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너 신고, 나랑 혼인신고
2019.01.25.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퍼뜩 잠에서 깬 민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깼어요?”
그때, 바로 왼쪽에서 예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 깨어난 탓에 성에가 낀 것처럼 흐리멍덩한 시야 안으로,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모로 누워있는 제 아내의 얼굴이 들어와 있었다.
“……몇 시야?”
“12시 넘은 지 얼마 안 됐어요. 좀 더 자도 돼요.”
예원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한 번 눈을 뜬 그는 더 이상 잠들 생각이 없어보였다.
저에게 시선을 둔 채 눈만 깜빡거릴 뿐, 좀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남편을 향해 그녀는 픽 웃었다.
“옷 입으면 못 잔다더니. 다 순 뻥이었어.”
“…….”
“나 지금 완전 사기 당한 기분인 거 알아요?”
이렇게 잘 잘 거면서 괜히.
예원이 장난스럽게 푸념했다.
저를 위해 일부러 꺼낸 우스갯소리란 것을 알면서도 차마 웃을 수가 없다.
설핏 쓴 미소를 짓던 민혁은 잠시 머뭇거리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아무 일도 없었지?”
“나요?”
“…….”
“그럼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일은…….”
내가 아니라 당신한테 있었겠지.
괜스레 베개를 고쳐 벤 예원의 눈빛이 애달프게 이지러졌다.
“오늘, 아버님 어머님 뵈러 갔었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
“뭐…… 민혁 씨가 내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는 게 하루 이틀인가. 다 아는 법이 있죠.”
물론, 그 모든 것은 매니저 성환의 공이었다.
제게로 쓰러진 그를 겨우겨우 방까지 부축해 옮긴 예원은 그가 곯아떨어진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성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덕분에 별도의 추궁을 하지 않고도 오늘 제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근데 거긴 왜 갔어요. 일을 이렇게까지 만든 거 보면 아주 작정한 거였을 텐데, 대체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예원이 안타까운 듯 물었다.
하지만 민혁은 눈길을 내리깐 채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일말의 기대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으니까. 사람이라면 충분히 반성을 할 만한 세월이었으니까.
변명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젠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것이 과한 기대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불과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빌어먹게도.
“……예원아.”
“네?”
불시에 불린 제 이름에 눈이 동그래진 그녀를, 민혁은 조용한 듯 열렬하게 바라보았다.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에 있어줄 거지?”
“…….”
“혹시나 내가 널 실망하게 하거나, 말도 못하게 귀찮게 해도…….”
꿀꺽. 침을 삼킨 그의 목울대가 흔들렸다.
“그래도 넌, 어디 가지 않을 거지?”
엄마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는 아이처럼 퍽 간절한 투.
예원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죠. 가긴 내가 어딜 가. 언제까지고 난 민혁 씨 곁에 있을 거예요.”
“…….”
“뭐, 민혁 씨가 날 먼저 버리지 않는다면야.”
그러면서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달뜬 오른쪽 뺨을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볼을 살며시 쓸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따스한 손길과 함께 느껴지는 금속의 서늘한 감촉.
그것은 물론 반지였다.
결혼반지를 낀 채 제 뺨에 고이 올려진 손과, 너무나 사랑스럽게 웃는 그녀를 번갈아 보고 있자니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 내일 혼인신고부터 하자.”
“혼인……신고요?”
“응. 더 이상은 안 돼. 당장 해야겠어.”
그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깜빡 잊고 있었어. 그런 서류쪼가리 같은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무심코 넘겼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아.”
“…….”
“할 수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다른 부부들답게 정말 제대로. 프러포즈도, 결혼 준비도, 결혼식도, 신혼여행도……. 혼인신고도 물론 그 중 하나고.”
몇 시간 전, 허튼 짓을 하면 저가 아니라 ‘그녀’가 다칠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
그는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우지끈,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말했다는 건,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분명 그들의 치부를 쥐고 있다는 것을 뜻할 수밖에 없었다.
무고한 그녀가 그런 더러운 일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끔찍했다.
결국 그 길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와야 했지만, 덕분에 그는 예원과의 관계를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그녀를 보호하려면 뭔가 최소한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바로 혼인신고였다.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널 온전히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설령 내가 방패가 되고 바람막이가 되어도 좋으니까.
