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33화 (32/122)

# 33

10. 상경 길에 만난 이들(4)

***

공연은 결국 보지 못했다. 그래서 느긋하게 장미축제나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전국에 있는 커플들이 다 왔는지는 온통 커플, 커플!

결국 장미를 배경으로 셀카를 몇 장 찍고 도망치듯이 바다로 향했다.

바다에 발을 담그고, 회를 먹고, 해안도로를 타고 올라가다가 관광지를 구경하며 이틀을 보낸 후 다시 서울 쪽으로 오토바이를 돌렸다.

“무사했구나. 다행이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스마트폰으로 버스 사고 뉴스를 살폈다. 뇌출혈로 환자가 수술 후 의식이 없다가 뇌손상 없이 깨어났다는 기사였다.

“그나저나 민규식 선생님이 이런 대형 병원의 원장일지는 몰랐네.”

사고 관련 기사엔 꼭 등장했다.

그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했고 자신보다 오히려 일반 시민들이 더 의인이라고 하곤 인터뷰를 거절했다. 하지만 병원 관계자들은 공짜 광고라고 생각했는지 연신 언론 플레이를 했다.

물론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나선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대단한 의인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스마트폰을 껐다.

슬슬 다시 출발해야 하는데 앉아 있는 평상이 너무 편했다.

드르륵! 가게 문이 열리며 가게 주인인 할머니가 도라지를 들고 나왔다. 할머닌 평상을 차지하고 있던 두삼을 흘낏 볼 뿐 별말이 없이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전 갈 거예요.”

“천천히 가도 돼.”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너무 오래 있으면 실례죠. 근데 혹시 이 근처에 볼 만한 곳 있나요?”

“이 시골에 뭐가 볼게 있겠어. 평창에 가면 올림픽인지 뭔지 한다고 건물들 지어놨던데 거길 가보든가.”

“아! 그럼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에 평창올림픽경기장을 찍고 출발했다.

“저녁엔 평창 소고기를 먹어야겠네. 근데 구경할 거리가 있을까 모르겠다.”

아직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도 있었고 여기저기 공사 중이라는 걸 나타내듯 자재가 쌓여 있는 모습만 보였다. 조금 더 들어가자 다행히 도로가 나 있고 완성된 건물도 보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냥 공사장이네.”

올림픽을 느끼기엔 너무 일찍 왔다. 간간히 공사 관계자로 보이는 이들이 보였지만 썰렁함을 없애기엔 부족했다.

“응? 이런 데서 운동하는 사람도 있네.”

리조트 투숙객인지 멀리서 운동복을 입고 두삼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구경할 것도 없고, 조금 신기해서 조깅하는 이를 쳐다봤다.

“응? 여자였네. 오른쪽 다리가 아픈 것 같은데······.”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직업병처럼 상대의 몸 상태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미세하게 다리를 쩔뚝거렸다. 다 낫지 않은 건지, 나았지만 다친 기억 때문인지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쏠려 있었다.

“선천적인 건 아닌 것 같고. 음··· 지금 상태로 조깅을 해봐야 균형만 망가질 텐데.”

막 옆으로 지나쳐 가는 여자를 보며 안타까움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들었을까?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가 흘낏 돌아본다. 꽤 매서운 눈빛이다.

“아! 죄송······.”

서둘러 사과를 했지만 그녀는 쌩 하니 지나갔다. 나름 사정이 있을 텐데 쓸데없는 소릴 한 것이다.

미안함에 머리를 긁적거린 후 떠나려 할 때였다.

잘 뛰던 여자가 마치 오른발이 없는 사람처럼 오른쪽으로 픽 꼬꾸라졌다.

“이봐요! 괜찮아요?”

얼른 다가가며 물었다. 여자가 손을 들어 가까이오지 말라고 표했기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여자는 두삼의 말을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무시하고 자신의 오른발을 때리며 중얼거렸다.

“···움직여! 움직여!”

뭔가 짠해지는 행동이었기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지켜봤다.

계속 때려도 발이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지 그녀는 낑낑거리며 왼발로 일어나려 했다. 그러다 다시 넘어졌지만 말이다.

“어! 혹시······?”

넘어질 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데 무척 익숙한 얼굴이다. 아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얼굴이랄까.

“이효원 선수 맞죠?”

피겨스케이트에서 두 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딴 피겨여왕 이효원이었다.

예쁘장한 얼굴과 세계가 인정하는 실력으로 호불호가 없이 국민에게 사랑받는 슈퍼스타.

무엇보다도 광고로 번 수익을 불우이웃과 후배들의 운동 환경 개선을 위해 척척 기부하면서 마음씨마저 슈퍼스타라 칭송받았다.

그런 그녀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사인을 해달라는 말이 나오려 했지만 이번엔 좀 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작년에 한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을 마음 아프게 만들었던 사고 소식이 떠오른 것이다.

올림픽이 끝나고 세 번째 금메달을 따기 위해 연습을 하던 이효원이 착지 실수로 발목뼈가 부서졌다는 기사였다.

비참한 꼴을 보였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녀의 얼굴엔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TV에 나오는 모습처럼 원래 마음씨가 착한지 입을 삐죽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꼴이 이래서 사인은 못 해드려요.”

“이, 이런 상황에서 사인을 해달라면 팬이 아니죠.”

“······.”

못 믿겠다는 표정에 마음이 찔려 움찔했다.

‘그나저나 무지 어색하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결국 생각해 낸 것이 모른 척 물러나 주는 것이었다.

“그럼, 전 이만···”

“그냥 가려고요?”

“네? 사인해 주려고요?”

“······.”

“···미안합니다.”

“그냥 팬이 아닌 걸로 하죠. 일어나려는 데 좀 도와주시겠어요?”

