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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96화 (96/102)

96. 나, 좋아하지 마

2019.03.05.

“어김없이 돌아온 목요 초대석! 오늘의 게스트는, 요즘 장안의 화제로 떠오르고 있는 분들이죠? 얼마 전 모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우승을 거머쥔 슈퍼 유망주! 홍고추 여러분들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저희 청취자 여러분들께 인사 좀 해주시죠.”

“안녕하세요. 홍지원입니다.”

“고민영입니다.”

“네, 홍지원 군, 고민영 양.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이야, 두 선남선녀가 자리하니까 오늘따라 스튜디오도 왠지 밝아 보이는 것 같아요. 오늘 보이는 라디오가 아니라서 좀 아쉬운데요?”

“헤헤, 감사합니다.”

라디오 스튜디오 안.

DJ의 능수능란한 진행에 나란히 앉은 지원과 민영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야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어색해했지만, 오디션이 끝나고 이곳저곳 불려다닌 뒤로는 이런 상황에도 어느새 꽤 적응이 된 두 사람이었다.

“근데, 두 분이 원래부터 이렇게 팀이었어요? 예전부터?”

“아, 아뇨. 아직 같이 한 지 1년도 안 됐습니다.”

“오우. 그래요? 근데 어쩌다가 같이 하게 됐어요?”

“아……. 저흰 그냥 같은 학교 친구 사이였는데, 드림스타코리아 앞두고 이 친구가 저한테 갑자기 자기랑 듀엣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해와서요. 생각해 보니까 나쁘지 않은 제안 같아서, 별 고민 없이 같이 하게 되었어요.”

“오, 그렇군요. 뭐 결과론적으로 얘기하는 것도 좀 그렇고, 금전적인 걸 따지는 것도 좀 그렇지만…… 어쨌거나 두 분이 의기투합하기로 한 건 굉장히 훌륭한 생각이었던 거네요? 그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승까지 하고, 상금도 아주 억! 소리 났잖아요.”

“하하, 네. 뭐 그렇죠.”

“아, 근데 또 듀엣이니까 상금을 반으로 나눠야 됐겠네. 왜, 전문 용어로 반띵이라고 그러죠? 어땠어요, 좀 아쉽지 않았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혼자 나갈 걸 그랬나 조금 후회했습니다.”

“뭐? 야!”

“이야, 지원 군~ 솔직한데요?”

방송에 익숙해진 덕에 이젠 성격에 안 맞는 능청도 떨게 되었다.

그래도 혼자였다면 절대 하지 못 했을 일이었다.

오직 서로에게 의지한 채, 오늘도 둘은 제법 프로페셔널하게 답변을 이어나갔다.

“자, 이쯤에서 문자 하나 읽고 갈까요? 3113님이 보내주신 메시지입니다. <지원 오빠 민영 언니 너무 멋있고 예뻐요ㅠㅠㅠ 완전 잘 어울림bb 저기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두 분, 남자친구 여자친구 있으신가요? 없다면 혹시 서로는 어떤가요?> 라고 보내 주셨네요. 오, 이거 질문이 굉장히 흥미로운데요.”

“……아.”

“…….”

“어때요, 두 분. 각자 남자친구 여자친구 있으세요?”

나름 여유롭던 두 사람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은 건 그때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원이 먼저 운을 떼었다.

“……아뇨, 없습니다.”

“……저, 저도 없어요.”

“오호. 두 분 다 아직까진 솔로다 이건데. 그럼, 혹시 좋아하는 사람도 없나요? ……아참. 지원 군은 방송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도 한참 떠들썩했잖아요?”

“……아, 네. 뭐.”

“지원 군은 그럼 있는 거고. 민영 양은?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저, 저요?”

저는…….

민영의 아랫입술이 지그시 깨물렸다.

약간 당황한 그녀의 눈빛은 잠시 지원에게 머물렀다 떨어졌다.

“저도…… 있어요.”

“진짜? 허, 대박이다. 요즘 친구들이 확실히 화끈하네. 괜히 없다고 둘러대지도 않고. 그럼 둘 다 남친 여친만 없지,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은 있다?”

“……네.”

“오오, 이거 궁금한데요. 청취자님들 귀 쫑긋 세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요.”

“…….”

“누구예요? 친구? 아는 오빠? 아, 이런 것까지 말하긴 좀 곤란한가?”

넌 그걸 꼭 물어봐야 아냐.

그렇게 답하고 싶은 걸 민영은 겨우 참았다.

“……네, 그냥…….”

“하긴, 그것까진 프라이버시니까. 그쵸? 오케이, 좋아요. 그러면, 둘 다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가정을 해보고. 서로만 봤을 때는 어때요? 이성으로서 맘에 드는 스타일이에요?”

아, 가지가지 하네 정말.

예의 상실. 개념 상실.

DJ의 거듭되는 질문에 순간적으로 살짝 짜증이 난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그때, 별안간 그녀의 옆쪽에서 무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뇨. 제 스타일 아닙니다.”

