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48화 (48/102)

48. 왜 자꾸 떨리지?

2018.09.18.

“야!”

명지고 밴드부 연습실.

기타 반주를 멈춘 지원이 민영을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Do’가 아니고 ‘Boy’라고. 왜 자꾸 같은 데서 틀리냐. 정신 안 차려?”

“……미안, 다시 할게.”

예의 영혼 없는 대답이 이어지고, 지원의 미간엔 금세 깊은 주름이 졌다.

“너, 요새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럼 왜 그러는데.”

“……내가 뭘.”

“몰라서 물어?”

그는 살짝 날선 눈빛으로 민영을 쏘아보았다.

“요 며칠 계속 이상하잖아. 가사도 까먹고, 음정도 틀리고, 정신도 계속 어디 딴 데 가 있는 것 같고……. 어제는 내내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아프다면서 집에 가겠다 그러질 않나. 너 갑자기 왜 그러냐?”

“…….”

“무슨 일인데. 사정이 있으면 얘기를 해,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라면, 며칠간은 연습을 좀 쉬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악순환만 반복할 바에야, 차라리 각자 재충전할 시간을 가지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까.

“……아무 일도 없어.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당사자는 도통 무슨 일인지 밝힐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후. 한숨처럼 내뱉은 지원이 이내 말을 이었다.

“고민영.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 지금 네 고민상담 해주겠다는 거 아니야.”

“…….”

“너한테 무슨 일이 있든, 네가 그걸 어떻게 해결하든 그건 내 알 바 아냐. 근데, 난 지금 네 동료야. 파트너라고. 이왕 같이 하기로 했으면, 적어도 팀에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냐?”

꽤나 정나미 떨어지는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의 민영이라면 무조건 걸고넘어질 법한.

일부러 자극을 주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정작 그녀는 순순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미안해, 민폐 끼쳐서.”

“……뭐?”

물어놓고는 졸지에 도리어 놀랐다.

당황한 지원의 눈길이 고개를 한껏 떨어뜨린 채 앉아있는 민영에게로 향했다.

왠지 모를 그늘이 가득 드리워져 있는 얼굴.

“…….”

쟤가 대체 왜 저러지.

비록 같은 팀을 이뤄 준비하고 있다지만, 지원은 민영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항상 활발하고 명랑한 여자사람친구. 그리고 이제는 함께 목표를 이루어야 할 동료.

그에게 민영은 딱 그 정도의 존재였다.

그런데, 안 그러던 애가 눈에 띄게 가라앉은 모습을 보이는 덴 아무래도 맘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연습 때문에 조바심이 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신경 쓰이고 거슬리는 건, 젖은 빨래처럼 축 처져 있는 저 모습.

딴엔 큰 맘 먹고 물어본 것이건만, 아무래도 오늘 안으로 대답을 기대하기는 무리 같아 보인다.

뜻대로 되지 않는 속이 답답했다.

“……혼자서 그렇게 껴안고 있기만 하면 상황이 좀 나아지냐? 차라리 다른 사람한테 기대고, 도움을 좀 받을 순 없어?”

“…….”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어디 네 마음대로 해봐, 계속.”

기타를 도로 가방에 넣고 주변을 주섬주섬 정리한 지원은 그대로 일어나 연습실을 나서려 했다.

그때였다.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데?”

마침내 민영에게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터진 뜻밖의 폭탄.

“나…….”

“…….”

“입양아래.”

순간, 지원은 제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자각할 새도 없이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뭐?”

“나, 입양아라고.”

“…….”

“갓난아기 때 입양됐었대. 난 그걸…… 지금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경악한 표정의 지원과 달리, 덤덤하게 운을 뗀 민영은 나지막이 읊조리고 있었다.

“내가 아빠 엄마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알고 보니까 진짜 아빠 엄마가 아니래……. 같은 피라곤 요만큼도 안 섞인, 진짜 완전…… 생판 남남이래.”

“…….”

“넌…… 그게 믿겨지니? 말이 된다고 생각해?”

지원의 입술이 스윽 벌어졌다.

한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져 있었다.

‘입양?’

그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다.

별로 친밀하지 않았던 그마저도 쉽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민영의 가족 얘기였으니까.

가족끼리 너무나도 사이가 돈독해 보이는 나머지 내심 가끔 부러워하기까지 했었는데.

그런데…… 그런 그들이 친 가족이 아니었다니.

제3자인 그에게도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위로를…… 해야 하나?’

하지만…… 글쎄, 이 상황에 대체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한단 말인가.

그로서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입양이 뭐 대수냐고,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 두 분이 아예 돌아가신 나보다는 네 처지가 낫지 않느냐고.

