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69화 (69/102)

69. 심장에 해로운 남자

2018.11.30.

“……옛날에, 조혜인 씨랑 사귀었던 거, 맞죠?”

한동안 그를 향한 감정 탓에 골몰하느라, 저도 모르게 맘속 구석 깊은 곳으로 넣어두어야만 했던 의심.

그 의심은 오늘 조혜인을 만난 이후 이미 확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질문을 뱉어 놓기까지 그간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허비해왔었던가.

이제는…… 더 이상 바보처럼 굴고 싶지 않다.

물음표를 던진 예원의 눈썹이 초조하게 들썩였다.

“…….”

반면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민혁의 얼굴에는 의외라는 빛이 띠었다.

물론 좀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예원은 생각했다.

예전부터 조혜인 관련 질문엔 무척 민감하게 반응했던 남자니까.

게다가 아무리 솔직담백한 그녀일지라도,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이렇게 바로 돌직구를 날려 올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좀…… 무리수였나?’

대답을 들으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싶었던 순간.

그는 허무하게도 곧장 입을 열었다.

“응, 맞아.”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그럼. 내가 거짓말을 왜 해.”

딴엔 굉장히 어렵게 어렵게 물어본 질문이었다.

당연히 긍정의 대답이 들려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세 마디 만에 끝이 날 줄이야.

예원의 표정은 대번 샐쭉해졌다.

“……뭐야. 왜 이렇게 당당해요?”

“당당하지 못할 건 또 뭔데.”

“아니…… 그래도 전 여친인데…….”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태연하게 맞받아치는 터에 순간적으로 헷갈리기까지 했다.

이 남자, 지금 나한테 상당히 미안해해야 하는 상황 같은데?

아닌가?

“언제쯤…… 사귀었어요?”

“글쎄. 한 십년 전쯤?”

“……얼마나 사귀었는데요?”

“한, 일 년 정도?”

“……허.”

“왜.”

“아니…….”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전 여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가 있지?

것도 나한테?

“내가, 무슨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런 걸 막 말해요?”

“오해 안 하잖아. 나 못 믿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마음먹고 취조하려 했더니 어째 되레 말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당황한 그녀는 헛숨을 삼킨 뒤 이내 설명했다.

“아무리 ‘비즈니스’라도 그렇지, 어떻게 전 여친이랑 한 장소에서 일을 하냐고요. 엄연히 내가 있는데.”

“…….”

“그냥 그런 일도 아니고, 키스신 같은 것도 막 찍고 그러면서…….”

당돌하게 묻던 조금 전과 다르게, ‘키스신’ 대목에 이르자 말꼬리가 절로 기어들어간다.

아니나 다를까 민혁의 얼굴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음이 떠올랐다.

“이제야 실토하시는구만. 그래서, 그 키스신 때문에 질투한 거야?”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하기도 싫었다.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물론 좀 짜증이 난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것보단 좀 더 고차원적이었다고…….”

그러나 횡설수설 변명하던 예원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아, 그래요! 맞아요. 근데 뭐요.”

내가 이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디 외간여자랑, 그것도 전에 감정이 있었던 여자와 같이 일을 하냐고.

혹시, 아직도 그 여자한테 약간 마음이 있는 것 아니냐고.

그렇게 그를 추궁하고 단단히 혼내려 했던 포부는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그라져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건, 오로지 그의 앞에서 솔직하고 싶단 마음뿐.

‘휴.’

이참에 그를 확실히 단속해두라던 지영의 말이 아직까지도 선연히 들려오는 듯했지만.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싶지는 않다.

부정하고, 거짓말하면서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는 건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족했다.

“……잘했다고. 아주 잘했어.”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다행히 민혁은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지 비즈니스니까 편하게 말하는 거야. 걱정할 필요 없어. 예전엔 그랬어도, 지금 혜인이 걘 그냥 내 동료일 뿐이야. 일만 하고, 평소엔 말 한 마디 잘 안 섞는 동료.”

“…….”

“그러니까 괜히 불안해하지 마. 난 걔한테 더 이상 아무 감정 없으니까.”

아니, 솔직히 말해 아무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케케묵은 분노와 증오 정도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게 맞으니까.