너 하나만은 기필코 내가 지켜주고 싶다.
그 모든 것을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왜. 왜 그런 표정이야?”
그런데 절실했던 그 맘이 통한 걸까.
그를 빤히 바라보던 여자는 어느새 꽤나 감동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해서.”
‘혼인신고’라.
이미 그와 결혼한 몸으로 살아온 지 오래고 이제는 진정한 부부까지 되었지만,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하기야 결혼을 했으면 혼인신고를 하는 게 당연한 건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호적까지 깨끗이 정리되고 나면, 그때는 비로소 완전한 그의 아내가 될 수 있겠지.
그 생각만으로도 예원은 마음이 붕붕 뜨는 것 같았다.
“그럼 나 내일은 일 있으니까, 며칠 내로 같이 갔다 와요. 민혁 씨 시간 빌 때.”
“응, 알았어.”
그런데 그때,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그 날 생각난다.”
“언제?”
“그…… 민혁 씨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했던 날이요. 프러포즈.”
“……아, 프러포즈.”
너무너무 허접해서, 이제 와선 차마 프러포즈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그걸 말하는 건가.
“그게 무슨 프러포즈야. 그냥 비즈니스 제안이었지.”
“왜요, 좀 뜬금없긴 했지만…… 민혁 씨 프러포즈 나름 신선하고 좋았는데. 포장마차에서 그런 식으로 프러포즈 받은 사람은 전 세계에서 나 하나밖에 없을 걸요?”
저리 너스레를 떨어대도, 진심으로 그게 좋았을 리는 없었다.
덩달아 피식 미소 짓던 민혁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생애 첫 프러포즈를 그렇게 망쳐버려서.”
“아니에요. 그때 민혁 씨랑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뭐. 나도 그땐 솔직히 제정신 아니었잖아요.”
“…….”
“무드는 좀 없었어도, 아마 평생토록 못 잊을 거예요. 하도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던 프러포즈라.”
여자의 입매가 다시 한 번 시원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 미소에서, 민혁은 문득 제주도에서 찍었던 그 사진 속의 그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이 여잔 이렇게 환하게, 싱그럽게 웃고 있었는데.
“우리, 여행 갈까?”
순간, 의식의 흐름에 따라 말이 튀어나왔다.
“여행……? 갑자기 웬 여행이요?”
“그냥, 그동안은 우리 둘 다 바빠서 갈 기회가 없었잖아. 가고 싶은 데 있으면…… 같이 가 보고 싶어서.”
다소 충동적인 제안이었지만, 뱉고 보니 꽤 괜찮은 생각 같았다.
이것저것 못 본 것도, 못 해 본 것도 많은 여자다.
이제부터라도 뭐든 원 없이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맘이었다.
“음…… 나중에요. 지금은 나도 이래저래 바쁘고, 민혁 씨도 바쁘잖아요.”
“나 드라마 끝났잖아.”
“그래도. 며칠 있으면 또 CF 촬영도 있고 그렇다면서요. 장소가 어디더라. 스페인이던가……?”
아니, 무슨 놈의 CF를 스페인까지 가서 찍어? 촬영장소가 거기서 거기지.
그녀가 속으로 된통 푸념했다.
하지만 그것이 싫은 건 저 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내적으로 투덜대고 있는 자신을 끌어당겨, 이리 품안에 꼭 가두는 그를 보면.
“……가기 싫다. 내내 이렇게 있고 싶어.”
그 말 한 마디에 모든 짜증이 마법처럼 녹아내렸다.
큼큼. 가슴 깊이 공감하면서도 예원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 그래도 일은 가야죠. 민혁 씨가 열심히 벌어야 날 먹여 살리지.”
“그래,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당신은 평생 놀고먹을 준비나 해. 도장 한 번 찍으면 이혼하는 거 아닌 이상 못 무르는 거 알지?”
그가 쿡쿡 웃으며 대꾸하자, 예원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짧은 새 새까맣게 타버린 듯한 남자의 얼굴이 마음에 덫처럼 턱 걸렸다.
여행을 가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당신 같은데.
가만있어 봐. 그럼 차라리…….
“……민혁 씨.”
“응?”
“그러지 말고, 이참에 가서 여행 좀 하다 와요. 스페인.”
“……뭐? 나 혼자?”
