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74화 (74/102)

74. 신종 고문

2018.12.18.

잠시 뒤.

소파 앞으로 딸린 테이블 위에 고풍스러운 외양의 커피 잔이 탁, 놓였다.

“여기, 드세요.”

“어, 그래. 고맙다.”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으로 커피를 홀짝이는 윤 교수를 보며, 옆 편 소파에 나란히 앉은 예원과 지영은 서로 넌지시 눈빛을 교환했다.

‘너, 미리 연락 받았어?’

‘아니? 그럴 리가.’

일전에 시간 나는 대로 한국에 들어가겠다는 기별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그 날이 오늘이 될 줄은 전혀 몰랐었다.

갑자기 웬 일이시지.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건가.

“근데 교수님은, 어떻게 연락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예원이 조심스레 묻자, 커피 잔을 내려놓은 윤 교수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어, 안 그래도 조만간 들어오려고 했는데. 이번에 딱 시간이 마침맞더라고. 뭐, 언제까지 거기 있을 수도 없고 하니까.”

“그럼…… 이번엔 아예 들어오신 거예요?”

“응. 근데 이러다가 또 휙 어디 가버릴 수도 있고. 나도 아직 장담은 못 하겠다.”

“아, 네…….”

원래도 약간 한량스럽긴 했지만, 학교고 카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인 윤 교수는 홀가분한 유랑객 같은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문득, 오래 전 민혁이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삼촌은 더 이상 이 카페를 굴리실 생각이 없어요. 홍예원 씨도 잘 알다시피 워낙 바쁘게 사신 분이잖아요. 여길 나한테 맡기고 가신 것도, 1년 뒤에 아예 나에게 떠넘길 생각으로 그러신 거예요. 내가 사업 쪽에 관심 있다니까 별 고민도 않고 바로.’

……그때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렇게 홀랑 떠나버린 윤 교수가 야속해 견딜 수가 없었더랬다.

하지만 그 결정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민혁과 계약결혼을 했을 일도, 지금 이렇게 그와 행복한 나날을 보낼 일도 결코 없었겠지.

그리 생각하니 그만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렇게 치자면…… 교수님이 우리한테는 은인인 건가.’

어느샌가 백팔십도 변해버린 자신의 생각이 우스워서, 예원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고, 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 뭐가요?”

“뭐기는. 너랑 민혁이 말이야.”

“……아.”

“얌전한 고양이들이 부뚜막엔 제일 먼저 올라간다고……. 내가 미국에서 너네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말을 잇던 윤 교수가 그녀를 밉지 않게 흘겼다.

“사업하라고 붙여놨더니만, 이것들이 연애사업이나 하고 말이야.”

연애사업이라.

사실은 사실이기에, 그녀로서도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하하하…….”

쑥스러워진 예원은 옆에 앉은 지영을 의미심장하게 보고는 몸을 비비 꼬았다.

그러자 이번엔 불똥이 별안간 지영에게로 튀었다.

“김지영이, 넌 결혼 언제 할 거야.”

“네?”

“너도 얘랑 동갑이잖아. 얼른 시집 안 갈 거야?”

어라, 내 얘기하다 갑자기 왜 얘한테?

지영이 괜히 곤란해지기라도 할까, 예원은 서둘러 중재하기 위해 나섰다.

“아휴, 교수님도 참. 제가 또래보다 결혼을 빨리 한 거죠! 그리고 지영이 얜 지금 남자친구도 없어요.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그래?”

“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지영을, 윤 교수는 다소 미심쩍은 듯 바라보았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네?”

“좋아하는 사람 말이야. 좋아하는 사람도 없어?”

순간, 지영의 눈빛이 동요했다.

일순 하얘진 머릿속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단어만이 둥둥 떠다녔다.

“어……. 그게…….”

……정말이지 희한한 일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지만.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있어요.”

홍지원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뭐?”

저도 모르게 꺼내어진 폭탄선언.

예원은 퍼뜩 놀라 지영을 쳐다보았다.

