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46화 (45/122)

# 46

14. 바쁘다, 바빠(1)

한강대학병원 근처에 위치한 일식집.

오전 수술을 마친 민규식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일식집 안으로 들어갔다. 단골이라 종업원은 인사와 동시에 예약된 방으로 안내했다.

“미안합니다, 임 원장님. 수술이 늦게 끝나 조금 늦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반백의 장년인, 태양한방병원의 원장인 임철호에게 사과했다.

임철호와 옆에 앉아 있던 30대 중반의 사내는 얼른 일어나 민규식을 맞이했다.

“5분 늦었는데요. 그리고 저희도 방금 왔습니다.”

“5분이라도 늦은 건 늦은 거죠. 늦은 벌로 오늘은 제가 쏠 테니 드시고 싶은 거 마음껏 드세요.”

“허허허! 그래야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참! 이쪽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제 아들 녀석입니다.”

“만날 때마다 자랑을 하던 그 아드님이군요. 반가워요. 민규식이라고 해요.”

“임동환입니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허허! 임 원장님과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그렇게 하지. 그나저나 정말 훤칠하게 잘생겼군.”

빈말이 아니라 임동환은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잘생기고 남자다움이 물씬 풍겼다.

“과찬이십니다.”

덕담이 오가는 인사를 끝낸 후 자리에 앉자 예약해 둔 민어탕과 찜이 나왔다.

식사를 하며 임철호가 물었다.

“준비는 잘되어가십니까?”

한방의학과 신설이 잘되어가느냐는 물음이었다.

“몸이 세 개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년 초까지 인선을 마무리해야 3월에 시작할 수 있을 텐데 지지부진합니다. 게다가 그 후년엔 한의과대학까지, 생각만 해도 두통이 생깁니다. 임 원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저희 병원으로서도 한강대학병원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회인데 놓칠 수 없죠. 이건 지난번에 부탁한 한의사 명단입니다.”

“빨리 준비하셨군요. 잠시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민규식은 한방의학과를 빠르고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명망 있는 한방병원과 전략적인 제휴를 원했다. 그에 선택한 곳이 수원에 위치한 태양한방병원이었다.

“확인해 보십시오.”

태양한방병원은 노하우와 실력 좋은 한의사를 수소문해 주기로 했고 한강대학병원은 태양한방병원에서 진행 중인 신약 개발을 돕기로 했다.

임철호가 준비해 준 한의사들의 이력서는 상당한 두께였다.

60대부터 30대 초반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5, 60대의 경우는 열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30, 40대였다.

“자리를 옮기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뺐습니다. 그리고 가급적 젊은 사람들로 뽑아봤습니다. 결국 일을 할 사람들은 그들이니까요.”

“옳은 말씀입니다. 응? 근데 재미있는 이력서가 여기 있군요.”

다름 아닌 임동환의 이력서였다.

“부족하지만 한강대학병원에서 많은 것을 배우라는 심정으로 넣어봤습니다.”

“부족하기는요. 누구보다도 이력이 화려한데요.”

경해대 한의학과 6년, 전문의 과정 4년을 지냈고 중국에 2년 유학을 다녀왔다. 그리고 2년을 경해대 한방병원에서 전문의로 2년간 근무했다.

게다가 방송 출연까지 해서 인지도도 상당했다.

“임동환 선생의 전문 분야가 침구로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공부 역시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좋은 마인드군. 중국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는 뭘 배운 건가?”

“중국의 중의학, 동양의학은 서양의학과 결합되어 우리나라보다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더군요. 물론 아직까지는 마취를 시킨다든지, 피의 흐름을 느리게 해서 출혈을 늦춘다든지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치매의 진행을 늦춘다거나 예방하는 독자적인 분야도 점차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오! 침으로 마취를 할 수 있는 건가?”

민규식은 짐짓 아무것도 모른 척 물었다.

“배운 기간이 짧아 완벽하진 않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완성하고픈 기술이긴 합니다.”

“그런가? 꼭 완성하길 바라겠네.”

“기회를 주신다는 말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허어~ 이 녀석이! 죄송합니다. 민 원장님, 아들놈이 배움에 대한 욕심이 강하다 보니 실수를 했습니다.”

임동환의 말이 다소 건방지게 보일 수도 있다 생각했는지 임철호는 얼른 나섰다. 그러나 민규식은 배우려고 하는 임동환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허허허! 아닙니다. 오히려 보기가 좋습니다. 일단 서류를 검토하고 다른 교수들과 의논을 해야겠지만 열심히 배우겠다는 자네의 마음은 염두에 두겠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하고말고. 설령 안 된다고 해도 절대 포기해선 안 되네. 이런! 맛있게 식사하는데 일 얘기라니··· 자자! 식기 전에 보신부터 하세나.”

세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쳤다.

“오후 진료가 있어서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민 원장님은 항상 바쁘시군요?”