“네. 민혁 씨 혼자.”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민혁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왜 나 혼자야? 나중에 같이 가면 되지.”
“에이. 그러니까 더더욱 혼자 가야죠.”
“…….”
“나도 나지만, 민혁 씨도 이제껏 제대로 쉰 적 없잖아요. 촬영 때문에 가본 데는 많아도 민혁 씨 성격상 관광은 안 하고 왔을 테고. 이번엔 가는 김에 제대로 푹 쉬고 와요, 나 없이. 어차피 다음엔 혼자 가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을 걸요?”
내가 이렇게 찰거머리처럼 딱 붙어 있을 테니까.
그녀가 귀엽게 눈웃음을 치며 샐샐거렸다.
“그래도…… 그건 좀…….”
“왜요, 어차피 곧 있으면 종방연이잖아요. 며칠 안 남았는데, 그때까지 신나게 놀다가 그 날 맞춰서 딱! 입국하면 되겠네. 어때요? 괜찮죠.”
“…….”
이야기를 듣던 그가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듣다 보니 여자의 말엔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잖아도 오늘 본가에 다녀온 이후 홧김에 이 땅을 확 떠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든 참이었다.
물론 그 생각엔, 당연하게도 예원이 함께였지만.
“가서, 복잡한 생각 같은 건 다 잊고 제대로 놀다 와요. 그럼 마음도 지금보단 훨씬 편해질 거예요.”
“……같이 갈까?”
기껏 물었건만 그녀는 가차 없이 콧방귀를 뀌었다.
“참나. 그럼 그동안 에덴은 어쩌고요. 촬영 끝난 사장님은 한가하실지 몰라도, 점장인 전 아니거든요? 휴가 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
“내 걱정은 말고 다녀와요. 올 때 선물이나 왕창 사오시고요.”
그녀의 지속적이고 끈질긴 회유에, 결국 그는 매우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성환이 형한테 말해 볼게.”
“네.”
예스.
그제야 예원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
* * *
그리하여 며칠 뒤.
나중에 하면 된다는 예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현민혁은 숙제처럼 남겨두었던 혼인신고를 기어코 마치고 나서야 홀가분히 스페인으로 출국했다.
그리고 그 사이, 아니나 다를까 여론은 근래 최대의 이슈로 떠오른 민혁과 태균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예상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민혁’의 아버지로 밝혀진 태균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안 그래도 호감이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되니 더더욱 호감이라며.
선거를 앞두고 터진 스캔들에 난색을 표하는 이도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숨겨온 것 자체가 대단하다느니,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 그렇게도 잘난 모양이라느니 하는 긍정적인 반응들이 주류였다.
민혁이 가족관계에 대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태균이 라희와 재혼한 것 또한 전 부인과의 사별 이후 어렵게 어렵게 이루어진 것이라는 등의 후일담 아닌 후일담이 곳곳에 떠돌았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예원으로서는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나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움직이지 마. 괜히 반응하지도 말고. 알았지?’
그가 그리 단단히 당부하고 갔기 때문에.
평소에는 한 없이 무르기만 한 그가 저를 상대로 그리 말한 데는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해서, 종종 집 앞까지 찾아오는 기자들도 철저히 무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민혁 쪽에서 따로 부인을 하지 않은 탓에 논란은 생각보다 그 불씨가 크게 번지지 않은 듯했다.
어쨌든 타국에 있는 그는 지금 이 구질구질한 얘기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인터넷을 일부러 켜지 않는 이상 이 소식들을 들을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예원은 우선 안심이 되었다.
일찍이 격리시켜 놓기를 너무너무 잘했지.
안 그랬으면 그 남자가 또 얼마나 혼자 힘들어 했을까…….
“와. 제수씨, 이 많은 걸 설마 직접 다 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가 떠난 지 이틀째 되는 날.
예원은 신혼집 앞뜰에서 예정돼 있던 축하파티를 열었다.
중간에 커다란 원탁으로 배치된 자리엔 주인공인 지원과 민영을 비롯해 재하와 은아, 윤 교수, 지영과 성환까지 둘러앉아 ‘홍고추’의 우승을 축하하고 있었다.
“아, 네. 그럼요. 제가 다 한 거죠.”
“와……. 거의 전문 요리사 수준이신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다 너무 맛있네요.”
