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세 번째 키스
2018.09.28.
“……예, 예원아?”
소름끼치도록 익숙한, 마치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예원은 꼿꼿이 멈춰 선 채,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전민혁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와의 재회는 결혼식 이후 처음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애달파 보이는 얼굴. 또 한때 그녀가 너무도 사랑해 마지않았던 얼굴.
약간 핼쑥해진 느낌은 있으나 그 특유의 말갛고 단정한 얼굴은 예전 그대로인 모습이었다.
“…….”
실은……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비록 다시는 보지 말자고 야멸치게 선언하긴 했지만,
혹시나, 아주 혹시나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그에게 가벼운 인사 정도는 건네자고. 그 정도 여유는 보이자고.
혹자는 그딴 자식한테 웬 인사치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를 사랑했던 지난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비록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을지언정, 모른 척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만약, 옆의 저 개자식만 없었더라도 말이다.
‘이젠 둘이 아주 대놓고…….’
하.
아니나 달라 전민혁의 옆에 버팀목처럼 서 있는 세찬을 보며, 예원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둘이서 지지고 볶고 잘 살겠지, 대충 짐작만 했었는데.
다시금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나니 더더욱 기가 막혔다.
저리 애틋한 애들을 어쩌면 그렇게 까맣게 몰랐을까.
제가 진작 저 사이에서 빠져주지 않았더라면, 그 후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가질 않았다.
예원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다 아물었다고 생각한 상처가, 졸지에 살짝 벌어지며 약한 속살을 내보인다.
마음이 따가웠다.
동시에 비참함이 온몸을 관통했다.
“예원 씨, 안 가고 여기서 뭐하는…….”
그때였다.
뒤에 있던 남자가 타이밍 좋게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것은.
“…….”
평소 타인에겐 다소 무신경한 그였지만, 뜻밖에도 민혁은 눈앞의 남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언젠가 에덴 앞에서 보았고, 심지어 결혼식에서까지 보았던……
바로 그 망할 자식이 분명했다.
‘저 자식이 여긴 왜?’
게다가 옆엔 웬 건장한 놈까지 한 세트로 있고.
그는 그들을 향해 본능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데,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옆에 서 있는 여자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멍해진 얼굴.
게다가 거기엔 왠지 모를 참담한 기색이 역력해 있다.
보는 이가 다 아픈 그 표정에, 가슴 한 구석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뻐근했다.
“…….”
이제는 이 여자도 어느 정도 단단해졌다고 생각했건만, 모두 제 착각이었던 걸까.
잠시 시선을 내리깔던 그는 이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이상한 확신 같은 것이 들었다.
“……아는 분들입니까?”
지금은 바로, 자신이 나서야 할 타이밍이라는 확신.
넌지시 건네진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여자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예원아!”
“이만 가죠, 늦었는데.”
이윽고 힘겹게 미소 지은 예원은 보란 듯 민혁의 팔짱을 꼈다.
그는 별 반응 없이 그녀를 에스코트해주었고, 금세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이 된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두 남자를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그들이 자취를 감추고 난 뒤.
그들이 사라진 곳을 고깝게 바라보던 세찬은 잔뜩 뿔이 난 표정으로 돌아섰다.
“야. 거기서 쟤 이름을 왜 불러? 아는 척해서 좋을 게 뭐 있다고!”
예원에게서 개무시를 당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전민혁은 돌처럼 굳어버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세찬은 거듭 물었다.
“너, 설마 아직까지 쟤한테 미련 남았냐?”
“…….”
“그래?”
미련?
문득 그 단어를 곱씹은 그의 입가에 허무한 미소가 번졌다.
‘……나도 모르겠다.’
이게 미련인지, 미안함인지…….
그는 조금 전의 예원처럼,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뇨,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메아리처럼 댕댕 울려대고 있었다.
* * *
공원으로 향하는 차안의 공기는 어느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마쯤 조용히 있었을까.
불쑥 그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아까, 그 남자.”
“…….”
“그 사람…… 아닙니까?”
모호한 문장이었으나 뜻을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예원은 내심 흠칫 놀랐지만,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당연히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이제껏 총 두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아주 잠깐 말 섞은 게 전부였고 심지어 두 번째는 먼발치서 힐끗 바라만 본 게 다였으니까.
그런데, 알고 있었구나.
