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12. 지우고픈 과거(4)
고개를 들어 얼굴을 봤다.
부스스한 머리를 질끈 묶고 화장기 없는 얼굴의 여의사가 반갑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퍼뜩 생각이 나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자 그녀가 다시 말을 했다.
“이거 서운하네요. 아무리 어수선할 때 만났다고 해도 치료도 도와드렸는데···”
어수선할 때 만났다는 말에 누군지 떠올랐다.
“아! 민청하 씨. 그때랑 너무··· 음! 반가워요.”
“···방금 그때랑 너무 다르다고 하려고 했죠?”
“아, 아니요.”
“말을 더듬는 거 보니 확실하네. 요즘 전문의 시험 준비하느라 제대로 관리를 못 했다곤 해도 못 알아볼 정도인가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케이크 사요. 이왕 망가진 거 배라도 든든히 채워야겠네요.”
그땐 귀하게 자라 도도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주 털털했다.
케이크를 사서 갖다 주자 한 입 크게 먹고 묻는다.
“근데 병원엔 웬일이에요? 어디 아픈 것 같진 않고, 누가 아파요?”
“아뇨. 민 선생님 뵈러 왔습니다.”
“아빠를요?”
“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무슨 부탁인데요?”
대답 대신 그냥 빙긋이 웃었다. 여기저기 말하고 다닐 만한 일이 아니었다.
“곤란한 일인가 보네요. 그나저나 이렇게 만날 줄 알았으면 심부름 센터엔··· 흠! 근데 서울에 사세요?”
“네. 장충동 근처에 살고 있어요.”
“가까운 데 살고 계셨네요. 참! 그때 그 환자 아무 후유증 없이 수술 잘됐어요. 며칠 전에 감사하다고 찾아왔었는데.”
“뉴스에서 봤어요.”
“그 분이 두삼 씨를 찾더라고요. 감사라도 표하고 싶다고요.”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선생님과 청하 씨 덕분이죠.”
“아빠는 두삼 씨 덕분이라던데요. 아무튼 보게 되니 반갑네요.”
민청하는 꽤 활달한 여자였다.
얘기를 주도하다가도 들어줄 땐 과하지 않은 리액션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시답잖은 얘기를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게 나눴다.
“경해대를 나왔다면 경해한방병원에 다니고 있는 거예요?”
“아뇨.”
“한의원을 내신 거예요?”
“한의원은 아니고 마사지 숍이에요.”
“에? 마사지 숍이요? 음, 뭔가 사정이 있나 보네요. 이번에 저희 병원에서 한방의학과를 신설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관심 있으면 지원해 봐요. 두삼 씨 실력이면 두 팔 벌려 환영할걸요.”
“생각해 볼게요. 아,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전화기가 떨렸다. 얼른 받아보니 비서실이었다. 벌써 수술이 끝났나 싶어 봤는데 어느새 1시간 30분이 지난 후였다.
-한두삼 씨? 여기 한강대학병원 비서실입니다. 원장님께서 수술 마치고 나오셨는데 한두삼 씨를 보시겠답니다. 어디세요?
“1층 푸드코트입니다.”
-그럼 15층으로 올라오세요.
전화를 끊자 민청하가 물었다.
“아빠 수술이 끝났나 보네요?”
“네. 청하 씨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어요. 고마워요.”
“저도 즐거웠어요. 공부하다가 집중이 안 됐는데 두삼 씨랑 수다를 떨고 나니 괜찮네요. 그럼 일 보고 가세요. 참! 같이 일했으면 좋겠네요. 꼭 지원하세요.”
시크하게 돌아서서 가는 민청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15층으로 향했다.
“허허! 어서 오게. 오늘 수술이 다른 날보다 잘되더니 자네가 찾아올 걸 안 모양이야.”
비서실을 통해 집무실로 들어가자 민규식은 반갑게 맞이해 줬다.
“약속 없이 불쑥 찾아왔는데 이렇게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우끼리 별소릴 다하는군. 두 번째 보는 거라 반말하는 건데 불편하면 말하게. 얼른 높이겠네. 허허허!”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건 민청하와 비슷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편합니다. 그리고 그때 기자들에게 제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나이가 들면 눈치가 빨라진다네. 자네가 스스로 숨기려 한다는 걸 알겠더군. 지난 얘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앉지. 뭘 마시겠나?”
“시원한 물로 부탁드립니다.”
민규식은 비서실에 연락하지 않고 직접 냉장고로 가서 두 개의 물병을 가지고 왔다.
“지나가다가 들른 것 같진 않고?”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해보게.”
두삼은 이효원의 발목 수술에 대한 얘기를 했다. 물론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다는 것 또한 말했다.
“흐음~ 그러니까 자네에 대해 밝히지 않고 이효원의 수술을 하고 싶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 한데 궁금해서 그러는데 정밀 검사를 했는데도 발견되지 않는 이물질이 있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나? 혹시 기를 이용해 내부를 볼 수 있는 건가?”
