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9. 마무리를 짓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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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이용하고 그 기를 통해 신체 내부를 볼 수 있게 되면서 우쭐하는 마음이 있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으로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증상을 파악할 수 있고 치료할 수 있는데 왜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희진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세맥까지 꼼꼼히 살피다 보니 착각임을 알 수 있었다.
택시 기사로 취업했다고 처음부터 전국의 골목 구석구석을 알 수 없듯이 인간의 몸에 흐르는 세맥 역시 비슷했다. 아마 평생에 걸쳐 노력해도 그 길과 기능을 다 알수 있을까 싶었다.
‘다만 숙련된 운전기사가 모든 길을 다 아는 건 아니지. 웬만큼 큰길만 알면 나머진 그때, 그때 이용하면 그뿐이지.’
두삼은 각종 색깔 볼펜으로 낙서처럼 그려진 그림을 와락 구겼다.
그릴 땐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렸는데 세맥이 더해지자 낙서가 되어버렸다.
“삼촌, 그 그림 중요한 거 아니었어요? ···왜요? 잘 안 돼요? 저 학교 못 가요?”
자고 있는 줄 알았던 희진이 걱정스레 물었다.
귀중하게 다루던 것을 찢어버렸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성급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 자책하며 얼른 말했다.
“아냐. 이젠 필요 없어져서 그런 거야.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거든.”
“···진짜요?”
“응. 학교 못 가게 되는 게 그리 걱정 돼?”
“네. 친구들이랑 다음 달 학교 행사 때 커버 댄스 추기로 했는데······.”
“걱정 마렴. 가게 될 테니까. 삼촌이 엄마랑 얘기하고 올 동안 잠깐 누워 있을래? 새로운 치료 방법에 대해 얘기해야 하거든.”
알겠다고 말하는 희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밖으로 나가 형수에게 갔다.
“방법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위험한 방법인가요?”
지금까지 특별한 설명이 없다가 말해서일까. 형수는 방법을 바꾸겠다는 말에 위험성이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그래서 실행하기 전에 말씀드리려는 거예요.”
“실패하면 어떤 증상이 일어날 수 있나요?”
“신체 일부분의 고통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릴 땐 거의 실패 없이 치료하던 할아버지께서 치료 전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서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커서 할아버지와 같은 의원이 되면 치료할 수 있으면 치료할 수 있다고 확실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크고 나니 최악의 경우를 항상 생각해야 하고 보호자에게 전달해야 함을 깨달았다. 뼈저린 교훈도 있었고 말이다.
이번에 희진에게 행할 시술은 척수신경 주변의 혈을 자극해서 몸의 한 부분만을 마취시키는 것이다.
전신마취까지 시킬 수 있으면서 한 부분만 마취시키는 것이 무에 어렵겠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척수신경을 이용한 마취의 경우, 목 아래 전부, 혹은 하반신을 마취시키는 시침은 배웠지만 부분, 부분 마취시키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부분 마취의 경우 척수신경이 아닌 상처 주변 혈의 흐름을 막는 것으로도 가능한데 굳이 위험을 내포한 척수신경을 통한 마취가 필요 없긴 했다.
두삼 역시 희진과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척수신경을 통한 부분 마취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척수신경은 운동, 감각, 자율신경을 모두 포함하는 신경이에요. 척추 뼈를 기준으로 위에서 7마디, 8개의 신경이 목 신경, 다음 12개 마디, 12개 신경이 가슴 신경이죠 다음은······.”
두삼은 자신의 몸을 교보재삼아 척수신경에 대해 설명했다.
“현재는 척수신경에서 뇌로 올라오는 감각 신호를 차단함으로써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있어요. 원인을 찾으려면 부분 마취를 통해 찾아야 합니다.”
“그럼 위험할 일이 없지 않나요?”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부분 마취의 경우 처음 시도하는 겁니다.”
“아! 그, 그럼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마취시키는 방법에 규칙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 없다고 할 수는 없죠.”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혹시라도 잘못되면··· 죄송해요. 두삼 씨 입장에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시간 좀 주세요. 희진이 아빠와 상의해 볼게요.”
“그러세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해도 결정은 백만수 부부의 몫이었다.
저녁에 가게를 끝내고 백만수가 왔다. 그는 오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곤 물었다.
“후우~ 그 방법밖에 없는 거겠지?”
“일단은요. 걱정이 되면 안 해도 돼요. CRPS의 경우 꾸준한 치료에 낮은 확률이긴 해도 제대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물론 악화되어 척수신경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지만요.”
“낮은 확률··· 그 확률에 기대기엔 지금까지 희진이가 겪는 고통이 너무 크다. 요즘 밝게 뛰노는 모습을 보면 차라리 척수 수술을 해야 싶을 정도다.”
