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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57화 (57/102)

57. 전세 역전

2018.10.19.

“……!”

온몸의 세포가 벼락처럼 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꽤나 진득한, 고작 1초 남짓의 볼 뽀뽀.

하지만 그 짧은 입맞춤에도 민혁은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잠잠하던 가슴이 사정없이 요동치고, 맥박 또한 갓 잡힌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어댄다.

뭐 이젠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이 여자만 곁에 오면 늘 이랬으니까. 미처 느끼지 못한 사이, 언젠가부터.

“…….”

반면, 술김에 그런 과감한 짓을 저지르고 제자리로 돌아온 여자는 여전히 그에게 팔을 걸치고 까치발을 든 채, 그를 조용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잠하던 호수에 돌을 휙 내던져놓고는 저런 무감각한 얼굴이라니.

발그레 달아오른 볼, 고요한 눈빛에 그의 목울대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키스하고…… 싶어.’

다른 생각은 사치였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는 그녀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

“…….”

그렇게, 금방이라도 다시 입술이 맞닿을 것 같았던 순간.

“……미안, 해요.”

그녀의 입술이 재차 달싹였다.

그 한 마디에, 슬금슬금 달아오르려던 그의 열망은 일순 차갑게 식었다.

“……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당황한 그가 생각했지만, 다음 말은 곧바로 이어서 들려왔다.

“……고마워요.”

“…….”

“고마워요, 민혁 씨.”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댔다가, 또 생뚱맞게 ‘고마워요’는 뭔지.

앞뒤가 영 안 맞는 걸로 보아 정말로 술에 취하긴 취한 모양이다.

어리둥절해하던 민혁은 이내 피식 웃었다.

제게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매달린 채, 통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그녀가 귀엽게 느껴진 탓에.

“예원 씨, 갑자기 왜 그런…….”

“안녕히 주무세요.”

하지만 그 다음은 뭘 해볼 새도 없었다.

말을 마친 그녀가 그의 어깨에서 미련 없이 스르륵 팔을 거두었으므로.

마지막으로 애달픈 웃음을 남긴 여자는 그를 뒤로하고 먼저 위층으로 향했고, 그런 그녀를 민혁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키스의 불발도 물론 아쉽긴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지원의 일도 잘 해결됐고, 그러니 이제는 평소의 그녀처럼 밝아져야 하는데.

여자는 어째 그 전보다 더 축 가라앉은 모습이었으니까.

아리송해진 그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상하게 힘이 빠진 듯하던 여자의 뒷모습이 텅 빈 계단 위로 선명하게 덧그려졌다.

“…….”

왜 저러지.

아직도 무슨 고민이 남아있나.

* * *

“그래서, 몇 시간을 그렇게 기다린 거야?”

[어, 일요일이라 그런가 사람들 완전 많이 왔더라고. 그래도, 결국엔 붙었으니까 됐지 뭐.]

“다행이네. 하나도 안 떨었어?”

[뭐 좀 떨긴 했는데, 실수는 안 했어. 아, 맞다. 누나 이흥철 알지?]

“이흥철? 그 제일 오래된 심사위원?”

[어어, 그 사람. 그 사람이 나 보고 물건이래. 꼭 어릴 적 자기 보는 것 같다던데?]

“풉, 정말?”

[그렇다니까. 음역대가 좀 낮기는 해도 밸런스가 아주 좋다고, 앞으로가 기대된다고 그랬어. 옆에 있던 심사위원들도 그런 극찬 되게 오랜만에 들어본다 그러고. 완전 쩔지?]

약 일주일 뒤.

지원과 민영은 예정대로 ‘드림스타코리아6’ 서울 예선에 팀으로 참가해 당당히 합격을 받아내었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 이 정도로 말이 긴 걸 보면 합격의 기쁨이 크기는 큰가 보다.

예원은 짐짓 미소를 지으며 노곤한 몸을 사무실 의자에 기대었다.

“야. 너 오늘따라 좀 겸손이 부족하다? 아무리 누나 앞이라도 그렇지, 그렇게 대놓고 자랑하기냐?”

[없는 말 한 것도 아닌데 뭐. 사실도 제대로 말 못해?]

“쳇…… 재수 없어. 잘나셨어요, 아주.”

[누나 동생 잘난 거 이제 아셨나.]

그녀의 밉지 않은 타박에 지원은 한껏 들뜬 듯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어김없이 진지해지는 목소리.

[그러니까…… 누난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고. 내가 알아서 잘할 거니까.]

예원은 그제야, 그가 오늘따라 평소와는 너무 다른 이유를 비로소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자식 지금, 나 걱정하지 말라고 이러는 거구나.’