그런 삐딱한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한창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있는 애한테, 차마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영.”

결국, 가까스로 뱉어낸 말은 고작 이것이었다.

별안간 불린 제 이름에, 민영은 자조하듯 픽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의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섰다.

“그래, 난 태어날 때부터 고민영이었어. 근데…… 내가 고민영이 아니라잖아. 김민영인지 이민영인지, 것도 아님 최민영인지…… 진짜가 뭔지 알 수가 없다잖아.”

“…….”

“넌 어떨지 몰라도, 난 그게…… 도저히 안 믿기거든.”

떨리는 목소리에 점차 울먹임이 섞여들었다.

지원의 시선은 그녀의 눈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방울로 모아졌다.

“나도 이딴 걸 혼자서만 껴안고 있기 싫어. 근데…….”

“…….”

“그럼, 그럼 난 도대체 어떡해야 되는데?”

“…….”

“어? 어떡해야 돼……?”

커다란 눈으로 눈물을 퐁퐁 쏟아내는 여자애를, 지원은 할 말을 잃은 채 지켜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만하게 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드는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쭙잖은 위로의 말 따위를 건네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

아니, 어쩌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보단 차라리…….

“…….”

그래, 이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머뭇거리던 지원은 민영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제 품안으로 천천히 끌어당겼다.

다소 어색한 몸짓이긴 했으나 힘이 빠져 있던 민영은 금방 그의 품으로 딸려왔고, 그녀를 감싸 안은 지원의 손은 그녀의 어깨 부근을 톡톡 두드렸다.

“……괜찮아.”

“흡, 흐윽…….”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마.

귓가를 울리는 낮은 속삭임에, 민영은 더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

어쩌면……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다 잘 될 거라는 말. 아무 일 없을 테니 안심하라는 말.

앞길이 막막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용기와 희망이 조금씩 돋아나는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홍지원이 해준 말이기에.

지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민영은 며칠 만에 처음으로, 맘껏 울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그의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들 때까지…….

시곗바늘이 한 칸, 두 칸을 넘어 몇 칸을 넘길 때까지도…….

* * *

“장 감독하고는 내가 잘 얘기해 봤다. 네 사정 얘기하니까 대강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심기는 영 불편한 눈치더라.”

“……그렇겠죠.”

“그쪽도 그쪽이지만 스태프들도 문제야. 너 때문에 그런 개고생을 했는데, 누가 네 꼴을 보고 싶어 하겠냐?”

“…….”

오랜만에 불려온 사무실의 공기는 다소 싸늘했다.

장 대표의 말에, 어두운 얼굴을 한 민혁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부정하고 싶어도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돼. 너, 이대로 모든 걸 다 놔버리고 싶은 건 아니지?”

하지만, 겨우 이 정도 일로 멈출 순 없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그녀를 위해서라도, 그는 더더욱 강해지기로 했으니까.

고개를 든 민혁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아시잖아요.”

“가서 잘해. 비위도 좀 맞춰주고. 아직 촬영 한참 남았는데 골치 아파서 좋을 거 없잖아.”

“……네.”

“그건 그렇고, 몸은 좀 어때. 괜찮아?”

“걱정 마세요. 끄떡없어요.”

“밥은, 잘 먹고 다니고?”

그가 며칠 휴식을 취하는 동안, 예원은 그만을 위한 요리사를 자처했다.

그녀는 커피만큼이나 요리도 꽤 잘 만들었고, 덕분에 장례 기간 동안 쏙 빠졌던 그의 볼살은 그나마 제 모습을 찾으며 나름 토실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원은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몫까지 다 하려는 양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뜰히 챙겼다.

어찌나 극성을 부리는지, 잠잘 때를 빼놓고는 도저히 혼자 있을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럼요.”

그래도, 그것이 싫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소중하게 여겨지는 기분,

애정 가득한 보살핌을 받는 기분은 실로 오랜만이었으니까.

[오늘은 마감이라 일찍 못 가요. 갈비찜 해놨으니까 집 가면 꼭 먹어용! 체력이 국력. ^0^]

오늘 오전, 어김없이 남겨져 있던 메시지를 떠올린 그는 문득 비싯 웃었다.

그저 그런 텍스트마저도 꼭 그녀처럼 사랑스러웠다.

“다행이네. 비실비실해서 한동안은 정신 못 차리고 골골거릴 줄 알았더니……. 그만하길 천만다행이야.”

“네.”

무심코 그가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때, 장 대표에게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와이프 잘 만난 보람이 있구나.”

……어라?

