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저한테…… 왜 키스하셨어요?
2018.10.02.
언젠가 예원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자고로 키스란, ‘영혼이 육체를 떠나가는 순간의 경험’…… 이라던가 뭐라던가.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그때 그녀는 그 말이 꽤나 오버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민혁과 나누었던 가벼운 뽀뽀에선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었으니까.
‘뽀뽀나 키스나, 마우스 투 마우스인 건 거기서 거긴데 뭐가 그리도 다르다고.’
그것이, 반 모태솔로 홍예원이 줄곧 가져왔던 솔직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일어난 직후.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온 건지.
정말이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영혼이 육체를 잠깐 떠나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단, 딱 하나 생생한 것은 감각이었다.
싱그러운 느낌으로 와 닿던 밤공기와, 저를 바라보던 남자의 달빛처럼 따스한 눈길.
고요하게 울려퍼지던 풀벌레 소리, 은은한 커피 향기.
그리고……
너무나도 부드럽던 그 입술의 감촉까지.
“…….”
“…….”
돌아오는 내내 차안을 가득 채웠던, 찢어질 듯 팽팽한 공기는 집안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여전했다.
밤이 깊어 사방이 조용해진 가운데서도, 어색해진 민혁과 예원은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한 채 1층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으, 죽겠네, 정말.’
이러고 있다가는 아주 1층에서 날밤을 샐 판이다.
보다 못한 예원은 제가 먼저 그 적막을 깨기로 마음먹었다.
“저……. 오늘, 감사했어요.”
“…….”
“덕분에 이제 좀 감이 생겨서…… 다음번엔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 사장님 덕이에요.”
물론 그건 순수하게 자전거를 잘 탈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뱉고 나서 생각하니, 뭔가 뉘앙스가 찝찝했다.
‘아이씨…… 말이 좀 이상한가.’
막판에 딱 그 일만 없었더라도…….
그래도 어쨌든, 자전거는 무사히 배웠으니 된 것이다.
괜스레 제 발이 저려오는 것을 예원은 애써 외면했다.
“그, 그럼. 전 이만…….”
최소한의 감사표시는 했으니, 최대한 빠른 후퇴만이 남았다.
예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얼른 계단으로 향했다.
“홍예원 씨.”
그런데 그때, 남자의 뒤늦은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세게 그러쥐었다.
“……네??”
졸지에 목소리가 삑사리처럼 튀어나갔다.
그는 가장 낮은 층계참에 서 있는 그녀를 잠시간 물끄러미 올려다보더니, 이어 한숨 같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나, 사과 같은 거 안 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웬 사과?
다소 어리둥절해 있는 그녀에게,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오늘 일, 실수 아니에요. 사고도 아니었고.”
“…….”
“그러니까, 사과 안 할 거예요. 아니, 못 합니다.”
그 순간, 서서히 또렷한 빛을 찾던 그녀의 눈은 이내 황망하게 변했다.
그의 말에 담긴 진의를 알 수가 없었다.
‘뭐, 뭐야. 저 말은?’
지난번처럼 어물쩍어물쩍, 유야무야 넘어갈 줄 알았는데.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가 오히려 예원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실수도 아니고 사고도 아니다…….
그 둘이 아니라면,
그 말인즉슨……?
“……잘 자요, 아침에 봐요.”
어느샌가 그녀의 곁으로 터벅터벅 올라온 그는 홀연히 그 말만을 남기고는 2층으로 향했다.
엉킨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다만, 그 와중에도 하나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기요, 민혁 씨!”
이대로 그를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것.
“헉!”
앞서있는 그를 황급히 붙잡는다고 한 곳이 하필이면 팔뚝이었다.
움켜쥔 팔뚝 밑으로 그의 단단한 팔 근육이 느껴지자, 예원은 부리나케 손을 떼었다.
달아오른 쇠기둥에 손을 댄 것처럼 손바닥 전체가 화끈거린다.
그만큼 강렬한 그의 시선이 정수리를 통해 곧장 와 닿았다.
“……왜요. 무슨 할 말 있습니까.”
할 말, 있지.
온갖 말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산발적으로 튀어 올랐다.
물론, 그 중 가장 궁금한 것은 이거였다.
‘저한테…… 왜 키스하셨어요?’
