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23화 (22/122)

# 23

8. 호사다마(1)

가게의 경영적인 측면을 보완하면서 한 달에 두 번 휴일을 가지기로 했다.

돈에 여유가 생기자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로 12경락 중 족양명위경과 족태음비경, 수태양소장경을 뚫었다.

임맥과 독맥을 세차게 도는 기를 이용하여 뚫었는데 경락을 뚫어갈 때마다 조금씩 수월해지며 빨라지고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여사님도 애쓰셨어요. 참! 내일부터는 하루 한 끼는 죽이 아닌 일반식을 드셔도 됩니다. 거친 음식은 아직까지 무리겠지만 재첩국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 정말이요? 그때 끝까지 못 먹은 게 두고두고 아쉬웠는데.”

“앞으로 언제든 드실 수 있으니 무리해서 드시진 마시고요.”

“걱정 말아요. 오랜만에 쉬는 한 선생님 방해 안 되게 천천히 오래 씹어 먹을게요. 한데 데이트하러 가는 거예요? 기분이 좋아 보여요.”

“여사님도 참. 제가 애인이 어디 있다고요. 쉬세요.”

배영옥이 그녀의 방으로 가는 걸 확인하고 치료실에서 나온 두삼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갔다.

“흐흐흐흐!”

그는 오늘 도착한 택배 상자를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아 상자를 뜯었다.

상자에서 나온 것은 커다란 망원렌즈와 디지털 카메라였다.

“이걸 가지게 될 줄이야.”

직캠을 찍으러 다닐 때 얼마나 가지고 싶었던 제품이었는지 모른다.

최고급이라기엔 무리가 있지만 소형 자동차 한 대 값은 족히 나가는 물건으로 생활비로 쓰고 나면 얼마 남지 않는 월급으로는 그림의 떡이었다.

한데 그림의 떡이 현실에 나타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두삼은 매뉴얼을 보며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만일 저녁 식사 하라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밥을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두삼은 카메라를 잡으려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창을 띄운 그는 즐겨찾기에서 ‘직캠카페’에 마우스를 올려놓고 누를지 말지 고민했다.

“8개월 만인가?”

악양에 내려올 때 모든 것을 버리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접속을 한 적이 없었다.

접속이 없자 카페지기가 몇 번 이유를 묻는 메시지를 보냈었다. 그러나 두삼은 응답을 하지 않았고 그에 등급이 하락된다는 메시지를 끝으로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지, 뭐.”

직캠카페를 클릭하자 카페의 첫 화면이 떴고 로그인을 했다.

다행히 정리는 되지 않았는지 가장 왼쪽에 예전에 그가 쓰던 아바타와 ‘쓰리고’라는 닉네임이 보였다. 그리고 아이디 옆에 카페의 계급 체계인 소위 계급이 붙어 있었다.

“원더보이 님이 그래도 목숨 줄은 남겨두셨네.”

원더보이는 카페지기로 두삼에게 직캠의 세계에 대해 가르쳐 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카페 내 게시판 중 아이돌 가수들의 행사 일정이 정리된 ‘촬영 게시판’에 들어갈 수 있는 최소 권한이 소위였다.

원래 그의 계급은 소령으로 그때에 비하면 못 들어가는 곳이 있어 불편한 점이 있었지만 새로 시작하자고 마음을 먹고 있어서인지 소위라는 계급이 만족스러웠다.

“새로운 사람들이 꽤 많아졌네.”

게시판을 훑어봤다. 글쓴이들의 닉네임과 계급을 보니 공백기가 길긴 길었나 보다.

띠링!

한참 보고 있는데 카페 채팅 프로그램이 창의 한쪽 구석에서 올라왔다.

[원더보이: 와! 이게 누구야! 진짜 쓰리고?]

두삼은 채팅창을 열고 글을 쳤다.

[쓰리고: 오랜만입니다. 원 대장님.]

원더보이의 계급은 대장이었다. 그리고 나이는 두삼보다 열 살이 많았다.

