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67화 (67/102)

67. 현민혁 사수 궐기대회

2018.11.23.

“컷!”

몇 시간 후, 촬영장.

그곳에선 경쾌한 오케이 사인과 함께, 흡족해진 얼굴의 장 감독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 민혁 씨.”

“……예?”

“오늘따라 연기가 평소보다 특히 더 좋은데? 감정도 훨씬 더 잘 사는 것 같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뜻밖의 극찬이었다.

이제 막 몰입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민혁은 절로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일이라.

뭐, 물론 있기야 한데.

“……좋은 일은요. 감사합니다.”

먼저 촬영을 마친 뒤, 옆에서 대기하며 그의 연기를 관망하고 있던 혜인은 그런 그들을 조금 의외라는 듯 쳐다보았다.

여간해선 인사치레조차 잘 하지 않는 장 감독이 저런 말을 하다니.

첫 방송 이후 시청률이 호조를 달리고 있는데다, 남자주인공인 민혁의 인기도 날로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어서일까.

그를 향한 감독의 태도는 눈에 띄게 호의적인 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더욱이 한때 촬영장 탈주니 뭐니 하던 문제로 대립각을 세웠던 둘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실로 놀랍고 엄청난 변화였다.

“하여튼, 쭉 이대로만 가자고. 응? 자, 자. 그럼 다음 장소로 바로 이동합시다.”

장 감독의 손뼉 소리에 이어, 현장은 금세 장비 철수로 어수선해졌다.

‘좋아. 지금이야.’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까.

주변의 주목도가 느슨해진 사이를 틈타, 혜인은 대본을 든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그에게로 다가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좋겠네? 감독님한테서 칭찬도 다 받고. 혼자 어디서 특훈이라도 받은 거야?”

“…….”

물론, 그에게선 예상했듯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번 예원과 함께 컵을 깨뜨린 일이 있었던 이후, 그는 요즘 혜인을 전에 없이 차갑게 대하는 중이었다.

원래도 그렇긴 했지만 이젠 그 정도가 심해져, 커플촬영을 하는 날조차도 말 한 마디 나누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야말로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철벽 방어.

덕분에 말 많은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이미 두 주연배우의 불화설까지 나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쳇, 꽤 끈질기네.’

하지만 그럴수록 혜인은 오기가 피어올랐다.

자고로 쉽게 함락되는 것은 재미가 없다.

남의 것이 된 그가 점점 더 탐이 나는 것 또한,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터였다.

“……아참. 예원 씨는 괜찮아? 많이 아팠다면서.”

어떻게든 대화의 구실을 만들고 싶다.

혜인은 그의 옆을 바짝 따라붙으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

그런데 그때, 걸음을 멈춘 민혁이 멈칫 그녀를 돌아보았다.

매우 의문스러운 듯한 얼굴로.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

“네가 그 사람 아픈 걸 어떻게 아냐고. 내가 말해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차.

순간 뜨끔한 혜인의 얼굴에는 일순 당황스런 기색이 어렸다.

“아, 어……. 그, 그게…….”

“…….”

“당연히, 민혁 씨가 매니저님이랑 이야기하는 거 들었지! 안 그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겠어? ……내가 달리 그쪽으로 소식통이 있는 것도 아닌데.”

“…….”

“아무튼…… 괜찮대?”

그녀는 한순간 얼굴에 철판을 깐 채,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그럴듯한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심쩍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관심 꺼. 네가 신경 쓸 일 아니니까.”

민혁은 다행히 더 이상 그 말을 문제 삼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졸지에 홀로 남겨진 혜인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네.

사실, 홍예원이 아팠다는 이야기는 일찍이 그저께 밤부터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이미 소문이 이리저리 퍼졌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 또한 그러마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낭패였다. 실로 저답지 않은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아이, 씨.’

정신 차려, 조혜인. 이제 와서 맥없이 들켜버릴 순 없잖아.

그녀가 속으로 방심한 자신을 단단히 다스렸다.

흐트러져 있는 표정, 동요하는 눈빛.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

금세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금 도도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무나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

.

.

그렇게 두 주인공이 향한 다음 촬영장소는, 모처럼만에 들르게 된 에덴이었다.

