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혼자 자긴 싫으니까
2018.11.16.
“……!”
드라마나 영화 같은 걸 볼 때, 몇 번 정도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남자에게서 ‘백허그’를 당하는 기분이란 과연 어떤 걸까?
그것도 저렇게 멋진 남자에게서!
그렇게 넌지시 머릿속에 그려보던 것이 말도 안 되게 현실로 이루어진 지금.
예원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대박, 미친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섹시해, 이 남자?
집채 같은 덩치가 몸 전체를 장벽처럼 에워싼 느낌.
그리 꽉 안긴 것이 아닌데도, 이상한 위압감 같은 것이 드는 나머지 몸을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같이 잘까?’라니.
예기치 못하게 훅 들어온 서브에, 그녀는 잠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져야만 했다.
남자의 둔탁한 심장소리며, 귓가에 닿은 입술의 촉촉한 감촉, 허리춤에 얹힌 큼지막한 두 손의 온기까지.
그의 모든 것이 새삼 적나라하고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거 완전…….
‘신종 고문이네, 고문.’
으. 당분간 이런 위험한 상황에는 놓이지 않으려 했는데.
사실 어색함도 어색함이지만, 그를 향한 야속함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저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마음고생을 하게 만든 남자가 얄밉고 괘씸했기에.
허나 그는 이미 예원에 한해 완벽히 통달한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일단 막무가내 식으로 들이대면, 쑥스러움과 난처함에 그녀가 아무 말도 못하리란 걸 아는 거지.
하여튼, 잘난 남자를 남편으로 두고 사는 일은 여러모로 벅찼다.
이럴 때는 특히 더.
‘이렇게 된 거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만 넘어가 줘?’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냐.’
예원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래도 이렇게 또 홀랑 넘어가 주면 안 되지.
이건, 엄연히 내 자존심이 걸려있는 문제라고.
“가, 같이 자긴 뭘 같이 자요!”
묵직한 팔을 다급히 풀어내고 돌아선 예원이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남자는 어쩐지 아이처럼 샐쭉해진 표정이었다.
“같이 자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죠!”
“왜?”
왜? 왜라니.
예원의 얼굴에 곧장 황당한 빛이 띠었다.
아니, 이 남잔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물론, 우리가 결혼까지 한 사이인 건 맞지만……! 그래도 우선은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로 고백한 지 대체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선’?”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말을 곱씹던 민혁이 돌연 눈썹을 들어올렸다.
“잠깐만.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
그는 예상과 달리 다소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난 그냥, 당신 옆에서 자고 싶다는 건데. 그냥 ‘잠’만. 그게, 그렇게 ‘선’을 어기는 일인가?”
“…….”
“아니면 설마…….”
그의 눈초리가 짓궂게 가늘어졌다.
“혼자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 건가?”
……이상한 생각?
그 은근한 물음에, 예원은 지레 파드득 놀라 대꾸했다.
“이, 이상한 생각이라뇨? 무, 무슨…….”
“뭐, 이를테면…….”
그 순간, 건장한 몸이 다시금 예원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그녀의 볼에 쪽, 하고 붙었다 떨어지는 무엇.
“이런 거?”
혹은…….
그러면서 똑같은 감촉이 입술 위에도 진득하니 머물렀다 떨어졌다.
“……이런 거?”
숨죽여 묻는 목소리가 지독하리만큼 달다.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
저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나른한 눈빛에, 예원은 볼이 화륵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되도 않는 장난 따위 그만하라고. 당장은 꼴도 보기 싫으니 저리 가라고.
그렇게 매몰차게 말해야 하는데,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가벼운 뽀뽀 두 방에, 머릿속에 있던 모든 것들이 Delete키를 누른 듯 일시에 삭제된 기분이었다.
“뭐, 아니면 말고.”
“…….”
“어쨌든, 같이 자자. 오늘만이라도.”
“오늘……만이라도요?”
“응.”
저를 향해 씩 웃어 보이는 그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며, 예원은 문득 생각했다.
“오늘 같은 날, 혼자 자긴 싫으니까.”
이 남자.