알고도 모른 척해준 거였구나.
예원은 순간 그를 향한 고마움과 부끄러움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괜스레 먼저 아는 척을 하지 않은 것 또한, 이 남자 나름의 배려였을 터였다.
“괜찮습니까?”
“……그럼요, 당연히 괜찮죠.”
이제는 안 괜찮아도 괜찮아야 한다.
예원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 얼굴을 보면 아직까지도 마음 한 구석이 싱숭생숭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뭐랄까. 그건 아련함이나 안타까움에 가까운 쪽이지, 설렘이나 떨림 같은 종류의 감정은 아니었다.
아까 전, 전민혁을 만나고도 무감했던 그녀의 심장이 그 사실을 확실히 방증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깨달은 제 감정은 무척이나 명확했으니까.
심장이 반응하는 쪽을 따지자면, 그야 당연히…….
“…….”
아. 또, 또. 정신 차리기로 그렇게 다짐했으면서.
예원은 은근슬쩍 그에게로 향하려는 시선을 거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얼른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저 오늘 안으로 자전거 마스터할 수 있는 거예요?”
“글쎄요. 그거야 배우는 사람 운동신경에 따라 다르겠죠.”
“……쳇, 가르치는 사람이 잘 가르치는 게 우선이지.”
들릴 듯 말 듯한 여자의 볼멘소리에, 민혁은 픽 웃었다.
“가르치는 거야 문제없으니까 걱정 마요. 아, 그때 내가 말하지 않았나?”
“……뭘요?”
힐끗 그녀를 돌아본 그의 입가에 어쩐지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스파르타 단기 속성 코스’라고.”
* * *
“아아악! 자, 자, 잠깐만요, 민혁 씨! 잠깐만!”
“걱정하지 말고 계속 페달 굴려요. 균형 잘 잡고, 핸들 똑바로 놓고!”
“노, 노, 놓으면 안 돼요! 알았죠!”
‘스파르타 교습’이라고 공언한 그의 말답게, 한산한 공원 일각에선 예원의 처절한 목소리만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자전거의 뒤꽁무니를 잡은 그가 열심히 그녀를 받쳐주는 동안, 예원은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자전거 핸들을 겨우겨우 붙잡으며 발을 굴리고 있었다.
이놈의 몸뚱이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건지.
몸에 기름칠을 안 쳐도 너무 안 친 것이 분명했다.
“자전거는 겁내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요. 차분하게, 천천히!”
“그, 그건 저도 아는데…… 몸이 맘대로 안 나가서…… 어! 어어, 어어!”
“대답 안 해도 되니까 집중해요! 핸들 똑바로 하라니까!”
“엄마아악!!”
철푸덕!
“……예원 씨!”
결국, 예상했던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자전거와 함께 보기 좋게 나동그라진 예원을 본 민혁은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다.
“아이씨…….”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조금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다친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바닥에 몸을 부딪친 사실보다, 일단 넘어졌다는 사실 자체에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든다.
온몸이 화끈해진 예원은 저도 모르게 다리와 무릎 부근을 쓸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녀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그가 그런 것을 놓칠 리 없었다.
“무릎 다쳤어요? 어디 봐 봐요. 까졌어요?”
“아, 안 까졌어요…… 그냥…….”
근데, 이 와중에 얇은 청바지 천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손길은 왜 이렇게 홧홧한지.
예원은 당황스러움을 애써 숨기며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한 술 더 뜰 모양새였다.
“잘못하면 흉질 수도 있어요. 바지 위로 걷어 봐요, 한 번 보게.”
잠깐. 뭐. 뭐, 뭘 걷어?
예원의 눈이 금세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에요! 괘, 괜찮은데…….”
“그러니까 괜찮은지 아닌지 눈으로 보자고요. 걷어 봐요.”
“아니, 저 그게…….”
“빨리요. 뭣하면 약국 가서 연고랑 밴드라도…….”
“괜찮다고요!”
결국, 저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버렸다.
그 자세 그대로 우뚝 멈춘 두 사람은 한껏 놀란 채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고, 두 사람 사이엔 잘게 눈을 끔뻑이는 소리만 가득 채워졌다.
‘……에이씨.’
그것에 먼저 균열을 낸 것은, 역시나 예원이었다.
“……쪼, 쪽팔려서 그래요! 안 그래도 부끄러워 죽겠는데, 자, 자꾸 뭘 걷으라고…….”
