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가지 마
2018.09.07.
[오늘로 벌써, 우리가 결혼한 지도 1년이 됐네요.]
[……그러네.]
문득 그를 돌아본 여자가 환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앞으로도 영영 잊지 못할 거예요.]
아득히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는 그에게 완전한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이별.
그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이상스럽게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홍예원 씨.]
[네?]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불러놓고는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곧.
[안 가면…… 안 되나?]
[……네?]
진심을 토해냈다.
[안 가면…… 안 되냐고.]
[…….]
[지금처럼 이렇게…… 쭉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돼?]
뜻하지 않은 말을 들은 듯, 그녀의 눈이 고장 난 신호등처럼 깜빡거렸다.
[……안 돼요. 그럴 순 없어요.]
[……왜?]
왜. 왜 안 된다는 거야?
그가 속으로 높게 부르짖었지만, 여자는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계약은 여기까지니까요.]
[…….]
[그러게, 왜 그런 계약을 하자고 했어요.]
바보처럼.
나직하게 이어진 그 말에,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야…… 그야…….
‘그땐, 당신이 이렇게 좋아질 줄 몰랐으니까.’
정말이지 하나도 몰랐어.
난…… 난 그냥…….
[그럼, 갈게요. 잘 있어요.]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여자는 곧바로 그를 등져 걷기 시작했다.
민혁은 조급해진 나머지 얼른 손을 뻗었다.
[안 돼!]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그러니까 가지 마…….
가지 마……!
.
.
“가지 ㅁ…….”
“민혁 씨.”
“…….”
“민혁 씨. 일어나 봐요, 민혁 씨!”
헉.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이 덜 깨 흐리멍덩한 시야에, 하얗고 높은 천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그 다음으로 바로 눈에 들어온 건,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저의 동태를 살피느라 잔뜩 찌푸려져 있는 미간.
그걸 본 순간, 그의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안 갔구나. 아직 내 옆에 있었어.
아직은…….
“왜 그래요? 무슨 꿈이라도 꿨…… 헉!”
그때, 생각보다 몸이 먼저 튀어나갔다.
별안간 몸을 일으킨 그가 한 팔로 예원을 무작정 끌어다 안은 것이었다.
“……!”
예기치 못하게 와 닿은 남자의 맨살에, 예원은 순간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떨었다.
‘아오, 이 남잔 노출증이라도 있나? 왜 이렇게 만날 발가벗고 자?’
하지만 한편으론 제 몸뚱이 전체를 감싸 안는 힘이 너무도 거세어서, 고삐를 잃은 심장이 주체를 못하는 채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평온하던 볼 또한 장작을 넣은 것처럼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제 막 일어난 남자에게서 물씬 풍겨나는 체향.
그것은 예원을 순식간에 어지럽게 만들었다.
“미, 민혁 씨……?”
그녀가 어찌 반응하든 말든,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태세였다.
그저, 여자의 어깨에 턱을 고인 채 낮게 읊조릴 뿐.
“……다행이다.”
“……네?”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영문을 모르는 예원은 어리둥절해졌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상체를 훌렁 벗은 남자의 무게가 다소 버겁긴 했지만, 순간적으로 그런 그가 부쩍 어린아이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갑자기 왜 이래요. 뭐, 무시무시한 꿈이라도 꾼 거예요?”
무시무시한 꿈?
여자의 말을 곱씹은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래,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네.”
귓가를 진득하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새삼스러운 듯 웃었다.
놀란 맘에 그의 몸을 뿌리치려던 생각은 어느 샌가 사라져 있었다.
“쳇. 겨우 꿈꾼 거 가지고 뭘 그래요, 서른두 살이나 먹은 남자가. 길 가던 유치원생이 친구하자고 하겠네.”
그렇게 타박을 하면서도, 머뭇거림 끝에 용기를 내어 그의 맨 등을 살짝 쓸어내렸다.
티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와 근육이 마치 실크를 만지는 듯 부드럽다.
잠시 동안 그렇게 그를 토닥여주던 예원은 이내 슬쩍 그에게서 떨어져 미소 지었다.
“곧 아침 다 될 거예요. 오늘은 같이 밥 먹고 출근해요.”
“……밥이요?”
