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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39화 (39/102)

39. 도둑 키스의 부작용

2018.08.17.

접촉은 아주 찰나였으나 감촉은 무척이나 뚜렷했다.

살짝 촉촉해진 입술 끝에서 묻어나는 커피와 우유의 고소한 향기.

카푸치노의 흔적이었다.

민혁은 한순간 공기가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눈앞의 여자와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절로 심장이 쪼그라들고 발끝이 곱아드는 그런 기분.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진 상태 그대로 얼마쯤 있었을까.

눈을 질끈 감고선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 여자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풍성하게 드리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눈꺼풀과 함께 천천히 위로 말려 올라간다.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 새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무척 당황한 것 같은 모양새로.

“…….”

“…….”

침 넘어가는 소리마저 우렁차게 들릴 정도로 고요한 실내.

그 속에서 떨리는 두 시선이 겨우 맞닿은, 그 순간이었다.

─스윽.

별안간 출입문 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는 동시에 돌아갔다.

“……어?”

꽤나 가느다란 인영.

무척 놀란 듯한 눈을 한 여자가 문 앞에 우뚝 선 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분, 아직까지 계셨네요?”

그녀가 매니저 주가윤임을 알아차리는 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던 그들은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고, 바짝 붙어있던 몸부터 황급히 떨어뜨렸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어, 매, 매, 매니저님은 웬일이세요?”

버퍼링이 걸려 말의 이음새가 뚝뚝 끊어진다.

예원은 혀를 콱 깨물고 싶어졌다.

“깜빡하고 사무실에 지갑을 놓고 가서요. 근데, 두 분은 여기서 왜……?”

바 안으로 들어온 가윤의 눈길이 그들의 앞을 가로질렀다.

거기엔 이 사태의 원흉인 스팀 피쳐들과 라떼잔, 카푸치노잔 무더기들이 일사분란하게 흩어져 있었다.

‘이 시간에 이 앞에서 이러고 있는 게 이해가 안 될 법도 하겠지.’

여자의 시선을 감지한 예원은 재빨리 대답했다.

“어…… 그, 그게. 사장님한테 뭣 좀 가르쳐 드린다고요……. 하하.”

“…….”

“그, 그쵸, 사장님……?”

민혁은 멈칫했다.

제게로 향한 여자의 눈빛에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 예. 그렇죠.”

엉겁결에 장단을 맞추었지만, 붉어진 얼굴은 도저히 숨길 여력이 없었다.

“아…….”

어쨌든 가윤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여자를 번갈아 보고 있던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빠져야 하는 순간임을 알아차렸다.

혼자 덩그러니 남을 여자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된 판국에 달리 방도도 없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여자를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저, 난 이만 먼저 가볼게요. 미안하지만 정리 좀 부탁해요.”

……예원 씨.

그리 불린 여자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이, 오늘따라 왜 이다지도 낯설게 느껴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집에서 봐요.”

남자의 거듭된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예원은 영혼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는 곧 긴 다리로 성큼성큼 자리를 떴고,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예원은 멍하니 좇았다.

앞에 선 가윤의 눈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점장님.”

“……네?”

“저기 혹시…… 제가 무슨 방해라도……?”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듯한 말투.

매니저 가윤은 똑똑하고 영리했다. 눈치도 꽤 빨랐다.

한밤중에 부부가 회포를 풀고 있던 현장을 졸지에 제멋대로 급습한 꼴이 됐으니, 지금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게 아닌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일 터.

예원은 여자를 안심시키듯 부러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니에요, 그런 거.”

어쩌면, 이 타이밍에 등장해준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차라리 다행이죠. 그쪽 아니었음 수습도 못할 뻔 했는데.’

이제 난 죽었다. 어떡해?

후환이 두려워진 예원은 다시금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지금 바랄 수 있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다.

* * *

‘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 날 이후 이틀간, 민혁은 수백 번 수천 번을 생각하고 자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분위기에 좀 취해있었다.