이렇게라도 티내지 않으면 누나가 또 남몰래 저를 걱정할 것을 뻔히 알기에.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 걱정되는 맘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동생 놈의 의젓한 마음씀씀이에 예원은 괜스레 또 코가 시큰해졌다.

“……알았어. 누난 우리 지원이 믿으니까. 그럼, 본선은 언제야?”

[아직 정확한 날짜는 안 나왔는데, 나중에 따로 연락 준대. 그때 알려줄게.]

“그래, 연습 열심히 하고. 어, 또 전화해. 어어.”

그렇게 미소와 함께 전화를 끊고, 작업 중이던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던 예원은 멈칫했다.

문득, 생각이 어떤 곳에 미친 탓이었다.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합격 선물로 뭐라도 해줄까.’

그러고 보니, 용돈을 주거나 참고서 같은 걸 사준 적은 있어도 정작 그 애가 좋아할 만한 물건은 사준 적이 없었다는 게 기억났다.

어떻게, 이번 달은 좀 여유가 있으려나. 곧 적금 만기이긴 할 텐데.

예원은 아무 생각 없이 옆에 놓인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보았다.

그런데…….

“……어? 어디 갔지?”

지갑에 고이 모셔두던, 늘 보이던 사진이 웬일인지 온데간데없었다.

당황한 그녀의 손이 지갑을 마구 헤집었다.

뭐지?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어디 떨어뜨렸나.

급한 마음에 가방 속까지 뒤적여보아도 나오는 건 없었다.

되짚어볼만 한 기억도 전혀 나지 않고.

뜻하지 않게 맞이한 돌발 상황에 예원의 얼굴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어, 매니저님!”

그때, 마침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가윤이 눈에 띄었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혹시…… 제 사진 못 보셨어요?”

“사진? 무슨 사진이요?”

“아 그게, 저 어릴 때 가족사진인데요…….”

예원은 사진의 형상을 간략히 설명했다.

“글쎄요……. 그런 건 못 본 것 같은데. 어디다 두셨는지 기억 안 나세요?”

“……항상 지갑에만 둬서 다른 데 둔 기억은 없는데……. 혹시, 매장에서 보신 적 없으세요?”

오다가다 매장에서 떨어뜨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예원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었지만, 가윤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진 같은 건 못 본 것 같아요. 죄송해요.”

……아. 예원은 실망한 티를 애써 숨겼다.

하긴, 누군가 발견했는데 아무 얘기가 안 들렸을 리가 없지.

카페 내 분실물은 무조건 찾아주는 것이 원칙이니까.

“아니에요……. 매니저님 탓도 아닌데요.”

그럼 그게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멀쩡한 사진에 발이 달렸을 리도 없고.

혹시 모르니 집에 가서 샅샅이 뒤져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깥으로 나가고 있을 때였다.

“여보!”

불현 듯 들린 생경한 호칭에 그녀의 고개가 팩 돌아갔다.

“민혁, 아니…… 사장님?”

선글라스를 끼고 앞머리를 시원하게 올린 남자가 그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예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요일 오후에 저 사람이 여긴 웬일로?

아, 아니 그보다. 갑자기 웬 ‘여보’?!

“아까는 매출 엄청나게 찍혔던데. 지금은 좀 한산하네요?”

“……아, 네. 이제 바쁠 타이밍은 지나가서…….”

“참, 지원이 소식은 들었어요? 합격했다던데.”

“네. 그렇잖아도 방금 통화했어요…….”

뒤에 선 알바들의 흥미로워하는 눈초리가, 뒤통수에 다트처럼 파바박 꽂히는 것 같다.

예원은 혀를 콱 깨물고 싶은 맘을 꾹 참고 물었다.

“근데, 갑자기 웬일이세요? 지금 촬영 갈 시간 아니에요?”

“아, 그렇기는 한데.”

씩 웃은 그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가기 전에 ‘여보’ 보고 가려고.”

“……네?”

왜 이래, 이 인간? 뭐 잘못 먹었어?

예원의 얼굴에는 곧장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예전 같았다면 이런 그의 행동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마냥 설레어할 그녀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또 쇼를 하려 하는구나. 또 뭔가 감출 일이 있어, 나를 이용하려는 거구나.

그런 온갖 저급한 의심들이 맘속에서 일사분란하게 고개를 들고 일어났으므로.

“저 할 일 많아요. 다 보셨으면 얼른 가세요.”

“……예?”

“연석아, 창고 가서 재고 정리 좀 하자.”

그러니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었다.

반문하는 그를 애써 외면한 예원은 쌀쌀맞은 표정으로 그의 앞을 벗어나 창고 쪽으로 향했다.

뒤에서 속으로 팝콘을 튀기며 구경하고 있던 알바들의 눈초리가 모조리 민혁에게로 모였다.

그의 낯은 부지불식간에 뜨거워졌다.

