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14화 (14/122)

# 14

5. 하나씩 알아가는 것들(1)

습관이 무섭다고 간만에 늦잠을 자려고 했지만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떠졌다.

밤에 들이닥친 손님들을 위해 보일러를 돌려서 따끈해진 방바닥의 기운을 느끼다 결국 일어났다.

“아~ 하함··· 헙!”

평소처럼 속옷 바람으로 방을 나와 차갑지만 상쾌한 아침 공기를 양껏 마시려는 듯 하품을 하던 두삼은 마당의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있음을 느끼고 입을 닫았다.

시선의 주인은 우하란이었다.

그녀는 손끝이 하늘로 가게 위로 뻗어 붙이고 한쪽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요가 자세를 취한 채 두삼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삼의 얼굴이 아닌 하체를 보고 있었다.

“···젊음(?)을 탓하고 싶진 않지만 앞으로 같이 지내게 되었으니 서로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두삼은 잠깐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의아했다. 한데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하체에 있다는 걸 깨닫곤 그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벅벅벅!

그의 오른손은 의지완 상관없이 사타구니를 시원하게 긁고 있었고 사각 팬티는 무언가(?)로 인해 텐트를 치고 있었다.

“미, 미안합니다.”

두삼은 얼른 손을 빼고 방으로 들어갔다.

“저 여잔 잠도 없나! 그리고 빤히 볼 건 뭐람.”

가볍게 투덜대며 얼른 옷을 입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 이번엔 가슴이 유난히 나와 보이는 요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자기도 만만치 않고만······.’

헐렁한 체육복을 입어도 섹시하게 보이는 미녀가 요가를 하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수돗가로 향한 그는 평소 2, 3분이면 끝나는 양치질을 10분 가까이 하며 느릿느릿 굴었다.

우하란이 요가를 끝내고 물을 마시러 수돗가로 오지 않았다면 이가 사라질 때까지 양치질을 했을지 몰랐다.

“이 물 마셔도 돼요?”

“네. 수원이 산에서 내려오는 지하수라 웬만한 생수보다 나을 겁니다.”

두삼의 말에 우하란은 아무런 의심 없이 수도꼭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마셨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정말 그러네요. 근데 지금부터 엄마를 볼 건가요? 그럴 것 같으면 준비시킬게요.”

“아뇨. 산에 갈 거예요. 그리고 직접 일어날 때까지 절대 깨우지 마세요.”

어제 자기 전에 목 밑으론 모두 마취를 시켜뒀다.

“아침과 약은요?”

“잠이 오히려 더 좋은 밥과 약이 될 겁니다. 그리고 포도당과 식염수를 빼곤 앞으로 밥과 약은 제가 알아서할 테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리 알려주세요.”

“그럴게요.”

우하란은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 의문 없이 받아들였다.

사사건건 나서면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기우였나 보다.

가방을 챙겨 우하란을 뒤로하고 산으로 향했다.

겨울이 오면 매일처럼 오르지 못할게 뻔했기에 등산이 가능한 동안 다닐 생각이었다. 그리고 올라간 김에 그동안 보고도 내버려 뒀던 약초도 캐올 작정이었다.

뚱뚱해지지 않으려면 살이 찌지 않을 간식을 준비를 해야 했다.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두 시간 정도의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자 마당과 마루에 많은 이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쯧! 간호사 한 명만 빼곤 가라고 해야겠군.’

혹시 위급할 때를 대비해 차만 남겨두면 두삼이 운전을 하면 됐다.

‘아! 근데 아침을 어떻게 하지? 미처 생각을 못 했네.’

한두 명이라면 사랑채로 내려가서 먹어도 되겠지만 지금 인원은 너무 많았다.

고민을 하는데 노혜자가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내들과 함께 두 개의 상을 들고 오는 게 보였다.

“어? 아주머니가 왜 아침을 준비하셨어요?”

엄한 사람을 고생시키는 것이라면 우하란에게 한마디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노혜자는 힘든 기색 없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르바이트야.”

“네?”

“예쁜 아가씨가 돈을 줄 테니 식사를 준비해 줄 수 있냐고 하더라. 그래서 냉큼 하기로 했다. 추수가 끝나서 할 일도 없는데 잘됐지 뭐냐?”

