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좋아하나 봐
2018.09.25.
“혜인아!”
“어머, 혜인 씨!”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사람들이 벌떼처럼 달려와, 호들갑들을 있는 대로 떨어대기 시작한 것은.
“괜찮아? 안 다쳤어?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예원 못지않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혜인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맥이 없었다.
이윽고, 스타일리스트로 보이는 여자가 혜인의 엉망이 된 옷을 보더니 헉 소리를 냈다.
“헐, 어떡해. 이 옷 협찬이잖아요, 언니!”
“……!”
혀, 협찬?
예원의 눈이 금세 동그래졌다.
TV로 간혹 본 적이 있었다.
협찬으로 마련된 옷이 손상되거나 얼룩이 져, 그런 결과를 만든 주인공이 모든 걸 뒤집어쓰고 고초를 겪는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하지만…… 난…….’
난, 난…… 그냥 만들어 달래서 만들어준 것뿐인데…….
예원은 순간 두려움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것을 느꼈다.
의상반납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던 여자가 그런 그녀를 팩 돌아보았다.
“저기요! 유리잔을 가지고 오실 거면 조심하셔야지, 이게 뭐예요? 다 깨졌잖아요!”
“옷도 옷이지만, 행여나 얼굴에 파편이라도 튀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여배우는 얼굴이 생명인데!”
혜인의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는 짜기라도 한 듯 합심해 맹공을 펼쳤다.
그뿐만 아니었다.
달려온 사람들 모두가 혜인의 편에 서서 그녀를 죄인이라도 되는 양 쳐다보고 있었다.
제아무리 당당한 그녀라도, 쪽수에서 밀리는 상황엔 어쩔 수가 없다.
예원은 졸지에 말문이 막혔다.
“아니, 저, 전 그냥…….”
“……제 잘못이에요.”
그때, 때마침 혜인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예원의 목소리를 갈랐다.
“예원 씨가 빨리 넘겨주셔도 제가 좀 더 잘 보고 받았어야 하는데, 대본 읽느라고 미처 신경을 못 썼어요. 저 생각해서 기껏 만들어주신 걸……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예원 씨…….”
“…….”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과 말투였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뉘앙스는 묘하게 예원을 탓하고 있었다.
넘겨주는 속도가 너무 빨랐던 탓에 제가 못 받았을 뿐이라는 것.
예원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눈을 치켜떴다.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예원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제가 넘긴 잔이, 혜인의 손아귀 안으로 정확하게 감기는 것을.
그랬기에 안심하고 잔에서 손을 뗀 것이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것인지, 일부러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잔은 혜인이 떨어뜨렸다.
혜인도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즉, 이 모든 일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란 얘기인데…….
“죄송하긴 뭐가!”
애석하게도, 돌아가는 분위기는 영 그렇지가 않아 보였다.
“맞아요. 언니가 다칠 뻔했는데 무슨 소리예요! 까딱하면 정말 얼굴까지 튀었겠는데!”
“으휴, 하여튼 혜인이 넌 매사에 물러서 탈이다, 탈.”
곁에 선 몇몇이 탐탁잖은 듯 한마디씩을 보태자, 혜인은 퍽 유순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결과적으로 안 다쳤으면 된 거죠. 그보다, 예원 씨는 괜찮아요? 혹시 다친 데 없어요?”
“아뇨…… 괜찮아요.”
몸은 괜찮았지만,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흡사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한 저 여자가, 저를 상대로 왜 이리 악의적인 모습을 취하는지 알 수가 없는 터에.
아니나 다를까.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 된 옷을 저도 모르게 추스르는 예원을 보며, 혜인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 생각보다 쉽게 걸려드네.’
모카를 마시고 싶었긴 개뿔.
모든 건 그저, 여자를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넣기 위한 술수일 뿐이었다.
별안간 촬영장에 들이닥치더니, 웬 김밥 타령을 하는 여자가 꼴도 보기 싫었다.
지 까짓 게 뭐라고 설쳐, 설치기를.
조금 골려주고 싶은 맘에 혹시나 싶어 시도해보았는데, 첫판부터 이렇게 알아서 따라와 주다니. 이 이상 고마울 수가 없었다.
혜인은 내친김에 쐐기를 박기 위해, 다시금 애살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말씀 안 드리는 거였는데…… 괜히 무리한 부탁해서 죄송해요. 아, 옷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다…….”
“비용은 내가 대겠습니다.”
그때였다.
남자의 두텁고 진한 목소리가, 예원의 귓가로 찡하게 와 닿은 것은.
