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미안해
2019.03.01.
벼르고 별러온 천기누설(天機漏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상도 못한 소식을 맞닥뜨린 듯한 남자는 일순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기?”
“네, 아기.”
아기라는 단어를 생전 처음 들어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
되묻는 말을 곧바로 되돌려 주었지만 아무래도 알아들은 눈치는 아니었다.
폭 웃음을 터뜨린 예원은 목소리에 보다 힘을 주어 말했다.
“나도 안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때 병원 갔을 때 갑자기 들은 거라.”
“…….”
“주수는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아무튼 임신 초기라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하던데……. 음, 그러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여전히 영혼이 집 나간 듯한 표정에, 기다림을 못 이긴 그녀가 결국 쐐기를 박았다.
“민혁 씨, 곧 아빠 될 거라고요.”
도저히 못 알아들으려야 못 알아들을 수가 없을 돌직구 한 방.
남자의 눈이 그제야 서서히 초점을 찾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알쏭달쏭하던 얼굴은 점차 분명해지고 있었다.
“정말이야? 확실해?”
“그럼요, 의사가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건데. 맞대요, 임신.”
“…….”
“좀…… 갑작스럽긴 하죠? 이해해요. 나도 처음엔 되게 놀랐,”
……다고 말하려 했는데.
미처 끝을 맺을 수가 없었다.
“민혁 씨!”
부지불식간에 이뤄진 포옹에 예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매끈한 뺨이 닿아 있는 귓가로 살짝 가빠진 그의 숨소리가 맺혔다.
“……어떡하지.”
“네?”
“나 지금 꿈꾸는 것 같아.”
어쭙잖게 오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그렇게 자신을 극구 피해댄 내막에 이런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방심하던 중 폭탄 같은 소식을 접한 그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이 여잔 왜 이제야 말한 걸까.
그것도 치킨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갑자기.
하여튼 얄밉고 발칙한 여자라니까.
이내 그녀를 제 품에서 살짝 떼어낸 그가 감격에 젖은 눈을 했다.
언제나처럼 사랑스러워 죽겠는 그 얼굴을 홀린 듯 뜯어보는데, 별안간 볼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정신이 팍 들었다.
“아아!”
“봐요, 꿈 아니죠?”
“……너!”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
천진한 웃음과 함께 다가온 그녀의 손은 조막만한 크기만큼이나 무척 매운 손길을 자랑했다.
꿈이 아님을 손수 확인시켜주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세게 꼬집을 것까진 없었잖아.
반사적으로 제 볼을 부여잡은 그가 속으로 툴툴댔다.
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스멀스멀 올라오는 팔불출 미소.
“근데 잠깐만. 주수는 아직 모른다고? 산부인과 아직 안 가 봤어?”
“아, 네. 이래저래 경황이 없어서……. 이제 한숨 돌렸으니까 곧 가야죠.”
“그럼, 그때 나도 같이 가.”
“민혁 씨도요?”
“응, 같이 확인하고 싶어.”
우리가 만든 새 생명을. 당신과 나의 사랑의 결실을.
솔직히 말만 들어서는 통 실감이 나질 않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지.
초음파 화면 속에서 힘차게 꼬물거릴 아이의 모습을, 민혁은 문득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얼마나 감동적일까. 생각만 해도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축하해, 예원아. 그리고 고마워.”
정말 진심으로. 다정히 눈을 맞춘 그가 제 마음 그대로를 담아 말했다.
한데, 그런 그를 보는 예원의 표정은 금세 샐쭉해졌다.
“당연히 고마워해야죠, 그럼. 앞으로 열 달 간은 내 앞에 드넓은 고생길이 펼쳐지게 생겼는데.”
자고로 부부의 연이라는 게 이렇다.
사랑의 무게는 똑같아도 책임의 무게가 같을 수는 없는 것.
임신이라는 것이 여자에게 얼마나 무겁게 다가오는 일인지, 그 또한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어 탈이었다.
“……혼자서만 고생하고 감당하게 안 할게. 절대 너 혼자 안 둬. 약속해.”
“치, 진짜죠?”
“두말하면 잔소리지.”