그놈의 포터니 뭐니 하는 어려운 용어들 탓에 정신도 좀 몽롱해져 있었고.

여하튼 그 순간엔 정말 그 여자가 반짝반짝 빛나보였던 게 사실이고, 제가 먼저 빌미를 제공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째서. 어째서 그 여자가 그런 짓을?

처음 그녀에게 접근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걸 어찌 무마해야 하나 고민했었던 그인데, 순식간에 입장이 뒤바뀌어버리니 이것도 퍽 난감했다.

아마 실수였을 것이다.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긴 좀 뭐하지만, 잘생긴 남자가 코앞에 있는데 순간 그런 충동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도저히 상상해선 안 될 의심이 슬금슬금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정말, 진심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는데…….

설마, 그 여자가 혹시 날?

“민혁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의아한 얼굴의 장 감독이 바로 보였다.

아, 또.

민혁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첫 키스신을 앞둔 촬영장에선 모든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 포옹으로 마무리되려 했던 이 장면은 두 주인공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연애 초기의 달달함과 설렘을 담아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신이었다.

그림 상 다양한 각도로 여러 번 찍어야하기에 무엇보다도 감정의 연결이 무척이나 중요한 신.

전후 장면은 최대한으로 집중해서 어떻게든 끝낼 수 있었지만, 아직 가장 큰 고비인 키스신이 남아있었기에 그로선 긴장이 필수였다.

그런데, 좀처럼 몰입이 되질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수없는 시뮬레이션으로 인해 조혜인을 상대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어떻게 커버가 되었는데, 키스신만은 아직도 힘에 겨웠다.

거기다 며칠 전 그 일까지.

그렇다 보니 집중은커녕 자꾸만 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를테면, 홍예원이라든지. 기습 키스라든지. 에덴이라든지. 홍예원이라든지…….

“자, 우리 이것만 끝나면 곧 퇴근이니까, 집중해서 짧고 굵게 가자고. 응? 오케이?”

“네!”

“……네.”

계속해서 떠오르는 잡념들을 애써 밀어 넣었다.

장 감독의 말에 나직하게 대답한 민혁은 문득 제게로 향하는 혜인의 묘한 시선을 느꼈다.

그와 마주선 채 살짝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 한 번 잘해봐. 오랜만에 실력 구경 좀 해볼까?’

여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분명 비웃음이었다.

한때, 저 붉은 입술에 열정적으로 입 맞추던 제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소매 아래로 드러난 주먹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자, 레디. 액션!”

마스카라가 잘 발려 한 올 한 올이 그림 같은 속눈썹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도발적인 표정을 짓고 있던 혜인은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수줍은 소녀의 모습으로 돌변해 있었다.

후.

속으로 심호흡을 한 민혁은 조심스럽게 여자의 양 어깨를 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티 하나 없는 여자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더운 숨결이 입술을 통해 느껴질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그런데 그때,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던 그의 눈에는 별안간 이채가 띠었다.

‘……!’

혜인의 얼굴 위로 갑작스레 떠오른, 누군가의 얼굴 탓이었다.

벼락같던 입맞춤 후, 눈을 꼬옥 감은 채 잔뜩 움츠려있던 홍예원.

다름 아닌 그녀의 얼굴이, 혜인의 얼굴 위로 선명하게 덧입혀져 있었다.

마치 홀로그램 같은 것처럼.

일순 티 나게 굳어버린 민혁은 거기서 더 이상 다가가질 못 했고, 멀찍이 앉은 장 감독은 그런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뭐야, 왜 저래?”

자식이 긴장해서 저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아무리 프로라도 키스신은 단연 부담이 되기 마련이니까.

어차피 첫 번째 슛부터 끝을 볼 생각은 없었다. 몇 번쯤 끊어간다고 해서 별 문제될 것도 없고.

그렇게 생각한 장 감독이 ‘컷!’을 외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흡!”

놀란 여자가 본능적으로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카메라 속에 비친 남자가, 여자를 향해 너무나 저돌적으로 키스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오래 굶주려 있던 짐승 같은 몸짓으로.