“…….”
아. 민혁은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닫고는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어, 미안합니다. 난 그냥…… 예원 씨 다쳤을까 봐.”
뭐, 까지고 구르는 것쯤이야 애초부터 각오한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덩달아 머쓱해진 예원은 혼잣말처럼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역시…… 하루 만에 성공하기는 힘들구나.”
어렸을 적, 그녀가 하늘을 향해 매일 같이 되뇌던 말이 ‘하루만 더 있다 가지’였다.
아빠와의 시간이 딱 하루만 더 주어졌다면, 이깟 것쯤 진즉에 다 배울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두 발 자전거가 이렇게 힘든 건 줄 알았다면, 아빠 원망은 조금만 할 것을 그랬다.
애꿎은 쪽에 괜한 심술만 부렸네.
“……그래도 잘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하면 혼자서도 설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계속해 봅시다. 힘내요.”
“……네에.”
‘하긴, 모든 일이 내 맘처럼 쉬우면 세상에 안 될 일이 있겠냐.’
후, 한숨을 내쉰 예원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왕 배우기로 한 것, 후회 없이 끝내야 하니까.
저 멀리 하늘에서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아빠와 엄마를 생각하며, 예원은 다시금 굳센 의지를 다졌다.
‘좋아.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자전거 핸들을 움켜쥔 그녀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 * *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녹초가 된 채 벤치에 앉아 있는 그를 향해, 캔 커피를 든 예원의 손이 쭉 내밀어졌다.
“자, 드세요. 오늘은 제가 풀코스로 쏩니다.”
“……고마워요.”
“뭘요, 이런 걸 가지고.”
실은, 애초부터 넙죽 갖다 바칠 생각이었다.
재개된 레슨은 그 뒤로 약 세 시간 동안 쭈욱 이어졌다.
몇 번을 넘어지고 구르고, 여러 번의 탄식이 터졌다.
혼자 바로서는 것까지는 어렵사리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아무래도 무리인지 끝끝내 활주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갈 수 없었다.
결국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걸로 그와 잠정합의를 봤다.
대차게 구른 걸로만 치자면 자신이 대접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나, 그도 답 없는 저를 가르치느라 그야말로 고군분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동전 때문에 빵빵해진 나머지 잘 닫히지도 않는 지갑을 억지로 닫으면서, 예원은 그의 옆자리에 앉아 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본의 아닌 격렬한 운동 뒤,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을 적시고 지나가는 느낌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즐거웠다.
“…….”
그러는 사이 그의 시선은 문득 예원의 손에 들린 지갑에 한참 머물렀다.
별 것 아니니 그냥 지나치면 되는데. 모른 척하면 되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몹쓸 호기심이 일어났다.
저게 대체 뭐기에 그렇게 비밀이라는 건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홍예원 씨.”
“네?”
“혹시,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뭐요?”
그녀가 주섬주섬 가방에 지갑을 넣자,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가방을 향해 눈짓했다.
“……아까, 그 지갑에 있던 사진. 비밀이라고 했던 거.”
“…….”
“그거, 무슨 사진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아.”
이 남자가 웬일로 그냥 넘어간다 했지.
사실 비밀이랄 것까진 없었지만, 굳이 그에겐 알리고 싶지 않았던 사진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예원은 고민 끝에 더듬더듬 진실을 털어놓았다.
“실은, 우리 가족사진이에요. 단 하나밖에 없는.”
“……가족사진?”
“네.”
쓰게 웃은 그녀가 설명했다.
“아빠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니까 지원이가 완전 애기였을 때. 아빠, 엄마, 저, 지원이 이렇게 넷이서 찍은 사진이요. 다같이 사진관 가서 찍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영정사진도 여기서 잘라다 썼어요. 두 분이 너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영정으로 쓸 사진이 없었거든요.”
아, 어쩐지 이상하게 익숙하다 했는데.
설명을 듣고 나니 그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있었다.
회식 날, 술에 취한 그녀를 데려다주며 언뜻 보았던 그것.
“혹시…… 예원 씨 방에 있는, 그 사진입니까?”
“어?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필요 이상으로 놀란 듯한 여자의 대꾸에, 머쓱해진 그는 살짝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냥, 지나가다 우연히 봤어요. 액자에 대놓고 끼워놨던데요.”