민혁은 조금 의외라는 듯 장 대표를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표정이었던 장 대표의 얼굴에, 돌연 엷은 미소가 띠어 있었다.

“너도 너지만, 이번에 네 와이프도 아마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다. 섭섭하지 않게 잘 다독여.”

장 대표가 그녀를 이렇게 간접적으로 언급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때 민혁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했던 인물 중 하나였던 그가, 저렇게 유해진 얼굴로 그녀를 두둔하다니.

민혁은 한순간 혼란스러운 눈빛이 되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이 실장 말이 처음엔 영 못 미더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창 창창할 나이에 뭔 결혼을 시키겠다는 건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었어.”

“…….”

“그런데, 보면 볼수록 네가…… 결혼 하나는 참 잘한 것 같다. 이제야 진짜 좀 사람 같아졌어.”

괜스레 너스레를 떨던 장 대표가 지나가듯 슥 덧붙였다.

“……있을 때 잘해. 괜히 틱틱거리지 말고.”

저 말이, 왜 이렇게 가시처럼 콕 박히는지 알 수가 없다.

민혁은 미처 대꾸하지 못한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 * *

생각해보면, 그가 결혼을 하고 난 뒤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말했다.

너 정말 봉 잡은 것 같다고. 네가 결혼 하난 정말 기똥차게 했다고.

물론 민혁도 제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갈수록 이상하게 찝찝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홍예원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뭔지 모를 이상한 죄책감 같은 것이 고개를 들었다.

꼭, 단추를 잘못 끼워놓은 것 같은 느낌.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직전인 것 같은 느낌.

이럴 필요가 없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저로선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감정들이 그는 살짝 두려웠다.

쏜살같이 흐른 시간 탓에 1년만, 1년만 하던 것도 어느덧 옛날 일이 되어버린 지금.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 결혼은 대체 어찌 흘러가고 있는 걸까.

“어, 민혁 씨?”

그렇게 복잡한 맘을 안은 그가 홀린 듯 찾아든 곳은, 바로 예원이 마감을 하고 있는 에덴이었다.

“웬일이에요, 카페엘 다 오고?”

“……그냥, 오랜만에 집에 같이 들어갈까 해서.”

“오~ 저야 뭐 좋죠! 편하고.”

아싸, 돈 굳었다.

그의 맘은 전혀 모르는 채, 금세 기분이 좋아진 예원이 배시시 웃었다.

“근데…… 왜 혼자예요?”

“아, 다른 건 다 끝났는데 머신 마감만 남아서요. 채린이 먼저 보내고 혼자 마무리하고 있었어요.”

“……오늘, 안 힘들었어요?”

“뭐, 모처럼 일하는 거니까 할 게 좀 많긴 했는데…… 괜찮았어요. 이 정도쯤이야 껌이죠.”

그를 향해 살풋 웃어 보인 그녀는 다시금 머신 닦기에 집중했다.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민혁은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일었다.

‘왜 저렇게…… 예쁘지?’

대충 묶어 검은 망에 집어넣은 머리에, 화장기라곤 거의 없는 얼굴.

군데군데 커피가루가 묻어 볼품없어진 앞치마와, 품이 좀 넉넉한 베이지색 셔츠.

다른 사람이었다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그 조합이 이리도 예뻐 보일 수가 없다.

그의 입가는 자동적으로 살짝 말려 올라갔다.

‘……희한하네.’

그리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자꾸만 한 곳을 향하는 시선.

그 눈빛이 어찌나 적나라했던지, 그리 예민하지 않은 예원조차도 일찌감치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왜요?”

“네?”

“아니…… 계속 쳐다보시길래. 무슨 할 말 있으신가, 해서요.”

“……없어요, 그런 거.”

참내, 근데 왜 그렇게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냐.

의아한 듯 어깨를 으쓱거린 예원은 청소용 포터필터에 약품을 넣어 장착한 뒤 자동린싱(자동세척) 버튼을 눌렀다.

그러는 와중에도 남자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였다.

그의 눈길이 닿은 것이 처음도 아니건만, 이상하리만큼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

그야말로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뭐야, 왜 저래?’

힘든 시간을 보낸 남자에게선 어쩐지 이전보다 성숙함이 느껴졌다.

눈빛도 뭔가 더 짙어지고, 전체적으로 우울하면서 소년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인생의 한 고비라고 할 수 있는 일을 무사히 넘긴 건 다행이었지만, 요 며칠 예원은 그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기가 이전보다 더 힘들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이 남자도 정말 오랜만에 나온 거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예원은 저도 모르게 손등을 들어 올려 볼을 식혔다.

그런데 그때였다.

“…….”

