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39화 (38/122)

# 39

12. 지우고픈 과거(3)

“···제 이미지가 어떤데요?”

“뭐든 척척 해내는 슈퍼우먼?”

“아니거든요! 저도 평범한 사람이거든요.”

“평범한 사람이 몇 달 만에 뚝딱 투자사 같은 걸 만들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아무튼 겉으로 보기에도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가 있어요.”

“계획한 건 꽤 됐거든요. 효원아, 내가 진짜 그런 이미지야?”

하란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효원에게 물었다.

“제가 볼 때도 그런 면이 있어요. 사실 언니처럼 괜찮은 사람을 보면 오빠에게 소개시켜서 진짜 언니로 만들까 하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오빠 따위가 감히’라는 생각이 들어요.”

“···생각도 못 했네. 근데 네가 그런 말 하는 게 우습지 않아?”

“저야 국민여동생이잖아요. 언니랑은 다르죠.”

다르긴. 두삼이 볼 땐 두 사람 다 똑같았다.

눈앞의 두 사람과 술을 먹고 있다는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물론 두 사람의 행동이 특별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TV 드라마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자, 이제 볼까요?”

이효원은 살짝 긴장된 모습으로 오른발을 내밀었다.

“왼쪽 다리도 주세요. 좌우가 어떻게 다른지도 비교해 보게요”

‘금메달 두 개를 딴 다리인가?’

결코 예쁜 발이라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느 손님의 발보다 조심스러웠다.

곧 상념을 지우고 집중했다. 손이 빛나며 발로 스며들었다. 그땐 빠르게 훑어보느라 세밀하게 못 봤지만 이번엔 꼼꼼히 살폈다.

‘신기하네. 다른 사람보다 다리의 맥이 훨씬 튼튼하고 발달됐어.’

피겨스케이트를 위해 태어났다고 평가받는 이효원의 다리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일반 사람들과 달랐다.

‘그나저나 심하네.’

왼발과 비교하자 오른발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왼발의 경우 세맥이 마치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는데 오른발의 경우는 전쟁으로 폭격을 맞은 도로마냥 곳곳이 끊기고 망가져 있었다.

‘이 정도면 설령 재수술로 뼈를 제거한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기량을 발휘 못할 가능성이 높아.’

심각한 상태를 접하자 머릿속은 자연스럽게 해결 방법을 모색하느라 바빴다.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방법. 그러나 하란의 물음에 상념에서 깨어나야 했다.

“어때요? 뼛조각이 있어요?”

이효원에게 수건을 건네준 후 자리에 앉았다.

“뼈인지 이물질인지 알 수 없지만 네 개는 확실히 있어요.”

“근데 병원에서는 왜 발견을 못 한 거죠?”

“너무 미세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제거할 수 있어요?”

“외과 수술을 제가 할 순 없죠. 다만 외과 수술을 하는 분과 함께한다면 가능할 것 같아요.”

“아! 두삼 씨가 정확한 위치를 가르쳐 주면 되겠네요. 근데 그렇게 해주실 수 있으세요?”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하란과 이효원 앞에서 거절은 생각할 수 없었다.

“당연히 도와야죠.”

“잘됐다, 효원아!”

“그러게요. 고마워요, 두삼 오빠. 언니 말대로 여길 오길 잘한 것 같아요.”

기뻐하는 두 사람.

그러나 이효원에게 오빠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두삼은 함께 기뻐하지 못했다.

맥주를 마시며 이효원의 상태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수술을 먼저 끝내고 경과를 지켜본 후에 말을 할지, 아님 그냥 말을 하지 말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지난번 평창에서 봤듯이 스스로를 망쳐가면서 연습을 할 게 눈에 보였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고, 피나는 노력에도 회복하지 못하면 좌절감 역시 클게 빤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의 정확한 상태를 인지하게 해서 포기할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치료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두삼 오빠, 우리 이거 먹고 나가요. 오늘 제가··· 왜, 그런 표정··· 혹시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요?”

