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1. 귀향(3)
“혹시 두삼이 아니냐?”
“만수 형?!”
두삼은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로 백만수의 이름을 불렀다. 백만수는 악양천을 사이에 두고 매계리와 마주하고 있는 정동리에 살던 한 살 터울의 형이었다.
어린 시절 악양천에서 만나 죽마고우처럼 지내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냐? 내가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진주로 갔으니까 16년 만인가?”
“벌써 그렇게 됐나요? 근데 언제 악양으로 다시 돌아온 거예요?”
“돌아온 지 올해 6년째. 대학 가려고 부산에서 삼수까지 하다가 때려치우고 군대 갔어. 그 다음에 이런저런 일이 있어 정리하고 올라왔다.”
“공부 곧잘 했잖아요?”
“너도 서울 가서 공부해 봐서 알겠지만 여기서 공부 좀 한다고 대도시 애들하고 비교가 되겠냐.”
초등학교 때 영재가 중학교 때 공부 조금 잘하는 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그냥 흔한 학생이 되듯이 고작 총 학생 수 100명 정도에 불과한 중학교에서 공부를 잘한다고 해봐야 특출 나거나 죽도록 공부하지 않는 이상 대도시로 나가면 평범하게 되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두삼도 겪은 일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수긍했다.
“근데 오토바이 기술은 어떻게?”
“사실 고등학교 때 조금 엇나갔었다. 그때 오토바이를 타면서 조금씩 배워둔 것이 이렇게 직업이 됐다. 서서 얘기할 게 아니라 이리 와서 앉아라. 커피나 한 잔 마시면서 얘기하자.”
백만수는 장갑을 벗고 밖으로 나가더니 아이스커피 두 개를 사가지고 왔다.
“아이스커피 괜찮지?”
“그럼요. 근데 바쁘지 않아요?”
“괜찮아. 오랜만에 만난 동생과 얘기할 시간도 없으면 이 짓도 때려 쳐야지.”
두 사람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얘기와 어린 시절 얘기로 한참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완전히 내려와서 살기로 한 거야?”
“그럴까 생각 중이에요. 왠지 서울에서 계속 살면 영원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았다라고 할까요. 사실 패배자가 되어 도피해 온 것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할 거예요.”
“자식! 그런 생각 마라. 그냥 지쳐서 충전하러 왔다고 편하게 생각해. 혹시 정착하게 되면 그렇게 살면 되고, 다시 맞붙어 볼 힘이 생긴다면 또 세상에 나가 부딪혀 보는 거고.”
‘예전에 친구 같았는데 이젠 정말 형 같네.’
백만수의 말은 두삼에게 위로가 되었다.
세월은 신기해 산과 들을 뛰어다니던 어린아이들을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을 만큼 어른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참! 근데 너 오토바이가게는 웬일이냐? 오토바이 필요하냐?”
“빨리도 묻네요. 면에 자주 왔다 갔다 할 것 같아서 하나 사려고요.”
“얼마나 생각하는데? 아! 아니다. 내가 한동안 타고 다닐 거 빌려주마. 나중에 갈 때 반납해라.”
“계속 살 생각이에요. 그러니 덤탱이만 씌우지 말고 싼 값에 쓸 만한 것으로 하나 줘요.”
“아무튼 일단 타고 다녀. 나중에 진짜 머물 것 같으면 그때 돈 주고.”
두삼은 백만수가 돈을 받고 싶지 않아 연극을 한다고 생각했다.
‘한 달쯤 뒤에 주면 되겠지.’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백만수가 빌려준 오토바이는 당기면 나가는 것으로 뒤에 짐칸까지 달려 있어 물건을 운반하기에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할아버님 댁에 있지? 저녁에 술 한잔하자. 참! 오토바이 기름이 거의 없으니 바로 주유해.”
“고마워요, 형. 저녁에 봐요.”
오토바이 가게를 나온 두삼은 기름을 넣고 마트에 들러 술과 안주거리를 샀다.
“좋은 오토바이네. 한 일이백은 하겠는걸.”
중고라 해도 엔진 소리가 크지 않았고 당기면 당기는 대로 쭉쭉 나갔다.
10분도 되지 않아 대문 앞에 도착했다.
신속한 기동력이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기도 했지만 부지런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두삼은 후자였다.
그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론 거의 사용하지 않는 본채의 옆에 세워져 있던 평상을 수리하기로 했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긴 했지만 고기를 구워먹으며 술을 마시기엔 평상이 제격이었다.
