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9. 마무리를 짓다(2)
***
산골에서의 삶은 적적함의 연속이다.
적적함을 즐기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겠지만 도시의 삶에 익숙해진 두삼에게는 꽤나 인내심이 필요했다.
물론 배영옥과 백희진의 치료에 집중을 하고, 또래인 나문덕과 정 간호사와 술을 마시고, 취미 생활인 직캠을 보며 적적함을 어느 정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쇼핑.
마사지 용품과 의료 기기를 사면서 시작된 쇼핑은 여러 쇼핑몰을 전전했고 ‘중고세계’라는 유명 카페로 이어졌다.
마음에 든다고 닥치는 대로 사진 않았다.
유명 쇼핑몰을 검색하면서 가격 비교까지 한 후 재차, 삼차까지 고민을 하다가 샀다.
덕분에 부모님, 아니, 정확하게는 어머니께 선물을 여러 차례 보내기도 하고 지루하지 않게 겨울밤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쇼핑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재차, 삼차까지 고민한다고 해도 당장 필요하지 않는 물건들이 하나둘씩 쌓여갔다.
“택배요!”
“또 시켰어요? 이번엔 뭐예요?”
택배 아저씨의 외침에 희진이마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다.
“···꼭 필요한 것들이거든요.”
한마디 했지만 딱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자 택배 기사는 마루에 상자들을 놓고 서둘러 가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크게 외친 후 상자들을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뭐가 그리 많아?”
가을에 말려둔 감을 우물거리며 나문덕이 물었다. 두삼은 상자 중 하나를 던지며 말했다.
“자, 받아라.”
“어? 뭔데?”
“선물. 스마트폰인데 유심칩만 바꿔 끼우면 될 거야.”
“이걸 왜······?”
“만날 시키기만 했잖아.”
“그야 당연히 내가 할 일인데······.”
물론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부탁한 일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해줬다. 그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다.
“입으로만 고맙다고 하는 게 염치가 없어서 준비한 거니까 그냥 잘 써라. 이건 정 간호사 선물.”
“···전 딱히 도와드린 게 없는 것 같은데요?”
“생각해 보니까 전에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아서. 그리고 열심히 하는 거 알아요.”
정 간호사는 꽤 괜찮은 여자였다.
딱히 눈에 띄는 스타일은 아닌데 뒤에서 열심히 일하는 스타일이었다. 윤기를 잃었던 나무 마루가 할아버지가 계셨을 때처럼 바뀐 것도 그녀의 부지런함 덕분이었다.
“보는 눈이 없어서 일단 제일 잘나가는 걸로 샀는데 마음에 안 들면 바꿔.”
정 간호사에겐 적당한 가격의 백을 선물했다.
“이건 여사님 거.”
“내 것도 있어요?”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는데도 배영옥은 여전히 높임말을 고집했다. 나중에 놓겠다는데 그게 언제일지는 미지수였다.
“상체의 근육량을 늘려주는 데 도움을 주는 운동 기구예요.”
“하체는요?”
“지금처럼 걸어다니시는 걸로 충분해요.”
암이 사라지면서 몸이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이젠 오랜 병치레로 약해진 몸을 건강하게 만들 차례다.
다음은 희진.
자신의 것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잔뜩 기대한 채 보고 있었다.
“가장 큰 게 희진이 거야.”
“우와! 뭐예요?”
“올해부턴 학교 다녀야지. 그래서 가방이랑 학용품 준비했다.”
희진의 아토피는 다 나았는데 CRPS 치료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그래서 상상만으로 아파하고 있다는 추측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희진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골목길이라고 할 수 있는 세맥까지 살펴보고 있는데 인간의 몸을 왜 소우주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몸 전부를 살피려면 웬만큼 시간을 투자해서는 안 될 것 같았기에 올해부터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나이를 생각한다면 더 늦기 전에 보내는 것이 미래를 위해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피이~ 나도 스마트폰이 좋은데.”
“스마트폰은 없어도 스마트워치는 있어.”
“진짜요?”