아픔을 겪은 당사자도,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도 아닌데 그들이 느낄 고통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두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두삼아, 보호자가 아닌 형으로서 물어보자. 너라면 어떻게 할래?”
“대답은 아시잖아요.”
“···그래. 너라면 이미 모든 가능성을 검토했겠지. 이해해라. 차라리 내가 겪는 일이었다면 널 믿고 맡겼을 텐데.”
“이해해요.”
“자식······.”
백만수는 어깨에 팔을 두르며 습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탁한다. 부디··· 최선을 다해줘라.”
“알았어요, 형.”
하고픈 말이 많을 텐데 그는 최선을 다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어깨 위에 올린 팔이 유독 무겁게 느껴진다.
***
“삼촌 나 내일 행사에 갈 수 있죠?”
“···으, 응.”
“저번처럼 절뚝이게 하면 안 돼요? 춤 못 추면 희진이 슬퍼요.”
“···으, 응.”
“친구들과······.”
“희진아, 삼촌 집중하고 있잖아. 치료 끝나고 물어보려무나.”
“···네, 아빠.”
아직 더워지려면 멀었음에도 땀을 흘리며 열중하고 있는 두삼 대신에 백만수가 나서서 희진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새로운 방법으로 치료를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 가까이 흘렀다. 혈의 깊이를 잘못 눌러 다리를 하루쯤 못쓰게 만들었던 것 말고는 별 탈 없이 진행 중이다.
여러 번 반복한 끝에 마침내 일곱 목신경과 가슴 신경의 사이, 팔과 팔목을 담당하는 부분과 허리신경과 엉덩이 신경 사이, 발과 다리를 담당하는 부분에 이상이 있음을 알아냈다.
그때부터 두 부위와 척수 사이의 맥을 자신의 것과 비교하며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오늘 CRPS의 원인이라고 의심되는 맥을 찾을 수 있었다.
‘음. 이것 같긴 한데······.’
두 개의 세맥이 새끼줄처럼 꼬여 있는데 그 사이로 신경이 지나고 있었다. 고작 이것 때문에 그렇게 큰 고통을 겪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이것 말고는 다른 점이 없으니 일단 이것부터 바로 잡은 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푼다?’
혈관이라면 외과적인 시술을 시키면 되지만 기가 흐르는 맥의 경우 불가능했다.
딱히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몇 차례 기를 통과시켜 봤지만 꼬인 세맥은 꿈쩍도 안 했다.
결국 오늘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아싸! 삼촌 밖에 나가서 놀아도 되죠?”
“응. 아직까지 팔과 다리는 감각이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
“항상 조심해요. 헤헤! 수고하셨어요, 삼촌!”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후다닥 뛰어나가는 희진.
그동안 안에만 있었던 것에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지 날이 풀리자 밖에서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희진이 떠나고 열린 문을 닫는데 백만수가 말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갑자기 뭔 소리에요?”
“아니. 치료할 때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아서.”
“아~ 상태가 안 좋은 게 아니라 원인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 거였어요.”
백만수에게 세맥이 꼬여 있다고 그것이 원인일 수 있음을 말해줬다. 그에 백만수는 상기된 얼굴로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정말 원인을 찾은 거냐!”
“그 때문인지 확신하진 못해요.”
“다른 점이 그 부분밖에 없다며. 그럼 그게 원인이겠지.”
“글쎄요. 솔직히 대학 다닐 때 인간의 몸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데 오히려 더 모르겠어요.”
“환각지와 말기 암까지 고친 녀석이 겸손은. 분명 그게 원인이 맞을 거야.”
“형도 참, 운이 좋았다니까요.”
“알았다, 알았어. 기대하지 않을게. 하하하! 더 할 일 없음 나가자. 오늘 형이 시원한 생맥주 쏠게.”
원인을 찾은 것이 기쁨 모양이다.
“술 먹으면 뻗을 것 같은데요.”
기를 이용해 몸을 검색하는 건 꽤 고된 일이다.
피시술자의 몸에 기를 주입하면 맥을 따라 돌면서 조금씩 줄어든다. 거기에 장애물이 있을 때 뚫다 보면 뭉텅뭉텅 빠져나갔다.
세맥까지 샅샅이 살펴야 하는 희진의 경우는 기의 소모가 훨씬 심했다.
임독양맥이 통하면서 푹 자고나면 다시 기가 가득해져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배영옥을 치료할 때보다 더 말랐을 것이다.
“그래? 그럼 아예 사와서 여기서 먹을까? 취하면 바로 자면 되잖아.”
“그럼 그래요. 전 장작구이 해놓을게요.”
“오케이! 다녀올게.”
백만수가 나간 후 두삼은 냉장고로 가서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꺼냈다. 그리고 두툼하게 잘라 쿠킹호일에 쌌다.