“다리 부분이 조금 흔들리는 걸 빼면 쓸 만··· 아야!”
그의 생각보다 더 낡은 모양이었다. 나무가 부서지면서 뾰족한 나무가시가 손에 박혔다.
“이런! 장갑이 있어야겠는데.”
그는 코팅된 목장갑을 찾아보았다. 본채엔 없었고 사랑채로 가서 찾아봐도 없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서 사올까 하다가 문득 괜찮은 장갑이 있음을 생각해 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주검 옆에 놓여 있던 것으로 그냥 태워 버릴까 하다가 할아버지의 소중한 물건이라 생각해 놔뒀었다.
‘잠깐 쓰고 깨끗이 닦아서 넣어두면 되겠지. 너무 오랫동안 쓰지 않아도 안 좋은 법이니까.’
거친 나무가 섬뜩하게 살을 파고드는 것을 두 번 당하고 싶지 않았다.
사당으로 간 두삼은 재단 밑에 문을 열고 깨끗한 종이에 싸뒀던 장갑을 꺼냈다.
‘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것치곤 깨끗하네.’
두삼은 장갑을 꼈다. 두께에 비해 마치 끼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금방 쓰고 돌려 드릴게요, 할아버지.”
마음에 걸리는 듯 두삼은 영정사진을 보고 말한 후 밖으로 나와 평상을 고치기 시작했다.
간단히 끝낼 줄 알았던 평상 고치기는 약간의 힘만 줘도 부서지는 통에 큰일로 바뀌었다. 그래서 온전히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그때였다.
장갑에서 은은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투명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삼의 손 안으로 스며들었다.
두삼이 알았다면 기겁을 했을 일이지만 집중하느라 장갑이 스며드는 걸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래도 고쳐놓으니 기분이 좋네.”
마침내 평상 고치기가 끝났다.
깔끔하게 고쳐진 평상을 보고 뿌듯하게 웃던 두삼은 이제 슬슬 저녁 먹을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한숨 돌릴 틈 없이 주변의 공구들과 널브러진 나무토막을 정리했다.
“이제 손을 씻고······. 어? 근데 장갑이 어디 갔지?”
수돗가에서 손을 씻기 위해 장갑을 벗으려는데 장갑이 없었다. 언제 벗어놨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벗은 기억이 없다.
두삼은 혹시나 싶어 주변을 열심히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장갑은 없었다.
“무의식중에 벗어 뒀나?”
“뭘 그렇게 찾고 있냐?”
“아! 아저씨. 일 끝마치셨어요?”
이봉래가 왔기에 두삼은 내일 찾기로 하고 일단 저녁 얘기부터 꺼냈다.
“오늘 면에서 만수 형을 봤어요. 그래서 삼겹살에 소주 마시려는데 같이 드시죠.”
“오토바이 가게 만수 말이냐?”
“알고 계셨어요?”
“농기구 때문에 몇 번 신세를 져서 잘 알지. 그러고 보니 너한테 만수 얘기를 해준다는 걸 깜빡 잊었네.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만났으니 된 거죠.”
“저녁은 둘이 먹어라. 아줌마랑 나랑은 너무 피곤해서 얼른 씻고 쉬어야겠다.”
“그럼 삼겹살 나눠 드릴 테니 두 분이서 오붓하게 드세요. 넉넉하게 사왔거든요.”
두삼은 사온 삼겹살의 절반과 술 몇 병을 사랑채에게 갖다준 후 채소를 씻고 불판을 준비했다.
백만수는 7시가 조금 넘자 치킨을 사가지고 왔다.
“남편 기다리는 새색시처럼 다 준비해 뒀네?”
“하하하! 일은 잘 끝내고 오셨어요, 서방님.”
“흐흐흐! 마누라 기다리는데 일이 손에 잡히겠어.”
농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평상에 앉아 서로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아까 못 물어봤는데 장가는 갔어요?”
“응. 애가 벌써 둘이다.”
“몇 살인데요? 일찍 갔네요?”
“열 살, 여덟 살. 사실 6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가 그 애들 때문이었다. 먹고살 길도 막막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겸사겸사 들어왔다.”
말하기 곤란한 일이 있는지 백만수는 말을 아꼈다.
두삼은 눈치를 챘지만 굳이 말하려 하지 않는 걸 캐묻고 싶진 않았기에 모른 척 고기를 구웠다.
“근데 넌 왜 내려온 거냐?”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더라고요.”
“너같이 독한 놈이 노력했는데도 안 되는 게 있어? 네 중학교 때를 생각해 봐.”