하지만 그걸 일일이 그녀에게까지 말하고 싶진 않았다.

예원이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배신감과 분노로 얼룩져 있던 그의 세상은 어느새 백팔십도 변해 있었으므로.

좀 더 따뜻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쪽으로.

“……그럼 됐어요. 사실, 그거 확인하려고 물어본 거예요. 그럼, 두 사람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닌 거죠? 친한 사이도?”

“당연하지. 철천지 원수라면 또 모를까.”

그제야 후련하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민혁은 짐짓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아까 걔 얼굴 꽤 볼만하던데. 그것도 작전이었어?”

“뭐가요? ……아.”

멍하니 반문하던 예원은 금방 그가 말하는 바를 깨달았다.

“……네. 처음부터 생각했던 건 아닌데, 상황이 그렇게 되니까 약간 골려주고 싶더라고요. 지난번에 나 골탕 먹인 것도 그렇고, 이참에 나도 본때 좀 보여줘야겠다 싶어서.”

“골탕?”

“그, 저번에 컵 깨뜨린 거요.”

잠시 망설이던 예원은 지난 번 그 사건의 진실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그럼, 그걸 당신이 깨뜨린 게 아니었다고?”

“당연하죠! 내가 뭐 음료 컵을 하루 이틀 만지나. 이래봬도 그 정도 조심성은 있다고요.”

마뜩잖은 표정을 짓던 그녀가 혼자서 팔짱을 끼며 진지하게 읊조렸다.

“나도 처음엔 좀 긴가민가했었는데, 아니에요. 확실히 그 여자가 떨어뜨린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혼자 피해자 코스프레하고……. 아후.”

“…….”

“어이가 없어서 진짜. 민혁 씨만 아니었음, 내가 먼저 그 자리 확 엎어버렸을지도 몰라요.”

허. 이제야 모든 사실을 안 그는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예원은 어쩐지 사이다 한 박스를 마신 듯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다.

‘아오, 통쾌해.’

진작 좀 이렇게 말할 걸. 괜히 혼자서 속만 끓였네.

하긴, 지금이라도 말하게 된 게 어디겠냐마는.

“아무튼, 일 핑계로 나한테 먼저 접근한 것도 좀 괘씸하고 해서…… 그냥 홧김에 그런 거예요. 좀, 유치했죠?”

“…….”

“내가 너무 심했나?”

그에게 묻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예원에게,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거야말로 진짜 잘했어. 앞으로도 그런 기미 보이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눈치 보지 말고.”

“…….”

“그리고 걔한텐 내가 단단히 일러둘게. 허튼 짓 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앞으론 걱정하지 마.”

진지한 얼굴로 당부하는 남자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도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정말이지, 진짜배기 동반자가 생긴 느낌.

“……네, 알았어요.”

그렇게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던 예원은 순간 억울한 듯 말했다.

“근데…… 오늘 일은 꼭 질투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연기한다는 사람이 기본자세가 안 돼 있더만. 아니, 그렇게 귀신같은 손톱을 하고 어떻게 바리스타 할 생각을 했대요?”

“…….”

“하여튼 빠져가지고. 얼굴만 예쁘면 다야? 죄다 콩만 해가지고!”

얼굴도 콩만 하고, 코도 요만하고. 근데 눈은 또 왜 그렇게 커? 쓸데없이.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한테나 줄 것이지!

하여튼 신이란 건 없는 게 분명해. 세상 불공평하다니까요!

“…….”

처음엔 단순히 혜인의 직업의식을 비판하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질타가 엉뚱한 쪽으로 빠진다.

그런 그녀를 할 말을 잃고 지켜보던 민혁은 저도 모르게 비싯 웃었다.

질투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지.

하지만 이것도 어쩐지 질투의 일환 같아 보이는 건, 당신에게 미친 나의 터무니없는 착각일까.

“아. 참, 나 당신한테 보여줄 거 있어.”

“뭔데요?”

한창 혜인의 흉을 보는 데 열을 올리고 있던 예원이 멈칫했다.

그는 바지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의 앞으로 디밀었다.

“자.”

“어? 이건…….”

남자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그것은, 그녀가 요사이 오매불망 찾아 다녔던 그 사진이었다.

