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내조의 여왕
2018.09.21.
“어이구, 뭘 그렇게 놀래. 아기 소리 처음 들어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럴 수가. 이모가 갑자기 이런 걸 물어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딱히 그럴 이유도 없으면서 잔뜩 당황한 예원은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너희도 이제 결혼한 지 꽤 됐는데 슬슬 애 생각해야지. 괜히 늦게 가져봐야 너만 힘들고, 스물여덟 정도면 딱 괜찮아.”
“…….”
“왜, 너도 전에는 애 많이 낳고 싶다고 그랬었잖아.”
……아, 그랬었지.
예원은 문득 옛 생각에 잠겼다.
어려서부터 달랑 세 식구로 살았던 예원은 머릿수 많고 복작복작한 가정을 꿈꿨었다.
아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았다. 키우기야 좀 빡셀 테지만, 그 정돈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때문에 전민혁에게도 누누이 얘기했던 예원이었다.
우리, 아기는 되도록 많이많이 낳자고. 너 닮은 아들, 나 닮은 딸들로 콰아악.
‘물론, 그때는 그 놈이랑 백년해로할 줄 알고 그랬던 거지만…….’
그러고 보니 전민혁 생각을 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그 놈 때문에 된통 고생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그것도 어느 샌가 이렇게 희미해져 버리다니.
새삼 꽤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그리고 나도…… 그새 이만큼이나 무뎌졌구나.
“정말 아직 소식 없어? 아무런 기미도 없니?”
“응? ……으응.”
“에휴, 젊은 애들이 왜 아직도 소식이 없을까……. 희한한 노릇이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은아는 마냥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셨다.
그러다 불쑥, 예원을 찍 흘겨보았다.
“너 설마, 피임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피, 피임……?”
어…… 이걸, 피임이라고 해야 하나?
뭐 아예 시도를 안 하는 거니까,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닌데…….
“뭐야. 너 진짜 피임해? 그런 거야?”
“……아, 아냐 그런 거! 피임은 무슨…….”
이모의 기세에 금세 쭈그러든 예원은 재빨리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그냥, 둘 다 바빠서 그래. 민혁 씨도 촬영하느라 바쁘고, 나도 카페 신경 쓰느라 바쁘고. 아직 여유가 없어.”
“……아. 하긴 뭐, 둘 다 어리니까. 아직은 좀 재촉하기 이른 때이긴 하지.”
“그러엄.”
철석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은아 또한 어느 정도 수긍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튼…… 그래도 애는 빨리 가지는 게 좋아. 현 서방이나 너나 좀 외롭게 컸잖니. 애가 생기면 지금이랑은 또 다를 거라고. 뭐, 이모도 얼른 조카손주 보고 싶기도 하고……? 호호.”
“…….”
“에유, 그나저나 아깝네. 사돈어른도 손자 손녀 보고 가셨으면 참 좋았을 건데…….”
“…….”
이모의 말끝에서 묻어나는 진한 아쉬움에, 예원은 대답 없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라고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을까.
예원이 미리 설명해 준 덕에, 이제는 은아도 민혁의 개인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예원에게 시어머니 격이 되는 어른이 두 분이나 계신다는 것도, 그 중 진짜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세상을 떠난 수진이었다는 것도.
때문에 은아와 지원도 예원을 따라 수진의 장례식에 참석해 그들의 곁을 지켰다.
슬픔과 허전함으로 정신이 없을 와중에도, 그들을 향해 무척이나 고마움을 표하던 남자의 얼굴이 아직도 선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의 행동은 너무나 새삼스러웠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우린 결혼한 사이인데, 겨우 그게 뭐라고…….
“참, 현 서방은 뭐라디. 촬영 괜찮겠대?”
“……아직 별 말은 없는데, 아무래도 좀 힘들 것 같아. 눈치도 좀 보이고.”
그러니, 지금 그가 이렇게 걱정되는 이유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테다.
결코 그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남편이니까.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이모……. 내가, 뭔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응? 네가 뭘 어쩌게.”
