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4. 만남(1)
주요 혈을 막아 다리를 마취시켰음에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두삼이 모르는 기의 길(경락)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고로 일단은 다리의 경락을 완전히 파악하는 게 치료의 첫걸음이었다.
‘기본을 무시하고 무작정 고치려고만 들었으니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지.’
두삼에겐 좀 더 다른 의미였지만 한의원에 가면 문진 이후에 맥을 짚어보거나 아픈 부위를 만져보듯이 상태를 먼저 살펴야 했다.
‘과거에 그렇게 혹독하게 당하고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굳이 변명하자면 기가 얼마만큼 소모될지 몰라 겁이 나서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 소모가 두렵다면 차라리 이 일을 그만두는 것이 나았다.
“점심 먹고 온다더니 일찍 왔네? 근데 우산은 어쩌고 비를 쫄딱 맞고 왔냐?”
마루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이영호가 물었다.
“혹시 비가 와서 고통이 일어날까 싶어서요.”
기대감을 주는 건 금물이었다. 그래서 두삼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쑤시긴 한데 참을 만해.”
“샤워하고 나올 테니 치료실에 가 계세요.”
“지금? 저녁에 안 하고?”
“좀 다른 방법을 써볼까 하고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편하게 주무셔도 돼요.”
“알았다.”
샤워를 마치고 치료실로 가자 이영호가 누워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습관처럼 손을 쥐었다 폈다 몇 번 반복한 후에 이영호의 단전에 왼손을, 다리에 오른손을 올렸다.
‘기가 다 떨어질 때까지 해보자!’
전신은 불가능하겠지만 오른쪽 다리의 경락만은 모두 알아내겠다는 각오를 다진 두삼은 기를 불어넣었다.
기를 느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어서일까, 안으로 들어간 기가 다리로 뻗어가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맙소사 무슨 경락이 이렇게나 많아!’
문제가 있다면 기가 흐르는 길이 두삼이 알고 있는 것보다 수십 배는 많다는 것이었다.
경락은 주로 큰 길만 알려졌지 작은 길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가령 서울에서 대전까지 간다고 했을 때 길이 몇 가지나 될까? 그리고 각 길로 차가 동시에 출발한다면?
흘러들어간 기는 마치 그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다리에 있는 기의 길로 퍼졌다. 게다가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금세 한 바퀴를 돌았다.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음에도 동시에 수십 개가 넘는 길을 외우려 하니 당황스러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절단된 다리로도 기가 흐른다는 것이었는데 마치 다리가 있는 것처럼 발 모양대로 흐르고 있었다.
‘허! 고통의 원인이 이 때문인 건가?’
놀람과 경이로움이 동시에 들었다.
‘고통을 완전히 없애려면 모두 차단해야 한다는 거군. 하나씩. 기가 금방 사라지는 것 같지 않으니 탈진을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시간은 많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진정시킨 두삼은 오늘이 아니면 내일하면 된다고 여유를 가졌다.
사실 연구진이 새로운 하나의 경혈과 경락을 찾는 데 들이는 시간과 비교하면 그저 먹기나 다름없었다.
절단된 다리로 돌렸던 기를 멀쩡한 왼다리로 기를 보냈다. 그리고 알고 있던 경락을 제외하곤 가장 많은 기가 흐르는 길을 택했다.
‘넌 1호선이다.’
두삼은 뭔가를 외울 때 그만의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익숙한 사물이나 단어를 지정해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 할 일이 없어 외운 지하철 노선도가 이렇게 쓰일 줄은 그도 몰랐다.
‘넌 소요산, 넌 동두천, 넌 보산··· 아! 네가 바로 음유맥의 축빈(혈)을 지나는 구나’
지나가다가 갈림길이나 느낌이 이상한 곳은 역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지하철이 노선이 그러하듯 1차선이라 명명한 경락은 이미 알고 있던 경락 혹은 맥과 연결되어 있었다.
막힌 건지 아님 흐름이 끝이 난 건지 복숭아 뼈까지 내려갔던 기운은 다른 길을 통해 다시 위로 올라왔고 골반을 지나 상체로 사라졌다.
“휴우~ 5분만 쉬겠습니다.”
두삼은 기를 느끼게 위해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손을 뗐다.
“······.”
이영호는 잠이 들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둘러 옆방으로 간 두삼은 벽에 걸린 달력을 떼어내 뒤로 돌려 백지에 알고 있는 경락을 검은색 볼펜으로 그렸고 이어 1차선을 빨간색으로 그렸다.