……뭐 인마?

한 치의 거리낌도 없어 보이는 시원한 대답. 졸지에 민영은 잠시 벙 찌고 말았다.

“오 정말요? 이거 약간 의왼데요. 두 분 다 워낙 외모도 출중하시고 매력 있으셔서, 이성으로서도 충분히 잘 맞을 것 같았는데.”

“……그냥 단순한 친구예요. 그런 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이놈이 오늘 아침엔 단호박을 먹고 왔나. 딱 잘라 매듭짓는 솜씨가 가히 일품이었다.

단지 친구일 뿐이라 단언하고 담백하게 웃고 있는 지원을, 민영은 알게 모르게 째려보았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웃겨. 너도 피차 내 스타일은 아니거든?’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어야 했는데.

그래야 했는데.

“그, 그렇군요. 아쉽지만 그렇다고 하네요, 3113님. ……자, 그럼 또 다음 질문으로 또 넘어가 볼까요?”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진행을 받아들이며 민영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티타늄 철벽남 홍지원 덕분에, 방송 내내 그녀의 기분은 최악을 기록했다.

* * *

“야.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내가 뭐.”

“사람 민망해지게 꼭 그렇게까지 얘기해야 돼? 넌 립 서비스란 것도 몰라?”

“……뭐. 너 내 스타일 아니라고 한 거 얘기하는 거야?”

“그래, 그거!”

역시나 따지고 들 줄 알았다.

라디오 방송을 무사히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시작된 민영의 갈굼에 지원은 피곤한 표정을 했다.

“사실 그대로 얘기한 건데, 그게 뭐 잘못인가.”

“뭐? 야, 넌 진짜!”

이 자식 이거 진짜 웃긴 놈이네? 미안하다고는 못할망정 뭐가 어쩌고 어째?

되레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그의 태도가 여간 탐탁지 않은 게 아니었다.

민영은 저를 본 채도 않은 채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는 뒤통수를 상대로 한껏 씩씩거렸다.

“누, 누구는 네가 좋은 줄 알아? 너도 내 스타일이랑은 거리가 아아주 멀거든?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사람이면……!”

“다행이네.”

“……뭐?”

앞서가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얼핏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나, 좋아하지 마.”

이제 분명 후덥지근한 온도인데, 이상한 냉기가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자리 그대로 못이 박힌 듯 서게 된 민영은 차마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얘, 얘가 지금 뭐라고……?

“할 수 있는 한 빨리 마음 접어. 그 편이 나아.”

“…….”

“난,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평소와 같이 덤덤한 말투로, 비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꽂는다.

별안간 심장이 난도질당한 기분에 민영은 어리벙벙해졌다.

심지어는 약간 헷갈리기까지 했다.

‘……뭐지. 방금, 나도 모르게 고백을 했나?’

아님 이럴 리가 없잖아. 고백도 안 했는데, 갑자기 왜 차인 거지 나?

의문이 일자 그와 동시에 엄청난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당분간은, 친구로만 지내도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실은. 친구조차 못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컸다.

그가 저에게 별다른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녀였기에.

다만 사람 일은 모른다고, 지금 그가 아무리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 한들 제게도 언젠가 기회는 오지 않을까 싶었다.

이렇게 비즈니스 파트너로, 가장 가까이서 붙어 지내다 보면 언젠가 얘도 나한테 마음이 동하지 않을까.

원래 정이란 게 무서운 거니까. 그런 단순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으면 굳이 참지 않았을 거였다.

친구? 친구는 개뿔.

미친 척하고 대놓고 들이댔어야 했다.

나 네가 좋다고, 싹퉁 바가지인 거 다 알지만 그런 너라도 좋아한다고 말이라도 꺼내봤어야 했다.

해봐야 소용없는 후회와 함께 낭패감이 그녀를 덮쳤다.

한순간 바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야!”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다시금 걸어가고 있던 그의 발이 멈추었다.

“그 언니가, 그렇게 좋냐?”

“…….”

“뭐가 그렇게 좋은데.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데!”

너무 억울한 나머지, 목소리에 살짝 울먹임이 섞여 나왔다.

체내의 제어 장치가 완전히 고장 나버린 느낌.

온몸을 엄습하는 쪽팔림을 감수하고 민영은 계속해서 뇌까렸다.

“진짜 웃긴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한테 좋아해라 좋아하지 말라 명령질이야? 너는 마음이란 게, 그렇게 뚝딱뚝딱 쉽게 조절이 돼? 네가 그렇게 잘났어? 어?”

“…….”

“사람들이 좋다 좋다 해주니까 세상이 다 네 아래로 보이지? 웃기지 마. 그 언니가 아홉 살이나 어린 너 같은 걸 거들떠보기나 할 거 같아?”

헙. 이성을 잃은 채 정신없이 쏟아내던 민영이 지레 흠칫했다.

방금 건 좀 심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든 탓이었다.

