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카푸치노와 키스의 상관관계
2018.08.14.
“……!”
잠기운으로 인해 몽롱했던 그의 눈빛이 일순 선명해졌다.
멀쩡했던 포옹신이 하루아침에 키스신으로 둔갑하다니!
달리 왜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성환은 그 이유를 줄줄 설명했다.
“박 작가가 싫다고 하는 걸 장 감독이 부득불 설득했대. 초장에 그런 씬 하나는 나와 줘야 게임이 된다고. 하기사, 초반 눈길 끌기론 그런 게 최고 아니겠냐. 포옹은 좀 미지근하긴 하잖아. 반응도 저조하고.”
……그래. 시청률에 눈먼 인간들을 그라고 어찌 모를까.
유명 작가가 집필한 만큼 전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각본이었지만, 막상 촬영을 시작하고 나면 거기에도 일부 ‘칼질’이 들어갈 거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그였다.
그뿐인가. 자극적인 요소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야 더 큰 반향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거기엔 주연배우인 그조차 차마 토를 달 수 없다는 것도, 드라마 판에서 수년간 혹독하게 구른 경험으로 인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무런 상의도 없이 씬을 바꿔치기한 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 보고 연기하는 것도 아직 어려워 죽겠는 판국에 갑자기 키스신 연기를 하라니?
덥석 받아든 소식이 기실 재앙과 다를 바가 없어서, 그는 매끈하게 빠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하아.”
젠장.
순식간에 담배 생각이 절실해졌다. 나쁘다는 걸 잘 알면서도 도저히 끊을 수가 없는 건 모두 다 이런 일들 때문이었다.
스트레스는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 곪아버리고 만다. 차라리 담배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때그때 털어 없애버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민혁은 당연한 버릇처럼 품안에서 담배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순간 멈칫했다.
그 날, 그 여자가 남겼던 말이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 그의 귓가를 울린 탓이었다.
‘실은, 저 담배 피우는 사람 싫어해요.’
어떻게 알았을까. 담배를 피운다 말한 적도 없고, 피우는 티를 낸 적도 없었다.
실제로 그가 흡연자임을 아는 사람은 재하 같은 절친한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 정도로 철저히 숨겨온 사실인데. 그 여잔 그걸 일찌감치 눈치 채고 있었단 거였다.
쥐도 새도 모르게.
둔하고 굼뜬 것 같으면서도, 또 그만한 여우가 따로 없다.
정말 알면 알수록 신기한 여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민혁은 담배를 꺼내려던 맘을 고이 접는 대신 조명을 켜면서 차 한편에 있던 작은 유리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얀 사탕들이 소담하게 담긴 병이었다.
성환은 역시나 매의 눈으로 그것을 재깍 포착했다.
“웬 거냐? 사탕이야?”
“어. 형도 먹을래?”
“됐다. 이 시간에 그런 거 먹다 이나 썩지. 너나 많이 드세요.”
피식 웃은 민혁이 사탕 하나를 꺼내 입안으로 톡 넣었다. 겉에 묻어있던 하얀 가루가 곧바로 사르르 녹아들며 혀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초콜릿과 카라멜은 이미 모두 그의 입안으로 사라진 지 오래고, 그나마 남은 게 이 사탕이었다.
그 여자가 손수 빚었다는 이 달콤한 것들은 만든 이의 말마따나, 담배만큼은 아니라도 기분 전환에 썩 효과가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꽤나 괜찮았다. 이만하면 담배도 꼭 필요하진 않겠다,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딱 적당하다 싶은 단맛이 그로 하여금 달아났던 기운을 솟아내게 했다.
“근데 어디서 났냐? 네가 설마 그런 걸 샀을 리는 없고, 뭐야.”
“……받았어.”
“받아? 누구한테?”
“…….”
“……아.”
단번에 눈치를 깐 성환은 멋쩍은 탄식과 함께 민혁을 괜히 한 번 흘겼다.
허허, 그럼 그렇지. 물은 내가 바보였다.
“아주 지극정성이고만. 내가 살다 살다 참 별 일을 다 본다. 좋냐?”
민혁은 시선을 내리깐 채, 대답 없이 살짝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에 성환의 눈길이 잠시 머물렀다.