두삼은 민규식의 물음에 약간 놀랐다. 뭐랄까 마치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는 듯한 태도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맞습니다.”
“믿네. 그날 자네가 처치한 두 사람의 상황을 보면 그것 아니곤 설명이 안 되지. 하지만 그럼에도 신기하다는 생각은 드네.”
“테스트를 해보시겠습니까?”
“아니네. 수술할 때 확인하면 되겠지.”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적어도 1시간은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 줄 알았는데 너무 간단히 허락하니 오히려 당황스럽다.
“병원 입장에서도 이효원의 재수술을 하는 건 좋다네. 물론 성공을 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일세. 성공을 한다면 자네가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병원이 다 가지게 되지 않겠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하는 말인지 진짜 홍보 목적 때문인지 헷갈렸다.
민규식은 두삼의 표정을 읽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허허. 환자를 홍보 목적으로 쓰는 걸 의사로서는 반대하지만 원장으로서는 필요하다고 본다네. 아! 그렇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할 생각은 없네. 그저 재수술을 우리 병원에서 했고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정도가 다일 테고. 왜 불편한가?”
“아닙니다. 부탁을 들어주시는데 그보다 더한 홍보를 한다고 해도 이해합니다.”
“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홍보를 한다고 할 걸 그랬군. 허허허!”
이번에 한 말은 농담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럼 수술 날짜는 언제로 하면 되겠나?”
“언제든 가능합니다. 다만 빠를수록 좋겠습니다.”
“마취과는 필요 없을 테니 내 스케줄만 잡으면 되겠군. 근데 기계로 찾을 수도 없는 이물질은 어떻게 제거 할 생각인가?”
“정확한 위치를 아니 석션을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단순한 제 소견에 불과하니 원장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나도 처음 해보는 수술인데 특별한 생각이 있겠나.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석션을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그럴싸하군. 그런데 절개 부위를 최소한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 생각 역시 그렇습니다. 이물질의 위치가 여기, 여기, 여기, 여기이니 이렇게 두 곳을 절개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두삼은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했다.
“그보다는 이렇게 절개하는 것은 어떤가? 석션을 삽입하는 건 어려워도 근육이 다치진 않을 것 같은데.”
“음··· 괜찮은데요.”
역시 경험 많은 의사라 그런지 이물질의 위치를 가르쳐 주자 대번에 최적의 절개 장소를 찾아냈다.
“수술 전날 입원해서 검사를 해보면 확실한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수술은 원장님께 맡기고 전 위치를 알려 드리는 것에만 신경 쓰겠습니다.”
“마취와 출혈을 잡아줘야지. 자자! 일 얘기는 그만하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왜 한의원이 아닌 마사지 숍을 연 건가?”
“······!”
민규식이 오늘 여러 번 놀라게 만든다.
‘이름으로 뒷조사를 한 건가? 아님 올라오는 동안 민청하와 통화를 한 건가?’
답은 바로 나왔다.
“그날 워낙 충격을 받아 자네에 대해 알아봤다네.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사실 그가 이름을 물었을 때 이런 일이 있을 걸 감안을 하고 말한 것이다.
“한의원이 아닌 마사지 숍을 연 건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과거의 그 일 말인가?”
“···그것도 아셨습니까?”
“모를 수가 없더군. 경해대의 아는 교수에게 자네에 대해 물어보니 그 일부터 얘기해 주더군.”
“왠지 모교에 그 일로 기억되고 있다니 좋은 기분은 아니네요.”
무슨 말을 하려고 남의 아픔을 꺼내는지 모르겠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자네 잘못이 아니야.”
우뚝!
민규식의 말에 나가려고 몸을 튼 그대로 멈췄다.
“사자(死者)의 의료 기록을 봤네. 자네의 침술이 아니었다면 헬기가 도착하기 전에 심장이 멈췄을 거네.”
“···압니다.”
고개를 숙인 두삼은 힘겹게 대답했다.
그토록 잊고자, 묻고자 노력했던 일이 어제 일처럼 머릿속을 채운다.
***
병역의 의무를 대신해 3년간 공중보건의로 근무하기로 한 것은 의료 취약 지역인 농촌에서 자란 두삼에겐 당연한 결정이었다.
농어촌 보건소나 의사가 부족한 지역 병원이 아닌 서해의 섬마을 보건지소까지 떨어질지는 예상 못 했지만 말이다.
섬마을에서의 공중보건의 생활은 편했다. 외과의이자 사수였던 최재형은 실력자임에도 공중보건의를 지원할 만큼 괜찮은 사람이었고 섬마을 사람들은 친절했다.
바쁘게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이든 어르신들에게 침을 놔주고 가끔 산과 들에서 캔 약초로 한약을 끓여주는 게 다였다.
아주 가끔 섬에서 처리 못 할 긴급한 환자가 생기긴 했지만 그땐 응급조치만 하고 헬기를 이용해 육지에 있는 병원으로 보냈다.
