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13. 상처를 주는 이도, 낫게 하는 이도 사람이다(1)
“환자의 죽음 때문에 손을 놓은 건가?”
“···의원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환자의 죽음에 대해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때 일어났던 논란 때문인가?”
‘논란이라······.’
1년이 넘게 지속되고 5년이 넘게 괴롭히고 있는 기억을 ‘논란’이라는 한마디 말로 정리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아니, 어쩌면 민규식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기억을 지우고 지우다 보면 남는 단어는 그 한 단어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좀 더 알아보니 왜 논란이 되었는지조차 의문일 정도더군. 의사가 환자를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 한데 칭찬은 못해줄망정 논란이 일어나다니!”
아픈 기억을 들추어내는 건 싫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느낌이다.
“···두눈박이시군요?”
“응?”
“아닙니다. 과거 얘기는 이제 그만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불편합니다.”
“그런가? 미안하네. 다만 과거 문제로 자네의 실력을 썩히고 있는 게 안타까워하는 말이네.”
“마사지로도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한계가 있지 않겠나?”
민규식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에게 바라는 게 뭡니까?”
“돌려 말하지 않겠네. 우리 병원으로 오게. 이번에 한방의학과를 신설하려고 하는데 자네가 필요하네. 이효원 씨의 경우처럼 현대 의학으로도 손쓰지 못하는 환자들이 부지기수네. 한방의학과가 모두 고칠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한축을 담당해 줄 거라고 생각하네.”
솔깃하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까진 마음이 거부하고 있었다.
“지난 일처럼 어이없는 상황은 절대 없을 거라 보증하네. 내가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또한 한강대에 신설된 한의학과의 교수로 추천해 주겠네.”
“도대체 저의 뭘 보고······.”
“실력. 더 이상 말이 필요한가? 손을 대는 것만으로 혈을 짚고 피를 멈추게 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몇 명이나 되겠나.”
“제 능력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능력을 가르칠 필요 없네. 능력으로 얻는 지식을 가르치라는 걸세.”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후······.”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다가 돌연 한숨을 뱉었다. 뭔가 심장을 억누르는 느낌이다.
‘빌어먹을 과거!’
하얀 의사 가운을 입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압박이 느껴지는 걸 보면 과거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게 분명했다.
“이런, 내가 너무 코너로 몬 모양이군.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되네. 환자를 고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내 제안을 가장 먼저 생각해 주게.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떤가?”
민규식이 한 발자국 물러나자 압박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알겠습니다. 제안은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거 마치 마음의 병이 있는 환자를 괴롭힌 모양새군. 미안하네. 사죄의 의미로 점심을 사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다음에 하시죠. 지금은 도저히 넘어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세.”
“그럼, 이효원 씨 입원할 때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40분간의 만남에 불과했는데 하루 종일 마사지를 한 날보다 더 피곤했다.
얼른 나가려 발걸음을 서두르는데 민규식이 말했다.
“참! 가끔 자네의 의견이 필요할 때 전화해도 되겠나? 제안에 대한 결정이야 천천히 해도 되지만 그동안 환자들이 기다려 주는 건 아니잖나. 물론 이번 일처럼 자네가 날 필요로 할 땐 언제든 연락해도 좋네.”
“···정말 끈질기시군요?”
“환자를 위해서라면 끈질기다는 말쯤은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네. 허허허!”
“···오전에는 거의 비어 있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 후 또 다른 말이 나올까 얼른 나왔다.
“그 친구 그렇다고 도망치듯 갈 것까지야. 허허허!”
두삼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민규식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표정을 굳히며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생각할 때의 버릇이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인터폰을 눌렀다.
“황 실장 들어오게.”
황 실장은 민규식의 업무 외적인 일을 주로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이번에 알아온 일 있지.”
“방금 전에 나간 한두삼 조사 건 말입니까? 잘못된 부분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5년 전 그가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던 섬에서 한 사람이 죽은 적이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해 봐. 별것 아닌 일인데 너무 커졌어.”
“한두삼을 노린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꼭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해. 공부 잘하던 이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라 그런지 음흉한 놈들이 꼭 있거든.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철저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수고해 줘. 참! 초대 이사장님은 어디 계신가?”
“시골에서 요양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알아봐 드릴까요?”