자신이 맛있는 것을 사겠다고 말하려던 효원은 두삼의 표정을 읽고 걱정스레 물었다.

두삼은 최대한 담담하게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근육과 뼈가 상해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다면 이해가 되겠는데 맥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얘긴 처음 들어요. 맥이 정확히 어떤 작용을 하는 건데요?”

스포츠 선수들의 경우 해부학, 생리학, 생화학 등 자신의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효원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

한데 맥, 혈, 세맥 정도의 말은 듣긴 했지만 잘 몰랐다.

“설명하는 거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앞에 놓인 맥주 캔 들어볼래요?”

“이렇게요?”

이효원은 의아해하면서도 바로 들어 올렸다.

“놓고 손 좀 줘볼래요?”

“여기요.”

손을 잡고 기를 이용해 그녀의 어깨에 있는 중부혈을 막았다.

중부혈은 감기, 기침 같은 기관지 관련 질환에 좋은 혈이지만 막히는 경우는 팔을 쓰지 못한다.

“다시 잡아보세요.”

“뭘 하는 건지 모르지만 맥주 캔 정도는··· 어! 파, 팔이 움직이지 않아요!”

“맥에 존재하는 혈을 막은 거예요. 기의 존재가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말을 하면서 다시 풀어줬다. 그녀는 다시 움직이는 자신의 팔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발달된 맥이 남들보다 더 높게 점프를 할 수 있게 해줬을 수도 있겠네요.”

“아마도요.”

“첩첩산중이네요······.”

이효원은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하란이 나섰다.

“그 맥을 고칠 방법은 없나요?”

“현재는 그래요. 다만······.”

그저 머릿속에서 그려본 방법에 불과한 것을 말하려니 조심스럽다.

환각지를 치료할 때 팔, 다리가 없음에도 기가 돈다는 점에서 떠올린 방법이다.

환자가 기의 흐름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원래 돌던 대로 돌았다는 것은 뇌의 무의식의 영역에서 그 일을 수행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환각지가 점점 사라지는 것은 무의식의 영역 또한 팔, 다리가 없어졌음을 인지한 결과가 아닐까.

즉, 이러한 가정이 맞는다면 맥이 망가졌다고 해도 무의식중에 기가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효율은 형편없겠지만 말이다.

“다만 뭐죠?”

침묵을 지키고 있자 하란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합니다.”

“정말이요? 다행이네요!”

“추측과 가정을 통해 얻은 결론이라 기대감을 갖지 않는 게 좋아요. 가능성을 따진다면 1퍼센트도 되지 않을 거예요.”

“1퍼센트의 가능성도 되지 않는다던 말기 암도 고쳤잖아요?”

“솔직히 여사님 치료는 천운이 따랐죠.”

“천운도 노력을 했으니 따른 거죠. 아무리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방법이 있다면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설령 시도한다고 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올림픽이 시작하기 전까지 치료가 안 될 수도······.”

문득 말을 하다가 자신이 회피를 하려고만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뒷말을 잇지 못했다.

회피하려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실패했을 때 원망을 들을까 걱정해서가 아니다. 실패로 인한 심적 고통을 자기 보호 본능의 차원에서 남 탓으로 돌리는 거야 충분히 이해한다.

그저 자책하는 것이 두려웠다. 실패를 내 탓이라며 스스로를 다시 어둠으로 내몰까 두려웠다.

‘고향에서 사람들을 고치며 자존감이 다시 살아나나 싶었는데 여전하군. 과거는 잊자. 이제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해도 괜찮잖아, 한두삼!’

과거를 애써 털어냈다.

그때였다. 자신의 마음의 일부를 보기라도 한 건지 잠자코 듣고 있던 이효원이 말했다.

“치료를 못 한다고 해도 오빠를 원망하지 않아요. 지금 제 상태를 정확히 알려주고, 고민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걸요. 이건 진심이에요.”

“······.”