“한가할 때 쉬시지······.”

“놀면 뭐 하냐. 그리고 돈을 많이 준다더라. 농사보다 훨씬 나아.”

“매끼 이렇게 많은 식사를 어떻게 준비하려고요?”

“네 할아버지 계실 때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 그리고 점심부터는 네 것까지 4인분이면 된대. 세 명만 남고 다 올려 보낼 거라고. 자자, 도와줄 생각 없다면 비키렴. 국 식겠다.”

“아! 제가 할게요.”

두삼은 상을 들어 대청마루에 올렸다. 상이 도착하자 지시를 내리기 보단 자연스럽게 수저를 놓는 우하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온전히 치료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해서 말뿐인 줄 알았더니 제법이네.’

두삼은 우하란을 다시 보게 됐다.

아침을 먹고 떠날 사람이 떠나자 집은 다시 평소처럼 조용해졌다.

예약된 손님이 오기 전에 할아버지의 지하 서고에서 암과 관련된 임상 기록을 훑어보았다.

임상 기록이라고 해서 대단한 치료 방법이 적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언제 침과 뜸을 놓았고 어떤 조처를 취했냐는 정도. 만일 다른 한의사가 자료를 보게 된다면 돌팔이가 마구잡이로 침과 뜸을 놓다가 재수 좋게 암을 치료했다고 말할지도 몰랐다.

‘장갑을 얻기 전이었다면 나 역시 그저 임상 기록이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할아버지가 어떤 의도로 기로 기록했는지 알 것 같아.’

물론 장갑을 끼고 있다고 해서 특별한 자료로 보이거나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장갑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한언수는 담배, 스트레스, 발암물질 등 수많은 원인으로 인해 암이 몸에 생길 때 경락과 경혈이 심하게 막히거나 망가진 곳에 주로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 막힌 경락을 뚫고 망가진 혈을 되살림으로써 몸이 스스로 치유되게 만드는 치료법을 사용했다.

치료법은 단순했다. 그러나 방식만 단순할 뿐 절대 쉽지 않은 치료법이었다.

막힌 경락은 물리적인 기구를 통해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기를 이용해 뚫어야 했는데 가능한 사람이 드물뿐더러 시간 또한 오래 걸렸다.

“한 선생님! 한 선생님!”

임상 기록을 보며 어떻게 치료할지 방향을 정했을 때쯤 우하란이 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배영옥이 깬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깼어요.”

“가보죠. 그리고 호칭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상해서 다르게 불러달라고 하려 했다. 근데 생각해 보니 딱히 부를 만한 호칭이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빠지만.’

잠깐 엉뚱한 생각을 하며 배영옥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배영옥은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불편할 텐데도 밝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편히 쉬셨습니까?”

“네, 선생님 덕분에요. 고통 없이 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며칠 더 쉬게 해드린 후에 본격적으로 살펴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하루라도 일찍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고통을 일으키는 부위를 정확하게 알아야 부분 마취를 할 수 있으니 오늘은 진통제를 먹지 않고 버티셔야 할 겁니다.”

“···참아 볼게요.”

배영옥은 고통을 참아야 한다는 말에 그러겠노라 대답은 했다. 그러나 겪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마저 숨기진 못했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섬뜩한 고통엔 참을성 따윈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삼은 그런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주고자 오늘 고통을 참음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에 대해서 말해줬다.

“시술만 잘되면 내일부턴 산책도 하고 가까운 곳은 구경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말이네요.”

“그럼 예약 손님 오면 끝내고 시작할 테니 그동안 쉬고 계세요. 안 오면 20분 뒤에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예약 손님은 목이 갑자기 뻣뻣해져 마사지를 받고 간 손님으로 예약 시간보다 10분이 지났지만 오지 않고 있었다.

서너 번은 받아야 뭉쳐져 있던 근육과 약간의 염증까지 다 나을 수 있는데 한 번 마사지를 받고 아무 이상 없이 움직이니 굳이 돈을 들이면서 올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예약한 손님이 안 오면 맥 빠지겠어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우하란이 15분이 지났음을 알리는 듯 물었다.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괜찮아요. 예약 손님 중 절반을 오지 않는다고 봐도 돼요. 개인적으로는 조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죠.”