어렸을 적, 아버지의 도움 없이 혼자서 아파하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예원의 옆엔 반드시 제가 있을 테니까.
땅 밑바닥까지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처럼, 그녀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서.
딱 잘라 말한 그는 마냥 행복한 듯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찍었던 드라마 신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때만 해도 제게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였다.
오기 혹은 패기로, 무서운 줄도 모르고 뱉었던 제 거짓말이 돌연 현실이 되어 돌아온 지금.
다른 건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암묵적 접근금지를 당했던 이틀간 차곡차곡 쌓였던 앙금도 이미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아.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왜, 아기 가지면 다들 그러잖아.”
“글쎄요. 딱히…….”
“…….”
“……치킨?”
기껏 들떠 물어보았건만 또 치킨 타령.
임신 소식을 신박하게 알리겠답시고 치킨을 세 마리씩이나 시킨 게 무척 그녀답긴 하다마는…….
피식 웃은 민혁이 재차 물었다.
“치킨은 이미 여기 있잖아. 다른 건 없어?”
“어…… 잘 모르겠어요. 당장 생각나는 건 없는데.”
“그래? 아직 입덧할 시기는 아닌가. 괜찮아?”
“음,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요. 조금 지나면 또 모르지만.”
“그럼 먹고 싶은 거 생기면 꼭 말해 줘. 뭐든지 구해다 바칠 테니까.”
“……뭐든지요?”
“그래, 뭐든지.”
아기가 그리도 좋을까. 얼굴 전체에 생기가 가득해진 그는 벌써부터 열혈 아빠 모드에 돌입한 것 같았다.
원체 애정이 지극한 편이긴 했지만 이제는 아예 여왕처럼 떠받들기라도 할 기세.
아휴. 제가 고백해놓고도 괜스레 쑥스러워진 예원은 남편의 끈덕진 시선을 피해 슬쩍 눈을 돌렸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얼른 이것부터 먹어요, 우리.”
“싫어, 난 다른 거 먹을래.”
“뭐요?”
“…….”
치킨 따윈 안중에 없다는 듯, 굵직한 팔을 쥐고 흔들어 봐도 꿈쩍조차 하지 않는다.
왜 그러나 했던 그녀는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제 입술로 향해 있는 남자의 노골적인 시선 탓에.
“……어우. 저질.”
“왜, 내 거 내가 먹겠다는데. 불만 있어?”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이번에도 끝까지 대꾸하지 못했다.
불퉁하게 답한 그가 곧바로 성급히 입술을 맞춰왔으므로.
실로 오랜만에 만난 호흡이 달콤하게 섞였다.
달디 단 꿀이라도 핥아먹는 것처럼, 입안 곳곳을 탐하는 입술은 무척이나 집요했다.
“……으, 진짜. 숨 막히잖아요!”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예원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그를 겨우겨우 떼어내고서야 헉헉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워씨, 무슨 애 낳기도 전에 호흡곤란 올 뻔 했네.
며칠 동안 본의 아니게 욕구를 누르고 눌렀던 데다, 생각지 못한 기쁜 소식까지 듣고 나서일까.
그의 열정은 거의 폭발 수준에 이른 것 같았다.
“미안. 도저히 참을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힘겨워하는 그녀에게 무작정 감당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이제 아이까지 가진 몸이지 않은가.
어느 한 쪽이 자중해야 한다면, 그건 반드시 그여야만 했다.
하는 수 없지.
불 같이 달아오른 몸을 애써 잠재우려 노력하며, 대신 그는 제 아내의 연약한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언제나 그랬듯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몸은 꼭 저를 위한 맞춤 같았다.
“……진짜, 진짜 고마워, 예원아.”
“…….”
“나한테도 이런 행복한 날이 올 줄 몰랐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인기를 얻고, 유명한 배우가 됨으로써 얻었던 것과는 그 종류가 약간 다른 행복.
그녀로 인해 비로소 완성된 행복이 민혁은 그저 감격스러웠다.
그런 그의 맘을 뻔히 알 것 같아서, 예원은 그 몸을 밀어내는 대신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기대해요. 앞으로는 더 더 좋은 일들만 가득할 테니까.”