“…….”

현장에 있던 모두가 토끼눈을 뜬 채 멍해졌다.

혜인의 입술을 단번에 찍어 누른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폭 감싸 쥔 채 열정적으로 입 맞추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 누구도 멈출 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연기 아닌 연기가 계속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커, 컷!”

장 감독의 외침에, 그의 열기는 그제야 뚝 끝을 멎었다.

빈틈없이 맞붙어있던 입술이 여운을 남기듯 천천히 떨어졌고, 며칠 전 들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촉─ 하는 민망한 소리도 뒤따랐다.

단단히 감겨있던 민혁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저를 향해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

다만 그녀는, 홍예원이 아니라 조혜인이었지만.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무언가가 파사삭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는 허무함과 낭패감이 온몸을 관통했고,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이야……. 짧고 굵게 가쟀더니, 굵어도 너무 굵은 거 아냐, 민혁 씨?”

우리 드라마 진짜 대박 나겠는데?

감탄한 장 감독이 장난스럽게 너스레를 떨어대자 스태프들도 와르르 웃었다.

반면, 방금 전의 흥분은 온 데 간 데 없이 특유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민혁은 혜인을 향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 좀 놀랐지.”

혜인은 사실 살짝 의외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몇 번 깔짝거리다 대충 하고 끝낼 줄 알았는데. 남자의 행동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렇게 제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키스신에 몰입할 줄이야.

다르다. 방금 전 현민혁은 저를 벌레 보듯 하던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의 심경에 어딘가 변화가 생긴 게 틀림없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어느 쪽이든 실상 그녀에겐 나쁠 게 없었다. 기왕이면 물론 좋은 쪽이 좋겠지만.

고개를 흔든 혜인은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접어두었던 흥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냐, 괜찮아.”

“자, 이 분위기로 계속 가자고. 다시 레디, 액션!”

* * *

……진짜 말도 안 돼.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아니 뭐 그래. 그럴 수 있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놈하고 그렇게 쫑이 나버렸는데, 당연히 제정신이었을 리가 없지.

그치만 홍예원, 너 그렇게 남자가 고팠니?

그렇게 굶었어?

꼭 그렇게 생시 분간도 못하고 그런 짓을 저질러야만 했냐고? 어?

“예원아.”

“…….”

“예원아!”

어우, 깜짝이야!

“네, 네?”

흠칫 놀라 쳐다보는 예원에게 수진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얘도 참. 정신을 어디다 뒀길래 그렇게 놀래?”

“아, 아니에요…….”

그제야 예원은 상념을 접고 현실로 돌아왔다.

민망함에 관자놀이가 절로 뜨끈해졌다.

‘제가 어머님 아들에게 겁도 없이 입술도장을 찍어버렸어요. 그래서 그래요.’

……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근데 너 어디 아프니? 얼굴이 빨갛네.”

“……아, 아뇨? 하나도 안 아픈데…….”

“그러고 보니 안색도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힘든데 괜히 온 거 아니야?”

걱정스러운 듯한 수진의 물음에, 예원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진짜 안 아파요. 오히려 어머님 봬서 컨디션 최상이기만 한 걸요.”

그들의 결혼식이 있은 후, 수진은 예정대로 드라마 촬영에 들어갔다.

단 촬영 날을 빼면 항상 집에서 요양을 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였다.

그간 민혁과 예원은 틈틈이 번갈아가며 수진의 집을 드나들었다.

차도가 있기를 기대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터라, 할 수 있는 거라곤 틈날 때마다 들러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수진은 이렇게 고마워하고 미안해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새 무섭게 정이 들었다.

이제는 예원도 남자 못지않게 수진을 친엄마처럼 따르고 있었다.

고로 이런 일쯤이야 전혀 힘들지 않다.

이젠 그저, 눈에 띄게 수척해지고 있는 그녀의 외양이 맘에 걸릴 따름이었다.