“아…… 그러셨구나.”
그제야 예원은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게 넷 다 엄청나게 잘 나온 사진이거든요. 그래서 고이고이 모셔두고 있어요. 방에 하나, 지갑에 하나.”
“…….”
“굳이 알 필요 없는 거라고 생각해서 말 안 드린 건데……. 됐습니까? 이제 궁금증이 좀 풀리셨어요?”
자칫 숙연해질 뻔한 분위기를 장난스럽게 환기시키는 예원 덕에, 민혁은 짐짓 웃었다.
“아, 참. 이것도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물어봐도 됩니까?”
참나, 갑자기 웬 질의응답 타임?
예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이번엔 또 뭔데요?”
평소보다 더 주춤하는 듯하던 그는 이내 천천히 물었다.
“아까 전에 레스토랑에서 만난…… 그 남자요.”
“…….”
“혹시 나랑, 이름이 같습니까?”
뜻밖의 질문에, 이번엔 그녀가 주춤했다.
‘아……. 하긴, 이름은 말한 적 없었구나.’
그래도 그 역시 이미 눈치는 채고 있었나 보다.
예원은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네. 민혁이에요, 전민혁.”
“……전민혁.”
민혁은 천천히 그 이름을 혀에 굴렸다.
전민혁, 전민혁이라.
‘성이 전씨였군.’
그의 미간은 절로 좁아졌다.
혈액형도 있고 키도 있고, 하다못해 발사이즈도 있는데.
하필이면 제일 중요한 ‘이름’이 같을 게 뭐란 말인가.
어쩐지 맘에 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요즘 그녀는 그를 향해 ‘사장님’이라는 호칭 대신 ‘민혁 씨’라는 호칭을 훨씬 더 많이 쓰고 있었다.
‘혹시, 날 부를 때 그 남잘 떠올리는 건 아니겠지.’
그 생각에 이르자 괜스레 유치한 질투심마저 올라왔다.
불쑥 엉뚱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전민혁’보단…… ‘현민혁’이 더 낫지 않나?”
“……네?”
……아뿔싸. 무슨 이런 얘기를!
“아, 아니…… 성 말이에요, 성. ‘전’씨보다는 ‘현’씨가 더 낫지 않나…… 해서.”
그는 순간적으로 마구 열린 제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으로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정작 예원은 저녁과 밤사이 나른한 분위기에 취한 모양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다 생각하는 건지 다행히도 순순히 수긍했다.
“아, 네. 뭐…… 그렇죠.”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듯 순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는 이상한 충동이 이는 것을 느꼈다.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 그 놈에게로 향해있는 이 여자의 마음은 대체 어떤 건지.
그리고……
나를 향해있는 마음은 대체 어떤 건지.
“……그 사람, 많이 좋아했습니까?”
“……네.”
“어디가 그렇게…… 좋았습니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얼굴 하난 꽤 반반한 남자였다.
같은 남자로서 좀 짜증스러울 만큼.
은근 얼빠 기질이 있는 여자이니 모르긴 몰라도 그 외모가 호감에 크게 작용했으리라.
역시나 그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지, 여자의 얼굴엔 이내 부드럽고도 애달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하지만 잠시 뒤, 그녀에게선 이내 생각지 못한 답이 들려왔다.
“나더러…… 기특하다고 했었거든요.”
“…….”
“왜 어릴 땐 다들, 그런 거 별 생각 없이 묻잖아요. 너희 부모님은 무슨 일 하시니, 뭐 해주시니 그런 거. 그럴 때 전 달리 할 말이 없었어요. ‘우리 부모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 한 마디면 다 끝났거든요. 게임 오버.”
“…….”
“근데, 그럴 때 보통은 다들 그래요. 물론 악의적으로 놀리는 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괜한 거 물어봐서 미안하다고, 내가 실수했다고……. 아마도 부모님들이 그렇게 가르쳤던 것 같아요. 엄마아빠 없는 애들한테는 꼭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요.”
“…….”
“근데 민혁이 걔는, 딱 그러는 거예요.”
「……그랬구나. 부모님 없이도 이렇게 씩씩하고 예쁘게 잘 크다니, 기특하네. 멋지다, 너.」
“처음엔, ‘쳇, 지 까짓 게 뭘 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웃기잖아요. 지가 무슨 선생님도 아니고, 나이 지긋한 어른도 아닌데…… 지가 괜히 뭐라도 되는 양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게.”