말을 마친 그녀는 살포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자리를 비웠던 몇 시간 전, 영덕과 나누었던 통화가 문득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며칠 있으면 확답이 나올 것 같다. 거의 맞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민혁이한테는 아직 얘기하지 말고. 혹시 모르니까.]
얼마 전 민영에 관해 조사를 부탁한 데 대한 답변이었다.
이래저래 시끄러운 일들이 겹치기도 했지만, 혹시나 아니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민혁에게는 미처 알리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
그러나 예원은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은연중에 점점 더 확신하고 있었다.
확실해. 아닐 리가 없어.
온몸의 세포들이 일사분란하게 깨어나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떻게 생기지.”
반면, 싱글벙글한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뒤로 뺀 민혁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지금 이 시간이 이토록 행복한데, 이 이상으로 무언가를 더 바란다는 것은 감히 제 욕심인 것만 같았으니까.
“왜요, 못 믿겠어요?”
“응.”
“쳇, 어디 두고 보세요. 꼭 내 말대로 될 거니까.”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걸까.
철석같이 장담하는 여자의 모습이 그저 귀엽게 느껴져서, 웃음기를 머금은 민혁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홍예원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그래, 믿어야지.
지금 나에겐, 당신의 말이 곧 진리고 율법이니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정하게 얽혔다.
옆에서 식어가는 치킨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은 채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그래서, 병원에 진짜 같이 갔다고?”
“응. 심지어 초음파 보고는 울기까지 하더라.”
“미친. 진짜?”
배우라 그런가, 역시 감수성이 남다르네…….
오후의 한적한 카페 안.
커피 빨대를 문 채 예원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지영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별별 일들이 있은 후, 꽤나 오랜만에 이루어진 절친 간의 상봉이었다.
“아무튼 나 이번에 민혁 씨 진짜 다시 봤어. 빈말이 아니라 진짜 대박 멋지더라. 역시, 내가 청춘을 다 바친 보람이 있다니까.”
“으이그. 넌 또 그 소리냐.”
“아, 맞다. 그럼 그 가윤인가 가식덩어리인가 하는 그 미친년은 어떻게 됐어?”
“……아.”
겨우겨우 잊어가고 있었는데.
불현 듯 들쑤셔진 기억에 예원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마, 접근금지 처분 받을 것 같아.”
“……뭐야, 꼴랑 그게 끝?”
“끽해야 주거침입죄 정도지 뭐. 것도 무늬로는 초범이라 딱히 큰 타격은 없을 것 같아.”
“아, 뭔. 무슨 법이 그따위냐! 아오, 이럴 땐 중국 좀 본받아야 된다니까. 법이 허술해도 너어무 허술하잖아.”
“……그러게.”
처벌할 수 있었음 진즉에 처벌했을 텐데.
사생팬 시절에도 유야무야 넘어갔던 죄목이 이제 와 무겁게 적용될 리는 없었다.
솜방망이 처벌밖에 가하지 못하는 현실이 개탄스럽긴 했지만, 예원은 그쪽으로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에 온 이상, 아이를 위해 좋고 행복한 생각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으니까.
“어쨌거나…… 그거 빼고는 다 잘 해결됐으니까 됐지. 거대한 똥 하나 밟은 셈 치기로 했어. 생각해 봤자 괜히 스트레스만 받는 것 같고.”
“그래 뭐, 그게 낫긴 하지……. 참, 그건 그렇고.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갖고 싶은 거? 그건 갑자기 왜.”
“장차 이모 될 입장에서 양심적으로 임신 축하 선물은 줘야 될 거 아니야. 뭐 줄까? 아기 신발? 양말? 젖병? 아, 아니면 옷?”
“아, 됐어. 아직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왜, 말해 봐! 이게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에요. 알잖아, 너?”
언니가 큰 맘 먹고 쏜다.
이번엔 섹시 브라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거한 걸로 해줄게. 어?
한껏 고무된 지영이 거들먹거렸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별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으유. 너도 어째 홍지원이랑 똑같냐.”
“……어?”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름.
지영은 어쩔 수 없이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지원이가…… 왜?”