이번으로 벌써 세 번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자’인 저에게 어째서 굳이 그런 짓을…….
그녀의 작은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저, 그게…….”
설마, 절 좋아하시나요?
아니, 혹시 당신은…… 게이가 아닌가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민혁이를 사랑했던 그때처럼,
이번에도 난…… 당신을 상대로 착각을 한 건가요?
내 멋대로?
“…….”
그렇게 따발총처럼 묻고 싶은 말들이 한 가득이었으나, 예원은 끝끝내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순간.
오래전의 기억이 그녀의 뇌리를 불쑥, 스쳐지나간 탓에.
“이제 다 끝났으니까, 솔직히 말해.”
“…….”
“너…….”
“…….”
“‘남자’ 좋아하는 거였어?”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 위로, 별 수 없이 저가 게이임을 인정하던 전민혁의 목소리와 얼굴이 생생히 덧입혀졌다.
……두려웠다. 아니, 무서웠다.
혹시나 그에게서도 같은 대답이 튀어나올까 봐.
그때는 몰라서 당했다지만 이번엔 그런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시작한 일이었지 않은가.
자신은 그를 ‘절대’ 좋아해선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도, 자신을 ‘절대’ 좋아할 수 없다는 것을…….
“…….”
그런 끔찍하고 지독한 경험을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결국, 예원은 제가 내놓은 말을 다시금 주워 담았다.
지레 겁을 집어먹어버리고서.
“……아니에요, 아무것도.”
“…….”
“사장님도…… 안녕히 주무시라고요.”
그런 그녀를 향해, 남자는 뜻 모를 미소를 엷게 머금었다.
그의 발걸음이 턱, 턱 위층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예원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하아.”
고작 키스 한 번에, 그를 상대로 애써 쌓아놓았던 철벽이 그만 허술한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사실을 깨닫자 순식간에 힘이 쭉 빠졌다.
예원은 옆에 있는 벽에 몸을 기댄 채,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어떡해. 이제 진짜 어떡해…….’
문득, 아까 전의 키스가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어김없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 반응하는 심장.
그런데 이번엔 그 움직임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평소의 박동이 두근거림에 의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것은 불안감으로 인한 쪽에 가까웠다.
한 손은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다른 한 손은 가슴팍을 세차게 문질렀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예원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잠시만 정신을 차려 보면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의 곁에 바짝 다가서 있는 마음.
그런 자신을, 이제는 그녀도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안 되겠어.”
이대로 있다가는 도저히…….
가까스로 자신을 다독인 예원은 문득 고개를 들어 말끔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힘겹게 몇 번 깜빡거리던 눈꺼풀이 결국, 맥없이 눈동자를 덮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허…… 대박!”
민혁과 예원의 신혼집에 처음으로 입성한 지영의 첫 감상은 이러했다.
제아무리 연예인 집이라지만, 끽해봐야 일반 집들이랑 뭐 크게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건 완전히!
“야, 이거 거의 궁궐 아냐? 이게 다 몇 평이야?”
누가 친구 아니랄까봐, 언젠가 예원이 가졌던 의문을 똑같이 제기한 지영은 연신 나지막한 탄성을 흘려댔다.
“……평수는 나도 몰라. 알면 다친대.”
“어후, 그래. 이 정도면 다칠 만도 하겠다…….”
인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네, 진짜.
박물관 견학 온 고등학생이라도 되는 양, 지영은 그렇게 한참이나 집안을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어? 예원 양, 일찍 왔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때, 마침 주방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지영은 재빨리 작게 물었다.
“누구셔?”
“……아, 우리 집 일 도와주시는 이모님. 한 분 더 계신데, 오늘은 안 오셨나 봐.”
“오…… 안녕하세요!”
이 넓은 집으로도 모자라 가정부 아주머니까지!
진정한 그사세가 따로 없다.
금세 하트 뿅뿅 눈이 된 지영은 2층으로 먼저 올라가는 예원을 마냥 부러운 듯 뒤따랐다.
“역시 사모님의 삶은 다르다, 달라. 난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이런 집에 살 수 있을라나?”
“…….”
“야, 근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로 오라고 했냐? 언제는 오고 싶다고 해도 부득불 오지 말라더니.”
물론, 그녀가 지영을 이곳으로 부른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지영을 조심스레 제 방으로 인도한 예원은 문을 단단히 잠그고 침대로 돌아왔다.
