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47화 (47/102)

47.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2018.09.14.

TV 속에 나타난 생전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

“…….”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닥뜨린 광경에, 민혁과 예원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핑 돌았다.

한순간 박제돼 버린 것 같은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카메라 앞에서 항상 연기만 하다가, 이렇게 저의 이야기를 하려고 보니 조금 쑥스럽고 낯부끄럽기는 합니다만……. 오늘은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어 이렇게 카메라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사실, 저는 최근 많이 아팠습니다. 이 인터뷰가 나갈 즈음이면 아마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겠지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섣불리 사실을 밝히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못했습니다. 실제로,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 촬영을 했으니까요. 혹시나 드라마에 누를 끼칠까, 주변 분들께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조심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녀가 조곤조곤한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망 3주 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울 만큼 또렷하고 침착한 목소리.

「지금껏 성원해주시고 많은 사랑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국민 엄마’라는 호칭도 너무나 과분했습니다. 연기자로서 그만한 광영이 또 어디 있겠는지요. 감사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참 힘듭니다. 그만큼 감사합니다. 감사했습니다.저는 비록 이렇게 세상을 떠나지만, 여러분들의 기억 속에는 누군가의 엄마로, 누군가의 아내로, 또 어떤 멋진 여자로…… 꾸준히 남아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거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진의 인터뷰가 계속될수록, 그들의 눈에는 더욱더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때 영상 속의 그녀가 잠시 머뭇거렸다.

「배우 ‘현민혁’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 대목에서, 민혁과 예원의 눈은 동시에 동그래졌다.

「함께 연기한 거라고는 드라마에서 한 번 만난 게 전부였지만, 저는 민혁 군을 평소 제 아들과 다를 바 없이 생각했습니다. 순수하고 착하고, 누구보다 고운 심성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었지요. 언제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이 기회를 빌려 말할 수 있어 참 다행입니다.」

“…….”

「앞으로도 그가 지금처럼 승승장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민혁 군에게 부디 많은 사랑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끝을 맺었고, 영상은 스튜디오에 있는 리포터에게로 돌아왔다.

「영원한 별이 되신 故최수진 씨의 짧은 인터뷰 영상이었습니다. 사실, 故최수진 씨의 별세 소식과 함께 이번 주 연예가를 뜨겁게 달구었던 소식 중 하나가 바로 배우 ‘현민혁’ 씨의 촬영장 무단이탈 소식이었는데요. 저희가 직접 취재한 결과, 그 이유는 故최수진 씨의 장례식 참석 때문이었던 걸로 밝혀졌습니다. 저희 <연예집중>은, 아무쪼록 고인의 뜻을 따라 이 인터뷰를 통해 모든 오해와 억측이 시일 내에 풀릴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멘트를 마무리 지은 리포터는 곧장 다음 소식으로 넘어갔다.

그러고도 민혁은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게…… 어떻게…….”

조용히 관망하고만 있던 영덕이 그런 그를 보며 씩 웃었다.

“방송의 힘 무서운 거 알지? 기사 뜨면, 밖에서 아무렇게나 떠드는 사람들 금방 없어질 거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순간, 민혁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저를 위해 일부러 남기고 간 선물이었음을.

제 생각보다, 제 깜냥보다도 더…… 엄마에게 많이 사랑 받았었음을.

그는 복잡한 말들이 적힌 유언장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녀의 편지를 꺼내보았다.

수진 특유의 단정한 글씨체가 천천히 그의 눈에 새겨졌다.

“…….”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간당간당 겨우 매달려 있던 눈물은, 어느 샌가 그의 아래 눈꺼풀을 넘어 후두둑 넘쳐흐르고 있었다.

결국 아이처럼 울음이 터졌다.

‘……엄마.’

당신은 결국…… 언제나 나를 눈물짓게 하시는군요.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이렇게…….

.

.

「민혁아, 안녕. 엄마야.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이면…… 어쩌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생전 안 쓰던 편지를 쓰려니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면 할 말을 다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이렇게 펜을 들어본다.

글 솜씨가 형편없더라도 부디 이해해주렴.

어느덧 너를 만난 지도 꽤 오래 전이 되었구나. 그때의 너는, 이제 막 날아오르기 시작한 독수리와도 같았지.

어린놈 눈빛이 어쩌면 그리 매섭던지. 어떻게든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눈과 얼굴에 고스란히 보이는 것 같았다.

결국 너는 내 생각보다도 더 높이, 훨훨 날아오르더구나. 그것만으로도 엄마는 무척이나 기뻤단다.

앞으로는 저 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기만 하겠구나, 더 이상은 힘들 일도 없겠구나 했는데.

