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11. 개업 준비(3)
‘보육원 출신. 신혜경 씨가 이거 때문에 챙겼나 보네······.’
“1년 쯤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뒀네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어요?”
“···난생 처음으로 해보고 싶은 게 생겼거든요.”
“그게 피부관리사인가요?”
“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도 못 했어요. 그저 보육 시설을 떠나야 했기에 상고를 나와 취직을 했고요. 그러다 TV에서 피부관리사에 대해 방영하는 걸 우연히 봤는데 눈을 떼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두고 학원을 다녔던 거예요.”
“TV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지만 쉬운 길은 아니에요.”
앉아서 화장품을 바르고 얼굴마사지를 하는 게 다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숙련도도 숙련도지만 결과가 거의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업종이라 감성 노동의 강도가 제법 높다.
“학원을 다니면서 많은 얘기를 들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다녀보니 오히려 제 적성인 걸 확신했어요. 전 누군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게 좋아요.”
정말로 좋아하고 있음을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미래엔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지금의 열정만큼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요? 그런 생각이면 함께해 봐요.”
애초에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이미 그녀가 할 일까지 염두에 둔 상태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한미령은 벌떡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할 일도 아닌데요. 아! 그리고 신혜경 씨도, 한미령 씨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듣기가 쑥스럽네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두삼 씨? 사장님? 동생? 아! 그럼 미령인 오빠라 부르면 되겠네요.”
“···두삼 씨 정도면 될 것 같은데요.”
“그게 편하면 그렇게 해요. 자! 두삼 씨, 이제부터 뭘 하면 될까요?”
“개업은 급한 게 아니니 일단 실력부터 키우죠. 일단 미령 씨가 혜경 씨 얼굴마사지하는 것부터 볼까요?”
“저··· 잘 못해요.”
“어느 정도인지 보려는 거니 있는 그대로 하면 돼요. 아래층으로 갈까요?”
두 사람과 함께 아래층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두 개의 여성 룸 중에 끝 방으로 들어갔다.
“와! 이게 다 뭐예요?”
신혜경이 한쪽 벽에 진열된 화장품들을 보고 놀라 감탄을 터뜨렸다.
“돈도 안 주고 부려먹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사람은 알아서 구해줄 테니까 최대한 연습 많이 해요.”
“네! 선생··· 아니, 두삼 씨!”
“시작하죠. 혜경 씨는 세수하고 오셔서 누우세요. 전 끝날 때까지 조용히 여기에 있을게요.”
한미령에게 맡겨두고 침대 옆에 섰다. 물론 시선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피부관리사의 기본은 손님의 피부 타입을 알아내는 것이다. 건성, 약건성, 지성, 약지성, 계절과 날씨에 따라 변하고 피시술자의 신체 상태에 따라 변한다.
그렇게 파악한 피부 타입에 맞게 화장품을 선택하는 게 시작이다.
‘시작은 나쁘지 않네.’
한미령은 약건성인 신혜경을 위해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의 모공을 충분히 넓힌 후 약지성의 클렌징을 이용해 노폐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또 다시 클렌징을 바른 후 피부를 자극해 노폐물을 빼내는 작업을 했다.
“조심해요. 피부는 약해요. 특히나 관리를 자주 받는 이들의 피부는 약해서 자그마한 실수에도 트러블이 일어나요.”
진행될수록 실수가 나왔다. 확실히 어깨 너머로 배운 게 티가 난달까.
피부 관리를 하는 데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다.
“···다했어요. 어떤가요?”
“부족해요.”
“···역시 그렇죠?”
“실망하지 말아요. 부족한 건 스스로도 알았잖아요. 이제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면 돼요. 제가 아는 한 도울게요. 경험과 함께하다 보면 금방 늘 거예요.”
“···그리 말해주시니 고마워요. 근데 어떤 것부터 하면 될까요?”
“마사지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눈썹 안쪽 끝에 위치한 찬죽혈, 태양혈 같은 기본 경혈을 가르쳐 줄 거예요. 그리고 피부 타입을 구별하는 법, 얼굴색을 통한 건강 체크까지 기본적인 것을 다 배우고 나면 점차적으로 심화 영역으로 들어갈 거예요. 이곳을 그만두기 전까지 많은 것을 배우길 바라요.”
“열심히 할게요!”
“그럼 오늘은 피부 관리에 기본이 되는 10개의 혈을 가르쳐 줄게요.”
“전 계속 누워 있어야겠네요?”
신혜경이 물었다.
“왠지 기뻐하는 것 같네요?”
“호호! 솔직히 일하러 와서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어서요.”
“이제부터 좀 아플 텐데요?”
“악! 아픈 건 싫어요!”
“그만큼 건강이 안 좋다는 얘기니까 참으세요. 미령 씨 웃지 마요. 조금 뒤엔 미령 씨가 누워야 해요.”
“···저, 저 안 웃었는데요?”
“미령아, 너 언니가 아프다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으니? 나중에 감당할 수 있겠어?”
“안 웃었어요, 언니. ···두삼 씨가 장난 친 거예요.”
한미령은 흘낏 바라보는 신혜경을 향해 진지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거짓말! 두삼 씨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지, 진짜예요, 언니.”
“너 좀 이따 보자! 꼭 복수한다.”
두 여자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괜한 농담을 했다 싶다.
‘그저 딱딱한 교육 분위기를 풀고자 한 농담인데······.’
두삼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진실을 말해봐야 괜히 분란만 키울 것 같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
두삼이 개업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하란 역시 회사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외부 투자자 규모는 어느 정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최익현 실장, 이제는 이사가 된 최 이사가 하란에게 물었다.
“일단은 3/4분기까지 500억을 목표로 하죠.”