“네. 제가 직접 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여자는 집안에서 줄곧 입는 후드 티 위에 예쁜 앞치마를 매고 있는 상태였다.
허구한 날 보는 게 그녀의 앞치마 입은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엄연히 카페 유니폼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좀 더 귀엽고, 상큼했다.
영락없는 새색시처럼.
“얼른 씻고 나와요. 차려 놓을 테니까.”
어쨌든, 그렇게 말하고서 방을 나서려는 것 같던 예원은 웬일인지 다시금 뒤로 돌았다.
그리고는 약간 쑥스럽게 웃었다.
“아참.”
“…….”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옷 좀 입고 주무세요. 깨우기…… 되게 민망하네.”
부리나케 자리를 뜨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민혁은 방금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하아.”
미쳤군. 갈수록 미쳐가고 있어.
‘저 여잘 대체 왜 안아. 다행이다, 는 또 뭐고.’
정말, 딱 돌아버리겠다.
그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하지만 사실, 그를 진정 괴롭게 하는 것들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
방금 꼭……
제가 저 여자의 진짜 남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었다는 것.
“……젠장.”
나지막이 중얼거린 그는 침대에 도로 벌렁 누워버렸다.
저 여자가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일까.
그러면서 또, 나는 왜 이렇게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는 걸까.
이건 아무래도 병임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아주 중증.
그는 모든 걸 회피하고 싶은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 * *
“어때요? ……짜요? 싱거워요?”
된장찌개를 맛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예원이 집요하게 물었다.
“……괜찮아요.”
여자가 준비해 놓은 아침 식탁은 소박했다.
따끈한 밥에 된장찌개, 계란말이, 김. 그리고 아주머님들께서 미리 마련해놓으신 밑반찬들.
전체적으로 예쁘고 정갈한 차림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출장요리사를 불렀던 때와는 차이가 좀 있었다.
“근데…… 갑자기 웬 아침을 준비했어요?”
평소엔 주 활동시간이 다른 터라 아침을 함께 먹을 일이 잘 없었다.
더구나 오늘 같이 그녀가 그를 깨우러 오는 일 또한 없었고.
“아.”
의아하게 묻는 그를 향해, 예원은 수줍게 웃었다.
“실은, 화해용 선물이에요.”
“…….”
“그저께 우리 좀 다퉜잖아요. 사실 싸울 일도 아니었는데…… 민혁 씨도 민혁 씨지만, 저도 괜히 홧김에 흥분했던 것 같아요. 미안해요.”
시간은 빠르게도 흘러 그 일 또한 벌써 며칠 전 일이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일정을 소화했기에, 그 일은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뜻밖의 사과를 들은 민혁이 숟가락을 든 채 주춤했다.
“……다 내가 잘못했던 건데요, 뭐.”
실제로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감정에 휩쓸려 화를 낸 뒤로 몇 번을 후회했는지 모르니까.
하지만 예원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생각해보니까 사장님 말도 맞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민혁 아내니까, 각별히 더 조심했어야 하는 게 맞는데…… 가끔은 제가 이상하게 그걸 까먹더라고요.”
“…….”
“아무튼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젓가락을 들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
“그 말은, 나 말고는 어떤 남자와도 안 만나겠다는 겁니까?”
“네. ……아, 지원이만 빼고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해맑게 헤헤거리고 있는 여자를 보자, 그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 말에 이상스럽게 기분이 좋아졌다.
‘화해용 선물’이라는 이 밥상을 받은 것보다도 더.
“근데…… 저 뭐 하나만 여쭤 봐도 돼요?”
“뭔데요.”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밥을 한 술 뜨는 사이, 예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최우진 씨 말이에요.”
“…….”
“그 분이랑 민혁 씨, 무슨 사이인지…… 물어 봐도 돼요?”
수저를 든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최우진.’
겨우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도 기분이 더럽기 짝이 없다.
그것도, 이 여자의 입을 통해 나온 이름이기에 더더욱.
그는 단숨에 차가운 얼굴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아뇨. 홍예원 씨는 몰라도 되는 일이에요. 그럴 가치도 필요도 없는 사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딱 잘라 거부하는 솜씨가 가히 무 자르기와 맞먹을 정도.
덕분에 예원은 찍 소리도 못한 채 그대로 수긍해야만 했다.
“……아, 네.”
