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하고 싶은 것, 받고 싶은 것
2018.12.28.
“야! 넌 ‘좋은 생각’이란 게 겨우 그거냐?”
[겨우라니? 그게 뭐 어때서!]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예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화기 너머의 지영은 그저 억울한 듯 대꾸했다.
[내가 그걸 얼마나 고심 끝에 고른 건데. 옆에 ‘신혼부부 강력 추천템’이라고까지 쓰여 있었다니까? 잔말 말고 내가 시킨 대로만 해 봐. 민혁 씨도 막상 보면 아마 좋아서 뻑 갈 걸?]
“아니,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어, 어떻게 그런 걸……!”
그 남자가 뻑 가기도 전에 내가 먼저 뻑이 가겠다, 가겠어.
후우, 후우.
예원은 필요 이상으로 흥분한 자신을 억누르며 숨을 골랐다.
그러니까, 방금 전 지영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안 그래도 너한테 한 번 까여서 상심해 있을 텐데, 까짓 거 이번엔 네가 먼저 덮쳐. 어쩌긴? 그게 뭐 어렵냐. 그, 내가 옛날에 준 섹시 브라 있지? 아, 왜~ 제주도 갈 때 내가 선물로 줬던 거 있잖아. 어, 그래. 그거 입고, ‘당신을 위해서 준비했어요.’ 딱 그러는 거야. 민혁 씨가 아무리 화가 났어도 안 넘어가고는 못 배길 걸? 어때, 생각만 해도 완전 죽이지 않냐.]
그 말을 들은 직후, 예원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아야 했다.
‘그래, 죽이네. 그 전에 내가 널 죽이고 싶은 것만 빼면.’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마음을 고이 접은 예원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 기집애는 그딴 걸 좋은 생각이랍시고…….
“됐다. 너한테 조언을 구하려 한 내가 잘못이지. 빨랑 씻고 출근이나 해!”
[와…… 이게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한 거 받아줬더니 적반하장이네. 넌 사람이 돼서 은혜란 것도 모르냐? 어?]
“은혜는 개뿔. 아, 몰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끊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뚝 끊어버린 예원은 바로 옆에 있는 화장대에 폰을 던져 놓았다.
‘아, 나 정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무시하고 못 들은 걸로 하는 거였는데.
괜한 전화비만 낭비한 꼴이 되어버렸다.
팔짱을 끼고 선 예원은 폰 쪽을 보며 마뜩잖게 입맛을 다셨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기집애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내가 그걸 어떻게 입어?’
예원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의 눈길이 점점 옷장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거기엔 속옷이나 양말 종류만 따로 정리해 놓은 화이트 톤의 서랍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엔…….
“…….”
잠시 주춤하던 예원은 스르륵 몸을 낮춰 서랍장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구석 쪽에 짱박힌 검정색 브래지어가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흐음.”
예원은 그것을 슬쩍 집어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유명 모델이나 입을 법한 뇌쇄적인 컬러와 디자인에, 온통 화려하기 짝이 없는 레이스.
처음 마주했을 때도 그랬지만, 다시 보아도 참 자비 없는 비주얼이다.
‘이걸, 내가 입는다고……?’
솔직히 말해서, 그의 앞에서 입으면 분명 그가 좋아할 것 같기는 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이런 걸 입고 덤비는데, 싫어할 남자가 과연 세상에 있기는 할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상상해보려 해도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아니, 이게 애초에 나랑 사이즈가 맞기는 하나……?
“뭐해, 당신?”
“엄마!”
그때였다. 별안간 민혁이 방으로 들어온 것은.
서랍 앞에 쪼그려 앉은 채 브라를 슬쩍 가슴에 대보려던 예원은 깜짝 놀라 그만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어후, 놀랬잖아요! 사람이 노크도 없이!”
“내 방 들어오는데 노크하는 사람도 있나?”
어느샌가 예원의 방을 제 방으로 둔갑시켜버린 민혁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근데 왜 그렇게 놀라. 거기 뭐 있어? 뭘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 봐?”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의 인기척을 깨닫자마자 재빨리 브라를 우겨넣고 닫았건만, 서랍은 일부가 아직 덜렁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도둑질하다 걸린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뜨끔하게 되는 건지.
예원은 덜 닫힌 서랍을 탁 밀어 넣고 황급히 일어났다.
“바, 바로 촬영장으로 갈 거죠?”