“오늘 신은 최대한 후딱 찍고 일찍 끝내자고. 내일은 아침부터 서초동 가야 하니까 준비해두고.”

“예, 감독님.”

감독과의 짧은 대화 후, 오랜만에 사장다운 포스로 매장을 짧게 둘러본 민혁은 구석에 앉아 촬영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의상 스태프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저, 현민혁 씨.”

“네?”

“혹시 가능하면, 카페에서 앞치마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요? 엑스트라용으로 준비해놨던 게 있긴 한데, 개중 하나가 영 못 쓰게 되어서요.”

“……그래요?”

앞치마라.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짓던 그는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다리세요,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네? 장소만 알려주시면 제가 가서 가져와도 되는데.”

“캐비닛이 사무실 안에 있어서요. 아무래도 외부인 출입은 좀…….”

“아…….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닳는 것도 아니고, 그까짓 앞치마쯤이야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지.

민혁은 별 생각 없이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

“앞치마가…….”

아마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직원들과 알바들이 이곳에서 유니폼을 갈아입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 유니폼들을 어찌 간수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던 그였다.

해서, 우선은 탈의 공간 옆에 딸린 캐비닛들을 차례대로 열어보기로 했다.

‘여기는…… 없네.’

여기도 없고.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앞쪽 캐비닛에서는 앞치마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 캐비닛을 열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마침내 미소가 띠었다.

“아.”

여러 사이즈가 구비되어 있는 유니폼들 사이에서, 다행히 여분의 앞치마를 찾아낸 것이었다.

오케이. 이거면 되겠지.

그는 무심코 제일 뒤, 옷걸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앞치마를 휙 꺼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뭔가가 가볍게 톡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멀뚱해진 민혁의 눈이 저절로 캐비닛 바닥을 스캔했다.

그렇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

사진이었다.

다름 아닌, 그 사진.

‘실은, 우리 가족사진이에요. 단 하나밖에 없는.’

그의 눈에도 무척 익어있는 그것은, 예원의 방에 있던 액자, 그리고 그녀의 지갑에 고이 모셔져 있던 바로 그 가족사진이었다.

그런데, 이 사진이 어째서 여기에?

“……빠뜨리고 갔나?”

그는 재빨리 사진을 집어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사진 속 또랑또랑한 눈빛의 여자아이는 분명 그가 예전에 보았던 어릴 적의 홍예원이 맞았다.

액자에 있던 사진을 여기다 놓고 갔을 가능성은 만무하고, 그래봤자 지갑에 있던 것일 텐데.

허나 그마저도 관상용일 뿐 밖으로는 잘 꺼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그였기에, 반가움보단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가 이 소중한 사진을 이리 아무렇지 않게 간수했을 리 없다.

물론 발도 안 달린 사진이 저 혼자 여기까지 올 리도 없었겠지만…….

민혁은 잠시간 사진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엄지를 들어, 사진 속 여자아이의 얼굴을 괜스레 보듬었다.

작은 키와 덜 여문 몸을 제외하고 본다면 마치 어제 찍었다 해도 믿어질 정도.

정말이지 고대로 자란 듯한 여자였다.

특유의 곱게 휘어지는 눈웃음과 시원시원한 입매에, 그의 입가에선 슬금슬금 미소가 비어져 나왔다.

“…….”

어느새 이곳에 온 본 목적은 잊어버린 채, 민혁은 그렇게 때 아닌 사진 관찰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내가 쓱싹해 버려?’

그러고 보니, 그녀에 관한 것이라면 그 흔한 사진 한 장조차 가진 게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비록 어릴 적 사진이라 조금 아쉽긴 해도, 아예 없는 것보다야 나으리란 판단이 들었다.

이참에 집을 한 번 바꿔주는 것도 좋겠지.

어차피 얘도 내내 한 곳에만 있는 게 지겨웠을 테니까.

“……흐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바지주머니 속에 그것을 소중히 챙겨 넣었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해요?”

별안간 들려온 익숙한 음성.

“설마, 우리 유니폼 훔쳐가려는 건 아닐 테고.”

흠칫한 그의 고개가 퍼뜩 뒤로 돌아갔다.