두삼은 마음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어린 시절 악양면에서 소문난 독종이었다.
빈둥빈둥 놀다가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일례로 할아버지가 너무 사고를 치고 다니는 두삼에게 실망의 눈빛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 후 전교 꼴등에 가까웠던 그가 다음 학기에 전교 1등을 했었다.
“그건 중학교 때 이곳에서나 가능한 얘기죠. 대도시의 고등학교에서는 따라가기도 힘들더라고요. 아니, 정말 미친 듯이 하니 따라갈 수는 있었어요. 근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저보다 노력을 많이 하는 애들도 많고··· 그리고 타고난 신체 능력도 문제였고요.”
“신체 능력?”
“이 손이요. 악력이 없어요.”
“아! ···그래도 꼭 네 할아버님처럼 안마로 사람을 고칠 필요는 없잖아? 한의사가 되면 되잖아.”
백만수의 말에 두삼은 씁쓸한 웃음으로 대답했고 두삼이 그랬듯이 백만수도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더 이상 묻지 않고 소맥을 비웠다.
그러다 문득 두삼의 손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악력이 없다는 녀석이 소주 병뚜껑을 쿠킹 호일 구기듯이 하고 있네. 뭔가 사정이 있겠지.’
“자자! 우울한 얘기는 여기까지! 이러다 체 하겠다. 지금부터는 살면서 재미있었던 얘기나 하자. 그래야 술이 술술 들어가지. 건배!”
“하하하! 그렇게 해요. 건배!”
두삼에게 서울 생활은 지우고 싶은 과거였다.
“참! 너 면에서 의원을 했던 김광도라고 기억하지?”
“기억하죠. 저희가 강도라고 놀렸었잖아요. 그 아들 이름이··· 음, 김장혁이었던가?”
“잘 아네.”
“그 사람이 뭐요?”
김광도는 악양면에서 작은 병원을 운영하며 한언수의 한의원에 찾아온 손님 중 병원 진료가 필요한 이들을 받아 많은 돈을 벌었다.
한데 욕심이 너무 지나쳤다.
돈이 없는 노인들에게 과한 비용을 청구하면서 한언수의 눈 밖에 났다. 그때부터 한의원을 찾은 손님 중 서양 의학의 조치가 필요한 이들을 전부 하동에 있는 병원으로 보내졌다.
결국 김광도는 악양면의 병원을 넘기고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김광도가 이번에 악양면에 한의원을 차린다더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하하! 형도 참, 잘못한 게 있어야 조심하죠.”
“그 인간들 어쩐지 잘 알잖아. 마지막에 가면서 외치던 거 기억 안 나?”
김광도는 은혜를 받을 때 다 자신이 잘한 것처럼 굴더니 막상 은혜가 거두어지자 모든 걸 할아버지 탓으로 돌리며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렸었다.
“아주 잘 기억하죠. 적반하장이라는 말을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거든요.”
“큭큭큭! 적반하장이라, 딱 맞는 말이다. 아무튼 동네 주민들한테 쫓겨나듯 고향을 떠난 사람이 보란 듯이 한의원을 차리려는 걸 보면 그리 좋은 의도는 아닐 게 분명해.”
“의도가 있든 없든 저랑은 큰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요. 뭐 약초를 비싸게 사준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할아버지가 계신다면 모를까 지금의 두삼과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남은 삼겹살이 숯이 되어갈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약초꾼이 될 거냐?”
“그럴까 생각 중인데 힘들까요?”
“글쎄다. 너라면 유명한 약초꾼이 될 것 같은데 너랑은 왠지 안 어울린다.”
“그럼, 형 밑에서 오토바이나 배울까?”
“됐다. 차라리 약초나 캐라.”
“방금은 안 어울린다면서요.”
“오토바이 기술을 배운다고 할지는 몰랐지. 안 그래도 이 좁은 시골에 두 곳이나 있는데 너까지······.”
“형한테 배워서 내가 설마 악양에 내겠어요?”
“응. 세상에 믿을 사람은 가족뿐이다.”
“이거 가족 없는 사람 서러워서 못 살겠군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처제 소개시켜 줄까? 그럼 가르쳐 줄 수 있는데.”
“됐네요. 술이나 마셔요.”
“하하하! 쫄기는. 아마 네 형수 보면 당장 소개시켜 달라고 할 거다.”
두삼은 백만수의 말에 피식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아까 오토바이 가게에서 가족사진을 봤다는 애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