이런 반응으로만 보아도 예사 사이가 아니란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기껏 화해하겠답시고 자리를 만들었는데, 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으니까.
빠르게 단념한 예원은 말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그때, 계란말이 하나를 베어 먹은 그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러는 홍예원 씨는요.”
“…….”
“그 자식이랑, 무슨 사입니까?”
넌지시 던져진 질문에, 예원은 잠깐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숟가락을 바쁘게 놀렸다.
당연한 걸 뭘 묻느냐는 얼굴로.
“무슨 사이긴요. 피터지게 싸워야 하는 사이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그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예원은 이내 장난스럽게 웃더니 설명했다.
“사실, 거기 개업한 뒤로 우리 카페 단골들이 거기로 꽤나 옮겨갔거든요. 경쟁카페다 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긴 한데…… 뭐 어쨌든 먼저 시작한 건 우리니까. 볼 때마다 좀 못마땅한 게 있죠.”
“…….”
“개인적인 악감정 같은 건 없지만, 별로 좋지는 않아요. 좀 귀찮고 성가시기도 하고.”
“……왜요?”
그를 따라 계란말이를 베어 문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잊을 만 하면 자꾸 와서 귀찮게 해요. 가뜩이나 장사 안 되는데 누굴 놀리고 싶은 건지, 심심한 건지…… 저번엔 대뜸 와가지고는 남편이 잘해 주냐고 꼬치꼬치 캐묻기까지 하는 거 있죠.”
“…….”
“남이사 잘해주든가 말든가. 하여튼, 좀 이해 안 되는 사람이에요.”
그녀 딴엔 대수롭지 않게 꺼낸 말이었으나, 그 말의 여파는 꽤 상당했다.
그는 어느 새 미미하게 굳어진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 * *
“컷!”
장 감독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쩌렁하게 울렸다.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민혁 씨.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벌써 몇 번째야 이게.”
“……죄송합니다.”
안 그러던 놈이 오늘따라 왜 저럴까.
자잘한 대사 실수에,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표정 연기까지.
민혁을 향해 마뜩찮은 표정을 짓던 감독은 분위기를 환기하듯 박수를 짝짝 쳤다.
“자, 자. 잠깐 쉬었다 갑시다. 민혁 씨도 좀 쉬고 와. 지금은 영 안 되겠어.”
“……예.”
그제야 긴장해 있던 스태프들이 하나 둘 움직였고, 민혁 또한 무거운 발걸음을 한 채 대기실로 향했다.
“후우…….”
그렇게 테이블에 딸린 소파에 기대어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반갑지 않은 얼굴이 또 빼꼼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오늘은 어째 연기가 영 민혁 씨 답지 않네. 꼭, 어디다 정신을 두고 온 사람 같아.”
애석하게도 혜인은 그를 제대로 본 게 맞았다.
묘한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 여자를 보며, 민혁은 맘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려는 짜증을 애써 눌렀다.
“쉬어. 내가 옆에 있으면 어차피 질색할 게 뻔하니까, 난 이만…….”
“네가 며칠 전에 하려던 얘기 말인데.”
대신, 그는 그녀의 말허리를 툭 잘랐다.
“그거, 최우진이 우리 옆 카페 사장이라는 얘기였어?”
혜인이 그를 휙 돌아보았다.
“……뭐야, 알고 있었어?”
그녀의 얼굴엔 금세 낭패가 어렸다.
이 남잔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기회 봐서 말해주려고 했더니.
“어떻게 알았어? 이미 만나본 거야?”
“……그래.”
기대한 바와 달리 너무나도 평온한 그의 모습에, 혜인은 붉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저절로 비아냥거림이 흘러나왔다.
“놀랐겠네. 전혀 생각도 못한 인물이었을 텐데.”
“…….”
“우진 오빤, 잘 지낸대?”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에게선 대답 대신 의외의 질문이 하나 되돌아왔다.
“……그때 그 일, 질투 때문이라고 했었지. 실수였다고.”
“…….”
“그거, 무슨 의미였는지 물어봐도 되나?”
이것이야말로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이다.
혜인의 표정은 한순간 얼떨떨하게 변했다.
“……그걸 이제야 물어보는 거야? 장장 십년도 넘은 일을?”