“……예원아?”

저를 향해 환히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 민혁은 깜짝 놀랐다.

타이밍이 이토록 절묘할 수가 없었다.

“뭐야, 언제 왔어?”

주인을 맞이하는 충성스러운 개처럼, 그는 그녀에게 쏜살같이 다가가 들뜬 투로 물었다.

우연찮게 마주하게 된 사진 탓일까.

그렇잖아도 집에 있을 그녀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던 차였다.

오늘 아침, 저를 껴안고 곤히 잠들어 있던 여자의 모습.

그 애틋하고 귀여웠던 모양이 불현 듯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실상 못 본 지 불과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체감은 마치 수일 만에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금이요. 이제 막 온 거예요.”

“웬일이야, 여기까진? 오늘은 내내 집에 있겠다고 그러지 않았나.”

그런 그를 보며, 예원은 살짝 쑥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그냥요. 그냥…….”

모래알처럼 흩어지던 목소리는, 이내 잘 닦인 유리처럼 또렷해졌다.

“보고…… 싶어서요.”

지금까지는 미처 밖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수줍으면서도 솔직한, 그녀의 오롯한 진심이었다.

* * *

“언제는 그렇게 오라고 오라고 해도 안 오더니. 진짜 웬일이에요, 제수씨?”

“그냥, 지나가다 생각이 나서요. 오래간만에 매니저님도 뵐 겸.”

예원의 능청스런 대답에 옆에 선 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그녀의 외양으로 보아할 때 그냥 지나가다 들렸을 법한 차림새는 확실히 아니었으므로.

봄을 그대로 빼다 박아놓은 것 같은 샤랄라한 쉬폰 원피스와,

앞 쪽으로 단정하고 귀엽게 땋아 내린 머리, 진하지 않으면서 산뜻한 메이크업까지.

뭔지는 모르지만 단단히 작정을 하고 온 태세였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걸까.

“그러고 보니까 오늘 제수씨 미모가 유난히 더 빛나는 것 같은데.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아, 잠깐 친구랑 만나고 오는 길이었어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면서도, 다시 한 번 확인받듯 묻는다.

“저 오늘…… 괜찮아요?”

“아유, 그럼요. 아주 아름다우십니다. 안 그렇냐, 민혁아?”

동조를 구해오는 성환의 말에, 민혁은 짐짓 미소를 지었다.

뭐…… 대답은 이미 한참 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콩깍지가 몇 겹은 씌어있는 그에게, 굳이 그것을 물어 무엇 할까.

“……예뻐.”

지금 당장 끌어안아 입 맞추고 싶을 정도로.

물론 속으로 덧붙인 말이었기에 밖으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눈빛으로 그 뜻을 금방 알아챈 예원의 얼굴은 어김없이 붉어졌다.

“어머, 예원 씨!”

그때, 뒤쪽에서 그다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그녀를 늦게야 발견한 혜인의 등장에, 민혁과 예원의 얼굴에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미소가 싹 사라졌다.

“아, 네. 저야 뭐…….”

“…….”

“잘…… 지내셨어요?”

반면 혜인은 아무렇지 않게 눈꼬리를 휘었다.

“그럼요. 지난번엔 본의 아니게 실례가 많았어요. 어떻게,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 맞다. 제수씨 아팠댔지.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혹시나 또 괜한 걱정이라도 끼칠까,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혜인의 입가엔 예의 뜻 모를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구나…….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그 눈빛에서, 순간 예원은 언젠가 클럽에서 만났던 빼빼로 같은 여자의 것과 비슷한 뉘앙스를 읽었다.

상냥해빠진 말투와 달리 무척이나 날카롭게 꽂히는 시선.

이제껏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거기에 실린 감정은 너무나도 확연했다.

저를 향한 뚜렷한 ‘반감’.

‘…….’

역시나, 그랬어.

이전엔 몰라서 그냥 넘겼다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속눈썹이 잘 말린 눈꺼풀을 바짝 치켜뜬 예원은 부러 혜인을 똑바로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걱정해 주셔서.”

“근데……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설마, 그새를 못 참고 민혁 씨 보러 오신 건 아닐 테고.”