“뭐가 안타까워요?”

“손님은 다 나았다고 생각해서 혹은 돈이 아까워서, 시간이 없어서 오지 않은 것이겠지만 제가 볼 때 꼭 조처가 필요한 사람이었거든요.”

“또 필요할 때 오지 않겠어요?”

“그땐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더 많은 비용과 더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겁니다.”

“···약속을 안 지켰다고 악담하시는 건가요?”

“하하하! 솔직히 그런 면이 아예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네요.”

두삼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내색만 안 할 뿐이지 약속했던 손님이 오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은 을이지만 나중에 갑이 될 때 두고 보자는 생각도 간혹 하곤 했다.

‘집중하자!’

오지 않은 예약 손님에 대한 생각도, 말기 암 환자인 배영옥을 살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잠시 한쪽으로 치워놓고 머릿속에 인체를 하나 그렸다.

두삼은 그려진 인체에 족소음신경, 수태음폐경, 족소양담경, 수양명대장경, 등 12경맥과 임맥, 독맥, 충맥, 대맥, 양유맥 등 기경팔맥을 그렸다.

인체는 이미 선과 점으로 복잡했지만 이번엔 붉은 선과 점으로 할아버지의 책에서 본 경락과 경혈을 그려 넣었다.

하얗던 인체가 새까맣게 될 때까지 경락, 경혈도를 만든 두삼은 배영옥의 왼쪽 맥문을 잡고 기를 흘러 넣었다. 그리고 기를 어깨로 올려 보냈다.

‘대부분의 대맥은 막혀 있네. 세맥으로 가야겠다.’

대로는 거의 다 막혀 있었다. 겨우 다닐 정도의 작은 길을 통해 어깨까지 겨우 갈 수 있었다.

팔뿐만 아니라 다리, 몸통, 심지어 목과 머리까지 뚫린 곳보다 막힌 곳이 더 많았다.

두삼은 기를 계속해서 보내며 경락과 경혈을 상태를 살폈고 머릿속 인체에 뚫린 곳은 파란색으로, 막힌 곳은 노란색으로 색칠해 나갔다.

‘아!’

그리고 어느 정도 완성했을 때 몸의 어느 부분에 암이 있는지 인체도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막힌 곳을 나타내는 노란색들이 모여 덩어리처럼 보이는 곳이 암이 아닐까 싶었다.

‘만일 내 생각대로가 암이 맞다면 오장육부에 모두 전이가 되었다는 건데······. 어차피 알고 있었잖아. 해보는 데까진 해본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태가 더 좋지 않아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이런 상태라면 죽어도 덜 미안할 것 같은 생각에 마음에 오히려 담담해졌다.

두삼은 잠시 손을 뗀 후 준비해 둔 공책에 머릿속 인체도를 간략하게 그렸다.

“이제 마취를 풀겠습니다.”

배영옥의 입에 마우스피스를 물리고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켰다. 그리고 마취시켜 뒀던 혈을 풀었다.

“크윽!”

풀자마자 배영옥은 고통이 밀려오는지 온몸이 경직되며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두삼은 손을 빠르게 놀려 상반신을 마취시켰다.

“···하악, 학! 고, 고통이 사라졌어요.”

“상반신에 통증이 있다는 겁니다. 다음은 오장육부 중 하나씩 제외시킬 겁니다.”

하나씩 소거해 가며 통증의 원인을 찾는 소거법으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은 있지만 성공했을 시 환자가 웬만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어 두삼은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다.

두삼이 끙끙대며 정확한 지점을 찾는 동안 그런 두삼을 우하란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 도대체 뭐지? 마사지사라서 그런 건가? 지금까지 의원들과 전혀 다르잖아. 근데 저 그림······. 엄마의 병원 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암이 전이된 곳을 정확히 아는 거지?’

이영호에게 환각지를 고쳤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배영옥을 맡기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근데 그가 하는 양을 보니 그 어느 때보다 희망을 갖게 된다.

‘엄마를 꼭 살려줘요. 그럼 약속했던 것의 열 배라도 줄 테니까요.’

우하란은 한손으론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채 다른 한손으론 땀을 흘리는지도 모른 채 열중하고 있는 두삼의 땀을 닦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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