“괜찮아? 안 다쳤어?”
예원의 고개가 나침반처럼 스륵 돌아갔다.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온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솜털처럼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남자이자 그녀의 하나뿐인 남편,
현민혁이.
“그러게 유리잔 들 땐 조심하라니까. 나 없는 새 또 이렇게 일을 만들어.”
“…….”
“어디 좀 봐. 정말 안 다쳤어?”
이제 보니 그의 뒤에는 의아한 표정의 성환도 뒤따라 와 있었다.
본의 아니게 혜인을 에워싼 사람들과 대치가 되는 구도.
그것을 깨닫자 예원은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이 사람만은…… 오롯이 내 편이구나.
저 여자와 아무리 오래된 사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
한편, 대답이 없는 예원을 보며 살짝 입술을 다문 민혁은 이윽고 혜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아래로 군데군데 얼룩이 진 그녀의 원피스에도 잠깐 시선이 머물렀다.
“옷이 많이 버렸네. 쌍방 실수로 일어난 일인 것 같긴 하지만, 원한다면 내가 변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문젠 나중에 따로 얘기하죠.”
“……네? 아, 아니에요, 굳이 그럴 필요는…….”
이 상황에 그가 이런 식으로 등판할 줄은 몰랐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 얼른 상황을 종결지으려고 했는데.
생각지 못한 등장에 일순 당황한 혜인이 경황없이 답했지만, 민혁은 그런 그녀를 얼른 잘라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
“커피가 맛있어서 굳이 부탁하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하지만, 웬만하면 근무시간 외 주문은 삼가줬으면 좋겠네요.”
한 템포 쉰 그는 유난히 힘주어 말했다.
“커피 뽑다 보면 손목에 무리가 많이 가서, 그만큼 충분히 쉬어줘야 하거든. 오늘 같은 휴일엔 특히 더.”
“…….”
“이 사람, 보기보다 손목이 좀 약한 편이라서.”
그 말에, 흠칫 놀란 예원의 입술이 스윽 벌어졌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커피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쿠키 반죽을 만들거나 머랭을 치는 등의 일도 겸하는 그녀였기에 예원은 비교적 손목을 혹사하는 편이었다.
때로는 아픔을 견디기 힘든 나머지 일부러 손목보호대를 차고 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장인 그의 앞에서 굳이 그런 티를 내고 싶진 않았던 그녀였다.
괜한 자존심에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사실인데, 이 남잔 그걸 어떻게 눈치채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정확한 이유까지 더해서.
“…….”
입술을 다문 예원은 그의 옆모습을 새삼스레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 이라는 호칭이, 언제부터 이렇게 달콤했었지.’
남자의 잘빠진 옆태가 도장처럼 눈에 콱 들어와 박혔다.
왠지 모르게 뒷목 부근이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가슴은 요즘 늘 그랬던 것처럼 쿵쾅쿵쾅 난리를 쳤고, 그의 손이 닿은 어깨는 불에 덴 것처럼 뜨겁기만 했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눈앞의 여자는 어느새 민망함과 부끄러움, 분노 등이 혼재된 얼굴로 서 있었다.
삽시간에 차가운 눈길이 된 혜인의 얼굴을 보며, 예원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제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통쾌함인지, 자만심인지,
그도 아니면 되지도 않은 승리감인지…….
그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 *
“그러게 왜 괜한 짓을 합니까? 거기서 걔한테 음료는 왜 만들어줘요. 무슨 좋은 소리 듣는다고.”
“…….”
“……어쨌든, 오늘 일은 신경 쓰지 마요. 거기 있던 사람들, 죄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 말들이었으니까.”
그는 뭐라 뭐라 말하고 있었지만, 예원의 귀엔 어느 말도 들어오질 않았다.
그 여잔 대체 나한테 왜 그랬을까.
그리고 난……
대체 왜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달구어진 머릿속이 지끈지끈거려서 금방이라도 펑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홍예원 씨.”
“…….”
“홍예원 씨?”
“네?”
상념이 깨진 예원이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요. 덥습니까? 히터 끌까요?”
“아…… 아뇨. 괜찮아요.”
언제 또 얼굴이 이리 달아올랐는지 모르겠다.
얼굴이 내내 화끈거리는 게, 마치 장작을 쌓아놓은 불가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표정은 그렇지가 않은데…….”
짐짓 미소 지은 그는 그녀를 힐끗 돌아보며 넌지시 물었다.
“혹시 혜인이…… 신경 쓰입니까?”
……혜인이?
어쩐지 친근하게 들리는 호칭이 팍 거슬린다.