편안한 생활을 보내던 중 급작스럽게 문제가 발생한 것은 최재형이 소집해제 된 후, 공중보건의 부족으로 부사수를 할 의사가 내려오지 못해 홀로 보건지소를 지키고 있을 때였다.
평소 보건지소 근처에서 생선을 말리던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지게 된 것이다.
같이 일하던 할머니가 달려왔고 현장에 갔을 때는 이미 심정지 상태였다.
즉시 심폐소생술에 들어갔고 지소에 보관 중인 제세동기를 이용해 겨우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한데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다시 심정지가 왔다.
심정지 원인의 80~90 퍼센트는 동맥경화로 인한 관상동맥질환이다.
찐득해진 혈전이 돌아다니면서 심장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혈관을 막으면 심근경색, 뇌의 혈관을 막으면 뇌경색이다.
또 다시 심폐소생술을 해야 했고 하늘이 도왔는지 숨을 쉬었다.
백억 대의 최첨단 의료장비가 탑재된 닥터헬기가 출동했다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한의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양의학적 지식, 거기에 최재형을 통해 봤던 지식까지 떠올리며 헬기가 도착하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데 닥터헬기를 기다리는 와중에 세 번째 심정지가 왔다.
당시를 떠올리면 과연 제정신이었나 싶을 만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평생의 기적을 그날 다 쓴 건지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질 만큼 심폐소생술을 한 결과 다시 살려냈다. 하지만 점점 짧아지는 시간을 비추어 봤을 때 네 번째 심정지가 올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생각하면 거기서 멈춰야 했다.
설령 병원이었다고 해도 손쓰지 못하고 죽었을 정도로 혈전이 막히는데 무슨 수로 살린단 말인가.
그러나 친근하게 이것저것 챙겨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결국 선을 넘게 만들었다.
이론적으로 알고 있던 혈류의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침술을 시행했다. 또한 혈전이 빠져나오길 기대한 건지 동맥에 상처를 내서 피가 새어나오게 만들었다.
미친 짓이었다. 과거의 그 장소로 갈 수 있다면 가서 과거 자신의 팔을 부러뜨려서라도 말릴 일이었다.
물론 미친 짓 덕분에 할머니는 헬기가 도착할 동안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시간도 되지 않아 헬기에서 긴급 수술을 하는 와중에 심정지가 와서 돌아가셨다는 얘기 들어야 했다.
한데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미친 짓에 대한 칭찬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토록 혹독한 나날이 될 줄은 몰랐다.
육지에서 이번 일로 무슨 말이 오가는지 처음엔 몰랐다. 할머니의 죽음에 넋을 놓고 있을 때였기에 어느 것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 안 사실이지만 자신이 한 의료 행위가 한의사의 ‘면허된 의료 행위’를 넘어섰다는 것이 논란의 이유였다.
의료법에서는 의사와 한의사가 동등한 수준의 자격을 갖추고 면허를 받아 ‘각자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 행위를 할 수 없다’고 이원적 의료 체계를 규정했다.
그런데 외과 의사가 할 법한 행위를 한 것이 누군가를 거슬리게 한 게 분명했다.
거기에 문제가 문제를 낳았다.
행위가 문제가 되자 돌아가신 할머니의 자식들이 찾아온 것이다.
그때부터 매일이 전쟁이었다. 자식들이 섬에 머물며 섬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친근했던 주민들의 눈빛이 적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섬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찾은 학교에서도 친구, 동료였던 이들의 눈빛 역시 변해 있었다.
최선을 다했고 잘못한 행동은 없다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든 의료 행위가 부정당했고 의원이 아니라고 강요받았다.
세상이 미친 건지, 내가 미친 건지 알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애꾸나라에 간 두 눈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이해가 됐다.
다행히 두 눈을 가진 사람이 한 명은 있었다.
자신의 과도한 열정을 꾸짖으며 의원 역시 사람이니 이상이 아닌 현실에서 살라고 말해주던 은사님.
아무튼 학계와 사회적으로 명성을 가진 은사님 덕분에 1년이 넘게 설왕설래 했던 문제는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 한 의료 행위로 문제가 없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얻은 것은 배울 땐 반감을 가졌던 은사님의 가르침이 일을 겪고 나니 삶의 경험이 녹아 있는 가르침임을 알게 됐다는 정도.
잃은 것은 많았다.
자존감, 자신감, 이상, 돈 등등.
그리고 침술.
돌아가신 할머니의 자식들은 어머니가 주신 돈에 만족 못 했는지 자신이 의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악다구니를 부렸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던 그때 결국 침술을 손에 놓기로 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한의사가 아닌 마사지사로서 살고자 했던 것도 그때의 기억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렇게 문제가 될 일인지, 자신이 한의사로서 살아가는 것마저 막아야 했는지 따위들.
‘사라져!’
더 생각했다간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을 다시 상자 속에 구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