생각보다 심신건강에 더, 더 해로운 남자라고.
* * *
솔직히 말해서, 예원은 상황이 어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고백했다 대차게 까이고, 집에 돌아와 엉엉 울며 짐을 싸는 것만 내내 상상해 왔건만.
갑자기 이렇게 그와 한 방에서, 한 침대에 잠들게 되다니.
‘……방음 잘 된다더니만, 진짜였네.’
아주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예원은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문득 아까 전, 그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 짓도 안 할게. 진짜 딱, 손만 잡고 자면 되잖아.’
그렇게 철석같이 말하던 남자의 얼굴이 아직까지도 선명했다.
남자들이라면 으레 할 법한 구닥다리 멘트였지만, 하도 간곡하게 말하기에 예원은 할 수 없이 승낙하기로 했다.
오늘은 날이 날이기도 하니까.
옛말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지.
즉 저 남자가 아무리 호랑이 같이 치명적이라고 해도, 정신만 똑바로 차린다면 아무 일이 없을 거란 얘기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렇게 내내 속으로 되뇌었다.
‘아오……. 지금이라도 저 방으로 갈까.’
하지만, 그럼에도 절로 떨려오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채 다 말리지 못해 아직 촉촉한 머리끝을 괜스레 비비 꼬며 그렇게 얼마쯤 앉아 있었을까.
뚝 멎은 물소리에 이어 위이잉 하는 드라이어 소리가 작게 들려오더니 이내 욕실 문이 열렸다.
─달칵.
예원의 눈길이 무심코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그런데,
“히익!”
곧장 기겁한 그녀는 새된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뭘 그렇게 놀라.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 그…… 그……!”
이 광경을 보고 대체 어떻게 안 놀랄 수 있냐고!
입을 벌린 예원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래쪽에만 하얀 타월을 두르고 있는 그는 예의 갓 구워 나온 식빵 같은 근육을 자랑하며 서 있었으니까.
아주 당당하게, 벗은 상체를 몽땅 드러낸 채로!
“……설마, 그러고 자려고요?”
“응.”
“…….”
“난 원래 옷 입고 못 자. 답답해서.”
반면 그는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소리 없이 기함했다.
저 남자가,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그건 혼자 잘 때 얘기죠! 나랑 같이 자기로 했으면서 어떻게…….”
“자면 되지. 뭐가 어려워?”
“난 옷 입고 있잖아요!”
“당신도 불편하면 벗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뭐, 뭐라고요?”
……아주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그, 그러지 말고 빨리 옷 입어요!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괜찮아. 이까짓 걸로 감기 안 걸려.”
“아니, 꼭 그거 때문이 아니라…….”
그것뿐이면 차라리 다행이게.
어버버거리다 한숨을 폭 쉰 예원은 이내 어렵게 말을 이었다.
“……민혁 씨 아까, 나랑 접촉도 했잖아요.”
“접촉? 무슨 접촉.”
무슨 말인지 뻔히 알면서 꼭 저리 답하지.
예원의 눈초리가 그를 휙 째렸다.
입과 입이 정통으로 맞닿았는데, 균이 안 옮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감기 끝물에 옮으면 진짜 답도 없다고.
“뽀, 뽀뽀했잖아요, 나랑!”
“아…… 그거.”
하지만 그는 뒷머리를 털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할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난 당신이랑 다르게 튼튼하거든.”
그를 몰랐다면 퍽 믿음직스러운 말이었겠으나, 예원의 표정은 전혀 고와지지 못했다.
참나. 웃기고 있네.
“……첫날밤부터 혼자 골골거리던 게 누군데.”
갑자기 열이 펄펄 끓는 바람에 사람을 간 떨어지게 만들어 놓고선…….
일부러 다 들리도록 혼잣말을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남자는 어느새 그녀의 침대 속으로 쑥 들어가 있었다.
“알겠으니까, 그만 좀 조잘대고 이리로 와. 나 추워.”
“……하.”
그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아니, 그러게 누가 그렇게 발가벗고 있으랬나.
“난 안 추운데요. 추우면 옷을 입으면 되잖…… 헙!”