저도 모르게 뾰족한 말투가 튀어나갔다.
“아뇨, 그럴 리가요. 그냥 서로 실수한 건데요, 뭐.”
“…….”
“신경 쓰지 마세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앗, 너무 쌀쌀맞았나.
말을 내뱉어놓고 되레 놀란 것은 그녀였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별 의심을 갖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 말을 끝으로 차 안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머뭇거리던 예원은 잠시 용기를 내 운전을 하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혜인과 마찬가지로 옷을 버린 그녀는 그와 첫날밤 아닌 첫날밤을 보냈던 그때의 기억처럼, 큼지막한 그의 셔츠를 빌려 입고 있는 채였다.
차 안에서도, 셔츠에서도, 그 특유의 향기가 코끝에 진하게 묻어났다.
머릿속이 너무나도 어지러웠다.
제 속에서 난폭하게 휘몰아치고 있는 이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이 남자는 절대로 알 수 없으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너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아려왔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다름 아닌 ‘전민혁’을 짝사랑하던 때와 많이 닮아있었다.
스스로 미처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다 왔어요, 내려요.”
그러는 사이, 그들은 별 탈 없이 신혼집 앞에 당도했다.
웬일인지 미동도 않는 예원의 앞으로 그가 왼손을 내밀어 휘휘 저었다.
“홍예원 씨. 홍예원 씨?”
“…….”
그런데 그 순간, 예원은 그의 약지에 뭔가 반짝이고 있는 것을 홀린 듯 발견했다.
“반지…… 끼셨어요?”
“네?”
“반지 말이에요.”
아.
손을 거둔 그가 왼손을 내려다보며 멋쩍게 씨익 웃었다.
“아. 네, 얼마 전부터 끼고 다녔어요.”
“……왜요?”
잠시 눈썹을 들어 올리던 그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야, 홍예원 씨가 얘기했잖아요. 유부남 티 팍팍 내고 다니라면서.”
“…….”
“어때요. 이제, 맘에 좀 듭니까?”
그는 으스대듯 손을 자랑스럽게 들어 보였고, 그걸 본 예원은 갑자기 멍해졌다.
‘나는 그렇다 치고, 사장님은 결혼한 사람답게 행동한 게 대체 뭐가 있는데요. 말만 유부남이지,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길 했어요,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길 했어요? 밖에선 여배우들이랑 키스신이나 찍고 다니고. 우리가 언제 한 번 부부답게 외식이라도 한 번 한 적 있어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였다.
제가 홧김에, 지나가듯 아무렇게나 내뱉었던 그 말을.
“…….”
……사랑을 자각하는 타이밍이란, 어쩌면 이리도 어이가 없고 얄궂은지.
예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얼굴만이 현미경을 들이댄 듯 확대되어 보였고,
설렘과 두근거림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몽글몽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콩닥콩닥. 심장이 또 페이스를 잃고 격렬한 운동을 시작한다.
그제야 예원은 비로소 깨달았다.
‘……어떡해.’
나, 아무래도 이 사람을……
좋아하나 봐.
* * *
감정은 한 번 자각하고 나니 걷잡을 수 없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리나케 씻고 방으로 들어온 예원은 침대에 모로 누운 채, 지난 일들을 가만히 생각했다.
‘웬만하면 오늘 같은 일은 다신 없었으면 좋겠어. 내 아내가 다른 남자랑 단둘이 밥 먹는 거,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우진이란 사람에게 대차게 맞서던 그 날, 그 사람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그리고 난…… 그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 어렵긴 뭐가 어려워. 저 봐라. 쟤 앞에만 서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지, 말투랑 눈빛도 다 바뀌잖아.’
맞아, 바뀌어. 그 사람 앞에만 서면……
내가 나답지 않게 바뀌어.
아예 다른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누가 봐도 좋아하는 건데 지만 몰라요. 저런 건 바보도 아니라니까. 등신이지, 등신.’
그때는 이모의 말이 너무 격해서 괜히 심통이 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야.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그런 거였어.
내가 바로, 그 등신이어서.
“…….”
모든 것을 종합해보았을 때, 그녀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딱 하나였다.
“……하아.”
제가, 게이인 남자를 또다시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그녀가 전민혁 이후로 느끼게 된 또 하나의 사랑일지도 모르겠다는 것.
“……설마.”
말도 안 돼.
아니야, 아닐 거야.
예원은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자고로 허튼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었다.
처음 그와 계약을 맺을 때, 스스로 굳게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 남잔, 절대로 좋아하면 안 돼.’