“뭐야. 민혁 씨가 가져간 거였어요?”

예원의 눈이 금세 기쁨으로 커다래졌다.

난 또 어떻게 된 거라고.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애먼 데만 찾았다며 허무하게 웃고 있는데, 그가 불쑥 답했다.

“내가 가져간 거 아닌데?”

“네? 그럼 이게 어디서 났어요?”

“사무실 캐비닛에서 주웠어.”

“캐비닛이요……?”

갑자기 웬 캐비닛? 거긴 찾아볼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러려니 하기엔 너무도 생뚱맞은 곳이라 당황스러웠다.

“……누가 주워서 거기다 넣어놨나?”

분실물 있다고 말이나 해주지.

뭐, 아무렴 어때. 어쨌든 찾았으니 된 거 아냐.

“아무튼 고마워요, 계속 찾고 있었는데.”

픽 웃은 예원은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

“잠깐만.”

그의 손이 그녀의 손길을 휙 피했다.

“왜요?”

“나, 이거 가져도 돼?”

“네?”

예원의 얼굴은 얼떨떨해졌다.

“생각해 보니까,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 부인 사진 한 장 안 갖고 다닌다는 게 영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내가 찾은 김에, 내거 하려고.”

“…….”

“안 돼?”

그리 말하는 남자는 그답지 않게 부쩍 애 같은 모습이었다.

맘에 드는 것을 제멋대로 집어서는, 내거 하게 해달라고 찡찡대는 아이 같다고나 해야 할까.

“……쳇.”

귀여워가지고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잠시 생각하던 예원은 이내 가방 속에서 지갑을 꺼내 펼쳤다.

“그럼 그거 말고, 이거 가져요.”

이윽고 그 속에서 천천히 꺼내어지는 사진 한 장.

“……뭐야, 이거 언제야?”

이럴 수가.

생각지 못한 대어를 받아든 민혁의 얼굴은 삽시간에 밝아졌다.

“몇 년 전이요. 지영이랑 대구인가 어디인가 놀러갔다가, 오랜만에 한 번 찍자 해서 찍은 거예요.”

특유의 휘황찬란하고 귀여운 효과로 장식된 스티커 사진 속에서는 앳된 모습의 예원과 지영이 풋풋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생소한 것이, 미처 몰랐던 그녀의 일상을 몰래 구경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아…….”

“아님 이것도 있어요.”

이어 그녀는 사진 한 장을 더 꺼냈다.

“이건 또 언제야?”

“이건…… 아마도 대학교 때? 급하게 찍느라고 좀 몰골이 별로긴 한데.”

이번 것은 느낌이 또 약간 달랐다.

증명사진 정도로 보이는 그것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듯한, 화장기가 거의 없는 말간 예원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특유의 맑고 큰 눈이 그의 눈 속에 곧장 들어와 박힌다.

홀린 듯 사진을 들여다보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지금도 어린데, 이땐 더 어리네.”

그녀가 스무 살이었을 적 찍은 사진이라면, 이때 그는 스물넷 정도 됐을 무렵일 터였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하며 뒤늦은 방황을 했었던 시기.

그때 그는 날카롭게 지나간 첫사랑과 뼈아픈 과거로 인해 한참 동안 괴로워했었다.

‘만약 이 여잘,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만약’이라는 말은 부질없고 소용없다.

해서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난 지금보다 한참 더 빨리 행복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엥? 내일모레면 서른인 사람한테 어리다뇨!”

“그래도 나보단 어리잖아.”

“……참나.”

자기가 많은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지.

어이없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그녀를 모른 척하며, 민혁은 두 사진 중에서 그녀의 증명사진을 골라잡았다.

“난 이걸로 할게. 이건 지영 씨까지 같이 있는 사진이니까 좀 그러네.”

“뭐, 그럼 그렇게 하든지요.”

예원이 남은 한 장을 거두어가자, 씩 웃은 그는 예원에게로부터 친히 하사 받은 사진을 소중히 주머니 안에 넣었다.

잠시 뒤, 그것은 곧 그의 지갑 안에 고이 모셔지게 될 예정이었다.

“내일이지? 지원이 출발하는 날.”