“어. 지금 인사드리고 바로 나가려고.”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샤워를 하고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 그는 얼굴 전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까스로 맘을 진정시킨 예원은 민혁의 앞으로 다가가 괜스레 그의 가슴팍을 쓸었다.
“괜찮아요?”
“응? 뭐가.”
“민혁 씨 안색이 영 피곤해 보여서.”
“……아.”
씁쓸하게 웃은 그가 반대로 예원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는 당신은 오늘도 쌩쌩하네. 잠 잘 잤나 봐.”
“그럼요. 민혁 씨가 팔베개 해준 덕분에 완전 꿀잠 잤는데.”
“……그래?”
“왜요, 민혁 씨는 잘 못 잤어요?”
잘 잘 수 있었을 리가 있나.
민혁은 괜스레 불퉁하게 대꾸했다.
“어. 당신 때문에.”
“……나 때문에요?”
엥? 내가 뭘 어쨌다고?
잠시 영문을 몰라 하던 예원은 곧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헐, 설마.
“혹시, 어젯밤에…….”
“어젯밤에?”
설마. 설마 아니겠지.
“……나 코 골았어요?”
한없이 진지해 빠진 목소리.
순간 어이가 없어진 민혁은 반문했다.
“뭐?”
“나 피곤할 때는 가끔 코 골긴 하는데, 어제는 별로 안 피곤했는데…….”
“…….”
“아니면…… 설마 이를 갈았나?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 정도까지 갔을 린 없지. 암.
혼자서 지레짐작하며 단언하는 모양이 너무 진지해서 절로 웃음이 난다.
하여튼 귀엽긴.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둘 다 아니야.”
“그래요? 그럼 왜…….”
그런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잠을 못 잤냐는 투.
“말했잖아. 나한테 당신은, 존재 자체가 고문이라고.”
“……뭐라고요?”
예원이 순간적으로 발끈했다.
하지만 잠시 뒤.
그녀는 이내 알겠다는 얼굴을 하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아.”
이제야 알아들었나 보네.
민혁의 입가엔 그저 행복하다는 듯 씩 웃음이 걸렸다.
하긴. 이렇게 적당히 엉뚱한 소리도 좀 해야, 내가 아는 홍예원이지.
“참. 나 다음 주면 촬영 끝이니까, 그때까지 한 번 생각해 봐.”
“뭘요?”
“촬영 끝나면 나랑 같이 하고 싶은 거. 아니면, 나한테서 받고 싶은 것도 좋고.”
“……받고 싶은 거요?”
“그래.”
“어떤 거든지 다 되는 거예요?”
“뭐,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다소 갑작스러운 제안.
이제껏 살면서 딱히 뭔가를 바라본 적이 없는 그녀였기에, 이런 주관식 문제는 너무나도 막연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거, 받고 싶은 거라.
흐음. 뭐가 좋으려나.
“그렇다고 너무 허무맹랑한 건 안 되고. 알았지?”
“……네.”
그녀의 볼을 애교스럽게 꼬집고 먼저 방을 나가는 그를, 예원은 쳇 하는 표정으로 뒤따랐다.
내려간 1층에서는 이미 윤 교수와 은아가 한창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어머 현 서방. 벌써 가는 거야?”
“예, 오늘 또 일찍부터 촬영이 있어서요.”
“아유, 아쉽네. 여기 밥이라도 한 술 뜨고 가지.”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제 곧 있으면 촬영도 끝나니까, 다음엔 제가 댁에 갈게요.”
“으응……. 그래, 그럼. 하는 수 없지 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저 먼저 가볼게요, 삼촌.”
“어, 그래. 얼른 가 봐. 가서 열심히 하고.”
“네.”
윤 교수와 은아에게 꾸벅 인사한 민혁이 마지막으로 예원에게 찡긋 눈짓을 하고는 현관을 나섰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은아는 어느새 특유의 열혈팬 모드가 되어 있었다.
“우리 현 서방, 아침부터 고생이네 정말……. 에휴, 예원이 너라도 얼른 이리 와서 앉아. 사돈께서도 얼른 오세요.”
“예. 그 전에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윤 교수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먼저 식탁으로 다가간 예원은 헤엑 입을 벌렸다.
“와. 이모야말로 아침부터 고생했네. 대체 뭘 이렇게 많이 했어?”
식탁 위로는 어젯밤에 못지않은 아침상이 떡벌어지게 차려져 있었다.
