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12화 (12/122)

# 12

4. 만남(2)

***

“침을 놓겠습니다.”

알코올 솜으로 어깨 주변을 슥 닦은 김장혁은 침을 들고 빠르게 여기저기에 꽂았다.

누가 보더라도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실제로 본다면 그의 빠르고 정확한 침술에 엄지를 척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이제 정확하게 혈의 위치에 꽂은 게 50퍼센트 쯤 되는군. 깊이는 여전히 힘들긴 하지만.’

침은 어느 혈에 어느 정도 깊이로 꽂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법이었다. 또한 수십 년 동안 침을 꽂아도 정확하게 꽂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 번에 족히 수십 개의 침을 꽂아야 하는데 천천히 꽂고 있으면 좋아할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정성껏 꽂으면 초보자가 아니냐는 눈빛을 보내는 게 현실이었다.

어깨에 꽂은 침 중 실제 혈에 꽂은 건 절반도 되지 않았고 웬만큼 잘못 꽂아도 전혀 상관없는 혈들이었다.

“다 됐습니다. 20분쯤 후에 뽑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뭉쳐져 있던 근육이라 단번에 치료가 되진 않을 겁니다. 물리치료실에 말해둘 테니 안마를 받으시고 시간이 없더라도 자주 들러주세요.”

오히려 실력보단 립 서비스나 다른 서비스가 소문에 더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쉬십시오.”

김장혁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옮기며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다음 손님은요?”

“안 계세요.”

“어? 벌써 퇴근 시간인가요?”

“아뇨. 4시예요.”

“···그래요? 하긴 안 되는 날도 있죠. 진료실에 가 있을 테니 침 뽑는 손님들은 그쪽으로 보내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김광도가 처음 한의원을 개원할 때 손해를 봐도 괜찮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꽤 흑자를 보고 있었다.

문을 열 때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손님이 끊이질 않을 정도로 바빴고, 진료비는 저렴했지만 값싼 한약재를 비싸게 팔아 상당한 이익을 남긴 것이다.

거기에 실력도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건 덤이었다.

진료실로 간 김장혁은 컴퓨터에 앉아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게 실험해 봤던 것들을 살펴보았다.

같은 부위가 아파 온 환자들이 많다 보니 조금씩 침을 꽂는 부위를 달리했고 지금은 부위에 따른 정석적인 패턴을 몇 가지 알아냈다.

‘1년만 더 고생하면 어디 가서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는 지루한 시골 생활을 공부하는 것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침을 뺀 손님들이 들를 때마다 상담을 해주고 나머지 시간은 실험 파일을 읽었다.

“선생님, 지금 손님이 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간호사는 마치 퇴근 시간이니 받지 말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몇 달간 고생해서 만들어둔 이미지를 간호사의 불평 때문에 망가뜨릴 순 없었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근데 그게··· 진료실로 바로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위급한 손님인가요? 당장 나가죠.”

응급실이 일 년 365일 24시간 열려 있는 대도시에선 한의원을 하면서 위급한 손님을 맞이할 일은 거의 없었다. 좋은 공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단숨에 진료실로 다가갔다.

“······!”

김장혁은 진료실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쌍꺼풀이 없음에도 작지 않은 눈과 살짝 올라간 눈초리, 적당히 솟은 콧대와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붉은 입술.

살면서 눈앞에 여자와 비견될 미녀를 못 본 건 아니었지만 전신에서 풍기는 도도함과 도발적인 기운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었다.

“···한의사님?”

만일 그녀가 부르지 않았다면 넋을 잃고 그녀를 얼굴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아! 시, 실례했습니다. 제가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아서 그만······.”

말을 하면서도 이성은 가당치도 않은 변명 따위 멈추라고 난리였지만 그녀 때문에 마비된 머리는 제멋대로 말을 만들어냈다.

“어, 어디가 아파서 오셨습니까?”

그는 그녀의 아미가 살짝 좁혀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허둥지둥 대답했다.