“실은, 너한테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나한테?”
얘가 갑자기 무슨.
지영은 한순간 새삼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장소 선정부터, 표정, 목소리까지. 뭔가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지원이 얘기인가?’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드디어 그 애가 제 누나에게 진심을 털어놓은 것일지도.
딱히 찔리는 것도 없건만, 지원의 꿈을 만들어준 사람이 저라는 소릴 들은 탓인지 지영은 왠지 모르게 살짝 긴장했다.
“뭔데, 물어봐.”
시선을 내리깐 예원은 잠시의 시간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
“……민혁 씨, 엄청 엄청 옛날 때부터 팬이었다고 했지?”
“……민혁 씨?”
아, 뭐야. 난 또 뭐라고.
헛웃음을 터뜨린 지영은 일순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참나, 그거 물어보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냐? 내가 대체 몇 번을 말해. 이제껏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구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뭐.”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예원은 괜스레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렇게 초창기부터 팬이었으면, 그 사람하고 관련된 개인적인 뒷얘기 같은 것도…… 좀 알고 있나 해서.”
“뒷얘기?”
뒷얘기라…….
어떤 종류를 말하는 건지 잘 감이 오지 않았지만, 잠시 눈을 굴리던 지영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뭐, 유명한 얘기들은 대충. 내가 아는 애들 중에 나보다 더 극성인 애들도 몇몇 있었거든. 걔들한테서 좀 주워들은 게 있긴 하지.”
“……아, 그래?”
순간, 지영은 제 친구의 표정이 아주 살짝 밝아지는 것을 캐치했다.
눈치로 대충 보아 하니, 웬만한 사람들은 잘 모르는 제 남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몰래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뭐,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준비가 돼 있지. 음하하.’
친구를 위해 그 정도도 못할쏘냐.
지영은 이어지는 예원의 말을 마냥 홀가분한 마음으로 들었다.
“그럼 말이야. 너 혹시…….”
“응.”
“그 사람, 전에 누구랑 사귀었었는지…… 혹시 알아?”
“……어?”
하지만, 그건 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이었다.
지영의 얼굴은 한순간 얼떨떨하게 변했다.
“갑자기 그건…… 왜?”
“……그냥, 좀 알아야 할 일이 있어서. 난 신경 쓰지 말고, 아는대로 알려줄 수 있어?”
갑작스런 질문이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얘는 왜 뜬금없이 지 남편 과거를 캐내려고.
잠시 멈칫하던 지영은 이내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아니 뭐…… 그거야 민혁 씨 본인만 아는 거지. 사생팬 아닌 이상 팬들이 아는 얘긴 거기서 거기야. 나 같은 쩌리 팬이 뭘 알겠냐.”
“……그래도, 아는 만큼만 얘기해 줘. 자세한 것까지는 안 바라, 나도.”
“그, 글쎄…….”
예원의 끈덕진 눈빛에 못 이긴 나머지, 지영은 제가 아는 내용들을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뭐…… 내가 알기로 민혁 씨는 여자랑 스캔들 난 적이 한 번도 없어. 내가 전에 말했던 조혜인도, 아주 잠깐 소문만 있었지 열애설이 난 적은 없고. 게다가 그건 아주 오래 전이야. 십년도 더 됐지, 아마? 뭐…… 지금은 드라마까지 같이 찍는 사인데 뭔 일이야 있었으려고.”
“…….”
“나도 그냥 추측이지만, 아마도 별 거 아니었을 거야. 그 뒤로 여자 관련된 얘긴 들어본 적도 없어.”
“……그래?”
“응. 그리고 사실, 민혁 씬 여자 상대 열애설보다 그놈의 게이 루머가 더 유명했지. 뭐 누구한테 고백을 받았다느니, 누구랑 사귄다느니……. 본인도 스트레스였을 거야. 너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마 꽤나 골치였을걸. 그것 때문에 캐스팅까지 까였다는 찌라시도 돌았었거든.”
“……캐스팅……?”
그 대목에서, 예원의 머릿속에선 저기 저 구석에 묻혀 있던 목소리들이 퍼뜩 재생되었다.