“아, 네.”

“난 촬영하느라 못 가볼 것 같으니까 대신 안부 좀 전해줘. 힘도 북돋워주고.”

“알았어요. 안 그래도 아침에 일찍 가보려고요.”

“그래. 큰 집에 혼자 있으면 위험하니까, 잘 때 문단속 잘하고.”

“쳇, 나 혼자 자는 게 무슨 하루 이틀인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런 건.”

그가 제 남자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었고, 물어볼 것도 확실히 물어보았다.

볼 일 다 봤으니, 이제는 빠르게 발을 빼야 할 시점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요.”

한데 그런 그녀를, 민혁은 황급히 붙잡았다.

“잠깐만.”

“……또 왜요.”

그는 무슨 생각인지 잠시 머뭇거렸고, 예원은 자연히 답답해졌다.

“왜요, 나 더 이상 여기 있기 눈치 보인단 말이에ㅇ…… 흡!”

바로 그 순간, 예원의 말은 온기를 잔뜩 머금은 그의 입술에 의해 가로막혔다.

‘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잇새를 톡톡 두드리자, 그녀의 입술은 곧 불시의 침입자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왕방울만해졌던 눈은 이내 온순하게 감겼고, 열에 들뜬 감각들은 어지럽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뜨거운 살덩이가 섞이는 꽤나 농밀하고 진득한 입맞춤이 한참이나 지속되고 나서야, 남자는 그녀의 입술을 비로소 놓아주었다.

“……출근 키스 했으니까, 퇴근 키스도 해야지.”

귓가를 울리는 낮은 음성에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네?”

오늘 아침, 그가 출근하기 전에 나누었던 짧은 뽀뽀가 뇌리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는 이윽고 속삭였다.

“우린 앞으로 더한 것도 할 테니까, 키스신 같은 거에 질투하지 마.”

“…….”

“알았지?”

그 말에, 순식간에 불타는 고구마가 된 예원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아. 정말…….

“……알았어요.”

심장에 해로운 남자, 맞다니까.

* * *

“혜인아. 어디 아파? 표정이 영 안 좋은데.”

“……아냐, 아프긴.”

“좀 힘들면, 네 신 조금만 더 나중으로 미뤄달라고 할까?”

“아냐, 괜찮아. 이렇게 잠깐 쉬면 돼.”

매니저는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혜인을 걱정스러운 듯 조심스레 살폈다.

“아까 감독님한테 핀잔 받은 것 때문에 그래? 알잖아, 그 사람 유별난 거. 요즘은 좀 덜해진 것 같더니 오늘 또 갑자기 그러네. 네가 너그럽게 이해해라. 어?”

“…….”

“하여튼, 그 현민혁 와이프인가 뭔가 하는 그 여자만 아니었어도…….”

그 순간, 자연스럽게 꼬아진 다리 위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주먹이 티 안 나게 꽉 쥐어졌다.

고개를 든 혜인은 매니저를 향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오빠. 나 잠깐만 혼자 있고 싶은데, 자리 좀 피해줄 수 있어?”

“어? 어어, 그래. 그러지 뭐.”

제가 악의 불씨를 던져준 줄도 모르는 매니저는 대수롭지 않게 자리를 떴다.

그렇게, 혼자 남게 된 혜인에게선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름다워 마지않던 그녀의 얼굴은 삽시간에 표독스럽고 독한 얼굴로 돌변해 있었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곧장 이를 악물었다.

아까 전 스태프들 앞에서 당한 망신이,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그녀를 신나게 괴롭히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계집애에게서 그런 모욕을 당하다니.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감히 지 까짓 게 날? 허. 말도 안 되지.’

당하는 건 오직 너뿐이어야지, 그 대상이 내가 되선 안 된다.

감히 날 뭘로 보고!

어떻게 하면 그년에게 이 치욕을 돌려줄 수 있을까…….

고개를 숙인 혜인은 입술을 깨물며 치열히 고민했다.

“…….”

그러다 어느 순간, 혜인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럴 줄 알고 준비해 둔 게 있지.’

분노를 애써 속으로 집어넣은 혜인은 옆에 놓여 있던 폰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로 곧장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일을 좀 더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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