“…….”
“근데, 근데요…….”
옛날이야기를 해주듯 조곤조곤한 말투로, 그녀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솔직히 그 전까진 아무 생각 없던 앤데, 걔가 그 말을 딱 해준 순간…… 바로 깨달았어요.”
“…….”
“얘가, 이 넓은 세상에서 나의 가치를 알아봐 준 맨 첫 번째 사람이구나. 나도, 누군가로부터 기특하고 멋지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구나.”
그리 말하는 예원의 눈망울엔 어느새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민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왜, 오리들은 태어나서 처음 본 물체를 자기 엄마라 생각하고 따른다고 그러잖아요. 그런, 비슷한 거였던 것 같아요.”
“…….”
“만날 안타깝다, 불쌍하다 소리만 듣던 애가 그런 소릴 들어서 그런가……. 나한테 처음으로 그런 말을 해줬던 그 애가, 이상하게 그렇게 좋아지더라고요.”
그렇게 장장 10년 동안 그를 사랑했다.
비록 저만의 철저한 짝사랑이긴 했지만.
말해놓고 보니 참 별 것 아닌 이유란 생각에, 예원은 괜히 쑥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였다.
“……이상한 거 아니에요.”
“…….”
“나도…… 당신이 자랑스러워.”
그의 조용한 읊조림이 살포시 들려왔다.
그녀의 고개가 스륵 돌아가고, 두 사람의 눈빛이 하나로 맞닿았다.
“자랑스럽고, 멋지고, 예쁘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는 사방으로 흔들렸다.
“……기특해. 누구보다 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분위기가 너무나도 진지해져 있었다.
예원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
초콜릿처럼 짙은 눈빛이 오롯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 덕에, 그녀의 심장은 또 다시 반응하며 쿵, 쿵, 박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거의 자동반사 수준이라고밖엔 할 말이 없었다.
‘이, 이런 분위기는 아무래도 위험한데.’
까딱하면 퓨즈가 팍 나가버릴 듯한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난번 꼬르륵 사건 때도 꼭 이런 느낌이었다.
만약 그때처럼 정신을 놓아버린다면, 또 무슨 큰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얼른,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그래, 뭐든지 빨리 생각해내라고.
위기를 직감한 예원은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횡설수설 딴청을 부렸다.
“자, 자전거 하나도 제대로 못 타는데 뭐가 그렇게 기특해요…….”
“…….”
“계속 넘어지고 깨지고…… 잘하는 것도 별로 없고…….”
“…….”
“나 같은 게 뭐라고…….”
하지만, 소용은 없었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자기비하를 시전할수록, 그는 오히려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을 할뿐이었으므로.
“……상관없어, 그딴 거.”
“…….”
“당신, 매력 있다고 했잖아.”
……매력 있어, 당신.
그 말에, 정처 없이 떠돌던 그녀의 시선은 자동적으로 다시 그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살짝 화가 난 것 같은 말투에 또 한 번 심장이 주책없게 덜컹거린다.
그가 다시금 힘주어 말했다.
“……결국, 그 자식은 당신의 진짜 가치를 못 알아본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 같은 여잘 그렇게 바보 같이 놓쳐버리진 않았겠지.”
겉으로는 전민혁을 향한 힐난에 불과했지만, 예원은 그 속에서 어쩐지 다른 속삭임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넌, 충분히 사랑 받을 자격이 있어.
기특하고, 특별한 사람이야.
굳이 그 새끼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그러니까…… 그딴 자식은 그만 잊어. 그딴 자식 때문에 울지도 말고.”
“…….”
“제발.”
그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떼어지는 순간, 예원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머릿속에 있는 모든 생각들이 한순간 깡그리 지워져버린 느낌.
그와 자신을 제외하고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느낌이었다.
하물며 시간까지도.
“…….”
“…….”
해서, 그녀는 제게로 서서히 가까워지는 남자의 입술과 손길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눈빛이 얽히고, 숨결이 얽히고, 고개가 얽혔다.
사이에서 진득하게 묻어나는 달콤한 캔 커피의 향기.
지지부진, 서로를 향해 좀처럼 용기내지 못 했던 마음이 마침내 천천히 맞닿은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세 번째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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