“우리 회사가 달성하고 있는 수익률을 보여주면 한 달 안에 1,000억도 가능할 겁니다.”
“회사의 투자는 받지 마세요. 개인의 한도는 10억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채워지는 금액만큼 제 돈은 뺄 겁니다.”
“같이 운영하는 거 아닙니까? 수익이 계속 발생하고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제 돈이 들어가 있으면 제 돈의 수익을 위해 투자자들의 돈을 희생한다는 오해를 하기 쉽죠. 테스트한 걸로 충분하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누가 오해를 한다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다음은 국민연금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회사에 투자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지분 투자요?”
“양쪽 다입니다. 지분의 15퍼센트를 3배의 가격으로 사고 싶어 합니다. 투자는 1차적으로 500억을 생각하고 있답니다.”
“국민연금이라······.”
단 몇 개월간 1,000억을 투자해 수배의 이익을 얻었다는 건 정보가 빠른 기관과 투자자들에게 이미 퍼져 있었다.
돈 냄새라면 기가 막히게 맡는 인간들이 왜 모를까. 다만 그런 사람들에게 투자를 받으면 골치 아프다. 다른 의도가 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고.
“지분 투자는 거부해요. 어차피 상장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간섭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건 아니시고요?”
“전 상관없어요. 최 이사님이 괴로울 것 같아서 그러는 거예요.”
“네?”
“아니에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죠. 김 실장님?”
“예. 지난번에 지시하신 회사 모델 후보들을 뽑아봤습니다. 태블릿을 보시죠. 총 여덟 명으로 ‘국민’이라는 단어가 붙는 이들입니다.”
국민배우, 국민축구선수, 국민엄마 등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 거의 없는 이들이었다.
한데 살펴보는 하란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그러다 마지막 장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효원 씨가 거절했다고요?”
“예, 대표님. 현재 재활 훈련 중인데 낫기 전에는 광고를 할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안타깝네요. 우리 회사 이미지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몇 번 더 접촉해 보겠습니다.”
김 실장은 하란의 말투에서 이효원에게 미련이 남아있음을 캐치했다. 그래서 얼른 대답했다.
직원들에게 친절하고 좋은 상사였지만 일과 관련된 것엔 고집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데 그의 생각보다 하란의 고집이 더 강한 모양이다.
“아니에요. 제가 직접 만나보죠. 그때도 안 된다면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죠.”
TV 방송이 아닌 그저 팸플릿과 브로슈어 정도에 얼굴이 들어가는 정도라 사실 광고 모델은 누굴 쓰든지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저 이효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더 컸다.
‘열심히 재활 훈련 중이겠지?’
그녀는 이효원과 꽤 친한 사이었다.
광고를 허락하면 자연스럽게 볼 생각이었는데 여의치 않게 되자 보고 싶어졌다.
“빠른 시간 안에 약속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번거롭게 뭘 그렇게 해요. 내가 할게요.”
“예?”
“통화할 수 있는 연락처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죠.”
아직까진 크지 않은 회사라 그녀가 결정할 것은 많았다.
***
오후 1시에 시작한 회의는 3시가 넘어서 끝났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이효원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회사에 연락을 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광고 건으로 연락한 란투자사의 대표인 우하란입니다.”
-귀사의 제안한 광고 건이라면··· 무척 욕심이 나긴 하지만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현재 광고 제안은 받지 않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남자 직원은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효원 양을 보고 말하고 싶은데요. 광고비가 부족해서라면 좀 더 지불할 생각이 있습니다.”
-말은 해보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사실 효원이가 요즘 재수술 문제로 정신이 없거든요.
“재수술이요?”
하란은 깜짝 놀랐다. 이효원이 재활 훈련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한데 재수술을 할 만큼 다리 부상이 악화된 모양이었다.
-아!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습니다.
“아니에요. 그런 사정을 모르고 제 욕심만 부렸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활이 된 후에 관심을 가져주십시오.
“물론이죠. 부디 건강하게 다시 아이스링크에서 보길 바란다고 헬렌이 말했다고 전해주세요.”
-네? 방금 헬렌이라고 말하셨습니까? 혹시 지금 전화하는 분 성함이 헬렌 우입니까?
“절 아시나요?”
-물론이죠. 매년 후원금을 보내주셨잖습니까. 그리고 동생이 가끔 헬렌 씨 얘길 했습니다.
하란과 이효원의 인연은 8년 전이었다.
월반을 거듭하며 어린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하란은 졸업할 때 유명 연구소의 스카우트 제안도 거절하고 집에서 자신의 연구에 몰두했었다.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노력했지만 완성품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생각할 때 우연찮게 들른 아이스링크.
그곳에서 당시 미국 나이로 15살인 이효원을 봤다.
처음엔 같은 동양인이라는 것에 눈이 간 것에 불과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잘 타서가 아니라 넘어지면 일어나고 다시, 또 다시 도전하는 모습에서였다. 그리고 선수석으로 들어가 스케이트를 벗고 쉬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퉁퉁 부은 발은 온통 피멍뿐이고, 넘어지면서 받은 충격 때문인지 의자에 앉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모습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노력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소녀의 모습을 머릿속에 새기고 집으로 돌아온 하란은 다시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연구 결과물을 세상에 내보일 수 있었다.
일하지 않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돈을 벌었다. 그때부터 하란은 이효원을 응원하며 후원했고 그렇게 얼굴을 익히고 친해졌다.
“아! 효원 씨 오빠 분이군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맞습니다. 헬렌 씨라면 효원이가 만나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말을 전할게요. 이 전화번호로 연락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전해주세요.”
사정이 몰랐을 때야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서라도 만나고 싶었지만 사정을 안 이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한데 전화를 끊고 1시간도 되지 않아 이효원에게서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