“저도 들은 거라 확실하진 않은데……. 걔 말론 그쪽 업계엔 이미 소문이 파다하대요. 그래서 가끔 캐스팅도 까이고…… 만나는 사람도 죄다 남자들밖에 없다고…….”
“사실은 요즘 내 삶이 본의 아니게 좀 피곤해졌어요. 이유가 한 가지면 그나마 나을 텐데, 문제는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거고. 더 놀라운 건, 그 모든 게 나의 ‘결혼’ 하나면 전부 한 큐에 해결될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 그때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문제는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라고.
사실, 어느 순간부터 예원은 그가 결혼을 하고 싶어 했던 이유를 ‘어머니인 수진이 결혼을 종용해서’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확실히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저와의 결혼에 이상하리만큼 적극적이었던 그.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필사적이었던 그.
단지 그것만이 이유인 것 치고는 너무도 극단적으로 치달은 결정이었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어.’
그땐 1년이라는 계약기간과, 엄청난 조건에만 눈이 멀어 다른 걸 깊이 살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순히 그런 루머를 타파하기 위함이었더라면, 진정한 사랑을 찾아 진짜 결혼을 했으면 되는 일이었을 텐데.
그런데 그는 굳이 가짜 결혼을 할 신부를 구했다.
아무리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결국엔 같은 결론만 도출되었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했을 때, 아무래도 그는…… 게이가 분명하다는 것.
그렇다면, 그가 자신을 절대 좋아할 일 없는 여자를 찾았던 이유도……
당연히…….
“…….”
순간, 맘 속 깊은 곳에서부터 뼈 저리는 절망감이 고개를 힘차게 들고 일어났다.
‘아니 그럼…… 그 키스의 의미는 대체 뭐였지?’
실수도, 사고도 아니라면서.
그런 키스는 대체 왜 한 거야. 사람 마음 설레게.
“당신, 매력 있다고 했잖아.”
그런 맘에도 없는 소린 대체 왜 한 건데.
왜 사람을 헷갈리게 한 건데.
왜, 왜……!
“에휴, 근데 그런 게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냐. 말했잖아, 네가 여기 떡 버티고 있는데 과거가 무슨 문제냐고. 그렇다고 민혁 씨가 바람피울 인사도 아니잖아? 걸리는 게 있는 사람이었음, 나부터 결혼 결사반대했지.”
“…….”
“암튼, 내가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야. 과거야 어찌 됐건 저리 묻어두시고, 울 싸모님께선 앞으로의 미래에나 집중하시지? 응?”
그래, 그러려고 했다.
계약이고 뭐고 그딴 건 아무 상관도 없어졌으니까.
그가 만약 게이가 아니라면……
그를 남자 대 여자로,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었다.
그 정도로 그 남자가 좋아졌는데……. 그런데…….
“근데 그런 건 갑자기 왜 묻고 그래? 왜, 민혁 씨하고 무슨 일 있었어?”
“…….”
“야, 홍예원. 얘가 사람 불러다놓고 말이 없어. 대답 좀 해. 야, 야!”
지영의 손이 장난스럽게 예원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지영의 얼굴에선 미소가 싹 사라졌다.
친구의 뺨을 타고 후두둑 흘러내리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액체를 발견한 탓이었다.
“야…….”
“…….”
“너, 울어?”
예원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나서야, 그제야 지영은 그녀가 진실로 울고 있음을 알았다.
“헤엑, 진짜네?”
“…….”
“야, 가, 갑자기 왜 울어? 어? 내가 뭐 잘못했어? 왜 그래, 너?!”
깜짝 놀라 저를 쳐다보는 지영을 향해, 예원은 멍하니 울먹거렸다.
“……지영아…….”
차라리 그 남자한테 속 시원하게 묻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겁이 나 죽겠단 말이야.
이대로 모든 게 끝일까 봐.
“흡, 지영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내 사랑은…… 내 사랑은,
왜 이렇게 항상 어려운 거니.
“흡, 흐으윽……. 지영아……. 나 어떡, 해…….”
“홍예원…….”
하나뿐인 친구 지영의 품에 안긴 채, 예원은 참고 있던 눈물을 폭포수처럼 터뜨렸다.
마치, 그 옛날 전민혁에게 대차게 차였을 때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욱 서럽게.
“…….”
눈물이…… 모든 걸 쓸고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이 지옥 같은 마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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