“대답해주기 싫으면 말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걸까. 그렇게 말할 기회를 달라 청할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던 남자가.
혜인은 기가 찬 마음을 애써 접고 입을 열었다.
“……다른 의미 없어. 그 말 그대로야. 실수고, 잘못된 판단이었어.”
“…….”
“난…… 민혁 씨가 날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거든.”
그 말에, 그의 고개가 퍼뜩 돌아갔다.
“뭐?”
휴, 한숨을 내쉰 혜인은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변명이라고 해도 할 수 없지만…… 솔직히 그랬어. 말로는 날 제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늘 다른 사람이 우선인 느낌이었지. 늘 불안하고 초조했어. 항상 날 뒤에 숨겨놓고 싶어 하고, 아무도 모르게 감추고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려고 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보통 안 그러잖아.”
말을 잇던 혜인이 피식 웃었다.
“근데, 그 일로 민혁 씨가 길길이 화를 내는 걸 보고 나니까…… 그제야 알겠더라고. 민혁 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
“참 아이러니하지 않아? 민혁 씬 그 일로 날 버렸는데, 오히려 난 그걸 통해서…… 민혁 씨가 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그녀가 씁쓸하게 자조했다.
반면, 그의 표정은 한없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넌 날 테스트하고 싶었던 거네.”
“아냐, 그런 거.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어.”
혜인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진 오빤 좋은 사람이었어. 민혁 씨만 아니었으면 나도 정말 진심으로 탐냈을지도 모를 만큼. 그때 난 날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우진 오빤 민혁 씨 대신 그 역할을 해줬어. 그것만큼은 나도 감사하게 생각해.”
“…….”
“그치만 확실한 건, 내가 정말로 사랑한 사람은 최우진이 아니라 현민혁이었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늘 틱틱거리던 혜인은 막상 발언 기회를 얻자마자 꽤나 절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던 민혁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답해 줘서 고맙다. 그런데 말이야.”
“…….”
“나라면, 그리고 너도 날 정말로 사랑했다면…… 그 따위 선택은 안 했을 거야. 절대로.”
그의 입꼬리가 살짝 삐딱하게 호를 그렸다.
“차라리 맘을 구걸했으면 구걸했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걸 대신 위안 받으려고 들진 않았을 거라고. 그건 결국, 나 하나 덜 아프려다가 다 같이 상처받는 길이니까.”
“…….”
“예나 지금이나 넌……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조혜인.”
그래서 내가 널 미치도록 증오하는 거고.
그는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나도,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
“민혁 씨…… 그 여자 진심으로 사랑하는 거 맞아?”
발걸음이 뚝 멈추고, 그는 혜인을 다시 돌아보았다.
“……뭐?”
“홍예원 씨 말이야.”
“…….”
“진심으로 사랑해?”
……네가 그걸 물을 자격이 있나.
하지만 그는 무의식중에 그 말을 혀에 굴렸다.
사랑?
그럴 리가 없었다. 계약 결혼에 사랑은 무슨 사랑.
다만, 온갖 생각들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하나만은 분명하게 확신이 들었다.
“…….”
그 자식에겐, 그 여잘 절대로 보낼 수 없다는 것.
혜인의 말을 듣고 나자 그 생각은 더더욱 확고해졌다.
“……그래, 사랑해.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더.”
“…….”
“하나뿐인 내 아낸데, 당연한 말 아닌가.”
간결한 답을 마친 그는 보란 듯 주머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왼손 약지에 끼워넣었다.
약삭빠른 그녀가 그게 무엇인지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결혼반지?’
“쉬어라. 난 다른 데 가서 쉴 테니까.”
그렇게 그는 곧바로 대기실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인은 문득 헛웃음을 뱉었다.
“……허. 이젠 반지까지 껴?”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현민혁.
* * *
저녁 무렵의 카페 에덴, 사무실.
예원의 손가락이 타닥타닥 키보드를 타이핑했다.
[최우진]
세 글자를 입력한 뒤 엔터를 탁 치자, 네이버 프로필엔 그의 앳된 시절 사진과 함께 간략한 인물정보가 쫙 떴다.
마우스 휠을 스크롤하며 검색결과들을 꼼꼼히 살펴보던 예원은 맘에 안 든다는 듯, 다시금 위로 올라가 검색어를 수정했다.