[원더보이: 그래 오랜만이다. 그동안 뭐 한다고 접속도 안 했냐?]

[쓰리고: 일이 생겨서 서울 생활 접고 시골로 내려왔어요. ㅈㅅㅈㅅ]

[원더보이: 얘기라도 하지. 서운하게. 근데 눈팅이냐? 복귀냐?]

[쓰리고: 이곳에서 살다 보니 여유가 생겨서요. 덜컥 바라던 카메라를 사고 보니 여기가 생각나더라고요.]

[원더보이: 올! 어떤 카메라냐?]

카메라 얘기가 나오자마자 원더보이는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서로 공통적인 관심사에 대해 얘기를 나누자 8개월의 공백은 금세 좁혀지는 듯했다.

두 사람은 채팅으로 한참 수다를 떨었다.

[원더보이: 내일 촬영이 있어서 이제 슬슬 장비 점검 하고 자야겠다.]

[쓰리고: 부럽네요. 근데 어디서 촬영이 있기에 벌써 자요.]

[원더보이: 남원. 지리산눈꽃축제에 은비랑 다솔이가 동시 출격이거든.]

은비는 원더보이가 좋아하는 걸그룹의 멤버였고 다솔은 댄스그룹의 일원으로 직캠 매니아들의 여신이라 불리는 댄서였다.

[쓰리고: 어? 남원이면 여기랑 가까운데.]

[원더보이: 어딘데?]

[쓰리고: 하동군 악양면이요.]

[원더보이: 바로 앞이네. 시간되면 새 카메라 들고 와라.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

두삼은 잠깐 생각하다가 타자를 쳤다.

[쓰리고: 그래요. 행사 시작 두 시간 전에 봬요.]

카메라를 사자마자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촬영 게시판에 들어가 행사 스케줄을 확인한 후 컴퓨터를 껐다.

똑똑!

“한 선생님, 자고 있나요?”

카메라의 기능을 살펴보고 있는데 하란이 찾아왔다.

“아뇨. 들어오세요.”

배영옥의 상태가 좋아지자 하란은 자신의 일을 하는지 밖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녀는 들어오더니 카메라를 보고 물었다.

“사진 찍는 취미가 있으신가 봐요?”

“아··· 네. 비슷합니다.”

여가수나 댄서의 직캠을 찍는다면 색안경부터 끼고 보니 취미라고 해도 당당하게 말하는 건 무리였다.

“좋은 취미네요. 참! 엄마께 내일부터 일반식을 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면서요.”

“네. 위에 있던 종양이 충분히 작아졌거든요. 지금은 한 끼에 불과하지만 조만간 약에 의존하지 않고 곡기만으로 생활이 가능하실 겁니다.”

“말만 들어도 기쁘네요. 근데 혹시 내일 시간 있으세요? 가능하다면 점심식사라도 같이하면서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아! 선약이 있는데······.”

좋은 일은 왜 항상 같이 일어나서 고민을 하게 만드는지.

얼핏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하란을 보니 생각 없이 약속이 있다고 튀어나온 입이 살짝 원망스럽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럼 지금 차 한잔할까요?”

“제가 준비하죠. 커피? 아님 녹차?”

“녹차로 주세요.”

두삼은 부엌으로 가 녹차를 타왔다.

“요즘 일이 많은가 봅니다.”

일주일 만에 돌아온 그녀였다.

“엄마가 나을 때까지 가급적 그냥 있으려고 했는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요. 그래서 조용한 곳에 가서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프로그래머였습니까?”

“···네.”

“전 컴퓨터는 문외한이라서 컴퓨터를 잘하는 사람이 부럽더라고요.”

“후후! 저도 마사지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걸요. 전 오히려 한 선생님 실력이 더 부러워요.”

“하하! 말이 그렇게 됩니까? 아무튼 바쁘면 어머님은 걱정 말고 편하게 일 보세요. 치료 경과는 매일이라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지급한 비용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 서비스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한 선생님이 어련히 잘 치료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다만 저랑 떨어져 지내서 이번 일이 생긴 것 같아서 겁이 나네요. 원래 식사를 같이하면서 말씀하려 했던 건데 혹시 선생님은 서울에서 가게를 해볼 생각은 없으세요?”

