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37화 (36/122)

# 37

12. 지우고픈 과거(1)

***

“헬렌 언니!”

볼 때마다 예뻐지더니 이젠 숙녀가 된 이효원이 반가운 얼굴로 달려와 안겼다.

“재활 훈련 한다는 애가 이렇게 뛰어다니면 어떻게 해. 마음고생 심하지?”

“아니에요. 예전보다 오히려 편해요. 보세요. 요즘 살도 많이 쪘어요.”

“살이 찌긴. 여전히 말랐는데.”

애써 밝은 척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보조를 맞췄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그동안 왜 연락도 없었어요.”

“앉자. 천천히 먹으면서 얘기하자.”

자리에 앉고 식사를 하기 전까지 예전의 일들을 즐겁게 얘기했다. 불편한 얘기는 두 사람 다 의도적으로 피했다.

“언니, 우리 술 한잔해요.”

“요즘은 술도 마시나 보네?”

“성인 되자마자 제일 먼저 술부터 마셨는걸요. 저 주량 엄청 세요.”

“훗! 그럼 와인 한 병 할까?”

“그래요!”

가볍게 시작한 술은 서로 간에 조금 더 깊은 얘기를 나누게 만들었다.

“근데 한국은 언제 온 거예요?”

“2년 정도 됐어.”

“그럼 그때 연락하지 그랬어요?”

“엄마가 아파서 왔어. 이제 함께 지내려고.”

“얼마나요? 많이 안 좋으세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고 묻는 모습에 하란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젠 다 나았어. 운이 좋았어.”

“휴우~ 다행이네요.”

“넌 어때? 오빠에게 들으니 재수술한다면서? 많이 안 좋아?”

“가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헤헤!”

“재수술할 곳은 어디야?

“···사실 아직 결정된 바가 없어요. 다리에 남아 있는 뼈를 제거하려는 건데 뼈를 찾을 수가 없대요.”

말이 뭔가 이상했다.

“뼈를 제거하려고 재수술을 하는 건데 뼈를 찾을 수 없다니?”

“그게 좀 복잡해요. 우연찮게 만난 사람이 다리에 뼈가 있어서 이상 증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했는데 뼈가 없다더라고요. 여러 병원을 다녀봤는데도 마찬가지고요.”

“그 사람에게 다시 물어보지 그랬어?”

“음··· 그것도 복잡해요. 전화번호를 알긴 했는데 코치님이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찾을 수가 없게 됐어요.”

말로 들어서 그런지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잠깐 머리를 굴린 후에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미국에 가볼래? 아는 의사분이 계신데 소개해 줄 수 있어.”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한데 그 사람이 관심 받으려 거짓말을 한 건지도 몰라서······. 이제 그냥 은퇴할까 싶기도 해요. 솔직히 지치네요.”

지친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단 슬픔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이 불가능한 병 앞에서 오는 무기력감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니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두삼 씨라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그녀의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는 능력을 가진 두삼이었다. 왠지 그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사정이 있어 치료는 하지 않으려는 것 같던데 소개해도 될까?’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한의원이 아닌 마사지 숍을 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세를 졌는데 꺼리는 일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씁쓸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이효원을 보자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언니, 무거운 얘긴 그만하고 술 마셔요. 오늘은 좀 취하고 싶어요.”

“으응 ···근데 내가 대단히 실력 있는 한의사를 알고 있는데 소개시켜 줄까?”

“한의사요? 제 주치의 중에도 계세요.”

“널 담당하는 분의 실력은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은 완전히 달라. ···사실 우리 엄마 말기 암이었어. 근데 그걸 고친 사람이야.”

“정말요?”

“응. 전국 유명하다는 병원, 한의원, 심지어 민간요법까지 안 해본 게 거의 없었어. 심지어 미국, 일본에 가서 좋다는 주사도 맞았고 한데 소용이 없더라. 그리고 우연히 만난 게 그 사람이었어.”

“우연이 겹쳤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너 환각지 알지? 팔다리가 없는데 간지러움을 느끼는 병 말이야.”

“들어봤어요. 치료 방법이 없다면서요.”