“그래주게. 당신을 고친 한의사의 후손이 나타난 것 같다는 말은 전해 드려야 하지 않겠나.”
“알고 계실 겁니다. 원래 은혜와 원한에 대해서는 확실하신 분 아닙니까.”
“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말씀을 드리게.”
“그러겠습니다.”
황 실장이 나간 후 소파에 앉은 민규식은 다시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생각에 빠졌다.
사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었다.
의술 실력과 환자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로 인해 초대 이사장과 원장에게 눈에 들어 원장이 됐다고 생각하는데 착각이다.
실력과 의사로서의 인품은 기본이고 경영 능력과 돈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어서 병원장이 된 것이다.
없는 돈을 쪼개서 돕는다는 마인드가 아니라 돈을 왕창 벌어서 돕는다는 마인드랄까.
그가 병원장이 되고 병원의 크기가 두 배 이상 커지고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위한 의료 지원과 사회봉사 활동은 4배 이상 커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권모술수에도 누구보다 능했고 인맥 관리 역시 꾸준히 하고 있었다.
상위 0.1퍼센트를 위한 의료 서비스와 그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별도의 입구와 병실을 마련한 것 역시 그의 생각이었다.
그들이 지불하는 돈과 후원금으로 최고의 의료진을 구축해서 다른 환자들에게 혜택으로 돌려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원하는 것을 위해 돈, 지위, 권력욕 모두 가지고 있었다.
특히 실력 있는 외과 의사에 대한 욕심은 누구보다도 강했는데 일단 찍은 사람은 불법적인 일을 제외하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데리고 와야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그렇게 데려온 의사들은 원하는 건 주고 철저하게 이용했다.
괴롭힌다는 얘기가 아니다.
한강대 의대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고 병원 내 후배들에게도 하나라도 가르치게 만들었다. 한강대학교병원이 우리나라 최고의 외과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런 민규식이 두삼을 찍은 것이다.
두삼을 알뜰하게 이용하려면 일단 그의 컨디션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의 일을 알아보라고 한 것이다.
쓸데없는 것에 정신을 쏟을 시간에 환자를 한 명 더 보는 게 이익이었다.
“그나저나 그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궁금하네. 허허허!”
현재 병원에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환자들을 떠올리며 두삼이라면 어떻게 진단하고 치료를 할지 벌써부터 흐뭇해졌다.
똑똑!
노크 소리에 웃음을 지웠다. 문이 열리고 여직원이 들어왔다.
“원장님, 태양한방병원 임 원장님이 지나는 길에 식사나 하자고 오셨습니다.”
태양한방병원은 신설하려는 한방의학과를 위해 도움을 받고 있는 이였다.
“그래?”
민규식은 자리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13. 상처를 주는 이도, 낫게 하는 이도 사람이다.
배영옥은 현재 일주일에 한 번 오전에 가게로 왔다.
마사지로 몸을 가볍게 만든 후 십이경맥의 막힌 부분을 한두 개씩 뚫고 일주일치의 약재를 준다.
“다 됐습니다. 이제 십이경맥은 다 뚫었네요. 다음부터는 독맥, 임맥을 제외한 기경팔맥의 막힌 부분을 뚫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한데 위에서 느껴진다는 건 어떻게 됐어요?”
“이제 저도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기 힘들 정도로 작아졌습니다. 지금 상태라면 2주 정도면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아요.”
“아! 이제 완치인가요?”
“하하! 병원에서 완치 판정은 이미 받으셨잖아요. 솔직히 현재 여사님 몸 상태는 웬만한 중년 여성들보다 좋으세요. 이제 한 달에 한 번씩만 오셔도 돼요.”
독맥, 임맥을 포함 십사경맥이 깨끗이 뚫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금처럼 간단한 운동만 하면 평생 잔병치레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호호! 그렇게 말해도 계속 올 거예요. 아마 제가 괜찮다고 해도 하란이가 보낼걸요.”
“그럼 다음부터 시간 때우려면 얼굴마사지도 해드려야겠네요.”
솔직히 건강을 되찾으며 살이 적당히 올라 주름이 줄어든 배영옥은 환갑에 가까운 나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젊어 보였다.
딱히 피부 관리가 필요 없을 정도다.
“호호호! 그것도 좋죠.”
“씻고 나오세요.”
밖으로 나가 일주일치 약재를 준비하고 마실 차를 우렸다.