스마트워치라는 말에 희진은 언제 실망했냐는 듯 귀여운 손으로 박스를 뜯으려고 했다.
스마트워치를 선물한 이유는 그녀의 심박수 모니터링, 운동량 측정 같은 상태를 파악해서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상자는 네 건가 본데, 뭐냐?”
나문덕이 새로운 스마트폰 살려보다가 두삼이 박스를 열자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빼며 물었다.
“내가 옛날부터 가지고 싶었던 거.”
“에? 그건······!”
“응. 달고나 세트야.”
보급형 달고나 세트가 아니라 전문가(?)용이다.
장사를 접는다면서 내놓은 것을 얼른 구매했다.
어린 시절 먹을 것이 많았음에도 유독 달고나를 좋아했었다. 특히 면에 나가면 바람을 타고 오는 설탕 타는 냄새에 절로 발길이 향했었다.
당시 달고나 장사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까지도 했는데 짧게나마 해볼 생각이다.
“와! 나도 이거 좋아하는데. 당장 만들어보자.”
“옛날 생각나네요. 만들면 하나 부탁해요.”
“저도요.”
“나도 삼촌!”
다들 좋아하니 장사꾼이 된 듯 마루로 나가 달고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판매자가 어떻게 만들면 잘되는지 꼼꼼하게 설명서를 적어줬기에 두세 번의 실패는 있었지만 꽤 그럴싸한 뽑기용 달고나를 만들 수 있었다.
다들 달콤함에 질려 못 먹겠다고 할 때까지 만들고 있는데 주변의 풍경을 흐릿하게 만드는 미녀, 하란이 본채를 향해 다가왔다.
“일은 잘했어요?”
하란은 일을 한다고 겨우내 서울에 있었다.
“덕분에 마음 편히 일단락 지었어요. 테스트 걸어놓고 바로 달려오는 길이에요.”
“여사님은 안에 계세요. 들어가 보세요.”
“엄마 뵙고 잠깐 봤으면 하는데요.”
“저요?”
“네. 드릴 말이 있어요.”
돈 걱정 없이 쇼핑하게 만들어주는 고객이 보자는데 무슨 말을 할까.
“그래요.”
“···근데 이거 먹어도 되나요?”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문득 달고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하하! 당연하죠. 예전에 좋아했었나 봐요?”
“좋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어요. 어릴 땐 친구들이 먹는 걸 구경만 했거든요.”
눈빛에 아련함보단 씁쓸함이 더 많은 것이 자신처럼 그리 좋은 추억만은 아닌 모양이다.
“다 먹어도 돼요.”
“하나면 돼요. 그럼 좀 이따 봐요.”
하란은 방에 들어갔다가 15분쯤 뒤에 나왔다. 두삼은 달고나 국자를 손에서 놓고 그녀와 옆방으로 갔다.
***
“차 한잔해요.”
“향이 좋네요. 무슨 차예요?”
“당귀에 매실을 조금 넣었죠. 괜찮으면 서울 올라갈 때 챙겨 드릴게요.”
여성에게 좋은 차라는 말은 뺐다.
“음! 좋네요. 사양하지 않을게요.”
“할 말 있음 하세요.”
차를 웬만큼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자고 한 이유를 물었다.
“다른 건 아니고 깡패들이 찾아왔다는 얘기 들었어요. 그래서 폐업 신고를 했다는 것도.”
“신경 쓰지 마세요.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기 위함이니까요.”
솔직히 배영옥이란 미래의 보험(?)이 없었다면 그렇게 순순히 그만뒀을까 싶다.
“여사님 치료는 걱정 마세요. 안정이 될 때까진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게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지금 상태라면 여름쯤엔 일상으로 돌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완전히요?”
“지속적인 검사와 치료를 하는 편이 좋죠. 아시다시피 암은 재발 위험이 높잖아요.”
“제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에요. 일단 한 번 걸리면 평생 조심해야 하죠. 그런 점에서 전 선생님이 어머니를 지속적으로 봐주셨으면 해요.”