“아니, 치료 가능해. 내가 직접 치료하는 걸 본 것만 세 사람이야.”

말을 하다 보니 마치 대변인이 된 것 같다. 마치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잘났다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왠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가보자. 내가 얘기 잘해줄게. 시간만 조금 투자해 보자.”

“혹하긴 하는데··· 왠지 망설여져요.”

“왜?”

“그런 사람한테 불가능하다는 얘길 들으면 진짜 포기할 것 같거든요.”

너무 솔직한 말에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남자는 일단 시작하면 자신의 몸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스타일이야. 절대 포기하지 않을걸.”

“···그래요? 근데 언니 혹시 그 사람 젊어요?”

“그건 왜?”

“그 사람 얘기할 때 언니 눈 반짝반짝 거리는 거 알아요? 혹시··· 사귀어요?”

“누가 무슨 눈이 반짝반짝했다고··· 그리고 사귀긴 내가 누굴 사귀어? 나 비혼주의자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펄쩍 뛰는 게 더 수상한데요?”

“이게 자꾸 언니를 놀려.”

하란은 이효원의 옆구리를 마구 간질였다.

“꺄~하하하하! 어, 언니 잘못, 잘! 못! 했어요. 그만해요!”

“놀릴 거야, 말 거야?”

“안 놀려요! 절대 안 놀려요! 꺄하하하!”

“그리고 언니 따라갈 거야, 말 거야?”

“가, 갈게요. 큭큭큭! 가요. 간다고요. 근데 이러니까 더 이상한 거 아세요?”

“이게!”

다시 손을 뻗는 하란. 하지만 이번엔 이효원이 빨랐다. 얼른 피하며 멀리 떨어졌다.

“또 당하지는 않죠. 그나저나 남자에 관심이 없던 언니의 마음을 돌린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궁금해서라도 가봐야겠어요! 호호호!”

두 사람의 장난은 한동안 계속됐다.

12. 지우고픈 과거

경험이 중요한 직업이라 마냥 교육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기에 2주간의 압축된 교육을 한 후 바로 영업을 시작했다.

물론 영업을 시작했다고 문 앞에서 손님이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서성인다고 손님이 오는 건 아니니 이리로 와 차 마셔요.”

대문이 보이는 창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사장님은 걱정도 안 되나?”

2주간 교육을 하고, 밥을 같이 먹고, 웃고 떠들면서 많이 친해졌지만 호칭은 결국 사장님으로 정해졌다.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하루 종일 서로 몸을 주무르고 얼굴을 만지는데 너무 친해지면 안 되겠다는 의견에서였다.

당분간만이라도 호칭을 정돈하자는 주장에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한두 달은 없다고 해도 이상할 거 없어요.”

“개업발이라는 게 있잖아요. 업체를 불러 개업행사라도 했어야 하나?”

“주변에 다 가정집밖에 없는데 시끄럽게 해봐야 주변 인식만 나빠져요. 안 마시려면 말고요.”

“가, 가요. 어떻게 직원보다 사장이 더 여유야? 안 그래 미령아?”

“···그러게요. 전 심장이 터지려는데.”

“길게 봐서 그래요. 당장 몇 달 뒤의 매출만 바라보면 결국 문을 닫게 돼요.”

말 그대로였다. 두삼은 평생 할 일을 조급함에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하란에게 맡겨둔 돈이 있어 적어도 굶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이런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

든든한 뒷배를 가진 것 같다고 할까.

“가격이 비싼 건 아닐까나? 보통 행사를 할 때 50퍼센트 DC를 하잖아요.”

신혜경은 차를 마시면서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지 물었다.

계속 비슷한 얘기의 반복이지만 가게에 대해 고민을 해주는데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다른 마사지 숍과 다르지 않아요. 다른 곳에선 할인행사를 하니 상대적으로 비싸 보이는 거죠. 그리고 싸게 할 때 온 손님이 가격이 정상이 되면 올 것 같아요? 아마 비싸다고 생각할 겁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면 그냥 여느 마사지 숍과 비슷해져요. 대신 우리 가게는 개업 한 달간 피부마사지를 공짜로 해주잖아요.”