“야, 말도 마. 바빠서 잠깐 통화하는 것도 못 한다고 빼더니만, 나 임신했다는 거 듣고는 꼭두새벽부터 전화해서 얼마나 호들갑을 떨어댔는지 아냐? 자기도 이제 돈 번다고,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지 얘기하라고 아주 난리 난리를 쳐대고.”
“……아.”
“츤데레 츤데레 해도 걔만 한 츤데레 없다.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이 생긴 놈이 진짜……. 걘 여친 생기면 분명히 지 간이고 쓸개고 다 퍼줄 거야. 어우, 지긋지긋한 놈.”
지긋지긋……한 면이 다소 있긴 하지. 네 동생이.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을 지영은 애써 속으로 삼켰다.
오늘은 좀 생각이 안 나나 했는데.
그 풋풋하고 잘생긴 얼굴은 고작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또 다시 그녀의 머릿속을 지긋지긋하게 떠다녔다.
“……지원이는, 잘 지낸대?”
“어어, 그냥 그렇지 뭐. 오디션 끝나고 방송국 불려다닌다고 한창 바쁘더니 요 며칠은 그래도 괜찮나 봐.”
“아…… 그렇구나.”
“연락해 보지, 왜. 너네 종종 연락하는 거 아니었어?”
“어…… 나도, 요 며칠은 좀 바빠서.”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연락할 틈조차 없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 애에다가 대고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답장하지 않았을 뿐, 지원의 일방적인 연락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있을 때 많이 봐둬라. 좀 있으면 보고 싶어도 못 볼 테니까.”
이틀 정도 전 그에게서 왔던 안부 인사를 무심결에 떠올려 보는데, 어쩐지 핀트가 어긋나 있는 듯한 예원의 말이 퍼뜩 그녀를 깨웠다.
“……왜. 지원이 어디 가기라도 해?”
“아, 어. 군대 가야지.”
……어라? 잠깐만.
“뭐? 구, 군대?”
“참나, 뭘 그렇게 놀래. 대한민국 사나이가 군대 간다는 게 그렇게 놀라워?”
“아니, 그, 그게 아니라…….”
군대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라 지영은 졸지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마치, 보이지 않던 장벽에 머리를 꽝 부딪친 느낌.
그러고 보니 그 애도…… 곧 스무 살이 되지.
“아, 아직…… 좀 이른 거 아니야? 이제 막 대학 들어갈 애가 무슨 군대야.”
“뭐 그건 그렇긴 한데, 걘 이상하게 자꾸 일찍 가고 싶다고 그러더라고. 뭐라더라.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나?”
“…….”
“까불지 말고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말해두긴 했는데…… 걔가 내가 말한다고 들을 애냐. 보나마나 지 쪼대로 하겠지 뭐.”
군대를 일찍 갔다 와야만 하는 이유. 지영은 멍하니 그 말을 곱씹었다.
그 이유에, 왠지 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까.
“아무튼 누나한테 비밀만 많아가지고. 이러다가 갑자기 덜컥 장가간다고 설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니까. 하여튼 그놈은 종잡을 수가 없어요. 무서워 진짜.”
“…….”
“어, 야. 잠깐만.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어어, 그래.”
뭔지는 몰라도 무척 기다리던 전화인 모양이었다.
건성으로 대답한 지영은 네, 아저씨! 하며 얼른 자리를 뜨는 예원의 뒷모습을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솔직히. 정말 솔직히 말해서,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새파랗게 어리고 잘생긴 남자애가 좋아한다는데, 그렇게 들이대는데.
머리털 한 올 흔들리지 않을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싶기도 했고.
비록 연락을 피하고 있기는 했지만 진정으로 그 애를 밀어낼 생각은 없었다.
조금만 생각이 정리되면, 그땐 정말 마음 가는대로 행동해볼까 싶기까지 했다.
그런데…….
“……하.”
방금 전, 지영은 자신의 처지와 지원의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찍부터 사회에 찌든 자신과 달리 지원은 이제 막 새로운 세상으로 걸음을 내딛는 햇병아리와 같은 입장이었다.