‘……자식, 제대로 빠졌나 보네, 아주.’
험난했던 길을 돌고 돌아, 생채기만 가득했던 저 녀석에게 이제야 봄날이 찾아든 모양이다.
지금 시점에선 어쩌면, 조혜인과의 키스신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진짜 임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그깟 조혜인쯤이야 뭐가 문제라고.
“……보기 좋네. 달달~하니.”
“…….”
“잘해 줘, 인마. 예원 씨 같은 사람이 어딨냐.”
사탕을 굴리는 데만 열중하고 있던 민혁의 움직임이 그 한 마디에 우뚝 멈추었다.
[잘해 줘. 그런 사람 없어.]
성환으로선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겠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결코 아무렇지 않은 말이 될 수 없었다.
굳이 짚어주지 않아도 그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홍예원이 정말 착하고 좋은 여자라는 걸.
여자로서 매력적이기 이전에, 사람 대 사람으로서 참 끌리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래서일까. 그는 요즘, 뭔가가 조금씩 걸리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감정과 애정 따위는 없이, 오직 대가와 조건으로 점철된 이 계약결혼이.
또, 자꾸만 사랑스럽게 보이곤 하는……
그 여자가.
“…….”
어느 새 키스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진 그는 쌀알처럼 작아진 사탕을 혀로 어르며 생각에 잠겼다.
바로 내일, 여자가 예고한 대망의 첫 수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다음 날, 카페 에덴.
항상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만 흐르던 그 곳에서는 모처럼 예원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너 어디야? ……뭐? ……참내, 집 같은 소리하고 있네. 차 소리 다 들리거든? 이게 어디서 누나한테 거짓말을 쳐? 너 진짜 혼나고 싶냐? 누나가 이 나이 먹고 너랑 진지한 대화를 해야겠어, 엉?”
엄격한 누나의 얼굴을 한 예원은 근엄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원을 꾸짖고 있었다.
통화에 한창 열중하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마침내 그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 왔어요?’
반갑다는 듯 입모양을 만들어 보이다가도 금세 또 인상을 찌푸린다.
“이 시간에 집도 안 가고 대체 뭐하냐고! ……아, 몰라. 시끄럽게 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 이모 걱정한단 말이야. 알았어. 들어가면 연락해. 어.”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민혁은 짐짓 모른 척 말을 붙였다.
“동생한테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뇨. 그냥 애가 아직도 집에 안 들어갔다 그래서요. 잠깐 혼 좀 내느라.”
“……처남은, 잘 지내요?”
넌지시 던져진 질문에, 예원의 얼굴에는 금세 불만스러운 빛이 띠었다.
“몰라요. 요즘은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가끔은 전화도 씹고, 카톡도 씹고. 고3이라고 우쭈쭈 해줬더니 버릇 나빠졌나 봐요. 이럴 줄 알았음 늘 하던 대로 하는 건데.”
“…….”
“……근데, 요즘 좀 이상하긴 해요. 뭔가 되게 열심히 하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딱히 공부는 아닌 것 같고. 통 뭔지를 모르겠다니까요…….”
졸지에 민혁은 살짝 뜨끔했다.
같이 사는 것도 아닌 터라 전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자는 그새 어딘가 수상한 점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지레 제발이 저린 민혁은 은근슬쩍 지원을 두둔하고 나섰다.
“……공부 잘하는 애라면서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요. 알아서 잘하겠죠.”
“그래도, 이제 거의 다 왔는데 막판에 그르치면 어떡해요. 혹시나 딴 맘 안 먹게 신경 써야죠. 안 그럼 지금껏 공부한 보람이 없잖아요.”
든든한 후원자도 생겼는데.
일부러 저에게 눈짓하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 여자에게, 그는 차마 뭐라 입을 열 수 없었다.
공부로든 뭐로든, 어떻게든 성공만 시키면 된다고 생각해 아이의 진짜 적성을 찾아주려 했다.
그런데 그녀는 지원의 완벽한 적성이 오로지 ‘공부’일 거라 매우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이 여잔 제 동생에게 다른 쪽으로 후원할 일이 생겼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리라.
제대로 된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비밀을 지켜주기로 약속한 그였기에, 할 말이 없어진 민혁은 결국 먼저 화제를 돌리고 나섰다.