“제발 제 걱정은 마시고, 어머님 몸만 생각하세요. 매니저님이 챙겨주시는대로 잘 드시고 계신 거 맞죠?”

“그럼.”

“막 맘대로 끼니 거르시고, 안 주무시고 그러면 안 돼요. 제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다고요.”

“……알았다니까.”

며느리의 귀여운 엄포에 수진은 설핏 웃음 지었다.

“민혁이는, 요새 촬영하느라 바쁘지?”

“아…… 네. 짬나면 꼭 오라고 하려고요.”

“아니, 나는 괜찮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이 예원의 얼굴을 향했다.

“넌 어떡해. 보고 싶지 않니?”

“……네?”

넌지시 건네진 질문에 덜컥 말문이 막혔다.

실은, 예원 또한 그를 보지 못한 지 며칠 째였다.

지난번엔 제가 일방적으로 그를 피했다지만, 이번엔 그도 쌍방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촬영으로 바쁜 이유도 물론 있겠으나 그뿐일 리가 없었다.

‘피차 불편해서겠지, 그 남자도.’

너무나 당연한 일.

하지만…….

“아직 신혼인데, 신랑 얼굴을 그렇게 못 봐서 어떡하느냐고. 보고 싶지 않아?”

달싹달싹.

몇 초간 머뭇거리던 예원의 입술 새에서 저도 모르게 낯선 진심이 튀어나왔다.

“보고…… 싶어요.”

그날 밤의 그 날카로운 키스의 여파일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그가 보고 싶었다.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것 같으면서도 때론 신기할 정도로 따뜻하고 포근하게 변하는.

커피 관련 지식은 형편없어도 학구열만은 뛰어나서, 저를 향해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반짝 빛내곤 하는.

그 남자가.

“…….”

괜히 쑥스러워진 예원이 엷은 미소를 짓자, 수진의 입가에도 덩달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지막 가는 길을 앞두고 유일하게 안심이자 위안이 될 때가, 바로 이럴 때였다.

“나중에 만나면 바가지 좀 박박 긁어. 그러게 왜 신혼 초부터 쓸데없이 드라마 같은 걸 찍고 그러냐고, 응?”

“……네. 그럴게요.”

“…….”

“그나저나, 어머님 뭐 하고 싶으신 거 없으세요? 민혁 씨 좀 덜 바빠지면 셋이서 같이 뭐라도 하게요.”

“하고 싶은 거?”

수진이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시간이 좀 필요한가 싶던 찰나, 그녀는 이미 생각해놓은 바가 있었던 듯 금방 답을 내놓았다.

“……바다. 바다에 가보고 싶네.”

“바다요?”

옳거니.

바다, 하면 또 이 홍예원이 빠질 수 없지.

“바다 좋죠! 안 그래도 신혼여행 갔을 때 바다가 너무 예쁘더라고요. 다음에 어머님이랑 같이 가면 되겠어요. 저랑 제주도 가요, 어머니.”

“제주도?”

“네.”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 듯, 예원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회도 먹고, 갈매기도 구경하고, 바닷물에 발도 담가보고. 제가 제주도 관광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책임질게요!”

“……정말?”

“그럼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민혁 씨는 짐꾼 겸 운전기사 하라고 하고, 어머님은 저랑 같이 재밌게 놀다 오시는 거예요. 아셨죠?”

“……그래, 그래. 기대하고 있어야겠다.”

살가운 것 같으면서도 무기력한 대답이 다시 한 번 마음을 콕콕 찔러왔지만, 예원은 애써 명랑하게 웃었다.

이렇게 힘든 때일수록, 그녀에겐 오로지 밝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근데 그나저나, 아까부터 어디서 전화 오는 것 같지 않니?”

“전화요?”

수진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모르고 있었다.

“어, 진짜네.”

가방 안에 있는 폰이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예원은 깜짝 놀라 폰을 집어 들었다.

한데, 액정에 뜬 저장명을 본 예원의 눈빛은 일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여보세요. ……네, 어머니.”

그렇게 잠시 후.

“……네? 지금이요?”

예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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