그가 아무리 빨리 군대를 갔다 온다고 한들, 그때 자신의 나이는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겨 있을 것이다.
그때 가서 뭘 해도 우스울 판인데, 하물며 지금은…….
게다가 그 애는 제 절친의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그것도 9살이나 어린.
겉으론 퉁명스럽게 말해도, 속으론 제 핏줄을 향한 걱정과 애정이 엄청난 예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애한테, 선뜻 저를 동생 여자친구로 인정하고 받아들여달라고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일순 정신이 확 들었다.
……애를 상대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네가 미쳤지. 돌아도 단단히 돌았지, 김지영.
“…….”
아무래도,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이 애매한 상태를 유지할 순 없었다.
폰을 꺼내든 지영은 애써 흐린 눈으로 무시했던 지원의 대화방을 찾았다.
그리고 잠시의 망설임 끝에, 자판을 꾹꾹 터치했다.
[혹시…… 시간 있으면 내일 좀 볼 수 있을까?]
[할 얘기 있어서 그러는데]
이제는 진정 결단을 내려야할 타이밍이었다.
이왕이면, 어른인 제가 먼저.
* * *
“누나!”
“……어, 왔어?”
방송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카페임에도, 별다른 무장을 하지 않은 차림의 지원이 지영의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제 슬슬 연예인 티가 나는 듯한 그는 그새 미세하게 더 남자다워져 있었다.
소년에서 남자로 가는 시기. 그 과도기에 머무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평소와 다르게 살짝 충혈된 눈이 피곤해 보이는 탓에 지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광대가 반짝 올라와 있는 잘생긴 얼굴엔 눈에 띄게 기쁜 기색이 어려 있어서, 그에 또 한 번 눈살이 찌푸려졌다.
“잘 있었어요?”
“……으응. 너는?”
“나는 뭐, 늘 똑같았죠. 방송 가고, 라디오 가고. 오전엔 학교도 가고.”
“……아.”
“그 와중에 누구는 엄청 보고 싶었고요.”
“…….”
“이제 좀 살겠네.”
저런 식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걸 보니 홍지원이 맞긴 하구나.
지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올라가려는 입가를 억지로 꾹 눌렀다.
차갑게 식어 있던 볼이 절로 화끈해지려 했다.
“저녁은 먹었어요?”
“……아니, 아직.”
“잘됐네. 그럼 같이 저녁 먹고 영화 봐요. 나 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영화?”
“네. 같이 가요.”
“…….”
“나랑, 데이트하자고요.”
그 말에, 지영의 눈이 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호기롭게 뱉어놓고 살짝 민망해진 지원은 작은 헛기침을 했다.
“대체 언제 답이 오려나, 궁금했는데 참았어요. 누나도 누나대로 고민이 많겠지 싶어서.”
“…….”
“누나도 이미 알겠지만, 나…… 예고했던 대로 고백 다 했는데.”
“…….”
“그래서, 답은요?”
방송에서 그녀의 이름을 대놓고 말하긴 부끄러워서 y양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름을 붙였다.
일생일대의 패기였다.
그녀가 부담스러워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물론 들었지만 고민은 잠시였다.
슬쩍 떠봤던 그녀는 제가 딱히 싫지 않은 기색이었고, 지원은 그 반응에 희망을 걸었으니까.
누나가 좋아한다던 사람, 그건 분명히 나일 거라고.
부끄러워서 괜히 말도 못 하고 연락도 못 하는 거라고, 그렇게 멋대로 단정 지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힘든 스케줄도, 누나 부부와 관련해 제 주위를 떠돌던 소문들도,
그녀에게서 연락 한 통을 받지 못 했던 최근의 나날들도.
“…….”
그런데, 지금 제 눈앞에 앉아 있는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지원은 속으로 흠칫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엿한 남자답게, 담담하게 굴고 싶었다.
“할 말…… 있다면서요.”
“…….”
“뭔데요. 말해 봐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쉬운 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원아.”
지원은 곧, 제가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했음을 깨달았다.
“……미안해.”
오만했던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심장은 기다린 것처럼 쿵 내려앉았다.
그 몇 마디 되지도 않는 말을 듣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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