씻고 나온 배영옥은 찻잔 앞에 앉으며 말했다.
“차가 바뀌었네요?”
“도라지 차예요. 제철 음식이 가장 좋은 법이죠. 껍질째 끓여야 효과가 제대로 나와요.”
“그래요? 시장에 가서 사다가 끓여봐야겠네요.”
“껍질엔 잔류 농약이 많아요. 차도 챙겨놨으니 자주자주 드세요.”
눈으로 농약을 볼 능력은 없었다. 다만 담긴 기를 확인할 수 있다 보니 좋은 도라지를 살 수 있었다. 도라지에 담긴 기의 양이 풍성한 건 대부분 무농약으로 키운 도라지였다.
물론 이번 도라지는 산 건 아니다.
악양의 백만수가 면에서 괜찮다는 도라지를 사서 왕창 보내준 것이다.
“항상 신세만 지네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그리고 하란 씨가 부담스러울 만큼 지불한답니다. 참! 다음 주엔 하란 씨와 여행가신다면서요?”
“네. 일이 바쁜 것 같아 괜찮다는데도 굳이 가자고 하네요.”
“그동안 못 누린 거 실컷 누리세요.”
“고맙고 기특하긴 한데 열심히 일하는 애 방해하는 것 같아서요.”
“그런 생각 마세요. 하란 씨가 일보단 어머니가 우선이래요. 정 미안하시면 친구분들이랑 놀러 다니세요. 그럼 조금 안심할 거예요.”
“훗! 우리 딸이랑 똑같은 말하네요.”
“하하! 그런가요? 그나저나 이 친구 안마 받다가 잠든 거 아냐?”
나문덕과 정 간호사는 올 때마다 신혜경과 한미령의 마사지 연습 상대가 되어줬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더니 요즘은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일어나려 하자 배영옥이 손을 흔들며 말렸다.
“곧 나오겠죠. 내버려 두고 차나 마셔요.”
고용인이 괜찮다는데 뭐라 할 순 없었다.
“한데 한 선생님, 듣자 하니 이효원이라는 아가씨 치료하기로 했다면서요. 마사지 숍과 병행하려면 연애할 시간도 없겠어요?”
“···하하! 연애엔 관심이 없습니다.”
“왜요? 과거에 좋지 않은 경험이 있으세요?”
“······.”
순간 훅 치고 들어오는 어퍼컷에 말을 하지 못했다.
요즘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에 관심이 많은 건지.
“아! 그냥 해본 말인데 진짜 그랬나 보네요. 미안해요. 아픈 상처를 건드린 건 아니죠?”
“그, 그럼요. 대학교 때 사귀다 대체 복무로 공중보건의 생활할 때 헤어졌습니다. 떨어져 있으니 시들해졌다고 할까요.”
“여자 쪽에서 헤어지자고 한 거죠?”
“비슷합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병을 보는 건 선생님이 잘하지만 사람 보는 건 제가 더 잘할걸요. 선생님은 마음을 주면 쉽게 변하지 않는 스타일이에요.”
“···그런가요?”
‘나문덕과 정 간호사는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대답을 하고 있지만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마치 명절에 엄마를 만난 기분이다.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해요? 말해봐요. 내가 가진 게 없어 선생님께 좋은 것은 못 해주지만 먹고 살려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참한 아가씨들은 많이 알아요. 소개시켜 줄 수도 있어요.”
참한 아가씨라는 말에 왜 솔깃한 건지, 아무래도 연애 세포가 완전히 죽은 건 아닌 모양이다.
“글쎄요. 굳이 말씀드리자면······.”
머릿속으로 이상형을 떠올렸다.
‘눈썹은 좀 짙었으면 좋겠고, 눈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코는 살짝 높고 입술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좋겠지. 몸매는 좀 글래머러스했으면 좋겠어.’
머릿속 연필은 생각대로 이상형을 그려갔다. 그리고 완성이 되었을 때 깜짝 놀랐다.
완성된 여자는 누가 보더라도 우하란이었다.
마치 눈앞의 배영옥이 보고 있는 것 같아 얼른 지우개를 소환해 지웠다.
“하하··· 딱히 안 떠오르네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아직 연애하고픈 마음이 없나 봅니다. 아! 나왔네요.”
때마침 번들번들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이 된 나문덕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