웬일인지, 남자의 몸이 서서히 그녀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에 맞춰 상체가 슬금슬금 뒤로 빠졌고, 예원은 큰 눈을 잔뜩 치켜떴다.

이, 이건 무슨……!

“……왜, 왜요?”

육식동물 앞에 잔뜩 움츠러든 초식동물 같은 모습.

그 순간, 남자의 따뜻한 손끝이 무언가를 집어내듯 눈언저리를 살짝, 건드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속눈썹 묻었어요.”

……응?

나직한 속삭임에 눈이 번쩍 뜨였다.

용무를 마친 그는 어느 새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간 상태였다.

예원은 꺾다 만 철사처럼 구부정하게 선 채로,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아…….”

일순 힘이 쭉 빠져나가고, 달아올라 있던 볼도 파사삭 식었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온몸을 덮쳤다.

몸이 저절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하하하, 소, 속눈썹이 언제 빠졌지……! 아깐, 아무도 말 안 해줬는데…….”

“…….”

“……고, 고마워요.”

그럼 그렇지. 난 대체 뭔 생각을 한 거야!

지난 번 꼬르륵 사건에 이어 또 한 번의 흑역사 갱신.

허둥지둥 눈가를 닦아낸 예원은 부자연스럽게 헤헤거리며 웃었다.

아오. 착각도 이 정도면 병이다, 병.

“그럼, 마저 마감해요. 난 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

다행히 그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좇던 예원은 그제야 안심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왜 자꾸 이러냐, 나답지 않게.

안 돼. 정신 차려야지.

심기일전한 예원은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금 마감에 몰두했다.

“…….”

……그런데 잠시 뒤,

그녀의 입가에선 문득 웃음이 사라졌다.

“……왜 이러지?”

남자의 앞에서 격렬히 반응하던 심장이, 아직까지도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평소에는 잠깐 이러다가도 금방 잠잠해지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럴 기미도 전혀 보이질 않는다. 오로지 빠르게 고조되기만 할 뿐.

거칠게 뛰는 맥박소리가 어찌나 큰지, 만약 남자가 옆에 있었더라면 그에게까지 전달될까 노심초사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왜…… 왜…….

“…….”

왜 자꾸 떨리지, 저 남자한테?

예원의 눈빛이 멍해졌다.

* * *

“왜긴 왜야! 좋아하니까 그런 거지!”

이모의 날카로운 일침에, 옆에 있던 예원은 지레 뜨끔했다.

“하여간에 드라마에 나오는 것들은 어째 하나같이 저 모양인지 몰라. 아니, 지 맘을 지가 알지 누가 알아? 지 맘도 모르면 그게 등신이지, 쯧쯧.”

열혈 드라마광인 이모 은아는 오늘도 여느 때처럼 드라마를 시청 중이었다.

과하게 감정이입한 채 드라마에 폭 빠져 있는 이모를 보며, 예원은 은근슬쩍 여주인공을 감싸고 나섰다.

“아니 뭐, 그렇다고 등신이라고 할 것까지 있나……? 모를 수도 있지.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 무슨 구구단도 아니고…….”

“얼씨구? 넌 또 왜 그래?”

은아는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픽 코웃음을 쳤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 어렵긴 뭐가 어려워. 저 봐라. 쟤 앞에만 서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지, 말투랑 눈빛도 다 바뀌잖아. 누가 봐도 좋아하는 건데 지만 몰라요. 저런 건 바보도 아니라니까. 등신이지, 등신.”

“…….”

이씨, 또 등신이래.

분명 드라마 캐릭터를 두고 하는 말일 텐데, 나는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건지.

괜히 제 발이 저린 예원은 이모의 말에 대꾸하지 못한 채 TV만을 응시했다.

‘누가 봐도 좋아하는 거라고……?’

에이, 말도 안 돼.

좋아하긴 누가.

고개는 절레절레. 손은 신경질적으로 콩나물 대가리를 똑똑 땄다.

“가뜩이나 쟨 애까지 배었는데 저러고 있으니…… 으휴, 속 터져서 못 봐주겠어 정말. 자꾸 저러면 저것도 그만 봐야겠다.”

예원에 비해 매우 프로페셔널한 손놀림으로 콩나물 대가리를 따던 은아가 마침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참, 그건 그렇고…… 너는, 어떻게 소식 없어?”

“……소식? 갑자기 무슨 소식.”

“아 왜, 그 있잖아.”

따로 듣고 있는 사람도 없건만, 은아는 괜히 은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임신 말이야. 아기 소식은 아직 없냐고.”

“……뭐?”

아, 아기?

예원의 눈이 일순 잔뜩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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