갈비 한 점을 뜯은 재하가 잔뜩 감탄을 늘어놓자 옆에 앉아있던 성환도 금세 맞장구를 쳤다.
“아유, 이 정도야 뭘요.”
후후후. 예원은 뻔뻔하게 웃으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전문 요리사 수준이겠지요.
출장요리사와 남편카드 찬스를 이용했는데, 맛이 없으면 그게 더 문제랍니다.
“참, 근데 말야. 내가 저번부터 생각했던 건데.”
그렇게 한참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던 도중, 재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민영이랑 예원 씨, 되게 닮지 않았어요?”
“……네?”
밥을 먹다 흠칫 놀란 예원이 반문했다.
예상치 못하게 지목당한 민영도 영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렇게 둘이 앉아 있으니까 왠지 더 닮아보여서. 안 그러냐, 지원아?”
재하가 툭 동의를 구했지만, 지원은 뜻밖에도 뭔 소릴 하냐는 표정이었다.
“에이. 고민영 쟨 우리 누나보단 차라리 매형을 많이 닮았죠. 맞다. 너, 별명 한때 ‘여자 현민혁’이었다고 하지 않았냐? 전에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우씨. 저건 여기서 왜 굳이 저런 말을.
눈치를 엿 바꿔 먹은 것 같은 지원의 친절한 설명에 민영의 표정은 점점 썩어 들어갔다.
“오, 그러고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랬나?”
“뭐가요?”
“아 실은, 제가 민영이 처음 봤을 때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었거든요. 민영이 너도 기억나지?”
“……아, 네.”
현민혁을 닮았다, 라.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면 워낙 으레 하던 말이었기에 이제는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민영은 별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 말에 예원은 제 왼편에 앉은 민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게. 자세히 보니까 진짜 닮은 것도 같네……. 누가 보면 우리 남편 스페인에서 벌써 돌아온 줄 알겠어.”
“……언니!”
예원의 농담에 자리에 앉은 모두가 깔깔 웃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다음 타깃은 제 오른편에 앉은 지영이었다.
“아, 맞다. 김지영. 나도 너 보니까 생각난 거 있어.”
“뭐? 뭔데.”
“지난번에 네가 좋아한다고 했던 사람 있잖아.”
풉!
그 순간 지영은 코끼리라도 된 듯 마시던 물을 뿜어냈고, 예원은 당연히 질겁했다.
“야! 아, 뭐야. 갑자기 왜 물을 뱉어!”
“켁, 아, 아니…… 내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지영이 저도 모르게 벌인 사고를 수습하느라 정신없어 하는 사이, 맞은편에 앉아있던 지원의 표정은 묘하게 변했다.
“누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어, 있대. 근데 누군지 말을 통 안 해줘. 나도 까먹고 있다가 지금 막 생각났잖아.”
“…….”
“아,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어?”
예원이 채근하듯 물었지만, 지영은 이리저리 눈치만 볼 뿐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재하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저, 보아하니 대답하시기가 좀 곤란하신 것 같은데……. 뭐 그런 미스터리한 부분으로 말하자면, 여기 계신 홍지원 군이 최고 아니겠습니까?”
“……네?”
“아, 왜 있잖아. 너의 그 사랑스러운 y양.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y양!”
‘y양’ 이라는 소리 하나에 모두의 눈이 일시에 지원에게로 쏠렸다.
말은 안 했지만 사실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자. 이렇게 어른들까지 다 모이신 김에, 여기서라도 속 시원히 밝혀봐. 너의 그 y양이 도대체 누구시냐? 응?”
분위기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쏠릴 줄이야.
지원은 살짝 당황한 눈초리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 저, 그게. 실은…….”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눈빛이 한껏 방황하던 지영의 것과 딱 마주쳤다.
두 사람은 일순 벼락을 맞은 것처럼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마치 확인이라도 받듯, 온몸을 칭칭 동여매는 듯한 시선.
의심, 호기심, 설마 하는 마음…….
그의 눈에 떠올랐던 온갖 가지 감정들은 어느새 강한 확신으로 변해 있었다.
“실은? 실은 뭐.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지금, 말해도 될까.
그의 맘속에서 치열한 고민이 일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지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그런데 그때.
“어머!”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예원이 소리쳤다.
깜짝 놀란 모두의 시선은 퍼뜩 그녀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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