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53화 (53/102)

53. 선을 긋는다는 것

2018.10.05.

“여기, 라떼 배달 왔습니다!”

“어어, 고맙다.”

한편 그 시각, 예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민혁은 사무실 한 편에서 대본을 검토하고 있었다.

미리 꽂아 놓은 빨대를 쭉 빨아 당기자, 고소하면서도 은근한 단맛이 도는 시원한 액체가 딸려 올라와 입안을 향긋하게 적신다.

‘뭐, 아이스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네.’

차가운 라떼는 그가 늘 마시던 따뜻한 라떼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맛은 적었다.

대신, 우유의 비린 맛이 덜하고 좀 더 산뜻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말했던 ‘커피 맛’이라는 것의 정체를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기도 하다.

민혁의 입가에 저절로 번지는 미소에, 커피를 배달한 막내 사원은 갸우뚱한 얼굴을 했다.

“근데 형, 원래 단 것만 드시지 않았어요? 요즘은 왜 자꾸 라떼예요? 이거 하나도 안 단 건데.”

“…….”

그는 대답 없이 짐짓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질문에 답을 한 것은 사무실로 들어오던 성환이었다.

“놔둬라. 쟤 딴 사람 된 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 얼마 전부턴 담배도 안 피워.”

“헐? 형 담배도 피셨었어요?”

막내의 눈이 곧장 휘둥그레졌다.

그게 그렇게 놀라울 일인가.

예상외의 과민반응에 멋쩍어진 민혁은 여전히 빨대를 문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조금.”

“와, 상상도 못했어요. 민혁 형님이 담배라니……. 전혀 입에도 안 대실 것 같은데?”

“저놈 이미지에 속아 넘어가는 놈들이 너 말고도 한둘은 아니지. 야, 담배 끊는 놈들이 얼마나 독한 놈들인지 아냐? 쟤처럼 하루아침에 끊는 놈들은 더더욱 독종이야. 무서운 놈이니까 미리미리 조심하고 피해. 알았어?”

인정하긴 싫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도 꽤 오랜 흡연자로서, 담배를 끊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도 혼자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저 담배 피우는 사람 싫어해요.”

그 여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 말이 생각날 때마다 한 개비, 한 개비 줄여나간 것이 결국은 거의 금연으로까지 이어졌다.

‘홍예원 효과’가 낳은 결과에 그 자신도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하하, 예. 유념하겠습니다.”

“짜잔, 다들 닭강정 드세요!”

그때, 얼마 전 채용된 인턴사원 몇몇이 한꺼번에 사무실로 밀려들어왔다.

“어? 갑자기 웬 닭강정?”

“아~ 요 앞에 새로 생긴 닭강정집 있잖아요. 지금 한창 오픈 행사 하더라고요. 먹고 싶다니까 매니저님이 쏴주셨어요.”

“헉, 성환 형님이요?”

“그래.”

“이야, 웬일이십니까? 형님처럼 한 소금 하시는 분이.”

“쓰읍, 이게.”

꼴에 짬 좀 찼다 이거지.

막내사원을 가볍게 쥐어박은 성환은 넉살좋은 어른처럼 웃었다.

“맨입으로 주는 거 아냐. 많이들 먹고 얼른얼른 커서 회사에 보탬이 되거라, 이 새싹들아. 알았냐?”

“헤헤, 옙!”

“감사합니다!”

금세 해맑은 얼굴이 된 사원들은 와글와글 젓가락을 들었다.

“민혁이 너도 이리 와서 좀 먹어. 일부러 많이 사왔는데.”

“아냐, 난 별로 생각이 없어서.”

성환의 부름을 가볍게 거절한 그의 시선이 닭강정 위로 머물렀다.

순간, 생각이 퍼뜩 어떤 곳에 닿았다.

“그거, 얼마예요?”

“이거요? 앞으로 3일 동안만 한 마리에 만원이래요. 진짜 싸죠!”

“……한 마리에 만원?”

“네! 근데 그건 왜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색하게 손을 내저은 그는 애꿎은 라떼만 빨아 당기며 생각에 잠겼다.

‘……한 마리, 사 가 볼까.’

혹시 그 여자가 닭강정도 좋아할는지 모르겠다.

엄연히 양념치킨과는 다른 음식이긴 하지만, 어쨌든 닭은 닭이잖아. 맛도 비슷하고…….

나름 무척 진지한 생각이었건만, 그 끝으로는 어김없이 자조적인 웃음이 피식 새었다.

정말이지 요즘은 뭐만하면 그 여자 생각이라, 당사자인 그조차 깜짝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가장 생각나는 건 바로 이럴 때.

그녀가 좋아할만한 음식을 마주할 때였다.

혹시 사다 주면 좋아할까, 맛있게 먹는 모습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가 있곤 했다.