“뭔 소리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있어, 그런 사람.”

“헐? 진짜?”

“…….”

“뭐야, 그랬음 진작에 나한테 말했어야지! 와, 김지영. 네가 나한테 이러기냐.”

배신감에 입을 딱 벌리는 친구에게, 지영은 주저주저하며 대꾸했다.

“……아니,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서…….”

“엥?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모르긴 뭘 몰라?”

답지 않게 대답을 머뭇거리는 게 어쩐지 수상하긴 한데.

예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뭐야, 누군데. 누구길래 그래?”

“자, 자. 며느님. 지방방송은 그쯤 하시고.”

“…….”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은 있다니까 다행이네. 누군지 몰라도 잘 해봐.”

윤 교수에 의해 제지당하긴 했지만, 지영을 향한 예원의 의심어린 눈길은 쉬이 거둬지지 않았다.

‘이따 봐, 너.’

‘…….’

그 무언의 압박을 지영은 애써 외면했다.

물론 이따 볼 일도 절대 없을 예정이었다.

“그나저나, 요즘 에덴은 어때. 장사 잘 되냐?”

“네? 에덴……이요?”

“그래, 민혁이랑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했을까 싶다마는.”

“…….”

“나 없는 동안, 매출은 좀 늘었겠지?”

아뿔싸. 매출?

방심하고 있던 예원의 얼굴이 일순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어, 그, 글쎄요. 매출이야…… 뭐…….”

윤 교수가 떠난 에덴은 사실 지금까지 거의 현상유지만 해온 수준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민혁의 인기로 인해 방문객이 늘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그다지 유의미한 매출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한데 그 모든 걸 전 사장 앞에서,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렴, 사장이 연예인씩이나 되는데 당연히 늘어야지. 그 정도 마케팅 효과면 두 세배는 족히 뛰었겠구만.”

“…….”

“못해도 ‘카페 빈’보다는 잘 나왔겠지. 안 그러냐?”

……하하하.

그저 웃음만 나지요.

“하기야, 말로 들어서 뭐하겠냐. 가서 직접 보는 게 제일이지.”

“…….”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같이 가보자 얼른.”

말을 마친 윤 교수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지, 지금요?”

그를 따라 후다닥 일어난 예원이 물었다.

“그럼. 좀 있으면 저녁인데, 얼른 갔다가 후딱 와야 시간이 맞지.”

“…….”

“어디, 나 없는 동안 카페를 어떻게 건사했나, 한 번 구경하러 가 볼까?”

그의 입가에 걸리는, 어딘지 모르게 사악한 미소.

그런 그를 보며 예원은 땡감을 베어 문 듯 떫은 미소를 지었다.

‘……어떡해.’

난 죽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고하듯, 정수리에 땀이 삐질 흘렀다.

* * *

“안녕하세요, 에덴입니다~”

늦은 오후, 기계적으로 멘트를 내뱉던 하연이 출입문 쪽을 보곤 눈을 반짝 떴다.

“어머, 사장님!”

“잘 있었냐, 유하연?”

“와, 이게 얼마만이에요!”

예원의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윤 교수의 모습에, 하연은 격한 반가움을 표시하며 달려 나왔다.

“유하연이 까불대는 건 여전하구만. 근데 무슨 인사가 그렇게 힘이 없어서 되겠어? 어디서 피죽도 못 얻어먹은 놈 같이 그러고 있어.”

“히히, 죄송해요. 어젯밤에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달렸더니 오늘따라 좀 피곤해서……. 근데 대체 언제 오신 거예요? 언니한텐 아무런 말도 못 들었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들은 게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야.

“연락도 없이 오늘 갑자기 오신 거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진짜? 오올~ 사장님 완전 작정하고 서프라이즈로 오셨네요.”

오버스럽게 감탄하던 하연은 슬쩍 윤 교수의 주위를 살폈다.

“근데, 저 먼 미국까지 다녀오시고…… 선물은요?”

“으이그. 어쩐지 유별나게 반긴다 했다. 너, 지금껏 선물만 기다렸지?”