“호호, 평소엔 이렇게 못 먹을 거 아니야.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해주니. 많이 먹어. 너 때문에 일부러 계란찜도 했으니까.”
“헤헤, 응.”
아싸, 오랜만에 먹는 이모 계란찜이다.
하지만 윤 교수가 오기도 전에 먼저 수저를 들 수는 없었기에, 예원은 싱글벙글해진 얼굴로 얼른 자리부터 잡았다.
그러는 사이 은아는 그릇에 국을 뜨며 은근슬쩍 물었다.
“어젯밤엔…… 잘 잤니?”
“어? 응, 잘 잤지. 이모는? 잠자리 바뀌어서 불편하진 않았어?”
“불편하긴? 허리도 안 배기고 좋기만 하더라, 야.”
확실히 비싼 침대가 좋기는 좋아…….
아,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근데…… 어제 나랑 사돈 때문에, 괜히 너희들이 불편했던 거 아니니? 우리가 방해한 거 아냐?”
“어?”
방해라니. 이 무슨 섭섭할 만한 소리란 말인가.
예원은 지레 손사래를 쳤다.
“아냐! 불편하긴 뭐가 불편해. 평소랑 똑같이 잘 잤어. 나도 잘 자고, 민혁 씨도…… 잘…….”
순간, 어쩐지 퀭해보이던 그의 얼굴이 스쳐지나가긴 하지만.
“잘 잤고. 하하.”
“……그래?”
뭣 때문인지 약간 발그레해지는 조카의 얼굴을, 은아는 탐색이라도 하듯 훑었다.
어젯밤엔 집의 방음이 너무 뛰어난 탓인지 딱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일이 과연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반응으로 대충 보아하니 아예 효과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흐음. 조만간, 좋은 소식을 기대해 봐도 되려나…….
“참. 그나저나, 뭐 먹고 싶은 거 따로 없어? 다음 주엔 뭐 해줄까. 그 날은 현 서방도 쉬지?”
“응? 언제 말이야?”
“얘가. 다음 주에 너 생일이잖아. 까먹었어?”
“……내 생일?”
헐. 그게 벌써 그렇게 됐나?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예원은 순간 깜짝 놀라 은아를 바라보았다.
작년 생일을 보낸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생일이 돌아왔다니.
최근 들어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았기 때문인지, 날짜 감각에 특히 무뎌져 있었던 듯싶었다.
“이젠 하다하다 생일까지 까먹어? 그러다 엄마아빠 제삿날도 까먹어라.”
“치.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돈 아니다, 뭐…….”
예년까지만 해도 생일 때는 항상 집에서 지원, 이모와 함께 케익을 자르고 조촐한 파티를 했던 예원이었다.
소박하게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고, 나이에 맞게 촛불이나 불면 장땡.
딱히 생일선물 같은 걸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 생일은 그와 보내는 첫 생일이었고, 평소와는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 생일 때는 아무것도 몰라서 별다른 것도 못 했는데…….
내 생일엔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무튼, 어떡할 거야. 그 날 집에 올 거야? 올 거면 미리 준비해두고.”
“……글쎄.”
어쩌지. 예원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그때,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이 갑자기 번뜩 떠올랐다.
‘그때까지 한 번 생각해봐.’
‘촬영 끝나면 나랑 같이 하고 싶은 거. 아니면, 뭐 나한테서 받고 싶은 것도 좋고.’
하고 싶은 것……. 받고 싶은 것…….
그가 했던 말이 차례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뇌리를 천천히 스쳐지나가는 검고 화려한 모양의 무엇.
“……!”
잠깐.
순간 예원은 모처럼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그래. 그 날이라면, 나도…….
“얘가 또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어떡할 거냐니까? 올 거야?”
득달같이 이어지는 이모의 채근에, 예원은 딱 잘라 말했다.
“아니, 그 날은 안 될 것 같아. 이모.”
“뭐? 왜.”
“……그런 게 있어. 이모는 몰라도 돼.”
아무래도 그 날은…… 내가 따로 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뭔 소리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은아를 보며, 예원은 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그 후, 시간은 무참히도 빠르게 흘러 금방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촬영장.
“……컷! 오케이!”
경쾌하게 오케이 사인을 날린 장 감독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기다려 왔던 그 말을 던져주었다.
“촬영 끝!”
와아-!
진정한 끝을 알리는 외침에 현장에 있는 전 스태프가 환호했다.