고기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틈틈이 만들어놓은 장작을 야외 아궁이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때 슈퍼에 간 줄 알았던 백만수가 다가왔다.
“도와줄 일 없냐?”
“어? 아직 안 갔어요?”
“나 기사랑 정 간호사가 갔다 온다 해서 그러라고 했다. 데이트하러 갔다 온다는데 방해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아.”
“에? 두 사람 사귀어요?”
“몰랐냐?”
“전혀요. 만날 봐도 그런 기색이 없었는데.”
“난 딱 보니까 알겠더구만. 서울 가서 연애는 안 하고 공부만 했냐?”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놀랄 일이네요.”
“이 조용한 동네에서 하루 종일 같이 붙어 있다 보면 없던 감정도 생기게 마련이지. 왜? 네가 꾀려고 했냐? 정 간호사 자세히 보면 꽤 예쁘긴 하지.”
“···아니거든요.”
“그럼 하란 그 아가씨?”
“여자에 관심 없어요. 설령 있다고 해도 하란 씨는 언감생심이죠.”
하란은 연예인 같은 존재다.
보는 것만으로 설레지만 이성으로 마음을 가지기엔 딴 세상에 사는 이였다.
“니가 어때서?”
“굳이 비교하자면 비루하죠. 아니,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게 더 맞겠네요.”
“잘사는 줄 알았지만 그 정도냐?”
말을 하다 보니 돈을 기준으로 사람의 위아래를 나누는 모양새다. 스스로 생각해도 속물적인 것 같아 두삼은 씁쓸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앞으로 잘 살면 되지. 아! 참 전에 가게에 왔던 깡패 놈들 얘기 들었냐?”
“형이 그 얘기는 어떻게 알아요?”
“희진이가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왔다고 얘기해서 알았지. 걔들 때문에 장사를 그만둔 것도 알고.”
“모르게 한다고 했는데······.”
“깡패 놈들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모를 리가 있나. 아무튼 그놈들 어떻게 된지 아냐?”
“이미 지난 일인데 알 리가 없죠.”
“걔네들 알아보니까 진주에서 활동하는 애들이더라.”
“진주 애들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나이 들어 보여도 대부분 20대초 중반이니 애들이라는 표현이 이상할 것 없었다.
“내가 부산에 있을 때 폭주족으로··· 큼! 아무튼 내가 아는 애 중에 지금은 경찰이 된 녀석이 있는데 걔한테 한번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래서요?”
“은퇴한 깡패 한 명한테 박살이 나서 조직이 와해됐다더라. 다들 무릎이 나가서 앞으로 깡패 짓은 못 할 거라던데?”
“에? 진짜요?”
밥숟가락 들 힘만 남겨놓은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물론 안쓰럽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자업자득이다.
“진짜! 그러니 걱정 말고 다시 영업해도 돼.”
“지금은 여사님이랑 희진이한테 집중할래요.”
“왜? ···혹시 다른 곳에 가게 내려고? 어디에?”
“그건··· 희진이 낫고 나면 말해줄게요.”
희진이를 내버려 두고 떠난다고 생각할 수 있기에 백만수에겐 아직 서울에 간다는 말은 하진 않았다.
“···미안하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자꾸 욕심이 생겨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제 슬슬 불 붙여야 하니까. 형은 마당에 물 좀 뿌려주세요. 먼지가 너무 날리네요.”
“그래야겠다. 호스는 어디에 있냐?”
“저기 낡은 서랍장에 있어요.”
장작구이는 장작에 불을 피워놓고 쿠킹호일로 감싼 고기를 던져놓으면 된다. 그리고 익었다고 생각했을 때 쿠킹호일에 구멍을 뚫고 기름을 빼면 끝이다.
기름이 쫙 빠지면서 고기 양이 확연히 줄어든다는 단점은 있지만 겉은 바삭하고 가운데는 촉촉한 맛있는 요리가 된다.
고기를 얹어놓는데 백만수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이렇게 꼬여 있냐? 넣어놓을 때 차곡차곡 잘 넣어놔야지.”
그는 엉킨 호스를 낑낑대며 풀었다. 그리곤 어느 정도 풀고 나자 수도꼭지에 끼웠다.
“아직 들 풀린 것 같은데요.”
대충 풀었을 뿐 여전히 꼬인 부분은 많았다.
“이런 건 굳이 풀 필요 없어. 그냥 이렇게 하면 돼.”
백만수는 수도꼭지를 돌리자 ‘쉬익!’하는 소리가 들리며 물이 호스를 타고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꼬인 부분에 이르자 호스는 마치 뱀처럼 꿈틀대며 스스로 꼬인 것을 풀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머릿속에 번쩍 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건 바로···
푸슉! 퍼덕퍼덕!
꿈틀대던 호스가 두삼의 얼굴로 물을 뿜었다. 그리고 퍼덕거리며 연신 물을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