바로, 그 순간이었다.
“……꼭 이렇게 무력을 사용해야겠어, 내가?”
서 있는 예원을 부지불식간에 잡아챈 그가 잽싸게 그녀를 제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금세 그와 한 몸이 되다시피 한 예원은 저절로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대리석 같이 단단하면서도 매끄러운 피부가 얇은 잠옷 위로 고스란히 느껴진다.
순식간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어느새 모든 게 그의 것이 된 느낌이었다.
그녀가 늘 혼자 누워 자던 이 침대도,
……또한 그녀 자신조차도.
‘휴,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작정하고 덤비시니 이길 도리가 없네.
결국, 체념한 예원은 막 씻고 나와 깨끗하고 투명한 민혁의 얼굴을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한 치의 근심 걱정도 없는 듯한 얼굴.
요 근래 본 그의 얼굴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민혁 씨.”
“응?”
“……이러고 싶은 걸, 대체 어떻게 참았어요, 그동안?”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한 물음.
덩달아 아래를 내려다 본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말했잖아. 지금껏 참은 것도 용하다고.”
정말이지 실로 그랬다.
그녀를 만난 후, 민혁은 ‘용기’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그까짓 계약쯤 진즉에 청산해버리고 새로 시작하자고 했으면 될 일인데.
어딘지 모르는 미진함이 사이를 항상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을 좋아하리란 확신.
굳이 계약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제 옆에 계속해서 머무르리란 확신.
그 확신이 하나 없던 것 때문에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버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근데, 오늘은 갑자기 왜 그런 거예요?”
“뭘?”
“아니, 왜 그렇게 충동적으로 그랬냐고요……. 갑자기 막…….”
말을 잇던 그녀의 목소리가 부끄러운 듯 기어들어갔다.
아무래도 그가 먼저 한 키스를 일컫는 모양이었다.
“왜…… 그런 거예요? 내가 먼저 고백해서? 아님, 최우진 씨 때문에 홧김에?”
“…….”
……겨우 찾은 사랑을, 또 다시 빼앗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사실, 오늘도 그런 위기감이 아예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나란히 앉아 있는 둘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던 그 기분이 설명될 수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된 이상, 그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화낼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그녀를 믿으니 화를 낼 이유도 없다.
그 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한 것이었다.
“그런 건 아니고…… 뭐 굳이 말하자면, 기특할 정도로 똑똑한 처남을 둔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네?”
엷은 미소를 지은 민혁은 오늘 저녁, 지원과 있었던 일을 찬찬히 털어놓았다.
“……걔가, 우리가 계약결혼 한 걸 알고 있었다고요?”
“응.”
“내가, 민혁 씰 좋아하는 것도?”
“응.”
예원은 당연히 경악했다.
“……말도 안 돼. 걔가 어떻게 그걸……!”
의구심 어린 표정을 짓던 예원은 잠시 뒤, 고개를 팍 쳐들었다.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표정으로.
“김지영 내 이걸 그냥……!”
“지영 씨?”
“…….”
“지영 씨도 알아, 우리 얘기?”
아차. 이 남잔 아무것도 모르지, 참.
민혁의 물음에 예원은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영 얘길 꺼낸 것이 곧바로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네.”
“어떻게?”
……휴. 어쩔 수 없이 이실직고해야 할 타이밍이구나.
머뭇거리던 예원은 이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실은, 내가 못 참고 말해줬었어요. 딴 사람한테는 말고, 오로지 걔한테만.”
“…….”
“물론 계약위반이란 건 나도 알고 있었어요. 그치만……. 그땐 나 자신이……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됐었거든요.”
그의 따스한 눈빛에 힘입어, 그녀도 또한 이제껏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전엔 미처 말하지 못했던 전민혁에 대한 비밀까지, 모두 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끔찍한 일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생기나……. 하루에도 몇 번씩 신을 원망했던 것 같아요. 난 내가 무슨 게이 감별사인 줄 알았다니까요? 왜 걸핏하면 그런 남자만 좋아해서 이 사달을 만드는지……. 나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너무 웃긴 거 있죠.”