물론 그 중심엔 민혁과 혜인도 있었다.
아낌없는 박수를 친 장 감독은 서로를 향해 예의상의 인사를 나누고 있는 그들을 향해 제일 먼저 다가갔다.
“민혁 씨, 혜인 씨. 그동안 진짜 수고했어. 다 두 사람 덕분이야.”
“아닙니다. 다 감독님과 스태프 분들 덕분이죠. 대본 재밌게 잘 써주신 작가님 덕분이고요.”
“아냐. 두 사람 아니었으면 우리 드라마 이 정도로 못 나왔어. 우리가 감사해야지. 아무튼, 이제 한 시름 덜었으니까 종영 때까지 푹 쉬어. 알았지?”
흐뭇한 얼굴로 민혁의 어깨를 탁탁 친 장 감독이 추가로 낮게 소곤거렸다.
“그리고 이건 아직 비밀인데, 이번에 워낙 반응이 좋아서 우리 포상휴가 보내준다는 얘기까지 있어. 진짜 수고했어, 두 사람.”
“하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용히 대답한 혜인은 장 감독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민혁의 얼굴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한 작품을 무사히 훌륭하게 마쳤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와의 촬영이 끝났다는 해방감 때문일까.
그는 어쩐지 무척 후련하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것을 보자 이상하게 배알이 꼴렸다.
“둘 다 뒤풀이 갈 거지? 내가 특별히 오늘 좋은 데로 예약해놨어. 오늘 아니면 우리 종방연 때까지 못 볼 텐데, 아쉽잖아.”
“……아, 뒤풀이요……?”
이런. 방심하던 민혁의 얼굴에 살짝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마치자마자 바로 집으로 갈 작정이었기에 뒤풀이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주연배우가 빠지는 뒤풀이는 아무래도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 않을 거였다.
‘이걸 어쩌지.’
그가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뭉근히 진동했다.
“저,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어어, 그래.”
그는 얼른 자리를 옮기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전화의 발신자는, 역시나 그녀였다.
액정에 뜬 ‘엄지공주’라는 저장명을 읽은 그는 곧장 기분 좋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민혁 씨.]
그런데 그때, 그녀답지 않게 약간 허스키해진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그는 순간 덜컥, 심장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예원아,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아요.]
“뭐? 갑자기 어디가.”
[그냥, 왠지 모르게 으슬으슬 추운 것도 같고……. 머리도 좀 띵한 것 같고…….]
그 소리를 듣자, 민혁의 얼굴엔 언제 기뻤냐는 듯 금세 걱정이 어렸다.
지난 번 병치레를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가 촬영 때문에 며칠 신경을 쓰지 못한 새, 칠칠치 못한 그녀가 또 어디서 웬 병을 얻어온 모양이었다.
“몸이 안 좋으면 병원부터 갔어야지. 대체 언제부터 그랬어? 약은 먹었어?”
[아니요……. 그냥, 가만 놔두면 나을 것 같아서…….]
만날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이럴 땐 바보가 따로 없는 여자다.
남은 그렇게도 챙기면서 왜 제 몸 소중한 줄은 모르는 건지.
하여튼 걱정하게 만드는 데는 1등이라니까.
“가만 놔둔다고 병이 나으면 병원은 대체 왜 있어. 기다려, 금방 갈 테니까. 일단 가서 보자.”
순식간에 마음이 급해져 있었다.
지금 가면 시간이 얼마쯤 걸리려나.
전화를 끊고 곧장 촬영장을 바삐 떠나려는 그에게, 멀찍이 서 있던 혜인이 다가와 물었다.
“민혁 씨, 어디 가? 뒤풀이 안 가?”
“어?”
아, 맞다. 뒤풀이.
예원이 아프단 소리에 그새 다른 건 다 잊어버린 채였다.
멈칫하던 그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예원이가 아프다네. 뒤풀이는 아무래도 못 가겠다. 나 지금 좀 가 볼게.”
“뭐? 지금?”
하지만, 그를 가로막은 혜인의 미간은 잔뜩 좁아졌다.
“아니, 그래봤자 죽을 병 걸린 것도 아닐 텐데 뭐가 그렇게 유난이야. 예원 씨가 무슨 애도 아니고. 민혁 씨가 꼭 그렇게 꼬박꼬박 달려가야 돼?”
자기가 무슨 의사야 뭐야.