어쩌면, 닭강정을 핑계 삼아 말을 걸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전거를 가르쳐준 그 날 이후, 본의 아니게 그들은 며칠간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그 이유는 그가 그녀에게 ‘저지르고 만’ 키스 때문이었지만, 그는 결코 제 행동이 후회되지 않았다.

그때가 아니라도 언젠간 벌어졌을 일이었으니까.

이제는 그도 서서히 확신이 들고 있었다.

그 여자를 놓치면 안 되겠다고. 계약과는 상관없이, 그 여잘 언제까지고 곁에 두어야겠다고.

결론은 섰는데, 이제는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 계약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또, 그 여자에게는 제 맘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지잉, 지잉.

그런데 그때, 별안간 휴대폰 진동 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여보세요? 어, 지원아. 어.”

그는 주위의 시끌벅적한 소음에 수화기 입구를 잠시 막았다.

“형,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 어, 그래.”

보나마나 또 그 처남으로부터 온 전화로군.

기분 좋게 통화하며 자리를 뜨는 민혁의 뒷모습에, 성환은 느슨한 미소를 지었다.

그 옛날의 민혁처럼 가수를 꿈꾸고 있다는 문제의 처남.

요즘은 오히려 그 누나보다도 더 소식을 많이 전해 듣고 있는 아이였다.

성환 또한 민혁 때문에 그 얼굴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놀랍도록 누나를 쏙 빼닮아 있는 외모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처음에는 좀 서먹서먹하더니만, 요새는 매형과 처남간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

처가 식구들에게 민혁은 그의 생각 이상으로 꽤나 헌신적이고 다정했다.

얼마나 기다려온 나날이었던가.

예전과는 다르게 눈에 띄게 안정되어진 민혁의 모습이, 성환으로선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와…… 대박이다.”

그렇게 그가 밝은 얼굴로 스케줄러를 펴던 그때, 닭강정 앞에 둘러앉은 인턴들의 대화소리가 그의 귓가에 화살처럼 꽂혔다.

“왜요? 뭘 보길래 그렇게 놀라요?”

“아, 이번에 서울시장 후보 나온다는 현태균 있잖아요. 지금껏 기부한 금액이 40억이 넘는대요.”

“헤엑, 40억? 와, 장난 아니네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원래 가진 놈들이 더하다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러긴 쉽지 않을 텐데. 그래도 간만에 괜찮은 인물 하나 나온 것 같아요.”

“하긴, 이번에 현태균 말고는 딱히 인물 없지 않나?”

“그렇긴 한데, 나중에 후보자 토론도 한 번 봐야죠. 기부 아무리 많이 해도 정책 꽝이면 도루묵이니까.”

“아, 난 토론 같은 거 봐도 잘 모르겠던데. 죄다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그냥 막 찍어요.”

“그게 어디예요. 투표도 안 하고 무작정 놀러가는 인간들도 엄청 많은데.”

“그런가? 아, 찍을 사람 없으면 그냥 현태균이나 찍어야겠어요. 다 귀찮아.”

“저도요, 저도요.”

순간, 성환의 얼굴은 미세하게 굳어졌다.

‘……현태균.’

그 이름은 어쩌면 이리도 짜증과 염증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지.

그는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이것들아! 단체로 소풍 나왔어? 뭐가 그렇게 시끄러워!”

“……네?”

“먹는 입, 떠드는 입. 그렇게 분리가 안 돼? 내가 니들 그러라고 닭강정 사준 줄 알아?”

“……예?”

가히 우디르급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태세전환에, 벙 찐 인턴들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으셨던 분이 갑자기 왜……?

“빨리빨리 먹고 자리로 가! 쓸데없는 소리들 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버럭 화를 낸 성환은 부쩍 성이 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졸지에 호되게 야단을 맞은 인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우리가 뭐 잘못했나?”

“그, 그러게요……?”

* * *

“처음엔 조금 부정적인 여론도 있었지만, 요사이 들어서는 SNS를 필두로 해 갈수록 긍정적인 양상으로 돌아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보수, 하면 젊은이들이 꺼려하는 이미지가 있는데, 의원님 같은 경우엔 특유의 바르고 정직한 이미지와 ‘새로운 보수, 젊은 보수’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적절히 잘 맞물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요. 지금으로선 딱히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멀끔한 얼굴의 보좌관은 언제나 그랬듯 꽤나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브리핑을 했다.

태균과 라희는 그 앞에 나란히 앉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이제 슬슬 여론조사 철이니까, 각별히 신경 써둬야 해요. 오늘 기사는 어디서 나온 거였죠?”

물론, 보좌관과의 소통에 있어 주도적으로 나서는 포지션은 라희였다.

“데일리뉴스입니다. 강형만이라고, 그쪽에 제가 잘 아는 기자가 있거든요.”