너도 잘 알잖아, 홍예원.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를 사랑할 수 없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 지독한 일을 두 번이나 겪는다면, 그 뒤는 제 깜냥에 도저히 감당하려야 감당할 수 없을 것이 자명했다.
‘안 돼. 의연해지자.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거야.’
그래서 예원은, 일단 제 마음을 있는 힘껏 부정해보기로 했다.
그 남자가 무슨 행동을 하든, 뭘 해주든.
아무런 의미부여도 하지 않는 것이다.
설레어하지도, 떨려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고.
“…….”
그래, 그럼 될 거야…….
속전속결로 결단을 내린 예원은 눈을 꾹 감은 채 잠을 청했다.
하지만 억지로 멈춰 세워 놓은 마음은, 고장 난 모터처럼 세차게 달그락거릴 뿐이었다.
너무도 시끄러운 나머지, 그녀가 새벽 내내 잠을 이룰 수 없도록…….
* * *
그 날 이후, 예원은 그를 상대로 견고한 철벽을 쌓기로 꿋꿋하게 다짐했다.
하지만 같은 집에 사는 이상 남자를 완벽히 피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이미 약속한 일을 무르기도 모양새가 뭐했다.
결국, 그녀는 그를 대놓고 피하지 않는 대신, 일단 그에게 뚜렷한 경계태세를 드러내기로 했다.
그게 그녀가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어책이었다.
“어때요. 입에 맞아요?”
저번에 파투났던 자전거 레슨을 다시 받기로 한 날.
그가 저녁식사 장소로 택한 곳은 우진과 갔던 곳과 비슷한 류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물론, 그녀의 앞에 놓인 것이 ‘치킨 스테이크’가 아니라 ‘진짜 스테이크’라는 점이 무척 다른 점이긴 했지만.
“네, 뭐…….”
사실, 질기지 않고 야들야들하게 씹히는 스테이크 조각은 살살 녹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하지만 내색은 금물이었다.
설사 맛있다고 한 마디라도 한다면, 그는 분명 다음에 그녀를 여기 또 데리고 오려고 할 것이었으므로.
“사실, 여기 이모님이랑 지원이도 같이 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어요. 사람들 평이 대체적으로 무난하고 좋아서.”
“…….”
“참, 어쩌다 보니까 지난번에 얘기한 턱 아직도 못 쐈는데. 조만간 외식 한 번 하죠. 언제가 좋을 것 같아요?”
……외식?
그가 가볍게 물었지만, 잠시 생각하던 예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모랑 지원이는 제가 사주면 돼요.”
“네? 하지만…….”
“그러실 필요 없다니까요.”
“…….”
“그리고, 오늘 이것도 제가 살게요.”
바위처럼 단단한 예원의 말에,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왜죠?”
“오늘, 저한테 자전거 가르쳐주시기로 했으니까요. 별건 아니지만 수강료 차원으로.”
“……수강료?”
갑자기 웬 수강료.
민혁이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때, 무료 강습이라고 말하지 않았었나.”
“……네, 그렇긴 했는데요.”
예원은 야무지게 대답했다.
“대가 없는 봉사는…… 받기 싫어졌어요.”
“…….”
“제가 도움을 받는 거니까, 마땅히 사례해야죠.”
무슨 이유에선지, 공짜 강습을 바라던 여자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요 며칠 그녀는 부쩍 그를 사무적으로 대했다.
상심해 있던 그를 사사건건 챙겨주고 돌봐주었던 얼마 전과는 너무도 다르게.
민혁은 내심 이상하게 여겼지만, 굳이 거기에 토를 달지는 못했다.
그녀가 하는 말들이 기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얼마죠?”
그렇게 빠른 식사를 마치고 나와, 카운터 앞에 선 예원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때, 뒤에 서 있던 그는 지갑 밖으로 비죽 나와 있는 무언가를 언뜻 발견했다.
“그거, 뭐예요?”
“네?”
“거기, 사진 같은 거.”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꽤 여러 명이 찍은 사진 같아 보였다.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예원은 그것을 황급히 다시 안으로 감춰 넣었다.
꼭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
“……그런 게 있어요. 민혁 씨는 몰라도 돼요.”
달리 추궁할 시간도 없었다. 여자의 움직임이 너무도 재빨랐던 탓에.
졸지에 그는 살짝 무안해진 채,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그런데, 입구 앞에 다다른 그녀는 순식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가 나가려던 문 앞에, 전혀 생각지 못한 이들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바로,
그녀를 발견한 채 깜짝 놀란 눈을 하고 있는,
강세찬과…… 전민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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