“아니 그냥…… 그래도 내가 아내니까 힘을 좀 북돋워주고 싶은데, 딱히 좋은 방법이 안 떠올라서.”
“…….”
“뭐, 특별 응원을 해준다든가…… 대충 그런 거 말이야.”
온갖 드라마며 예능들을 싹 다 챙겨보는 이모인 만큼, 아무래도 저보다는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은근슬쩍 운을 뗀 예원은 살짝 기대를 안고 이모를 지켜보았다.
“글쎄…….”
아니나 다를까,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던 은아가 어느 순간 손뼉을 짝 쳤다.
“아! 그러면 되겠네.”
“어? 뭐. 뭘 어떻게?”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인 은아는 콩나물 대가리를 빠른 속도로 떼어가며, 조카를 향해 열렬한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 * *
공교롭게도, 수일 만에 재개된 촬영은 다름 아닌 ‘에덴’에서 이루어졌다.
그간 민혁이 본의 아니게 빼 먹고 만 카페 신들의 촬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우선 촬영을 할 땐 하더라도, 먼저 사과부터 정중히 구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촬영 전, 마음을 단단히 먹은 민혁은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장 감독을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
장 대표가 잘 얘기했다고는 했지만, 그를 맞닥뜨린 감독은 여전히 매우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어차피 다 뻔히 예상하고 왔던 바.
민혁은 지체 없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우선, 죄송합니다 감독님. 정말 죄송합니다.”
“…….”
“모든 게 제 불찰이었습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공과 사를 잘 구분했어야 하는데, 감정이 너무 앞선 나머지 본의 아니게 큰 폐를 끼쳤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너무나도 공손하고 예의 있는 사과.
마냥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장 감독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사실, 장 감독은 오늘 그를 보자마자 불호령을 내릴 작정이었다.
여기가 네 맘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놀이터냐고. 이제껏 고작 그딴 마인드로 연기를 하려 했느냐고.
그런데, 먼저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니 차마 그런 말을 내뱉기가 힘들었다.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 같은 놈을 다그칠 수도 없고.
게다가, 다른 이유도 아니고 소중한 사람의 장례식을 참석하느라 그랬다고 하니…… 달리 추궁할 수 있는 연유도 없지 않은가.
다만, 하나 확실히 해둘 필요는 있었다.
“……진심으로 자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예.”
“……정말?”
“예.”
저를 미심쩍게 쳐다보고 있는 장 감독을, 민혁은 또렷한 눈빛으로 마주보았다.
“갈 때 가더라도 필히 감독님께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저 하나로 인해 촬영 스케줄이 미루어지게 된 것도 송구합니다. 많이 노여우시겠지만, 그만큼 앞으로 더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민혁이 다시 고개를 숙이자, 잠시 그를 쳐다보던 장 감독은 괜스레 큼큼거렸다.
여전히 그가 고깝긴 해도, 좋지 않은 이 상황을 굳이 더 연장시킬 필요는 없었다.
촬영장 분위기는 사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고스란히 시청률에까지 반영된다.
지금은 방송 전에 얼른 분위기를 끌어올려야 할 때였다.
생방 환경이었다면 또 모르지만, 아직 방영일이 좀 남은 드라마이기에 이후 일정에도 큰 무리는 없었다.
좋은 것이 좋다고, 직감적으로 이 일은 이 정도에서 묻어두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섰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다름 아닌 현민혁이지 않은가.
이번 드라마의 기둥이자, 이번 일로 인해 더더욱 자리를 공고히 하게 된 자타공인 톱스타, 현민혁.
결국, 그를 한참동안 말없이 지켜보던 감독은 협박이라도 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지켜볼 테니까, 잘 해. 괜히 연기까지 후지면 주연배우 확 갈아치울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됐다.
장 감독의 퉁명스러운 투에도 불구하고, 민혁의 입가엔 어쩔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로써 또 하나의 문제를 나름 유연하게 넘겼다.
이 이후를 극복하는 건 제 몫이 될 터였다.