“……하, 하하.”

요 며칠 계속 저러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날의 예감이 틀리지 않게, 여자는 지난 일주일 내내 그를 향한 냉랭한 태도를 꾸준하게 유지했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걸까 생각해보아도 도저히 짚이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지원을 도와준 덕에 점수를 땄으면 땄지, 잃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러면서 왜 날 상대로만, 저렇게 시베리아 뺨치는 여자가 되는 거냐고.

‘미쳐버리겠네, 정말.’

이유를 모르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혜인과의 일 이후, 근 10년 만에 처음으로 갖게 된 연애감정이었다.

그 일을 빼면 거의 모태솔로나 다름없는, 도화지 같이 하얗고 말끔한 연애 전력의 그에게 요즘의 홍예원은 도저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이건 뭐, 주관식인데 힌트까지 없으니.

무조건 찍기밖에 답이 없었다.

“읏차!”

“어, 점장님! 그건 제가 들게요.”

“괜찮아, 내가 들 수 있어.”

“그러다 또 손목 상하시면 어쩌려고요. 제가 들게요.”

“괜찮다니까. 이리 줘.”

그래도 이 복잡한 와중에 하나,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건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들죠.”

저 여자 옆에 딴 놈이 얼쩡거리는 것.

“사, 사장님이…… 직접요……?”

“네. 어디로 갖다 놓으면 됩니까?”

“아…… 저기, 왼쪽 편에요.”

벙 쪄있는 남자 알바생과 예원을 뒤로 한 그는 자재 박스를 받아들어 거침없이 옮겼다.

입고 있는 세미 정장과는 지독히도 안 어울리는 일이었지만, 그 이질감에서 또 묘한 섹시함과 박력이 느껴진다.

넋을 잃은 예원은 그 모양을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와…… 사장님 팔뚝 봐. 저 힘줄!”

“점장님 때문에 저러시는 거 맞죠? 점장님 힘드실까봐!”

“말해 뭐해. 어쩜, 저 노란 박스를 들고 있는데도 멋있냐.”

매니저 하연과 알바 아이들이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아득히 증폭돼 들려왔다.

예원 또한 그 말에 가슴 깊이 동의했다.

정말이지 너무 멋있었다. 맘 같아선, 하루 온종일 이렇게 저 모습만 보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만약, 옆에서 저렇게 지켜보는 이들만 없었더라도 말이다.

“이게 답니까? 더 없어요?”

“……네, 없어요. 그만하고 얼른 가세요. 이러다 늦으시겠어요.”

“그러죠.”

그제야 후련한 듯 웃은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예원의 옆에 선 남자 알바생을 슥 훑어보았다.

퍽 탐탁잖은 듯한 얼굴로.

“연석…… 씨라고 했나?”

“네?”

깜짝 놀란 알바생이 얼른 대답했다.

“아, 예! 송연석이라고 합니다.”

풋풋하고 해맑은 미소에, 알바생들이 입는 하얀 셔츠가 꽤나 잘 어울리는 훤칠한 청년이었다.

저 정도 외모면, 다른 곳에서도 꽤 환영받을 텐데. 민혁의 눈초리가 살짝 가늘어졌다.

“……키가 꽤 커 보이는데, 얼마죠?”

“네? 저…… 180cm인데요.”

……나보단 작지만, 그래도 너무 커. 탈락.

“대학은 다니고?”

“……네.”

“나이는?”

“……스무살입니다.”

……흠, 그렇게 안 보였는데 많이 어리군.

여덟 살 차면 그녀의 동생 지원과도 딱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새파랗게 어린 남자애가 감히 점장을 상대로 흑심을 품을 린 없을 테고.

좋아, 합격.

“……점장님 좀 잘 도와드려요. 원래 이런 궂은일은, 따로 시키지 않아도 남자가 해야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죠?”

“……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언제 언짢은 표정을 지었었냐는 듯, 금세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그는 예원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못 들어갈지도 몰라요. 혹시 모르니까 문단속 잘하고 자요.”

“……네.”

“그럼, 난 이만 갈게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남자를 보고도 예원의 표정은 풀리지 못했다.

매장 안에 작은 소란을 불러일으킨 남자가 그렇게 떠나버리고, 느릿느릿 바 안으로 돌아간 예원은 어김없이 질문 폭탄을 떠안았다.

“점장님! 사장님이 뭐라세요?”

“오늘 왜 오신 거래요? 점장님 때문이에요?”

“방금 사랑한다고 그러신 거 맞죠, 그쵸!”

“어우, 얘들아. 그만!”

착잡해져 있던 예원의 얼굴이 일순 차갑게 식었다.

“일할 땐 일에만 집중하자. 가서 2층 라운딩이나 돌고 와. 올라갔는데 접시나 컵 트레이, 셋 중에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혼날 줄 알아.”