그런데 그런 네가, 고작 나 같은 사람 때문에 그렇게 울고불고하는 것을 보는데…… 어떻게 맘이 아프지 않을 수 있었겠니.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것 같으면서도, 항상 어딘가 아등바등 사는 것 같은 네가 안쓰러웠다.

이리저리 사업을 해보려 하는 것도, 쉴 새 없이 소처럼 일한단 소리까지 들으며 드라마와 영화를 찍는 것도, 잃어버린 여동생을 죽어라 찾는 것도.

뭐든 열심히 하는 네가 기특했지만 한편으론 안타까웠단다.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들이 과연 큰 도움이 되기는 할까 싶다마는, 앞으로 네가 살면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조금이나마 밝은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돌파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거면 엄마는 더 바라는 것이 없어.

그리고 엄마는 이제 더 이상의 소원도 없단다. 왜냐하면, 하나 남은 걸 네가 이루어 주었으니까.

죽기 전에…… 너와 예원이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갈 수 있어 참 다행이야. 앞으로도 그렇게, 예쁘고 행복하게 살렴. 알았지?

참, 예원이에게도 좀 전해줄 수 있겠니? 네 말처럼 제주도도 가고 바다도 가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부부는 닮는다더니. 너를 꼭 닮아 마냥 착하고 예쁜 아이라, 약속도 안 지키고 떠나버린 못된 시어머니를 맘껏 미워하지도 못할 것 같단 생각이 드는구나.

내가 없더라도, 부디 둘이서 알콩달콩 재미있는 삶을 살길 바란다. 내가 미처 못 누린 몫까지 모두 다.

만약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 하늘에서 그런 너희의 모습을 내려다볼 수도 있겠지.

그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은데…….

민혁아. 내 하나뿐인 아들.

아주아주 많이, 사랑한다. ^^

- 이 세상에서 널 제일로 사랑하는(아마도 예원이 다음으로?^^) 엄마가.

추신.

영덕이에게도 널 도와달라 부탁해 놓았다.

네 동생 민영이, 언젠가는 꼭 찾을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려무나.

아들, 화이팅!」

* * *

“오늘 밤은 혼자 있기가 무서워요~ 창문을 여니 바람소리가 드세요~”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민영의 작은 흥얼거림이 골목길을 울렸다.

오늘은 모처럼 지원과의 연습이 일찍 끝난 날이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다나, 어쨌다나. 엄밀히 말해 자기 일은 아니라는데 당최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 물론. 물어본다고 답해줄 놈도 아니니 일찌감치 질문은 포기해야만 했다.

“아, 배고파.”

아파트 앞에 거의 다다른 민영은 본능적으로 주린 배를 감쌌다.

요사이 민영은 오디션을 나가기에 앞서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관리를 하고 있었다. 이름하야 다이어트.

그런데, 이 시간만 되면 자꾸만 허기가 진다는 게 문제였다.

자나 깨나 딸들 걱정뿐인 아빠와 엄마는 당연히 민영의 다이어트를 결사반대했다.

한창 커야 할 시기에 다이어트가 웬 말이냐며 쌍심지를 켜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집밥은 그대로 먹고 학교급식을 최대한 적게 먹는 걸로 퉁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는 고등학생이었고, 자연히 이 시간만 되면 배가 고팠다.

이놈의 배꼽시계는 어쩜 이렇게 딱딱 들어맞는지.

‘아으, 이럴 줄 알았으면 반찬만 먹지 말고 밥도 조금 먹는 거였는데.’

기껏 급식 적게 먹고, 이제 와 야식을 먹어버리면 말짱 도루묵 아니냐고.

그야말로 조삼모사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어떡하지?’

웬만해선 참고 싶었으나, 오늘은 인간적으로 너무 배가 고팠다.

에이, 몰라.

“……엄마한테 떡볶이 해달라고 그래야지.”

그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지. 인생 뭐 별 거 있냐.

몇 초 만에 고민을 끝낸 민영은 싱글벙글 가벼운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어?”

그런데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순간, 민영은 현관문 틈새가 살짝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누가 왔나?”

그러고 보니, 주방 안쪽에서 뭔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민영은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현관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으려고 하자마자, 다소 흥분한 듯한 엄마의 목소리가 곧바로 귀에 꽂혔다.

“자꾸 왜 이러세요, 형님! 글쎄 저는 말 안 한다니까요?”

“이 답답한 사람아. 그걸 대체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응? 애도 알 건 알아야 할 거 아니야.”

‘……큰고모?’

엄마의 목소리에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민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이 지긋한 큰고모의 목소리였다.

‘큰고모가 갑자기 왜……?’

민영에게는 고모가 두 명이 있었다.

아빠의 누나인 큰고모와, 동생인 작은고모.

