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설명하긴 뭐하고 일시적으로 막아둔 거라 생각하면 될 거다. 여기 샤워실 있지?”
끄덕끄덕.
“씻고 나와. 그리고 음식을 먹고 상황을 보자.”
스스로도 막힌 것을 느끼는지 고분고분 말을 따랐다.
그가 샤워실에 들어간 후 CCTV를 향해 먹을 것을 가져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물론 못 알아들었지만 말이다.
문이 열리며 원장과 나연섭의 아버지가 들어왔다.
“뭐라고 한 건가?”
“···음식을 들여보내 달라고요.”
“음, 그게 그런 뜻이었나?”
“······.”
“앞으론 저기 있는 벨을 누르고 말하면 된다네. 음식은 바로 준비시키지. 한데 혹시··· 치료는 된 건가?”
“임시방편입니다.”
“아! ···그런가?”
아쉬워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모른 척했다. 기대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나연섭이 샤워실에서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음식이 도착했다. 평소 보던 병원식이 아닌 한정식 수준이었다.
한데 나연섭은 뭉툭한 포크와 숟가락을 든 채 머뭇거렸다.
“많이 먹어. 정확히 알아야 조치를 취할 거 아냐.”
“···어떤 조치를 취할 건데요?”
“글쎄다. 일단 막은 다음에 하루에 한 번씩 풀어줄 생각이다.”
“큰 거야 그렇게 한다 해도··· 소변은 어쩌려고요?”
“나도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 있어 24시간 붙어 있을 수가 없단다. 불편하고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기저귀를 차야 할 거다.”
“···평생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희망은 금물이지만 치료 기간 중에 자살하는 건 바라지 않았다.
“나도 평생 너랑 만날 생각 없다. 하니 일정 기간 동안이라도 치료할 시간을 줬으면 해.”
“···얼마나요?”
“올해 열일곱이지? 스무 살 때까지만 노력해 보자. 그때도 안 된다면······.”
뒷말을 삼켰지만 무슨 말인지는 나연섭도 두삼도 알고 있었다.
“너무 긴 것 같은데······.”
“그 소리는 내가 할 소리거든. 그동안 애인이랑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잖아.”
나연섭은 스스로 생각해도 두삼이 무척 귀찮은 제안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등장부터 심상치 않더니 사내가 보인 굉장한 능력과 대변이라도 가릴 수 있게 되면 사는 게 조금 덜 쪽팔릴 것 같다는 생각이 절벽 끝에 있던 그를 한 걸음 물러나게 만들었다.
앞에 앉아 있는 두삼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개인적인 질문을 했다.
“···애인은 예뻐요?”
“아직 없다.”
“없으면서 무슨 여행을······.”
“너 스무 살 때까지 계속 솔로로 있으라고? 차라리 악담을 퍼부어라.”
“그럴 것 같은데······.”
“뭐!”
“아, 아니에요. 근데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한두삼. 아저씨라 부르지 말고 형이라고 불러라. 나이 차이야 제법 나지만 특별히 호형을 허락할게.”
“허락 안 해도 되는데··· 이름이 참 특이하네요? 누가 지은 거예요?”
“우리 할아버지께서. 산에서 산삼을 두 개 캔 날, 내가 태어났거든.”
“대박~ 세 개 캤으면 세삼이었겠네요?”
“···석삼이었겠지.”
식사를 하는 동안 시답잖은 얘기가 오고갔다.
딱히 할 일도 없었거니와 앞으로 자주 볼 사인데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얘기를 하던 나연섭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무래도 조금 샌 모양이다.
“테스트 중이라고 말했잖아. 그러니 지레짐작으로 판단하지 말자. 침대에 누워봐.”
얘기를 나눈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나연섭은 별다른 말없이 침대에 누웠다.
진맥을 하는 척하면서 기운을 보내 두 곳을 살폈다.
요도관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다만 워낙 복잡한 항문 부근엔 막아둔 곳으로 조금씩 샜다.
‘혈관이 막힐 것 같아 조금 느슨하게 막은 게 문제였어. 좀 더 강하게 막아야 하나······.’