“……네에.”

꼭 이런 식으로 초강수를 둬야만 그만두지.

2층으로 쪼르륵 올라가는 알바생들을 올려다본 예원은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남잔 뜬금없이 여긴 갑자기 왜 출두해가지고.

에휴, 됐다. 일이나 하자.

“……안녕하세요, 카페 에덴입니다!”

복잡한 마음을 꾹꾹 누르며 무의식적으로 인사 멘트를 내뱉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주문하시겠…… 어?”

그런데, 카운터 앞에 선 손님을 확인한 예원의 얼굴은 순식간에 잿빛이 되었다.

“……!”

저 분이, 여기에는 왜……?

“……오랜만이구나, 예원아.”

그녀의 기억 속, 맨 앞장에 매우 흐릿하게 그려져 있던 얼굴.

“그동안, 잘 지냈니?”

바로, 전민혁의 어머니였다.

* * *

“……여기, 드세요.”

에덴 2층, 잘 보이지 않는 구석자리.

여자의 앞으로 쿠키 몇 개가 소담히 담긴 접시와, 커피 한 잔이 놓였다.

맞은편에 앉는 예원을 향해 여자는 특유의 주름 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고맙다.”

몇 개월 만에 본 여자의 얼굴은 지난번에 보았던 전민혁의 얼굴만큼이나 눈에 띄게 상해있었다.

나만큼 궂은 일 한 번 한 적 없이 곱게 큰 여자는 없을 거라며, 예비 며느리였던 저를 상대로 꽤나 고상을 떨어대던 사모님이었기에 관리 하나만큼은 여전히 철저할 줄 알았는데.

어쨌든 저 얼굴을 다시 보니, 흠씬 뜯겼던 두피가 욱신거리며 다시금 고통을 호소하는 것 같다.

예원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며 덩달아 커피를 들이켰다.

“카페는, 잘 되니?”

“……네, 뭐. 자리 잡은 지 좀 돼서요. 잘 되고 있어요. 반응도 점점 더 좋아지고 있고요.”

“……다행이구나.”

커피잔을 내려놓은 예원은 가만히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솔직히 다시 볼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끝이 워낙 좋지 못했으니까.

그럼에도 저 자존심 센 여자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분명 저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일 터였다.

“저……. 그런데, 아주머니께서 제겐 무슨 일로……?”

조심스레 건네진 예원의 질문에, 흠칫 놀란 듯하던 여자는 이내 쓰게 웃었다.

“이제……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않는구나.”

“……제 어머님은 따로 계시니까요.”

비록 너무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순간 그리운 수진의 얼굴을 떠올린 예원의 눈빛이 짙어졌다.

하지만 굳이 그런 게 아니라도, 그녀가 여자를 ‘어머니’라 호칭할 이유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뭐 저리 씁쓸하게 묻는 건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상대해 주고 있는 시간이 뼈저리게 아까워지고 있었다.

“아주머니. 죄송하지만, 제가 먼저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

“실은 저, 이렇게 아주머니랑 얘기하는 거…… 무척 불편해요.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고요. 기왕 찾아오신 분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어서 이렇게 앉아있긴 하지만, 따로 할 말 없으시면 전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저 아직 근무시간이라서요.”

“…….”

“……아주머니?”

큰맘 먹고 내놓은 말이었으나, 여자는 여전히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듯했다.

저러다 날 새겠네, 아주.

그런 여자를 잠시 동안 지켜보던 예원은 하는 수 없이, 먼저 일어나기로 했다.

“그럼, 편히 쉬다 가세요. 전 이만…….”

“예원아!”

그렇게 미련 없이 자리를 뜨려는데,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여자의 마른 손이 예원의 손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봐. 응?”

……후.

얕은 한숨 뒤, 입술을 앙다문 예원은 선심 쓰는 마음으로 돌아섰다.

“할 말 있으시면 하세요, 얼른. 손은 놓으시고요.”

과연 할 말이 있으실까 싶긴 하지만요.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름 단호한 투로 말했는데도 여자의 손은 예원의 손을 더욱더 강하게 쥘 뿐, 통 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뒤.

“…….”

망설이는 여자의 눈이 질끈 감겼다 떠졌다.

이상하리만큼 참담한 표정을 짓던 여자에게서는 마침내, 머뭇머뭇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예원아.”

예원아, 제발…….

손을 움켜쥐는 힘이 더욱 거세졌다.

“우리 민혁이……. 한 번만, 한 번만 다시 만나주면 안 되겠니? 응?”

그 뒤 곧바로 이어진 울음소리에, 예원의 입술은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냥 울음소리가 아니었다는 걸.

그것은, 여자의 마지막 남은 한 자락 자존심이, 예원의 앞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였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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