말을 하던 예원이 자조적으로 픽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진지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계약 같은 거 하지 말걸. 그럼 넉넉한 삶까진 못 누려도, 적어도 평온하고 안락하게는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괜히 애꿎은 민혁 씨까지 원망스러워졌고, 그래서 더 미안했어요. 다 나 혼자 좋아한 건데, 그쪽한테 무슨 잘못이 있나 싶었으니까요.”
“…….”
“그러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지영이한테만 말했는데, 걔가 그러더라고요. 난 네가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정리할 거면 빨리 정리하라고……. 사실 어떻게든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이 확 들었어요. 이럴 바엔 차라리 고백하고 시원하게 까이자고. 그럼 좀 더 빨리 단념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뭐 물론, 그걸 실천으로 옮기는 데까진 상당한 시간이랑 용기가 필요했지만요.”
몇 시간 새 천당과 지옥을 오간 기분.
그럼에도 예원은 마냥 행복하게 웃었다.
이렇게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도저히 믿기 힘든 어마어마한 기쁨이었으므로.
“어쨌든 지금은, 내 생각이 틀려서…… 너무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
“민혁 씰 마음껏 사랑할 수 있어서, 정말 너무너무 다행이에요.”
민혁은 제 품에 안긴 채, 사랑스럽게 속삭이고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저를 향해 고개를 든 그녀에게선 특유의 예쁜 눈웃음과 함께 햇살처럼 눈부신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제기랄.
순간, 그는 맘속 깊은 구석에 있던 인내심 한 자락이 뚝 부러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지.”
“…….”
“아까 약속, 못 지킬 것 같은데.”
“네?”
별안간 은근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예원의 눈은 바로 동그래졌다.
“미안. 근데…….”
“…….”
“이건 전적으로, 당신 탓이야.”
그의 목에 돌연 단단한 힘줄이 섰다.
나는 정말이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손만 잡고 자고 싶었어.
근데 이렇게 사랑스럽게 굴면, 나더러 대체 어떻게 참으라는 거야.
내 인내심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깊지가 않다고.
“갑자기, 무슨……?”
그의 갑작스런 말에, 예원은 여전히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다정히 팔베개를 해주고 있던 그가 금방 포지션을 바꿔, 제 위를 침범해왔기 때문이었다.
“미, 민혁 씨!”
이성이 끊긴 그는 이미 어느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아까 전만큼이나 짙은 키스가 곧바로 이어졌고, 예원은 놀란 가슴을 추스를 새도 없이 그의 거침없는 공세를 받아냈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평소보다 좀 더 알싸하면서도 청량한 향기가 코를 무지막지하게 찔러왔다.
‘씨,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순 뻥쟁이 같으니!’
‘오늘만’이라는 꼬임에 넘어갔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예원이 속으로 잔뜩 푸념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혼란스럽고 짜증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근데 난 또 왜…… 이게 싫지 않은 거냐고……!’
사실, 아까부터 예원은 그를 향한 욕구를 꾹꾹 누르던 중이었다.
사랑하니까 만지고 싶고, 만지면 또 안고 싶어지고, 입 맞추고 싶어지게 되는 순리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유효했다.
솔직히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그것도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절대 욕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바로 코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데 세상에 어떤 여자가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고양이 앞에 생선을 가져다 놓은 거나 매한가지지.
다만, 그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기에 참은 것뿐이었다.
물론 이렇게 된 이상…… 결과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어떡해.’
소심하게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행복감이 그녀를 덮쳤다.
당장 이대로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을 정도로.
어느새 그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예원은 가느다란 팔을 그의 목에 감으며, 그의 열정에 꽤 협조적으로 화답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잉, 지잉.
별안간 들려오는 휴대폰 진동음에, 두 남녀의 몸짓은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범인은 바로, 침대 옆 협탁 위에서 부르르 떨리고 있는 민혁의 휴대폰이었다.
“…….”
“…….”
아…….
한순간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기분.
후덥지근하던 공기가 금세 식어버린 느낌이었다.
몇 센티미터 남짓을 사이에 둔 채, 민혁과 예원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