“물론, 한편으론 두삼 오빠가 치료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다시 아이스링크에 당당하게 서고 싶거든요. 헤헤!”

애써 웃음 짓는 모습에 가슴이 찌릿하다. 입을 열려는데 다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근데 있잖아요. 오빠 말대로 가능성이 희박하겠지만 한번만 노력해 주면 안 될까요?”

“그래요, 두삼 씨.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주세요.”

두 사람의 간절한 부탁이 아니더라도 이미 마음속으론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부탁 안 해도 팬으로서 이미 하려고 했거든요. 아무튼 일단은 뼛조각 제거 수술부터 집중해요. 그리고 제 추측이 틀리길 바라자고요.”

최상의 경우는 역시 수술 후 치료 과정 없이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는 것이리라.

***

중국에서는 양의학과 한의학의 콜라보는 심심치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오히려 쥐와 고양이마냥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고 할까.

물론 한의학이 쥐다. 한의학은 일방적이다 싶을 만큼 코너에 몰려 있는 상태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의학이란 결국 환자의 병세를 완치시켰는지에 대한 결과 싸움인데 한의학이 보여주는 결과는 양의학과 비교를 하는 것이 우스울 만큼 미약했다.

한의학계의 의원들이 게으름을 피운다는 건 아니다.

현대 의학이 고치지 못하는 병을 한의학을 통해 고치고자 노력하고, 천연물로 만든 신약을 개발하는 노력 역시 하고 있었다.

막상 이효원의 이물질 제거 수술을 함께할 병원을 찾으려 하니 막막해졌다.

일단 함께하려면 스스로의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한데 그 과정이 얼마나 번거로울지는 생각하는 것조차 싫었다.

피를 멈추게 하고, 맨손으로 온몸을 마취시킨다고 ‘오! 당신 말을 믿어요! 함께 수술을 합시다!’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실험실의 쥐처럼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물론 수술 당사자인 이효원이 직접 설득해서 참가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재수술을 한다고 병원을 돌아다닌 것만으로도 각종 매체에서 뉴스로 내보는데 요상한(?) 수술을 하게 된다면 어찌될지 뻔했다.

아마 동물원의 원숭이가 될 것이다. 주목받는 건 절대 사양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찾아갈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민규식이 원장으로 있는 한강대학병원.

강원도에서 자신의 실력에 대해 무척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과 인품이 남다른 그에게 부탁하면 조용하게 수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될까? 일단 부딪혀 보자.”

***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병원 원장이 잠시 스친 인연 때문에 순순히 허락할 가능성은 낮았다.

“그나저나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엄청 많네.”

환자와 그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큰 로비를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병원에 가보면 자신의 건강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더니 새삼 아픈 사람들이 많음을 느낀다.

두리번거리길 잠시, 로비 중앙에 위치한 안내데스크로 다가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훤칠하게 생긴 직원이 물었다.

“민규식 선생님을 뵈었으면 합니다.”

“···민규식 선생님이라면 원장님 말씀입니까?”

“네.”

“약속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강원도에서 우연히 뵀는데 한번 찾아오라고 해서 들렀습니다.”

거짓말이었지만 연락이 닿는 게 우선이었다.

“잠시만요. 일단 비서실에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성함이······?”

“한두삼입니다.”

직원은 약간 의심을 하는 눈치였지만 전화기를 들어 확인을 했다. 대답은 금세 돌아왔다.

“현재 수술중이시랍니다. 2시간 후쯤 끝나는데 그때 전한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저쪽으로 가면 푸드코트가 있습니다. 참! 전화번호를 남겨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그가 알려준 푸드코트로 갔다.

시원한 생과일 주스를 주문해서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할 일이 없었기에 스마트폰을 꺼내 연예 기사를 읽었다.

유명 연예인 커플이 결혼한다는 기사를 볼 때였다. 의사 가운을 입은 여성이 근처에 앉으려다가 두삼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어? 한두삼 씨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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