“네? 아닌데욥. 전 순전히 사장님이 반가워서 그런 건데욥.”

“짜식이. 입에 침이나 바르고 얘기해, 인마.”

귀엽게 너스레를 떨어대는 하연 덕분에 세 사람은 잠시 한바탕 웃었다.

“참. 가윤 매니저님은?”

“아, 버스 때문에 좀 늦으신다고 했어요. 이제 곧 오실 텐데.”

“가윤 매니저? 새 사람이냐?”

“아, 네. 교수님 가시고 얼마 안 돼서 새로 충원했었어요. 어, 저기 오네. 가윤 씨!”

마침 출입문으로 들어오던 가윤의 발걸음이 그들을 발견하고 우뚝 멈추었다.

“……점장님? 오늘 근무도 아니신데 매장엔 웬일로…….”

“아, 오늘 전 사장님이 갑자기 오셔서요. 인사하세요. 여긴, 저희 전 사장님 ‘윤정한’ 교수님.”

“……안녕하세요. 주가윤입니다.”

“어, 그래. 반가워요.”

그런데 그때, 고갯짓으로 인사를 받던 윤 교수가 대뜸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세요?”

“…….”

눈치 챈 예원이 기껏 물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안경너머로 가윤을 꿰뚫어 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

“…….”

“얼굴이 낯이 익은데.”

“……제가요?”

“…….”

“그, 글쎄요. 저는 잘…….”

아니, 방금 만난 사람한테 다짜고짜 이게 뭔.

중간에 선 예원은 얼른 무마에 나섰다.

“에헤이, 우리 교수님 특기 또 나오시네. 학교 다닐 때도 만날 애들한테 나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냐고 그러시더니. 여기서 또 시작이세요?”

“으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로 어딘가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그는 여전히 제 머릿속을 더듬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 가윤이 그보다 먼저 나섰다.

“예, 예전에…… 여기 손님으로 자주 들른 적은 있어요. 아마 그래서…… 기억하시나 봐요.”

“……그래요?”

하지만 이번엔 예원도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려야만 했다.

예원도 에덴의 초기 멤버라면 멤버였고, 윤 교수가 기억할만한 손님이라면 응당 그녀도 기억을 해야 마땅했으니까.

허나 그녀의 기억엔 가윤 비스무리한 얼굴조차 없었다.

처음 면접을 볼 때도 전혀 그런 눈치를 채지 못 했었고.

“뭐 아무튼 간에. 앞으로도 점장님 도와서 잘 해줘요.”

“……네, 알겠습니다. 전 가서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어쨌거나,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한 가윤은 먼저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럼 사장님, 이제 다시 미국 안 가시는 거예요?”

“글쎄다. 아마 당분간은?”

“우와. 그럼 다시 복귀하시려고요?”

“이제 내 가게도 아닌데 복귀는 무슨 복귀. 눌러앉을 거면 우리 집사람도 같이 왔겠지.”

“아…… 그러고 보니까 사모님이 안 계시네. 사모님은요?”

“아직 미국에. 거기 일 좀 더 보고 며칠 뒤에 올 거야.”

“헐. 사장님 외로우셔서 어떡해요?”

“허허, 그러게나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외롭지 않게 조카네 집에서 신세 좀 지려고.”

윤 교수와 하연의 대화를 별 생각 없이 듣고 있던 예원은 순간 파드득 놀랐다.

“……네?!”

“허참. 뭘 그렇게 놀래? 그 집에 널린 게 침대더만. 개 중 하나만 내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까지 기함할 일이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가만있어 봐. 우리 집에 침대가 몇 개더라?

두 개? 세 개?

교수님이 건넛방에서 주무시면, 그럼 민혁 씨는?

난 어디서 자?

온갖 질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줄줄이 흘러나왔다.

“자, 홍점. 그럼 이제 우린 사무실로 들어가서 조용히 얘기해 볼까.”

“네? 아, 네…….”