“네.”
다짐한 그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의 다짐이 무색하지 않게, 다행히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민혁은 언제 슬픔에 잠겨 있었냐는 듯 능청스러운 연기를 완벽히 소화해냈고, 장 감독도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만족이 담긴 은근한 미소를 몇 번 내보였다.
딴 걸론 까도 연기로는 절대 못 깐다는 현민혁의 진가가 고스란히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민혁 씨.”
이윽고 촬영 중간 쉬는 시간, 혜인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여주인공이자 극중 바리스타로 등장하는 그녀인 만큼 혜인은 오늘도 당연하게 그와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얼굴이 좀 상한 것 같은데, 이제 좀 괜찮아요?”
주변의 시선들을 의식한 건지 그녀는 모처럼 그에게 철저한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녀가 말을 거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지만, 그는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도 참석하고 싶었는데, 알다시피 촬영 스케줄이 워낙 빡빡해서……. 미안해요.”
나름 애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걸로 보아하니, 그녀는 수진의 장례식을 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촬영 스케줄이 빡빡해서.
얼핏 듣기엔 수긍할 만 이유였지만, 그것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그럴 맘이 있었다면 하루 한 타임이라도 짬을 내 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았다는 건, 아예 그럴 의지가 없었다는 방증밖에 되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한 적도 없는 문상객이지만,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여 그는 화가 났다.
“미안할 것까진 없고. 나한테 따로 사과 같은 거 안 해도 돼. 어차피 너 선배님 잘 몰랐잖아.”
그 나름의 촌철살인 답변이었으나, 혜인은 마냥 여유롭게 맞받아쳤다.
“에이, 그래도요. 같은 연기자 선배님이신데……. 어쩔 수 없이 못 참석한 거긴 했지만 자꾸 마음에 걸려서요. 내내 마음이 무겁더라고요.”
“…….”
“유해 계신 곳이 서울 근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 우리 드라마 끝나면, 한 번 같이 들러요.”
“……뭐?”
너 따위가 거길 왜?
그의 눈썹이 대번 꿈틀했다.
이건 또 뭐하자는 플레이인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조혜인 너…….”
주변에 보는 눈이 있다는 것도 잊은 그가 무어라 쏘아붙이려던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별안간 들려온 우렁찬 인사 소리에, 민혁과 혜인의 시선은 동시에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그 곳엔, 그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하나 서 있었다.
위로 높이 올려 묶은 머리에, 평소처럼 편하지만 은근히 신경 쓴 듯한 복장.
어딘가 퀭해 보이는 얼굴에는 햇살처럼 해맑은 미소가 떠올라 있다.
그야말로 인간 비타민과도 같은 모습.
‘아니 저건……?’
그의 눈이 얼떨떨하게 끔뻑여졌다.
“저기, 다들 김밥 좀 드시고 하세요!”
그것은 바로,
양손 가득 무거운 종이가방을 들고 있는, 홍예원이었다.
* * *
“와, 이걸 다 혼자서 직접 싸신 거예요? 대단하시네요.”
“혼자는 아니고 두 명이서……. 다 제가 직접 싼 건 맞아요.”
“허, 솜씨 진짜 좋으시다. 꼭 도시락집에서 사온 것 같아요. 안 그러냐?”
“그러게. 진짜 맛있는데요. 덕분에 잘 먹을게요.”
“헤헤, 감사합니다. 많이들 드세요. 일부러 좀 넉넉하게 쌌어요.”
……나참, 눈꼴 시려서 못 봐주겠구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직도 현실감각이 없었다.
스태프들 앞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는 여자를 관망하고 있던 민혁은 은근슬쩍 그녀를 잡아끌어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의돕니까?”
“……의도라뇨?”
“갑자기 왜 이런 짓을 했느냐고요, 힘들게.”
“참나, 왜긴요.”
예원의 고개가 의기양양하게 들렸다.
“‘내조의 여왕’. 몰라요?”
“……네?”
갑자기 뭔 내조의 여왕?