“···제가 아니라 안쪽에 계세요.”

여자는 다소 차갑게 말했지만 김장혁은 외모에 아주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 안으로 들어갔다.

김장혁은 이번엔 환자를 보고 놀랐다.

숨을 쉬고 있지만 저승의 문턱을 밟고 있는 환자였다. 아이러니하게 전에 일하던 한의원에 위급 환자는 없지만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은 자주 찾아왔다.

한의학의 위치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긴 했지만 현대에 양의학이 이룩해 놓은 것을 보면 이해가 됐다.

‘이런 경우 그냥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는 것이 상책이긴 한데······.’

맥을 짚는 척하며 여자를 흘낏 봤다.

귀찮음을 감수할 만큼 미인이었다.

“어떤가요?”

“음, 그게······.”

김장혁은 말을 길게 늘이며 할 말을 생각했다.

사실 맥을 짚어 어디가 아프다는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만져보고 겉모습만으로 추측해야 했다.

“혹시 ···암입니까? 정확하게 말씀해 주셔야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환자가 들을까 싶어 귓속말처럼 속삭였다.

“네. 말기예요.”

“그렇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죠. 제가 경력은 짧지만 우리나라에게 제법 이름 있는 분 밑에서 일하면서 나름 제대로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혹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살펴보겠습니다.”

김장혁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자신의 말에 만족스러웠다.

어디에도 책임지겠다는 뜻은 없었고 모든 것이 여자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짐을 내포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말하는 순간 여자, 우하란의 눈이 순간 경멸의 빛으로 반짝이는 걸 보지 못했다.

“···진맥 결과가 나쁜가요?”

“상당히요. 큰 병에 기력까지 쇠하여 치료가 어려운 상태입니다.”

“기력이 약해졌다면?”

“일단 약으로 기력을 북돋운 후에······. 아, 아니, 왜? 가시려고요?”

반쯤 넘어왔다고 생각하고 평소대로 말하던 김장혁은 우하란이 갑자기 일어나자 당황해서 물었다.

우하란은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큰 병원을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급해서 들렀는데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요.”

“아··· 네······.”

“진료는 받은 것이니 비용은 지불할 거예요.”

“아닙니다. 제대로 치료도 못 했는데 괜찮습니다. 병원에 가서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랍니다. 혹··· 만에 하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방문해 주십시오. 제가 아는 다른 분이라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아쉽긴 했지만 간다는데 어쩌겠는가.

다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사실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지금과 같은 필요 이상의 친절을 보이는 것도 우스웠다.

“다시 만났으면 좋겠네.”

김장혁은 환자를 데리고 사라지는 우하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선생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 간호사. 자자! 이만 퇴근 준비 하세요.”

간호사의 물음에 적당히 얼버무린 그는 아까 보다만 서류를 보러 사무실로 향했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혁한의원을 나온 우하란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고 5시간이 넘게 달려왔는데 역시나 그저 그런 한의사였다.

그들의 직업 특성상 책임질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판에 박힌 말투와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착한 분 같던데 그냥 가려고?”

배영옥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굳었던 얼굴을 펴며 말했다.

“착하다고 잘 고치는 건 아니니까요.”

“금세 알아차리다니. 자주 다니더니 네가 반 의사 다 됐나 보구나.”

그녀가 만난 한의사는 수십 명. 그들 모두가 이름값을 못 하고 돈만 밝히는 건 아니었다.

그중에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서 고칠 수가 없으니 시간 낭비 말고 다른 사람에 가라던 의원이 있었는데 그 의원이 미안하다며 최소한 진료를 받아볼 가치가 있는 의원인지 판별법을 알려줬었다.

‘몸에 좋다고 너무 많은 약재를 먹여서 환자분의 몸엔 다양한 기가 복잡하게 엉켜져 있습니다. 그러니 맥을 짚으며 약을 먹여야 한다는 이가 있으면 그냥 무시해도 좋습니다.’