“가능하다면 당연히 그럴 겁니다.”
“두삼 씨라면 그래줄 거라 생각해요. 한데 어머니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 이제 함께 지내고 싶어요.”
하란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너무 멀지 않은 곳에 계셨으면 해요. 솔직히 폐업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울로 옮기려는 건지 싶어 조금은 기뻤답니다. 미안해요··· 제 욕심만 차리는 것 같아서요.”
“그럴 수 있죠.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자신이라고 해도 같은 상황이면 하란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사실 도시로 가서 가게를 낼까 생각하는 중이기도 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래서······.”
“제가 서울로 옮겼으면 하는 건가요?”
“네. 그래주신다면 서울에 가게를 내는 데 도움을 드릴게요. 이거 보세요. 제가 간단히 준비한 건데 세 가지 안이 있어요.”
그녀는 가방에서 세 개의 서류철을 꺼냈다.
“첫 번째 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건물의 한 층을 인테리어했을 때의 모습이에요.”
“···너무 크군요.”
첫 번째 안은 100평이 넘는 곳으로 혼자서 감당할 규모가 아니었다.
“아직까진 누군가를 책임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럼 두 번째 안을 봐주세요. 사무실 근처에 있는 3층짜리 건물인데 3층과 옥상을 쓸 수 있어요.”
“···언젠가는 꼭 이런 가게를 가지고 싶네요. 하지만 지금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안은 첫 번째 것보다 규모면에선 작았지만 화려함은 훨씬 더했다. 그러나 돈이 썩어난다면 모를까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제 요청으로 오는 것이니 해드릴 수 있어요.”
“받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염치없는 짓은 하고 싶지 않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세 번째 안을 보세요. 20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단독주택이에요. 인테리어와 리모델링을 했을 때 기준인데 1층은 가게로 쓰고 2층은 숙소로 쓸 수 있어요”
마지막 안이 제일 무난하면서 마음에 들었다. 일단 혼자 할 수 있는 규모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지낼 수 있는 곳까지 해결된다는 점에서 흠잡을 데가 없다.
“좋네요. 보증금과 월세는 어느 정도 수준인가요?”
“리모델링해 놓으면 집주인이 계약 기간 끝나고 팔아버릴걸요. 그나마 양심적이라면 월세를 올려달라고 할 거고요. 그럴 바에 차라리 사는 게 나아요. 투자 가치도 충분하고요.”
“현재 가진 돈으로 어림도 없어요.”
하란이 준 돈과 환각지를 치료하면 번 돈이 가진 전부였다. 그 걸로는 어림도 없었다.
“저에게 받을 돈이 있잖아요. 미리 드릴게요. 집값과 세금, 리모델링 비용하면 10억쯤 될 거예요.”
“성공이라기엔 아직 이른데······.”
“현재 상태로만 지속되어도 어차피 줄 돈이잖아요. 그리고 만에 하나 상상하기도 싫지만 실패하면 집으로 돌려받을게요.”
“···생각 좀 해볼게요.”
“그러세요. 가급적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면 해요. 그리고 가급적 빨리 결정해 주세요. 사실 급전이 필요한 집주인에게 예약을 걸어둔 거거든요.”
“그러죠. 참! 서울에 올라가는 건 희진이가 낫고 난 다음에야 가능할 겁니다.”
“물론이죠.”
하란이 나간 후 고민을 했다.
사실 10억이 생기면 도시로 나가 적당한 가게를 차리고 2, 3억쯤으로 어머니 집을 사주려고 했었다.
아버지가 싫다고 시골의 낡을 집을 빌려서 힘겹게 사는 어머니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일단 전세로 구해 드릴까?’
부동산에 대해 문외한이 자신이 봐도 평생 살아도 될 정도로 괜찮은 위치에 있었다. 남산이 멀지 않았고 유동인구가 많은 약수역이 도보로 10분 거리였다.
큰길에서 조금 들어가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지금과 비할 바가 아니다.
서류를 봤을 때부터 살짝 기울었던 마음은 급격하게 하란의 말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