“잘됐네요.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엔 제일 괜찮았던 것 같으니까, 비슷한 맥락으로 몇 개 더 만들어 보세요. 시민들 반응도 계속 살펴주시고요.”

“예, 걱정 마시고 맡겨 주십시오.”

남자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 매우 익숙하다는 듯한 태도로.

“그건 그렇고, 저번에 말씀하신 아드님 건은…… 언제쯤 터뜨리는 게 좋겠습니까. 위험요소가 어느 정도 있긴 합니다만, 말씀해 주신대로 잘만 이용한다면 여론형성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최근의 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얻은 분이기도 하고요.”

“아…….”

그 말에, 태균과 라희는 알 수 없는 시선을 교환했다.

“……아직은 좀 일러요. 그래도 선거까진 아직 꽤 남았는데, 벌써부터 모든 걸 쏟아 부을 순 없죠. 장기전으로 가자고요.”

대한민국 최고의 톱스타이자 한류스타이기도 한 현민혁의 숨겨진 아버지.

그 사실은 정치인 현태균에게 막대한 후광효과를 안겨줄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부작용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서울시장’이라는 직무는 장차 대권주자로 발돋움하고픈 자들에게 최적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엄청난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 자리에 혈안이 된 경쟁주자들이 그를 가만 두고 볼 리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더러운 것을 캐내고 할 수 있는 한 추악한 쪽으로 매도할 터.

그러나…… 적진이 모두 사망한 이후에 터지는 폭탄은 아무런 효과가 없는 법이다.

일단은 당선이 우선이다. 입장표명은 선거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물론, 자연스레 긍정적인 면만 남긴 채 묻히는 것이 가장 베스트겠지만.

경쟁자들이 미처 네거티브를 준비할 시간도 없게끔, 빠르게 치고 빠지는 전략이 주요했다.

“우리가 걜 이용하려 들면, 걔도 아마 가만있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진짜 카드는 맨 마지막에 내미는 걸로 하죠. 의원님과 상의해보고, 적절한 시기에 다시 기별 드리지요. 그때까진 앞서 말씀드린 것 잘 좀 해주시고요.”

“예, 사모님.”

라희의 입술이 흡족한 듯 빙긋 호선을 그렸다.

* * *

한가로운 오전 시간대의 카페 에덴.

“여기 이거, 이름이 뭐예요?”

이름표가 앞에 버젓이 있는데 굳이 저렇게 물어보는 건 무슨 심보일까.

예원은 마뜩잖음을 숨기고 애써 미소와 함께 답했다.

“아, 네. 레어치즈케이크입니다.”

“이거, 맛있어요?”

“그럼요. 여자 고객님들께서 주로 많이 찾으세요.”

“까망베르치즈케이크……? 이거는요?”

“……그것도 물론 맛있습니다.”

“난 이거! 초코초코!”

쇼케이스 유리에 그림이라도 그리려는 듯, 모자(母子)의 손가락이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겼다.

옅은 손자국이 새겨질 때마다 예원의 얼굴은 티 나지 않게 구겨졌다.

“안 돼. 초코 먹으면 이 썩어.”

“아아앙, 시러! 초코, 초코!”

“어허, 또 그런다 또. 자꾸 그러면 저기 이모가 ‘이노옴!’ 한다? 봐봐, 저기. 이모 화난 거.”

“…….”

“그냥, 티라미수로 주세요. 얼마죠?”

“……아, 예. 사천오백원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 그녀에게 이름도 모르는 조카를 만들어 준 손님은 그렇게 떠났다.

잠시 뒤, 손자국이 남은 케이크 쇼케이스를 야무지게 닦아대던 예원의 손길은 뚝 멈추었다.

삶이 아무리 복잡하고 고달파도 일은 열심히 해야 하건만, 몸이 마음처럼 잘 따라주지가 않았다.

하기야, 콩밭에 가 있는 마음이 쉬이 돌아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을밖에.

“…….”

그 날, 그렇게 한참의 울음을 쏟아낸 뒤.

지영의 다그침에 못 이긴 예원은 결국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전민혁과 있었던 일부터, 현민혁과 계약결혼을 맺고 정말로 그를 사랑하게 된 지금의 일까지.

예상했던 대로 지영은 무척이나 놀라는 눈치였다.

‘그랬…… 구나.’

지영은 그 뒤로 한참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몰라보게 차분한 얼굴이 된 지영은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서, 넌 뭘 어떻게 하고 싶은데. 계약을 깨고 싶어?’

‘……모르겠어.’

지영에게라도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나니 현실이 새롭게 보였다.

어차피 계약기간은 1년. 그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이 계약은 파기가 된다.

그 전에 그에게로부터 멀어져야만, 그 뒤가 한결 편해질 거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때까지만이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에겐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으니까,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으니까.