“일단 하나 완성.”
왠지 모르게 뿌듯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후후! 고작 하나만 해놓고 뿌듯해하다니. 다시 움직여 볼까.”
오늘 왠지 길고 힘든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치료실로 향하는 그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전지 한 장에 다리의 경락이 얼기설기 그려졌고 그 위에 수많은 경혈들이 벌레처럼 찍혀 있었다.
얼핏 보기엔 막 연필을 손에 쥔 아이의 낙서 같아 보였지만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일 것이다.
그런데 일주일에 걸쳐 만들어진 다리의 경락, 경혈도를 보는 두삼의 얼굴은 결코 밝지 않았다.
막상 알아냈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앞이 깜깜해서였다.
“죽기 전에 저 많은 경혈들의 기능을 알아낼 수 있을까? 쩝! 천천히 하다 보면 되겠지.”
위치를 알아내는 것과 그 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내는 건 별개였다.
사람들 몰래 실험을 해볼 수 있었지만 그건 인간이 할 짓은 아니었다.
두삼은 전지를 둘둘 말아 보관용 통 안에 넣었다. 이미 감각으로 일일이 체득한 것이라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어서 굳이 볼 필요는 없었다.
“근데 다리 지도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단 말이야.”
조금 전 완성된 경락, 경혈도를 보면서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보관용 통을 들고 벽장을 열었다.
벽장 왼쪽에는 침구와 몇 가지 짐이 놓여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커다란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두삼은 손잡이에 달린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린 후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
덜컹!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벽장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생겼다. 두삼은 계단을 내려가 벽 쪽에 손을 뻗어 스위치를 켰다.
형광등이 켜지며 본채 절반만 한 크기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의 사면은 책장으로 되어 있었고 그중 삼분의 일은 책으로, 나머지 삼분의 일은 두삼이 가져온 것과 비슷한 보관용통과 할아버지의 손때 묻은 오래된 한의용품들이 놓여 있었다.
“봤다면 여기서 봤을 텐데······.”
책들 중 삼분의 이는 할아버지가 손님들의 증상과 치료법을 적어둔 기록으로 어린 시절부터 동화책 대신에 읽었던 것들이었다.
장갑이라는 기물을 얻고 난 후 다시 읽고 있지만 어릴 때와 달리 책과는 친하지 않아 속도는 더뎠다.
“속독법을 사용해야겠군.”
두삼의 속독법은 바로 대충 훑어보기였다.
경락과 경혈에 관련된 책이 모여 있는 책장으로 가서 책을 뽑고 파라락 넘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그가 그렸던 그림과 거의 비슷하게 그려진 그림을 볼 수가 있었다.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겠는 걸.”
책을 찬찬히 살피던 두삼이 중얼거렸다.
다리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머리, 몸통, 팔에 대한 것과 각 혈에 대한 기능도 적혀 있었다.
“···할아버지.”
장갑에, 수십 년 세월이 녹아든 노하우까지 남겨주신 할아버지께 뭐라 감사해야 몰랐다.
“이번엔 어떤 고난이 닥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아들딸 낳고 잘 살게요.”
두삼의 할아버지 한언수가 그에게 딱히 한의사가 되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한언수가 진정으로 바란 건 다름 아닌 그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뿐이었다.
책은 단숨에 모든 것을 알만큼 간단하지 않았기에 필요한 부분만 중점적으로 봤다.
‘잘하면 가능하겠어.’
경락, 경혈도를 완성한 후 환각지의 치료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무릎 아래로 내려가는 모든 경락을 막아버리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큰 기능이 없는 세맥을 이용해 큰 경락 중 살릴 수 있는 것은 살리는 것이었다.
고속도로(큰 경락)의 사라진 구간을 국도(세맥)로 대신해 교통을 원활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아무튼 당연히 첫 번째 방법이 귀찮음도 없고 손쉽게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방법을 몰랐다는 모를까 가능성이 보이는 이상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을 다루는 일이지 않은가.
두삼은 방 한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할아버지의 책과 머릿속에 담긴 다리의 경락, 경혈도를 떠올리며 어떻게 연결할지를 고민했다.
수십 개의 경로를 일일이 원래 돌던 대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큰 길부터 차근차근 최적의 길을 만들어 나갔다.
두삼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몰두했다.
“두삼아, 아침 먹어라! 얘가 이 시간까지 안 일어나다니 많이 피곤한가 보네.”