기운을 더욱 많이 보내 직장 입구까지 쥐어짜듯이 막았다. 이러다 오히려 항문이 망가지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그때 나연섭이 외쳤다.
“조여지는 느낌이 들어요!”
“너무 꽉 조이는 것 같진 않고?”
“글쎄요. 뭔가 조금 불편한 것 같기도 해요.”
혈관이 다 막혔으니 불편할 수밖에. 이대로 뒀다간 항문 근육을 아예 쓸 수 없게 될 것 같았기에 다시 느슨하게 풀어야 했다.
‘어떻게 막는다?’
고민을 하다가 일어났다.
“···가려고요?”
“항문 관련 책 좀 보고 올게.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지식이 부족한 거 같다. 가더라도 멀리 안 갈 테니 걱정마라.”
머리를 슥 한번 헝클어뜨려 준 후 벨을 눌러 밖으로 나왔다. 밖엔 남자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호자는 회사에 갔고 원장님은 수술 들어가셨습니다. 필요한 거 있음 저한테 말하시면 돼요.”
“수고하시네요. 항문 관련 책 좀 봤으면 하는데요.”
“잠시 기다리시면 갖다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의자에 앉아 신혜경에게 연락해 늦을지도 모르겠다고 연락했다.
-예약 손님은 어쩌려고요?
“세 시니까 그 전까진 갈 거예요. 문만 열어주세요.”
-그야 어려울 것 없죠. 그럼 나중에 봐요, 사장님.
신혜경, 한미령 두 사람 다 대문 열쇠가 있었다.
전화를 끊고 얼마 되지 않아 간호사가 책을 잔뜩 가지고 왔다.
“더 있는데 더 가져올까요?”
“아뇨. 찾는 게 없으면 그때 다시 부탁드릴게요.”
책을 뒤적였다. 금방 찾았다. 항문 주변의 조임근들의 작용. 확인하고 나니 이해가 됐다.
항문 입구의 피하외괄약근, 직장과 항문관 밑에 있는 치골직장근과 심부외괄약근, 그리고 그 둘을 중간에서 덮고 있는 표재성외괄약근이 당겨지며 입구를 조이는 구조였다.
‘당겨서 조인다. 가능할까?’
지금까지 기를 이용해 맥과 혈관을 막거나 누르기만 했었다.
‘해보면 알겠지.’
안으로 들어갔다.
“금방 왔네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서둘러야지.”
“······.”
“감격하진 말고.”
“누가 감격했다고······!”
어려서 그런지 얼굴에 속마음이 다 보였다. 알아서 침대에 누운 그의 아랫배에 손을 댔다. 처음 해보는 일이니 가까이에서 해야 나을 것 같았다.
세 개의 기를 만들어 세 개의 조임근을 쭉 잡아당겼다. 그리고 고정되길 바랐다.
의지대로 움직이는 기니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의지로만 안 되는 것이 있듯이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조임근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몇 번 더 테스트를 해봤지만 마찬가지. 벽에 못을 박고 걸어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계속 실패했다.
수확은 기의 한계를 알게 된 정도였다.
‘쉽지 않네. 실망시키긴 싫은데······.’
완벽하게 막지 못하면 큰 의미가 없었다. 냄새 때문에 스스로를 가두고 결국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가 허튼 생각을 하지 않게 하려면 대변은 완벽하게 막을 수 있어야 했다.
다른 방법을 떠올려 보지만 막막할 뿐이다.
답답함과 생각을 하느라 뜨거워진 머리를 식힐 겸 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천장에 달린 환기 시설을 제외하곤 꽉 막힌 곳을 둘러본다고 무슨 위안이 될까 싶었다.
“선생님, 시원한 물 좀 드세요.”
답답해하고 있음을 눈치챘는지 유모가 종이컵에 시원한 물을 따라줬다.
“···감사합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늘 보여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저 지치지만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편안하게 웃어 보이며 돌아서는 그녀.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두삼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래, 저 방법이라면!’
새로운 방법을 찾은 두삼은 얼른 물을 마신 후 나연섭의 몸에 손을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