그리 생각하고 있는 사이, 그에게 고개를 바짝 들이댄 예원이 숨죽여 속삭였다.
“안 그래도 잔뜩 밉보여있는데, 점수 따려면 뭔 짓을 못해요. 민혁 씨 이미지 회복만 된다면야 김밥이 아니라 김밥 할아버지라도 갖다 바칠 수 있어요.”
“…….”
그 말에, 민혁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김밥, 하니 예전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조심하셔야겠어요. 여자친구분이 촬영장으로 감시하러 가시는 거 아니에요? 김밥 같은 거 막 싸들고?」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때, 여자는 무지막지하게 시니컬한 표정으로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김밥 비슷한 소리가 한 번이라도 더 나오면 판을 그냥 엎어버릴 것처럼.
그런데 지금은…… 이 여자가 어째서?
“꾸물거리지 말고 민혁 씨도 빨리 먹어요. 꽤 많이 싸긴 했는데, 인기가 워낙 쩔어주시는 바람에 금방 동날 거 같거든요.”
훗. 한껏 거들먹거린 예원이 손을 들어 귀 밑을 슬쩍 튕겼다.
그 모양이 꽤나 깜찍하고 귀여워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민혁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이었다.
“김밥 너무 맛있어요. 덕분에 간만에 맛있는 거 먹네요.”
멀찍이 앉아 있던 혜인이 어느 새 그들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예원 씨?”
있는대로 휘어지는 눈꼬리가 가만있던 예원의 신경을 묘하게 자극했다.
“아, 네. ……오랜만이네요.”
한편,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민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봐도 구면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대화였기에.
“네가…… 이 사람을 어떻게?”
“아.”
혜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제가 한 번 찾아온 적이 있었거든요. 스승님도 구할 겸 해서.”
“……스승?”
“커피 스승. 마땅한 분이 안 계셔서, 여기 있는 예원 씨한테 부탁했어요.”
민혁의 눈길이 단번에 예원에게로 향했다.
그에겐 굳이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라, 예원은 왠지 모르게 머리털이 쭈뼛하는 기분이 들었다.
“참, 그렇잖아도 오늘 실제 시연 장면 있는데. 이왕 이렇게 오셨으니까, 오늘은 저 도와주실 거죠 선생님?”
“……네?”
아뿔싸.
예원의 얼굴이 일순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의 기를 살려줄 생각에 들떠있던 나머지, 이런 변수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부담스럽고 어려울 것 같아 한사코 거절했던 일이었는데.
“어려운 건 아니고, 옆에서 자세 같은 거만 봐주시면 돼요. 네? 부탁 좀 드릴게요.”
지금까지는 어떻게 어떻게 잘 피해왔으나, 여기까지 제 발로 와놓고는 싫다고 발 뺄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저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어쩔 수 없이 예원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런데, 등골을 급속도로 타고 오르는 이 쎄한 느낌의 근원은 대체 무얼까.
자신과 남자를 번갈아 보는 여자의 의미심장한 눈길에, 예원은 더욱더 이상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아무래도…… 어째 예감이 좋지 않은데.
* * *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우려와 다르게, 촬영은 굉장히 스무스하게 끝이 났다.
다른 데서 미리 학습해둔 모양인지 혜인은 실제로 가르칠 게 별로 없었고, 덕분에 예원은 스승이라기보다는 뒤편에 물러나 있는 구경꾼, 혹은 들러리의 포지션에 가까웠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했네요. 많이 힘드셨죠.”
“아……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물론 힘든 것도 맞았지만, 그 말만은 사실이었다.
실은, 민혁의 연기를 한 번쯤 실제로 보고 싶었던 그녀였다.
오늘 그가 담당한 씬은 단순한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 별로 중요한 씬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남자의 연기를 실제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거기다 그녀만의 망상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제가 싸온 김밥으로 인해 스태프들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듯도 했다.
뭐니뭐니해도 사람 마음 돌리는 데는 먹을 게 최고라던 이모의 말이 퍼뜩 생각났다.