조금이라도 옆에서 그를 더 보고 싶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 그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애초부터 그는 모든 걸 암시하며 계약을 제안했었고, 자신은 그 제안에 별 의심 없이 응했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그녀와의 약속을 매우 충실히 이행해주었다.

늘 착하고 다정했던 사람.

그런 사람에게 갑자기 좋아한다느니, 그래서 이 결혼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느니 한다면…….

그로선 그것만큼 황당한 일이 없을 터였다.

‘숨길 수 있어. 내가 이런 맘이라는 거, 절대로 그 남자한테 안 들킬 거야. 할 수 있어.’

‘근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잖아. 민혁 씨, 게이 아닐 수도 있어. 너한테 키스도 했다며. 결혼식에서도 그랬고.’

‘……알아.’

‘근데? 왜 지레 포기하는 거야, 벌써부터. 차라리 민혁 씨한테 물어보면 되지.’

‘……자신이 없어. 우린…… 시작부터 잘못됐잖아. 그 남자 마음이 어떤지 대충 알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숨길 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뇌는 그녀에게, 지영은 딱한 중생을 다 보겠다는 투로 말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알겠어. 근데…… 너도 이거 하나만은 알고 있어라.’

‘……뭐?’

‘난, 현민혁 팬이기 이전에 네 친구야. 그게 먼저야. 난 무조건 네 편이라고.’

‘…….’

‘난 너 두 번 상처 받는 꼴 못 봐.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정리해. 정리할 거면.’

예로부터 현민혁이라면 껌뻑 죽었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김지영이 그렇게 말했다.

난 네 편이라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하나뿐인 친구의 말은 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힘이 되었다.

그가 아무리 좋아도, 어쨌든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건 그녀 자신이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래, 힘내자.”

인생 뭐 별 거 있냐. 홍예원 파이팅! 아자아자!

입술을 꾹 다문 그녀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였다.

“예원 씨!”

밝은 얼굴의 우진이 입구를 지나,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일단 몇 주 만인 것은 확실한 남자.

민혁과 일이 있었던 그날 이후, 그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얼른 표정을 고친 예원이 떨떠름함을 숨기며 인사했다.

“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

매장 안을 둘러본 그가 예의 미소를 씩 지어보였다.

“그 날, 그렇게 헤어져서 아쉬웠는데. 잠깐 따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요새 카페는 미처 못 들렀어요. 잘 있었죠?”

“……네, 저야 뭐…….”

잘 있긴…… 했지. 그 사이 나도 엄청난 걸 깨달아서 그렇지.

그녀가 씁쓸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한편, 우진은 넌지시 물었다.

“민혁이는…… 잘 지내죠?”

“……네?”

그에게서 ‘민혁’이란 말이 나온 순간, 예원은 며칠 전 지영의 말을 떠올렸다.

‘최우진? 와, 진짜 오랜만에 들어본다 그 이름. 걔, 민혁 씨의 대표적인 라이벌이었어. 아마 둘이 사이 별로 안 좋았을 걸……? 최우진 탈퇴할 때, 둘이 치고 박고 싸웠다느니 뭐니 별 얘기가 다 있었거든. 그 얘긴 팬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한데……. 근데, 확실히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어떻게 그렇게 또 만나지냐?’

민혁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내던 중, 마침 생각이 닿아 우진과 관련된 이야기도 혹시나 해 물어보았던 것이다.

예원은 그제야, 그가 왜 그리 우진을 치떨게 싫어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희한하다 싶을 정도로 여유로워 보이는 저 모습.

정확한 이유까지는 모르지만, 그것 자체가 대놓고 날을 세우던 민혁과는 대조적이었다.

둘 중 어느 쪽에 귀책이 있었을지는 뻔히 보이는 사실이다.

원래 가해자는, 피해자 쪽의 마음을 절대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니까.

혼자서 쿨하게, 멋있는 척은 다 하는 거지. 저렇게.

“근데, 예원 씨 얼굴이 많이 상했네요. 그새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

“저, 우진 씨.”

그래서일까.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만, 저 빙글거리는 얼굴이 무지막지하게 꼴 보기가 싫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 예. 말씀하세요.”

의외라는 듯한 표정에 괜스레 오기까지 생긴다.

잠시 눈을 내리깔던 예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진 씨가 민혁 씨와 오래 전에 인연이 있으셨다는 건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 하셨으면 좋겠어요.”

“…….”

“그 사람, 우진 씨 많이 불편해해요. 반가워하지도 않는 것 같고요.”

무심한 척, 고통스럽게 뇌까리던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에 금방 떠오른다.

‘언제부터 알던 사이냐고요. 그 자식이랑 친해요?’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신을 두고, 내가 왜.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예요.”

“…….”

“자꾸 찾아와서 이러시는 거…….”

한 템포 쉰 예원은, 마침내 쐐기를 박았다.

“좀 많이 불편해요, 저.”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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