너무 값비싼 약재를 먹이다 오히려 독이 되었다는 것이 그 의원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기력이 약해서 약을 써야 한다니 일고의 가치가 없었다.

“엄마를 치료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정도 구분해요. 미안해요, 엄마. 힘든데 이곳까지 내려오게 해서요.”

“갑갑한 집보다 너랑 얘기하면서 차를 타고 이곳저곳 다니는 게 난 더 좋단다.”

행여 우하란이 걱정할까 그녀의 어머니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근데 여기가 하동 근처라고 하지 않았니?”

“맞아요. 차로 20분 정도 가면 하동읍이에요.”

“그럼, 우리 재첩국이나 먹고 올라가자. 엄마 어렸을 때 네 외증조할머니가 하동에 계셔서 방학 때 내려오면 항상 재첩국을 사주셨거든. 섬진강도 한번 보고 싶기도 하고.”

“그래요.”

병 때문에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먹고 싶은 게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인터넷에서 가장 유명한 가게를 찾아 그곳으로 향했다.

손님들이 많아 일행 모두가 식사할 정도의 자리는 없었다. 한데 한 손님이 좁은 테이블로 옮겨가면서 다행히 자리가 났다.

“감사합니다.”

불편한 다리로 자리를 양보해 준 이와 그 일행에게 감사를 표했다.

“허허허! 괜찮습니다. 한데 어머님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제가 좋은 의원 한 명······.”

“아저씨!”

“왜? 부끄럽냐?”

“실례예요.”

“허허허!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미안합니다. 오늘 제가 오랜 고통에서 벗어나 너무 기분이 좋아 주책을 부렸군요.”

“···괜찮습니다. 엄마, 앉으세요.”

아저씨의 넉살을 들을 기분은 아니었기에 시선을 돌리고 아예 모른 척했다.

다행히 시끄러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뒤 간간히 낮은 웃음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엄마, 괜찮아요?”

우하란은 벽에 기대고 앉긴 했지만 평소 앉아 있는 것도 버거워하던 어머니가 걱정스러워 물었다.

“괜찮다. 공기가 좋아서인지 컨디션이 꽤 좋구나.”

“다행이네요. 드시고 괜찮으면 많이 사서 가요.”

“호호. 그러자구나. 재첩국 나왔다! 예전엔 갱조개라 했단다. 새벽이면 ‘갱조개국 사이소!’ 하는 소리가 골목에 들리곤 했지.”

음식은 추억으로 먹는다고 했든가. 배영옥은 재첩국이 나오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보였다.

그 모습에 우하란도 무거웠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맛있다!”

배영옥은 점심 때 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상태가 호전되어 보였을 때 주의를 했어야 했다.

와장창!

“윽! ···으으.”

배영옥을 갑자기 배를 움켜잡고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고통스러워했다.

“엄마! 약, 약! 어서 진통제 가져와요!”

밥을 먹던 간호사 중 한 명이 서둘러 달려와 약을 건네준 후 테이블을 치웠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우하란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약을 까서 배영옥에게 먹였다.

진통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마약 성분이 들어간 진통제를 먹였는데 약효가 돌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 동안 우하란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움직이지 못하도록 꼭 껴안고 아프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엄마.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10분 정도만 이해해 주세요.”

배영옥을 다독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과도 잊지 않았다. 워낙 고통스러워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도 그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기 일쑤였다.

차로 데려가면 좋겠지만 그것도 고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난 후에야 가능했다.

“으으으으······. 아악! 하악 하악!”

뭔가 이상했다.

10분이 지났는데 고통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안 되겠어. 병원으로 옮겨야겠어.’

막 간호사에게 병원으로 가자고 말하려는데 아까 자리를 양보해 줬던 일행 중 가장 젊은 남자가 다가왔다.

“체해서 약이 제대로 흡수가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제가 좀 봐도 될까요?”

남자는 우하란이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배영옥의 맥을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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