뜻밖의 질문이라 두삼은 즉각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라고 좋아서 시골로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악양에서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한다 해도 결국 도피였다.

장갑을 얻으면서 약점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 어마어마한 실력을 얻게 된 후 어린 시절 꿈꾸었던 할아버지처럼 되겠다는 생각이 다시 꿈틀거렸고, 도시로 나가서 가게를 열어볼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무엇보다도 저녁 6시만 넘어도 TV보는 것을 제외하곤 할 것이 없는 시골에서 살기엔 그는 아직 젊었다.

그런데 직접 물어오니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두삼이 말이 없자 하란이 말을 더했다.

“생각이 있다면 제가 가게를 여는 걸 도와 드릴 수 있어요. 투자라고 생각해도 좋고 성공 사례금을 미리 드린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대신 가급적 서울 집과 가까운 곳에 가게를 열었으면 해요.”

당장에라도 ‘예스’라고 대답하고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장고를 한 두삼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예스가 아니었다.

“아직은 부족합니다.”

사기템인 장갑을 얻었지만 세상은 실력이 다가 아님을 호되게 당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어설픈 거짓말에 어리바리하게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에서 서울에 가봐야 결과는 명약관화였다.

‘실력을 키워야 해. 그보다 중요한 건 물론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는 마음이겠지만.’

인간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건 좋지만 손님은 손님일 뿐이고, 환자는 환자일 뿐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됐다.

한 명의 환자를 구하려다 경력이 망가지고 스스로가 추락하는 건 이젠 절대 사양이었다.

“한 선생님이 부족하다면 우리나라 의원들 중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리 말해주니 감사하긴 한데······. 글쎄요, 전 아직 여러모로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걸 채울 때까진 여기에 머물 생각이고요.”

“···그런가요?”

“어머님을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치료를 하기엔 여기만큼 좋은 곳도 없습니다. 일부러 좋은 공기와 자연 환경이 깨끗한 곳을 찾아다니기도 하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선생님 말대로 하는 걸로 해요. 그리고 완치가 된다고 해도 어머니가 정기적으로 다녔으면 해요. 그러니 언제가 되더라도 제 제안은 유효하다는 건 기억해 주세요.”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제안 고맙습니다.”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제안인데요, 뭘.”

제안을 거절해서 분위기가 어색할 줄 알았는데 하란이 담담하게 받아줘 좋게 마무리가 됐다.

“근데 혹시··· 아, 아니에요. 시간이 늦었네요. 편히 쉬세요.”

차를 다 마신 하란은 뭔가를 말하려다 손을 저으며 일어났다.

두삼은 왠지 그녀의 눈빛과 행동에서 하려던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가려는 그녀를 불렀다.

“하란 씨.”

“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사지실로 올래요? 일주일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으면 몸이 많이 찌뿌듯할 겁니다. 방금 한 제안의 보답이라기엔 뭐하지만 시원하게 마사지 해드릴게요.”

“아니에요! 선생님도 쉬어야 하는데 그럼 도리가 아니죠. 다음에 받을게요.”

“괜찮습니다. 내일 휴일이잖아요.”

“괜찮은데······.”

두삼의 예상이 맞았는지 괜찮다고 말하는 하란의 말엔 싫다는 느낌이 없었다.

“지난번처럼 이상한 효과는 없으니까 기대하진 마세요. 대신 발마사지부터 두피마사지까지 풀로 해드리겠습니다.”

“누, 누가 기대를 했다고······.”

귓불이 빨개지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더 놀리면 재미가 있을 것 같았지만 받으러 오지 않을 것 같아 멈췄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얼른 다녀오세요. 그럼 마사지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두삼은 마사지 받는 걸 기정사실화 시키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마사지실로 향했다.

그런 그를 보며 하란은 잠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곧 옷을 갈아입으러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