거의 완성했을 때쯤 이영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하느라 꼬박 밤을 샌 모양이었다.
“나갈게요!”
큰소리로 대답하곤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지하실에서 나갔다.
경로를 최대한 살리려 했지만 열 개 정도의 경로는 포기해야 했다.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치료는 오늘로 끝내겠어!’
밤을 새어 피곤했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평창동 고급 단독주택 앞.
두 대의 승용차 사이 커다란 밴에서 늘씬한 키에 지나가는 누구라도 돌아볼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 내렸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을까 그녀의 얼굴은 잔뜩 흐려 있었다.
“장시간 차를 타셔서 상태가 좋지 않으니 조심히 모셔요.”
“알겠습니다.”
그녀보다 먼저 내려 기다리고 있던 간호사들은 그녀의 말에 밴의 뒷문을 열어 환자 이송용 간이침대를 내렸다.
침대엔 병약해 보이는 노년의 여인이 누워 있었는데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에서인지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는 딸을 위해서인지 수척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괜찮아요, 엄마?”
“···응. 편하게 차를 타고 왔는데 피곤할 일이 무에 있겠니? 내 걱정하느라 하란이 네가 피곤하겠구나.”
하란이라 불린 여인, 우하란은 엄마의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걱정을 끼치기 싫어하는 말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자신 앞에선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다가 그 말이 스트레스가 될까 싶어 삼켰다.
“들어가요. 함 박사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아픈 곳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그러자.”
우하란이 간호사들에게 눈짓을 하자 침대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거실에서 기다리던 함인교가 일어나며 물었고 우하란은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암 전문의인 함인교 박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알았다는 눈빛을 보낸 후 방긋 웃으며 침대에 누워 있던 노년의 여인에게 말했다.
“배 여사님, 긴 여행에 힘드셨죠? 어디 불편한 곳 있으세요?”
“제 몸이야 늘 그렇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군요. 그래도 먼 길 오느라 피곤하실 테니 검사는 빨리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함인교와 배영옥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우하란은 그들이 묻을 닫자 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우하란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다 몇 년 만에 집에 와서야 그녀의 엄마가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의 암 병원에서조차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심한 상태.
자신을 위해 평생 희생하며 고생하다가 이제 살 만하니 병에 걸린 엄마를 넋 놓고 그냥 보낼 순 없었다. 양의학에서 손을 쓸 수가 없다하니 한의학이나 민간요법에라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을 돌며 민간요법과 유명한 한의사를 알아보는 한편 암에 좋다는 약재를 사서 먹였다. 그러다 암에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 데려갔지만 별다른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돈만 밝히는 작자들······.’
이번에 만난 한의사도 지난번 한의사와 다름없었다. 비싼 약재를 썼다며 돈만 요구하고 어떻게 되어 가냐고 물으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뿐이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돈이야 얼마가 들어가든 상관하지 않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배영옥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년만 있었다면 정말 가능했을까?’
막상 한의사를 욕하긴 했지만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는 그녀에게 떠날 때 한의사가 1년이면 가능할 것이라고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막막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아 팔로 눈을 가렸다. 자신마저 약해지면 안 된다고 다짐하며 참아보려 했지만 절망감은 그녀를 약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20분쯤 지났을 때 한 사내가 들어오며 그녀를 불렀다.
“사장님!”
“아··· 최 실장님.”
“올라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근데 예상보다 일찍 돌아오셨는데 이번에도······?”
미스터 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것처럼 시간만 달라고 해서 그냥 올라왔어요. 그들이 하는 양을 보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더군요.”
“···그렇군요. 혹시나 해서 새로운 한의사에 대한 소식을 알아왔는데 소용이 없겠군요.”
“···이름 난 한의사라도 있나요?”
믿을 수 없는 이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말에 기대에 또다시 기대는 그녀였다.
“예전에 악양에 가신 거 기억하시죠?”
“악양이요?”
전국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었으니 가물가물했다.
“약초 사러 화개장터에 갔을 때 유명 한의사가 산다고 해서 들렀던 곳이요.”
“아! 기억나요. 한데 못 고치는 병이 없다던 한의사는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희가 고용한 심부름센터 직원 말이 그 후계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실력도 좋은지 손님이 끊이질 않고 들어온답니다.”
“후계자?”
수십 년 경력의 한의사들도 배영옥의 상태를 알고 나면 고개를 흔드는데 후계자로 될까 싶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에 ‘혹시’라는 생각과 함께 어느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