작은고모는 별로 그런 것이 없었지만, 유독 큰고모만은 이상하리만큼 민영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어렸던 민영은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냥 어린아이 자체를 싫어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런 큰고모도 민영보다 두 살 어린 동생 민아만큼은 훅 불면 날아갈세라, 안으면 터질 세라 너무나 애지중지 예뻐했다.

어쩔 수 없이 민영은 서운해졌다.

‘같은 조카인데 고모는 왜 나만 싫어하는 거지.’

사실, 민영과 민아는 생김새 자체도 아주 달랐다.

민영이 살짝 날카롭고 도회적인 고양이 같은 인상인 데 반해, 민아는 흔히 말하는 강아지 같은 순한 상이었으니까.

부모님 두 분 다 유순하고 둥그런 상이었기에, 가족 중 그녀의 외모가 특히 튀어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덕분에 속으로는 그런 생각도 했다.

‘고모는 나 같이 생긴 애를 안 좋아하는 건가…….’

부모님도,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하다못해 지나가던 사람들까지도 예쁘다고 하는 외모였지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 민영은 제 외모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버렸고, 결국엔 민영도 고모를 똑같이 싫어하게 되었다.

나중에 어느 정도 크고 나서야 알았다.

누군가 저를 이유 없이 싫어한다면, 싫어할만한 이유를 만들어주면 그만이라는 것을.

그래서 한동안 큰고모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던 민영이었다.

요새 어쩐지 발걸음이 뜸하기에 좋아하고 있었더니, 오늘은 갑자기 웬일일까?

현관 쪽에 숨은 민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왜 꼭 알아야 해요? 우리 민영이, 제 딸이에요. 피는 안 섞였어도 엄연히 제 딸이라고요. 근데…… 제가 왜 굳이 그런 말을 해야 돼요?”

“아휴, 정말.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크면 자기 뿌리를 찾아가게 돼 있어. 본능적으로 지 핏줄을 찾게 된다고. 걔 벌써 좀 있으면 성인인데, 조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말해야 될 거 아니야.”

“……전 못해요. 절대 못해요.”

“올케!”

큰고모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휴, 그래. 맘대로 해. 올케가 안 하면 나라도 말할 거야.”

“뭐, 뭐라고요?”

“솔직히 말해서, 입양이 무슨 흠이라도 돼? 이제껏 공짜로 입히고 먹이고 재워줬으면 고마운 줄이나 알아야지. 그걸 갖고 걔가 뭐라고 하겠느냔 말이야.”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에요.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요. 지금껏 모르고도 잘 키워왔잖아요.”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야. 어릴 때 진작 말해뒀어야 하는데.”

“…….”

“걔, 음악인가 뭔가 하려고 한다며? 올케는 그게 돈이 얼마나 깨지는지 알기나 해? 잘못하면 집안 거덜 나, 거덜.”

“……그래도, 애가 원하니까…… 하게 해주고 싶어요. 그만한 재능도 있는 아이고요.”

“어이고. 재능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런 게 재능만 갖고 되는 줄 알아? 요즘 개나 소나 가수한다고들 난리야. 근데, 개중에 진짜로 성공하는 애들 몇이나 될 거 같아? 뭐, 누구한테서 났는지 얼굴 반반한 거 하나는 다행이지만…… 요즘 그만큼 예쁜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을 하다 만 그녀가 혀를 끌끌 찼다.

“제발, 걔한테 정신 쏟을 시간 있으면 민아한테나 좀 써. 친자식도 아닌 애를 왜 그렇게 감싸려고 난리들이야?”

“……민영이 없었으면 민아도 없었어요. 저흰, 민영이가 저희한테 와준 덕분에 민아도 생겼다고 생각해요. 아시잖아요.”

“쯧쯧쯧,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그러게 내가 빨리 입양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으휴, 내 말 안 들어서 결국 일이 이렇게 된 거잖아. 대체 이게 뭔 고생이야?”

“형님, 소리 좀 낮추세요. 이제 곧 민영이 올 시간이란 말이에요. 자꾸 그러시면 저도……!”

“……엄마.”

불현 듯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두 여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 샌가 민영이 식탁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미, 민영아!”

“방금…… 그거 다 무슨 소리야? 입양……이라니?”

……모든 것이 탄로나 버린 순간이었다.

너무나 허무하게도.

“민영아…… 그, 그게…….”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안절부절못하는 엄마를 보자, 민영의 눈은 더더욱 발개졌다.

듣지 않아도, 피부로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맞추려 해도 안 맞아 들어가던 퍼즐조각들이 이제야 제대로 짜 맞춰지기 시작했으니까.

사실……이구나.

그게, 사실…….

“방금 그거 다 무슨 소리냐고!”

손마디가 다 하얗게 질리도록, 가방끈을 세게 움켜쥔 민영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날씬한 뺨엔 어느 새 눈물줄기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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