가격을 깎아주지 않는 대신에 1시간 안마를 받는 사람들을 위해 피부마사지를 제공하기로 했다.

한미령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그건 그렇지만······.”

“미령 씨 실력을 믿어요. 제가 가르쳐 준대로만 하면 결코 지불한 돈을 아까워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는 생각하는데··· 한데 가만히 앉아 있자니 불안해져서요.”

“정 불안하면 책이나 보고 있어요.”

“책을 본다고 글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사장님도 참. 미령이 넌 여기 있을래?”

“전 노트 볼래요. 손님이 오면 머리가 하얘질 것 같아요.”

“그래라.”

신혜경이 마사지실을 둘러보러 가자 한미령은 작은 노트를 꺼내 읽었다.

직접 손님을 마사지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겁이 나는 모양이다. 노트를 넘기는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차 많이 마셔요. 진정 효과가 있는 차니까.”

“···사장님도 떨리는 거예요?”

“약간요. 저라고 왜 안 떨리겠어요.”

“조금 전까진······.”

“저까지 떨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리고 실수하는 거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 제가 말했잖아요? 전문가인 척하는 것도 중요한 거라고.”

어느 장사나 그렇겠지만 엄청난 실력 차가 나지 않는 이상 마사지 숍 역시 실력 이외의 것에서 판가름 난다.

씁쓸하지만 현실이다.

“···그러고 싶은데 양심에 찔리네요.”

“현재 미령 씨 실력이면 웬만한 피부관리사 수준은 됩니다. 그런 관리사가 비싼 화장품을 무료로 잔뜩 발라 주는데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중간중간 주의할 부분들을 알려줄게요.”

“정말요?”

도와준다는 말에 안도감을 느낀 건지 한미령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딩동!

얘기를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통과했다는 알람이 들렸다.

“손님 왔나 봐요. 후우~ 파이팅!”

한미령은 긴 한숨을 내뿜으며 스스로를 북돋은 후 안내데스크로 갔다.

손님을 맞이하는 건 한미령이 주로 하고, 그녀가 일할 땐 신혜경이, 신혜경도 일할 땐 두삼이 맡기로 했다.

“어서 오세요~”

두 명의 여성이 현관으로 들어오자 한미령은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자 한 여성이 다가와 데스크 앞에 세워둔 가격표를 확인하더니 물었다.

“전단지 보고 왔는데 지금 마사지 가능한가요?”

“물론입니다. ···한데 마사지사가 한 명은 남자인데 불편하시면 조금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난 남자는 불편한데··· 넌 어때?”

“상관없어. 난 오히려 남자 마사지사가 훨씬 낫더라.”

“그럼 됐네. 건식마사지 2인으로 해주세요.”

“네. 안내해 드릴게요. 족욕하고 계시면 마사지사가 들어갈 겁니다.”

한미령은 처음치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족욕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탈의실에 가서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때 마실 차와 족욕통 준비를 마쳤다.

“차는 여성에게 좋은 당귀차예요. 꿀을 조금 넣어 달게 했어요. 더 마시고 싶으면 말씀해 주세요.”

“고마워요. 근데 물 색깔이 조금 다르네요?”

“한약을 달인 물이에요. 여름철 발 냄새는 물론 무좀에도 좋아요. 사실 저희 사장님이 한의사래요. 그래서 가게에서 사용하는 차부터 피부 관리에 필요한 한약을 직접 만들어요.”

“한의사가 왜 마사지사를?”

손님이 의문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모르겠어요.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해주더라고요.”

“그냥 한의학에 대해 조금 아는 거 아닌가요?”

살짝 통통한 손님도 의문을 표했다.

“아닐 거예요. 진맥을 어찌나 잘하시는지 손이나 발을 잡으면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불편한지 단번에 알아내더라고요.”

“재미있는 얘기네요. 한의사라고 해서 마사지를 못하는 건 아니겠죠?”

“받아보세요. 아마 매일 받고 싶어질 거예요. 아! 쓸데없는 얘길 했네요. 편히 쉬고 계세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벨 눌러주시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