……아니, 그거 맞는데.

‘난 뭐 내 남편 좀 보러 오면 안 되냐?’

은근슬쩍 떠보는 듯한 질문에 기분이 팍 상했지만, 예원은 언짢은 맘을 숨기고 이내 생긋 웃었다.

물론, 이유가 그것 뿐만은 아니었으니까.

“아 실은. 지난번에 저한테 부탁하셨던 게 내내 걸려서요.”

“네? 어떤……?”

“저한테, 선생님 되어달라고 하셨잖아요.”

예원은 특유의 순한 얼굴로 태연하게 대꾸했다.

“오죽하면 저한테까지 찾아 오셨을까 싶은 생각도 좀 들고……. 기껏 어렵게 부탁하셨던 걸 텐데, 그동안은 제가 부끄럽고 쑥스럽단 핑계로 너무 불성실하게 해드린 것 같아서요. 오늘은 이렇게 온 김에, 아주 제대로 봐드리려고요.”

“제대로……요?”

“네.”

갑자기 무슨……?

생각지 못한 전개에 살짝 당황하는 듯한 여자를 향해, 예원은 그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저, 오늘 혜인 씨 실력 좀 구경해 봐도 되죠?”

나 혼자만 엿을 먹을 순 없지, 치사하게.

얼마나 맛있는지, 이참에 너도 한 번 먹어보렴.

* * *

그로부터 약 한 시간쯤 뒤.

“자, 이건 이렇게 해서…… 이렇게 딱! 누르면…….”

“컷, 컷.”

열심히 이어나가고 있던 혜인의 연기가 장 감독에 의해 뚝 잘렸다.

“혜인 씨, 잠시만.”

“……네?”

“여기 와서 이것 좀 봐봐.”

마뜩잖은 표정의 장 감독이 그녀를 잽싸게 호출했다.

제 아무리 잘나가는 톱 여배우라 할지라도, 그녀 또한 감독의 깐깐한 디렉팅 앞에서는 별 수 없는 연기자일 뿐이었다.

왜 저러지.

약간 움츠러든 혜인은 쭈뼛쭈뼛 그에게로 다가갔다.

“왜요……?”

“봐, 혜인 씨가 보기엔 어때? 샷이 좀 어색하지?”

“…….”

“나름 가르치려는 의욕은 있어 보이긴 하는데, 뭔가 좀…… 어설퍼. 경력자 같은 태도 영 안 나는 거 같고. 이것만 보면 지금 누가 누굴 가르치나 싶을 정도야.”

“그런……가요?”

난…… 잘 모르겠는데.

‘전엔 아무 말 없이 넘어가 놓고 왜 이제 와서…….’

실제로 지난번 촬영 땐 단 몇 번 만에 오케이 사인을 받지 않았던가.

순간 혜인의 얼굴은 티 안 나게 불퉁해졌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오늘 그녀가 찍어야 하는 장면은,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을 상대로 직접 커피 추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신이었으므로.

검사인 남주에 비해 잘 드러나 있지 않았던 여주의 프로페셔널한 면을 부각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스킨십으로까지 물 흐르듯 연결되어야 하는 장면.

그만큼 그녀의 손짓과 자세 하나하나가 풀 샷과 클로즈업 샷으로 대거 표현될 예정이었다.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시청자들을 몰입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디테일한 연기가 필요했다.

대충 편집으로 때울 수 있었던 지금까지와는 애초에 그 결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영 아냐. 그러게 미리 연습 좀 해두라니까……. 이렇게 어설픈 걸 누가 베테랑 바리스타라고 생각하겠어. 쯧쯧…….”

“…….”

“어쩌지. 무턱대고 찍는다고 해결될 게 아닌 것 같은데, 이건.”

흠.

입술을 꾹 다문 장 감독의 얼굴에 고심의 흔적이 패였다.

그런데 그때.

“……저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의 손이 소심하게 올라갔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옆에서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

“몇몇 부분만 신경 써서 고치면, 지금보다는 한결 나아질 것 같은데.”

무려 6년차에 이르는 전문 바리스타이자, 조혜인이 직접 선택한 커피 스승.

홍예원의 등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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