혜인은 어이가 없는 나머지 콧방귀를 뀌었다.
뒤풀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관계자들만 가지는 비밀스러운 자리였다.
어쩌면 다음 작품에 대한 논의도 나올 수 있고, 그 배우의 향후 평판도 좌지우지 될 수 있는 그런 자리.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일을 내팽개치고 가는 게 고작 집이라니.
가만 보고 있자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걜 그 정도로 좋아한다는 건가?
아니, 그 계집애가 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민혁 씨. 지금까진 민혁 씨가 뭘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오늘은 진짜 아닌 것 같아. 만날 촬영만 마치면 쪼르르 달려가더니……. 오늘 같은 날까지 꼭 그래야겠어? 예원 씨도 그래. 민혁 씨 바쁜 거 뻔히 다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만날 자기 맘대로 오라 가라 할 수가 있어? 솔직히 진짜 한심해. 배우자에 대한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냐?”
금세 열이 뻗친 그녀가 지금껏 그의 앞에선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홧김에 다다다 늘어놓았다.
하지만,
“……조혜인.”
그녀의 말은 곧 그의 서늘한 음성에 의해 뚝 잘리고 말았다.
“예원이에 대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마. 너 따위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람 아니야.”
“……뭐?”
차갑게 식은 그의 눈초리는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렇잖아도 얘기 한 번 하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너야말로 내 부인에 대한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 같다. 이제 그만해.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누가 혹시 듣기라도 할까, 그는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조금은 불쌍했던 적도 있었어.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는데 쟨 왜 아직도 나한테 집착하나. 정작 날 버렸던 건 자기면서……. 하루빨리 정신 차렸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그건 내가 딱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아니라서 놔뒀었어. 그냥 내가 신경 안 쓰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가 다시 눈을 번뜩였다.
“난 이제 내가 보호해야 할 가족이 있고, 아내가 있어. 날 건드리는 건 그렇다 치지만, 내 아낼 건드리는 건…… 누구라도 용서 못 해.”
“…….”
“그러니까 이쯤에서 제발 그만하길 바란다.”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촬영장을 벗어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혜인은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보호?”
그가 남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입술을 타고 띄엄띄엄 곱씹혔다.
가족, 아내…….
용서를, 못 한다고……. 감히 날…….
“……하.”
웃겨, 정말.
혜인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옷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이 주먹을 꽉 쥐었고, 그 계집애의 충고로 바짝 깎았던 손톱은 그녀의 손바닥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두고 봐, 어디.’
악에 받친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그 일이 벌어지고 나도, 당신이 이렇게까지 오만하게 굴 수 있을지.
* * *
장 감독에게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하자마자 천 리 길을 한 걸음처럼 달려왔다.
집에 도착한 그는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곧장 그녀의 이름을 불러댔다.
“예원아! 예원아!”
온몸이 으슬으슬하고 머리까지 아프다 했으니, 아마도 방에 누워있을 게 분명할 터였다.
그는 고요하고 어두운 1층을 지나 곧장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하지만 비로소 2층에 올라선 그의 눈에 보인 건…….
웬일인지 방 안이 아닌 바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의 인영이었다.
“……?”
잠깐만. 저게 뭐지?
그는 순간적으로 제 눈을 의심했다.
연주황 빛의 미등이 비추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사방에 얕은 어둠이 깔린 가운데,
여자는 진갈색의 긴 생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하늘하늘한 소재의 슬립가운을 입고 뒤돌아 서 있었다.
게다가 그 밑으로는 매끈하게 쭉 뻗은 하얀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고.
환자가 입고 있다고 하기엔, 누가 봐도 너무 얇고 또 과하게 섹시한 의상이었다.
‘이, 이게 지금…….’
잠시 상황 파악이 안 된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스위치를 누르려 했다.
그때였다.
“……불 켜지 마요.”
아까와는 달리 아주 멀쩡한 그녀의 목소리.
또 한 번 이상함을 느낀 민혁은 조심스레 그녀를 다시 불렀다.
“……예원아?”
그러자, 여자는 그제야 그를 돌아보았다.
“…….”
그를 확인한 그녀의 입꼬리가 말없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함께 핑크빛의 슬립가운 안으로 보이는, 검정색의 무엇.
“민혁 씨…….”
미처 뭐라 할 새도 없이, 여자는 곧바로 뛰어와 그의 품에 폭 안겨들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