[현민혁 최우진 관계]
흠, 하는 소리와 함께 엔터를 치고 다시 한 번 검색결과를 살펴보려던 그때.
“스케줄 짜세요?”
“엄마!”
불현 듯 가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예원은 졸지에 깜짝 놀라 몸을 잔뜩 움츠렸다.
“어머. 놀라셨어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무리 그래도 안에 사람이 있는데, 노크 한 번 없이 들어오냐.
예원은 불편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는 밑에 띄워뒀던 엑셀 창을 열었다.
방금 전까진 진짜 스케줄 짜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잠깐 한눈 팔 때…….
“저…… 근데 점장님.”
예원이 그렇게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 가윤은 불쑥 그녀를 불렀다.
“네?”
“혹시…… 사장님이, 따로 무슨 말씀 없으시던가요?”
“……네?”
뜬금없는 말에 예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 이요?”
척 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던 가윤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마저 일 보세요.”
“……?”
뭐야, 싱겁기는.
금세 말을 거두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예원은 별 생각 없이 픽 웃었다.
“참, 이번 주는 지난번에 휴무 바꿔준 거 감안해서 스케줄 짰어요. 다시 한 번 고마워요. 매니저님 아니었으면 진짜 힘들었을 거예요.”
미처 안 뽑았으면 어쩔 뻔 했을까, 싶을 정도로 가윤은 요즘 제 몫을 톡톡히 잘해내고 있었다.
저의 급한 요청에도 별 말 없이 흔쾌히 수락을 해주었던 걸 보면, 하다못해 마음결조차도 비단결임이 틀림없었다.
“천만에요.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뭐.”
“그래도요. 앞으로는 아마 저도 자리 비울 일 잘 없을 거예요. 지금까지 수고해준 만큼 휴무도 좀 더 넉넉히 챙겨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예원이 괜스레 흐뭇하게 웃던 그때, 마침 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엥, 이 시간에 누구지?’
그녀는 액정에 떠 있는 이름을 확인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수진의 매니저였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네, 아저씨.”
그런데, 통화를 이어나가던 그녀의 입가에선 웬일인지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네?”
핸드폰을 든 그녀는 순식간에 멍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 * *
한편 짧은 휴식을 마친 민혁은 촬영 재개를 앞두고 스탠바이 중이었다.
세트로 다시 들어가면서, 그는 폰을 들고 제가 혹시 빠뜨린 연락이 없었는지 확인했다.
한데 무심코 통화 목록을 열어본 그는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
예원에게서 온 부재중 통화가 한 통도 아니고 여러 통이 찍혀 있다.
게다가 그 밑으로는 수진의 매니저에게서 온 연락도 더러 있었다.
‘뭐지?’
덜컥,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민혁은 우선 예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민혁 씨.]
한참의 연결음 끝에 들려온 목소리는, 그의 생각보다 무척이나 낮은 것이었다.
바닥끝까지 가라앉은 듯한 축축한 목소리.
이상한 느낌은 단숨에 배가 되었다.
“……목소리가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살짝 훌쩍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매우 힘겹게 내뱉는 듯한, 약간의 울먹임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어머님이…… 흑, 수진 어머님이…….]
“…….”
……잠시 뒤.
뒤통수를 꽝 찍히기라도 한 듯, 그의 눈빛엔 초점이 사라졌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폰을 쥔 손과 팔에선 서서히 힘이 빠졌다.
─탁!
결국, 그의 폰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야, 여기 서서 뭐하냐? 자식이 폰까지 떨어뜨리고…….”
“…….”
“민혁아. 현민혁?”
그의 멍해진 눈길이 옆으로 다가온 성환에게로 향했다.
“……형.”
“어?”
“……감독님한테 대신 말씀 좀 전해 줘.”
“뭐? 뭐를.”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가엔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미안해, 형. 나 지금 가 봐야 돼.”
“뭐?”
성환은 지금 뭔 소릴 하냐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야, 이제 좀 있으면 촬영 시작인데 가긴 갑자기 어딜 간다고…….”
하지만 성환의 말은 미처 끝을 맺지 못했다.
“야! 야, 현민혁! 너 어디 가! 야 인마!”
텅 빈 복도에는 그의 바쁜 뜀박질 소리만이 세차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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