‘훗. 역시, 이모 말을 듣길 잘했어.’
촬영 중간 중간 이따금씩 저를 향해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예원은 스스로를 격하게 셀프 칭찬했다.
그래도 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쁜 마음이었다.
“민혁 씨는…… 어디 갔나요?”
“아, 네. 잠시 화장실 간 것 같아요. 금방 오겠죠.”
“아…… 네.”
그런데 그때, 머뭇거리던 혜인이 조심스러운 듯 물었다.
“……저, 근데 예원 씨. 부탁드릴 게 하나 있는데.”
“네? 뭔데요?”
“아, 그게…….”
“…….”
“실은, 예원 씨가 저번에 만들어주셨던 음료 있잖아요. 그게 너무 맛있어서, 잊을 만 하면 자꾸만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 그, 카페모카요?”
“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한 잔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엔 아이스로요.”
엥, 갑자기 이게 웬.
“……네?”
예원의 얼굴은 알게 모르게 살짝 뚱하게 변했다.
물론 그녀만의 특별 레시피로 만든 모카였던 만큼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을 테지만,
지금이 촬영이 막 끝난 시점임을 고려할 때…… 약간 뜬금없는 부탁이 아닐 수 없었다.
“부탁 좀 드릴게요. 피곤할 때는 당이 최고라잖아요. 방금 막 촬영 끝나서 한창 당 딸릴 타이밍이거든요.”
하지만 웃는 낯에 침뱉을 수 없다고, 혜인은 매우 살갑게 웃으며 다시금 청했다.
‘참나, 하루에 부탁만 대체 몇 번을 하는 거야.’
내가 착해서 탈이지, 정말.
예원은 굳어있는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답했다.
“……네,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네. 아, 잔은 꼭 유리잔으로 해주세요. 제가 테이크아웃 컵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얼른 덧붙인 혜인이 생긋 웃었다.
.
.
‘하, 이게 대체 뭔 짓이냐.’
촬영 철수로 1층 전체가 부산한 가운데, 예원은 숙련된 손놀림으로 카페모카 한 잔을 제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여긴 어디, 나는 누구’와 같은 상황.
솔직히, 단칼에 싫다고 거부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꿋꿋하게 이걸 만들고 있는 것은, 모두 그 남자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이미지 회복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런 마음을 듬뿍듬뿍 담아, 예원은 주문자의 요청에 따라 휘핑크림과 초코소스를 듬뿍 얹은, 맛있는 카페모카를 만들었다.
오늘따라 휘핑도 유독 빵빵하게 잘 올라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케이, 좋았어.
‘대놓고 티내면서 갖다 줘야지.’
그래야 그 남자 면이 더 설 테니까.
예원은 트레이에 받친 음료를 들고 조심스레 혜인에게로 다가갔다.
“저기…… 말씀하신 모카 다 됐는데요.”
카페 의자에 앉은 혜인은 그새 한창 대본 삼매경에 빠져 있었던 듯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대본에 머물던 혜인의 시선이 힐끗 카페모카를 향했다.
그런데 대답까진 잘해놓고, 정작 도통 음료를 집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예원은 순간 멈칫했다.
‘뭐지, 내가 건네줘야 하나?’
지가 공주님이야 뭐야. 까탈스럽긴.
하지만, 온갖 손님들을 응대해본 그녀에게 이런 것쯤이야 별 일도 아니다.
예원은 대수롭지 않게 잔을 손에 들었다.
“여기, 드세요.”
“네, 네.”
그제야 혜인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쨍그랑!
손에서 미끄러진 걸까. 아니면 제대로 보고 받지 못한 걸까.
혜인의 손에서 벗어난 잔은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하얀 휘핑과 갈색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고, 혜인과 예원의 옷은 한순간에 엉망이 되어버렸다.
바닥엔 크고 작은 유리조각들이 즐비했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난 예원은 금세 왕방울만해진 눈으로 혜인을 쳐다보았다.
“……!”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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