“팬인데······. 그러죠.”

일어나려는 이효원의 왼팔을 잡고 힘을 줬다.

“아악!”

조금 전에 넘어지면서 어깨가 다친 모양이다. 그녀는 다시 주저앉았다.

“이러다가 더 다치겠어요. 실례할게요.”

검지로 코끝을 긁적거리던 두삼은 먼저 사과를 한 후 그녀를 번쩍 안았다. 그리고 건물이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움찔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행히 소리를 지르진 않았다. 건물 외부에 앉을 자리는 없었다. 다행히 자재를 쌓아놓은 곳에 앉기 적당한 자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저기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요?”

“···그래요.”

자리에 앉힌 후에 얼른 뒤로 물러났다. 어색한지 그녀는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실례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도와주시려고 한 건데요······.”

“그건 그렇죠. 근데 훈련 중인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안 보이네요?”

코치도 없이 혼자 있다는 게 이상했다.

“훈련은 끝났어요. 그냥 기분이 우울해서 뛰려고 나왔어요. 금방 올 거예요.”

“전화기 없으면 제 거 쓰세요.”

이효원은 금방 온다고 말했지만 그녀가 없어졌음을 확인하고 찾으러 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감사해요.”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전화기를 받아 전화를 걸었다. 얼핏 듣기론 코치진은 이효원이 없어졌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통화를 마친 그녀는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불편하지 않다면 데리러 올 사람 올 때까지만 같이 있을게요.”

“고마워요.”

거리를 벌리고 그녀의 코치진이 오길 기다렸다. 하릴없이 서성거리는데 이효원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저인지 알았던 거예요?”

“뭐요? 아! 아까 지나갈 때 한 말이요?”

“네. 균형이 망가졌다는 얘기요.”

“···모르고 한 말입니다.”

“근데 달리는 거만 보고 어떻게 알았어요?”

“그건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직업이 뭔데요?”

“마사지사요. 얼굴 마사지, 경락, 스포츠, 타이 다 할 줄 알아요. 참! 물리치료사 자격증도 있어요.”

“대단하시네요. 근데, ···당신이 보기엔 다시 전 재기가능성이 없나요?”

“······.”

순간 말을 못 했다.

사실 아까 안고 옮길 때 그녀의 어깨와 다리 부근을 살펴봤었다.

어깨야 근육 타박상에 불과하니 약 먹고 얼음찜질 하면 끝이지만 그녀의 오른 발목은 상태가 아주 심했다.

외과적으로 보자면 뼈에 철심을 박아 잘 마무리한 수술이지만 한의학적으로 보자면 수술은 실패였다.

주요 맥이 상하고 끊어졌다. 게다가 잘게 부서진 뼈 중 일부가 제대로 제거되지 않아 그나마 흐르고 있는 기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발에 힘이 사라지는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하다가 피하는 쪽을 선택했다. 악역이 되기 싫었다. 그녀 또한 스쳐 지나가는 이에게 가슴 아픈 얘길 듣기 싫을 것이다.

“글쎄요. 발의 상태를 본 게 아니라서 말할 거리가 없네요.”

“보여 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

그녀는 손을 뻗어 운동화를 벗고 양말을 벗었다. 그리고 나타난 그녀의 발.

“······!”

정말이지 오늘 여러 번 말을 잊게 된다.

기를 이용해 볼 땐 발의 건강 상태가 보였지만 실제로 보게 되니 그녀가 그동안 해온 노력이 보였다.

여기저기 든 피멍들, 굳은 살, 상처들, 그리고 지렁이가 붙어 있는 듯한 수술 자국.

언젠가 봤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리나의 발만큼은 아니었지만 예쁘장한 얼굴에 비해 너무 엉망이었다.

“못생겼죠? 다들 제 발을 보면 당신··· 참, 그러고 보니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있었네요.”

“올해 서른셋인 한두삼입니다.”

“상당히 동안이네요. 아무튼 제 발을 보면 두삼 씨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요.”

“못생겼다고 생각한 건 아닌데. 그냥···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이 없구나 싶어서.”

“대답도 비슷하네요. 호호! 두삼 씨가 보기엔 이 발로 재기할 수 있을까요? 보고만 알 수 없으면 만져봐도 좋아요. 아! 운동해서 발이 좀 그러려나······.”

머뭇거리는데 차가 이쪽 방향으로 다가왔다. 코치진인 모양이다.

이효원 역시 봤는지 양말을 신으며 씁쓸하고 자조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하긴 물리치료사라고 해도 단숨에 알 순 없겠죠. 절 담당하는 물리치료사분은 지금도 고민하는데요. 하지만 설령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최소 3년은 더 노력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그저 낯선 두삼에게 흉한 꼴을 보인 것이 마음에 걸려 그녀 자신의 의지를 말한 건지도 모르겠다.

“효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무리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이럼 오히려 역효과야. 얼른 타. 병원에 가보자.”

차에서 내린 코치는 걱정과 화가 반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좀 뛰고 싶었어요. 두삼 오빠, 오늘 고마웠어요. 다시 스케이트장에 서게 되면 그땐 사인해 드릴게요.”

코치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타던 이효원은 TV에서 보여주던 웃음을 지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되자 좀 전에 한 고민이 쓸데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서서히 움직이는 차창으로 손을 흔드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재기하고 싶으면 일단 뼛조각을 완전히 제거해야 해요. 뼛조각이 지금과 같은 증상을 일으키게 할 가능성이 높아요.”

“병원에선 다 제거했다고······.”

“있어요! 분명히 있어요! 그러니 꼭!”

어느새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진 차를 향해 낮게 중얼거렸다.

“···제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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