“평일에는 항상 이렇습니다. 허허허!”

“그럼 좀 시원해지면 골프 어떻습니까? 오늘 식사를 사셨으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임동환 선생, 다음에 보세나.”

“맛있게 먹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두 부자는 민규식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배웅을 했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지자 임동환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끝까지 특채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군요?”

“쉽게 될 줄 알았느냐?”

“아버지 말씀대로 열혈 의사처럼 행동해서 긍정적인 반응도 이끌어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비슷한 또래 중에 저만한 스펙을 가진 이가 몇 명이나 됩니까.”

“쯧! 한강대학병원의 전문의 중 너보다 스펙이 떨어지는 이들이 몇 명이나 될까? 그 양반이 원장직을 그냥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느냐? 오늘 널 마음에 들어 했지만 내일 네가 하는 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호령을 내릴 사람이다.”

“···경해대 병원에서도 잘하고 있는데 꼭 한강대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겁니까?”

두 팔 벌려 환영받을 거라곤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취급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존심에 상처가 생기자 굳이 한강대로 옮길 필요가 있나 싶었다.

“휴우~ 내가 그깟 시답잖은 제휴 때문에 그를 돕고 비위를 맞추는 줄 아느냐?”

“제휴 때문이 아닙니까?”

“이제 너도 병원 사정을 알 때도 됐지. 여기선 얘기하기 뭐하니 차에 가서 얘기하자.”

차를 탄 임철호는 담배를 빼어 물었다. 그리고 열린 차창으로 길게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병원 사정이 좋지 않다.”

“예? 그게 무슨··· 언제부터요?”

임동환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수원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태양한방병원이었다. 그래서 항상 손님들로 북적였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10년쯤 됐다. 주변에 하나둘씩 정형외과들이 생겨날 때만 해도 무시했는데 어느새 그들이 우리 병원을 집어삼킬 정도로 커졌다.”

“······.”

“믿기지 않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한의학의 한계를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 있을 게다.”

한의학의 한계를 말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치료 효과의 신속성이다.

가령 오십견이 걸려 팔을 움직이기 힘든 환자가 있다고 하자.

한의원에 가게 되면 삼, 사 일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나마도 실력이 좋은 한의사를 만났을 경우다. 하지만 정형외과에 가면 근육을 풀어주는 주사를 맞으면 약간 멍해지긴 하지만 어깨가 멀쩡해진다.

물론 근본적인 치료가 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치료비 역시 지불하기 부담될 정도만 아니라면 당장 일을 해야 하고 멀쩡해지길 바라는 이들은 정형외과를 선호하게 된다.

한방병원의 진료 과목을 주의해서 보면 그 한계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이 어떠한 질병을 예방하자는 차원이지 치료는 드물다.

“게다가 주요 고객인 나이든 노인들도 한방병원보단 물리치료 시설이 구비된 정형외과를 선호한단다.”

“하지만! ···명성을 무시할 수는 없잖습니까?”

반발심에 말을 꺼냈지만 아버지가 어떤 말을 할지 짐작이 됐기에 힘이 없었다.

“그야 그렇지. 그러나 요즘처럼 SNS가 발달된 세상에 명성을 잃는 것도 금방이더구나. 옛 명성만으론 이미 거대해진 병원을 유지하긴 힘들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은 것이 자연 재료로 만든 의약품이었는데 그것 역시 일반 의약품과 다르지 않고 한의학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해서 반려됐다.”

“······.”

“당장 문을 닫을 정도는 아니지만 네가 물려받을 때가 되면 힘들게다. 네가 작은 한의원으로 만족한다면 상관없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 정도는 가능하니까. 하지만 아니라면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임철호의 얘기를 들을수록 임동환의 표정은 굳어졌다. 당연히 자기가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부와 명예가, 자신을 당당하게 만들어주던 배경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그러나 화를 표출하기보단 자신의 것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오히려 냉철해졌다.

“···방송 출연을 성사시키고 경해대 교수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셨던 것도 그 때문이셨습니까?”

“그래. 네가 경해대 교수가 되어 다시 우리 병원을 일으켜주길 바랐다. 그래서 너의 상대가 될 것 같은 녀석이 있으면 떨어뜨리고, 이사진과 친하게 지냈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였는데 왜 갑자기 한강대학병원으로 바꾸라는 겁니까?”

“경해대는 층층시하다. 실력 좋은 놈들, 배경 좋은 놈들이 년 단위로 있다. 교수 자리가 하나만 나도 벌떼처럼 달려들겠지. 네가 생각하기에 네가 교수가 될 가능성은 얼마나 있을 것 같으냐?”

“···한강대학병원이라고 다릅니까?”

“다르지. 배경 있는 놈들도 거의 없고, 교수 자리는 모두 공석이다. 일단 병원에만 들어가서 조금만 두각을 나타내도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게다.”