그러고 나니 저를 올곧게 쳐다보고 있는 남자의 눈빛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나름 엄청난 말을 퍼부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의 표정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마음 써주는 건 고마운데, 걱정 마.”

그 상태 그대로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입가엔 이내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안 그래도 차였으니까. 것도 제대로.”

“……뭐?”

뜻밖으로 흘러나온 대답에 민영이 다시 한 번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지원은 밀랍처럼 굳은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뚫어질 듯 저를 바라보는 여자애의 얼굴 위로, 싸늘하게 말하던 그녀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네 마음이 어떤지는 잘 알겠어. 근데…….]

[나 좋아하지 마. 할 수 있는 한 빨리 마음 접어, 지원아. 그 편이 나아.]

혹시나 했던 마음은 고이 패배감으로 변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영화는커녕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떴고, 지원은 그 자리에 앉은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 날 미처 보지 못한,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곳을 빠져나온 뒤로도 그는 혼자서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귀결되는 결론은 딱 하나였다.

“홍지원, 너…….”

민영의 목소리는 어느새 실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지원은 부러 씩 웃어보였다.

“근데, 너한텐 미안하지만…… 난 포기 안 할 거야. 절대로.”

“…….”

“어디 할 수 있을 때까지 한 번 부딪쳐 보려고. 그 사람이 날 제대로 봐줄 때까지. 내내 해왔던 거니까, 나한텐 별로 안 어려워.”

……근데 그게 원래는 진짜 겁나게 힘들고 어려운 거거든.

넌 똑똑하니까, 나 따라하지 마라. 알았지?

다짐이라도 받아내듯 말하고서, 그는 다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온갖 근심과 걱정을 훌훌 털어버리려는 듯한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야! 홍지원, 야!”

덕분에 민영은 바로 따라가지 못하고 애꿎은 소리만 질렀다.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흘러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나도 차인 건 매한가지인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대체 어쩌라는 거야.

이 대책 없고 나쁜 자식아.

“……아오, 씨.”

혼자만 남고 나니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늦게야 올라왔다.

그도 그럴 게 고백만 안 했다 뿐이지, 제 맘을 저 놈 앞에 고스란히 내보인 셈이 아닌가.

앞길이 막막해졌다.

당장 다음 스케줄도 있는데. 이제 저 자식 얼굴을 어떻게 보지?

“……그 말은 하지 말 걸.”

너무 의식의 흐름대로 뱉었어. 말하기 전에 조금 더 생각했어야 되는데.

아니 근데, 솔직히 내가 뭐 죄 지었나. 내가 저 자식이 그렇게 뻥 차인 줄 알았냐고…….

눈을 질끈 감은 민영은 절로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정말 돌겠네.

이 와중에 왜 또 전화는 오고 지랄이야.

“여보세요.”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은 민영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의 눈은 이내 동그래졌다.

“……예원 언니?”

* * *

“갑자기 집으로 오라고 해서 놀랐지. 마땅히 얘기할 데가 없어서.”

“……아니에요. 근데, 저는 무슨 일로……?”

바로 어제였다.

홍지원과 한바탕 다툼 아닌 다툼을 벌인 후, 연락처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놈의 누나가 갑작스레 제게 연락을 해온 것은.

스케줄 탓에 늦은 밤에만 시간을 낼 수 있다고 말했는데도, 여자는 부득불 괜찮다며 민영을 집으로 초대했다.

덕분에 민영은 영문도 모른 채 이 곳에 도착해 있었다.

톱스타의 집이라 그런가, 집안 곳곳에 부내가 철철 넘쳐흐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눈앞의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많이 고민했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만 한 게 없겠더라고.”

“……네?”

아이에게 전화를 걸 때부터 내내 상상했던 상황인데도, 막상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예원은 어렵게 어렵게 다음 말을 이었다.

“……민영이 너, 어렸을 때 헤어진 가족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이는 역시나 대번에 반응했다.

순간 흠칫한 민영은 설마 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언니가 그걸…… 어떻게?”

“…….”

“지원이가 얘기했어요?”

“……응.”

“허, 왜 쓸데없는 짓은 하고 난리야.”

혼잣말이었지만 그 소리가 약간 크게 나왔다.

아니, 그 자식은 그걸 왜 말했지? 이렇게 막 떠벌리고 다니라고 말해준 사실이 아니었는데……!

민영의 표정이 저절로 심각해졌다.

예원은 물론 그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걱정 마. 나 말곤 아무도 모르니까. 것도 내가 먼저 물어봐서 답해준 거야.”

“……언니가, 그걸 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여자애의 눈길이 예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후, 예원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내 말, 지금부터 천천히 잘 들어.”

“…….”

“정말 믿기지 않겠지만, 말도 안 되는 것 같겠지만. 네 친오빠를…….”

“…….”

“……내가 알고 있어.”

그 순간, 민영은 움직임을 그대로 정지했다.

“네?”

잠깐만.

이 언니가 지금,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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