어쩐지 자꾸만 교수님께 말리고 있는 것 같다.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을 억지로 구기며, 예원은 윤 교수의 뒤를 멍하니 따랐다.

* * *

“……휴.”

촬영을 마치고 귀가하는 저녁길.

성환과 민혁만이 타고 있는 밴 안에는 민혁의 낮은 한숨이 울려 퍼졌다.

“땅 꺼지겠다, 자식아. 왜 그렇게 한숨이야?”

나까지 맥 빠지게.

성환의 눈이 룸미러를 힐끗 일견했다.

오늘 촬영도 순조롭게 끝났겠다, 이제 집에 가면 곧 사랑스러운 아내도 볼 수 있겠다.

객관적으로 한숨을 쉴 이유가 전혀 없건만 이상하게도 민혁의 표정은 아까부터 어두웠다.

“……형.”

“응?”

“……아냐, 아무것도.”

“뭐야, 싱겁기는.”

자식이 말을 하려다 말고 난리야.

대수롭지 않게 넘긴 성환이 피식 웃었지만, 민혁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미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의 속은 저 위의 밤하늘만큼이나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떻게 넘기지.’

그도 그럴 게, 사랑하는 여자를 옆에 두고도 손끝 하나 댈 수 없는 이 맘을 누가 알리오.

그야말로 신종 고문이 따로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도 처음부터 무작정 이렇게 참을 생각은 아니었다.

며칠 전, 그녀의 친척으로부터 문제의 전화가 왔던 그 날.

그 날의 일을 겪기 전까지는.

‘……아뇨. 이제 안 울게요. 약속.’

한참의 눈물바람이 이어진 후.

발갛게 부은 얼굴로 저를 향해 애써 웃는 아내를 보던 민혁은 순간 이성을 잃었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가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깨물면 상큼한 맛이 날 것 같은 그녀의 입술을 마음껏 탐하고,

뽀얀 우윳빛 살결을 정성스레 매만지고, 그녀를 제 품에 가득 넘치게 안고 싶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이었던가.

그의 절실함을 알아챈 듯, 다행히 그녀도 민혁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는 내심 그 날이 마침내 두 사람의 역사적인 날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 어…… 이게…… 그, 그러니까…….’

‘너, 너무, 간지러워서…….’

탁, 하고 제 손을 부여잡는 손.

그리고 잔뜩 겁에 질린 듯한 그녀의 표정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왜 저러지.

잠시 멍해있던 그는 예원이 후다닥 욕실로 줄행랑을 치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

설마, 무서웠던 건가?

그게 아니면, 혹시 불쾌했나?

하긴, 서로 마음이 통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남자와의 관계에 있어 거의 모든 게 처음인 그녀가, 그의 손길에 그런 느낌을 받는 것도 딱히 무리는 아닐 터였다.

아무리 그를 사랑하고 있다 할지라도.

‘젠장.’

한순간 제가 짐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의중은 생각지도 않고, 성급히 진도 나가기에만 급급했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조금 더 참았어야 하는데.’

그 이후 며칠 간,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러워진 것 같은 예원의 태도가 눈에 띌 때마다 그는 자꾸만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녀를 다그치거나 종용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는데.

일이 어찌 이렇게까지 흘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그녀가 먼저 맘을 열고 다가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끓어오르는 젊은 혈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곁에 있으면 도통 자신을 제어하기가 힘들었기에, 그는 차라리 그녀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을 택했다.

그런데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림의 떡을 보는 것이 이런 걸까.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나머지 아무래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을 때면, 그는 마음속의 바늘을 쿡쿡 찌르며 겨우 자신을 진정시켜야 했다.

아마 오늘 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후.’

그래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집에 들어가 그녀를 보면,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고,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럼 돼.

스스로 정해놓은 행동 강령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는 마음을 애써 다잡고 있었다.

.

.

.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저, 다 씻었어요.”

“…….”

“민혁 씨도…… 얼른 씻어요.”

제가 어김없이 얄궂은 운명에 처해지고 말 거라는 사실을.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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