“교수직을 얻는다고 우리 병원이 살아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교수가 된 후가 더 중요하다. 우리 병원에서 밀어주는 연구 자료로 신약 개발 같은 성과를 내야겠지. 독자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한강대병원의 힘이라면 충분히 해. 아마 몇 가지만 해도 우리 병원은 살아날 거다. 그리고 최종 목표는······.”

“최종 목표도 있습니까?”

임철호는 임동환에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고 그 말을 듣는 임동환의 표정은 점점 원래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

“수고하셨어요. 몸이 무겁다가도 여기만 오면 싹 풀려요.”

한 달 만에 네 번째 방문한 손님이 엄지를 척 올리며 말했다.

“편해지셨다니 다행이네요. 이건 건강에 좋은 약재를 우린 건데 드세요.”

“스킨케어도 서비스로 받았는데, 이러다 남는 것도 없겠어요.”

“시골에서 보내주는 사람이 있어서 괜찮아요.”

“잘 마실게요.”

손님을 보내고 컴퓨터로 은행 업무를 보고 있는데 한미령이 다가왔다.

“사장님, 힘들게 말리고 달여서 그렇게 퍼주지 말고 파는 거 어때요? 요즘에 몸에 맞는다고 팔지 않겠느냐고 물어오는 손님도 계시던데.”

“평범한 제철 약초로 달인 건데 팔긴요. 혜경 씨는 뭐 해요?”

“청소하고 계세요. 금방 끝날 거예요.”

“그럼 끝나고 발코니로 같이 올라올래요?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일찍 저녁 먹죠.”

“알았어요.”

먼저 위층으로 올라간 두삼은 조금 전에 올려둔 압력 밥솥의 불을 껐다. 여름 내 고생한 두 사람을 위해 삼계탕을 끓인 것이다.

발코니에 저녁 준비를 거의 마쳤을 때 두 사람이 올라왔다.

“어머! 이게 뭐야? 웬 삼계탕?”

“한 달 동안 고생했잖아요. 앉으세요.”

“아! 벌써 한 달이 됐어요? 배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날짜 가는 줄도 몰랐네.”

“말 나온 김에 줄게요. 이건 혜경 씨 거.”

“이건 뭐예요?”

프린터로 뽑은 월급명세서였다.

“100만 원에 카드 수수료, 세금 일부 제외하고 혜경 씨가 담당한 손님의 이익 50%예요. 아!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료는 뺐어요.”

“···4대 보험도 가입했어요?”

“나중에 가게 그만두고 혜경 씨 가게 열 때 실업 급여 타면서 천천히 준비하라고요. 싫어도 좀 참으세요. 이미 가입해서 취소도 불가능하거든요.”

“싫긴요··· 고마워서 그러죠.”

“그럼, 됐어요. 자! 이건 미령 씨 거.”

“제 것도 있어요? 전 연습생인데······.”

“언제까지 연습생일 건 아니잖아요. 미리 해뒀어요. 그리고 많이는 못 주고 차비랑 식비 정도는 통장으로 넣어뒀으니 쓰고요.”

“···사장님.”

“그런 표정으로 부르지 마요. 가게 사정이 안 좋았으면 안 줬을 거예요. 자! 명세서는 나중에 확인하고 일단 식기 전에 먹읍시다.”

한 달간 많이 벌진 못했다.

각종 공과금과 세금, 두 사람의 월급을 빼고 나면 남는 것 10만 원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효원이 수술비 명목으로 얼마를 주었고, 쌍둥이 엄마 치료비도 민규식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다음 달까지 버티는 건 문제없었다.

“근데 삼계탕 먹으니까 소주 생각난다.”

땀을 흘리면서 삼계탕을 먹던 신혜경이 손을 꺾으며 말했다.

“한잔할까요?”

“아뇨! 저녁에 예약 손님 있잖아요.”

“딱 한 잔인데요, 뭘. 가만, 근데 소주가 있나?”

일 끝나고 가끔 마시는 맥주는 있는데 소주는 사놓은 기억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없었다.

“···없네요.”

“그럼 괜찮아요. 다음에 마시면 되죠.”

소주 마시는 건 포기하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한미령이 벌떡 일어났다.

“요 앞에 슈퍼에 가서 제가 사올게요.”

“귀찮게 뭘 그래요.”

“아니에요. 저도 오늘은 한 잔 마시고 싶네요.”

말렸지만 그녀는 벌써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대문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시간 날 때 술이나 좀 담가놔야겠네요.”

“이왕이면 맛있는 걸로 해줘요.”

“혜경 씨가 다 마시려고요?”

“헤헤! 들켰다.”

소주가 오길 기다렸지만 오늘은 술을 먹을 날이 아니었나 보다.

나갔던 한미령이 다급하게 들어오며 외쳤다.

“사장님! 밖에 웬 남자가 쓰러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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