“그건 그렇고, 오늘 가르쳐준다는 건 대체 뭡니까?”
다행히 예원은 그의 속셈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 했다.
대신 예의 가자미눈을 한 채 그를 째려보았다.
“쳇, 성격도 급하시네. 지각까지 하신 분이 다짜고짜 그렇게 물으실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지금이 대체 몇 신 줄이나 아세요?”
“……미안합니다.”
촬영이 끝나는 대로 최대한 발걸음을 재촉한다고 했건만, 약속시간인 11시는 턱없이 넘겨버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혹시 또 뿔이 나 있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달려온 그였지만, 여자는 생각 외로 금방 표정을 풀고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뭐…… 괜찮아요. 자고로 밤은 긴 법이니까. 아직 시간 많은데요, 뭐.”
“…….”
“……그럼, 어디 한 번 기초부터 시작해 볼까요?”
은아의 것을 닮아있는 것도 같은, 어딘가 사악하게 느껴지는 미소.
혼이 나지 않았다는 것에 그저 안도한 민혁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다가올 전쟁의 서막이었다는 것을.
* * *
얼마쯤의 시간이 지났을까.
민혁의 시선이 슬쩍 사무실 쪽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분명 한 시간 정도 지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계는 고작 30분 정도만이 지났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장 기본이 에스프레소. 즉 ‘샷’이라고 하는 거고요. 짧게 뽑은 게 리스트레토, 길게 뽑은 게 룽고예요. 사장님처럼 좀 연한 걸 좋아하는 타입이다 싶으면 에스프레소보단 리스트레토를 달라고 하는 게 맞다는 거죠. 오케이?”
“…….”
“보시다시피 우리는 ‘라마르조꼬’라는 브랜드의 머신을 쓰고 있고요. 뭐, 나름 커피머신계의 명품이에요. 좋은 머신은 거의 차 한 대 값에 육박하기도 하거든요. 일부 카페에서는 어쭙잖은 머신 대신 모카포트 같은 걸로 차별화를 꽤하기도 하는데. 그건 특색 있는 대신에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퀄리티가 일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단점들이 존재하기도 하죠. 여기까진 이해하셨죠?”
미처 몰랐는데, 홍예원은 정말 열정적인 강사였다.
살짝 눈이 풀린 그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예원은 거침없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여기 원두 담겨 있는 게 그라인더. 원두 갈아주는 기계고요. 여기 머신에 달려있는 게 ‘포터필터’라는 건데, 여기에다가 원두가루를 담아서, 탬핑하고…… 이렇게 장착해서 딱! 추출하는 거예요.”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약 5초쯤 뒤에 가느다란 커피 줄기가 샷 잔으로 아름답게 떨어졌다.
볼에 바람을 넣은 그는 그 모습을 권태롭게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었다.
커피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흥미로웠을 이야기들과 광경이었지만, 아쉽게도 현민혁은 결코 그런 사람이 못 된다는 게 문제였다.
“방금 말한 게…… 포터, 뭐라고요?”
“포터필터요.”
“……아, 포터필터.”
무슨 해리포터도 아니고.
저도 모르게 읊조린 혼잣말이었으나, 교육을 한답시고 신경을 한껏 곤두세우고 있는 그녀가 그런 말을 못 캐치할 리 없었다.
“사장님.”
“예?”
“지금 집중 안 하고 계시죠.”
“……아뇨?”
들킨 나머지 흠칫 눈을 크게 뜨는 그를, 예원은 말없이 쏘아보았다.
“거짓말 마세요. 금방이라도 졸려죽겠다는 것처럼 동태눈깔을 하구선…….”
아. 그는 애써 민망함을 감추며 대답했다.
“……아니, 용어 같은 게 좀…… 어렵게 느껴져서. 실례했으면 미안해요.”
그를 넌지시 올려다보던 예원이 느슨하게 팔짱을 꼈다.
문득 아주 먼 옛날, 지원의 과외선생을 해주던 지영의 말이 생각이 났다.
‘공부에 흥미 없는 애한테 처음부터 어려운 걸 가르치려고 하면 안 돼. 무조건 쉽게, 재미있게. 눈높이교육을 해줘야 한다고. 그래야 조금씩 알아듣고 스펀지처럼 쑥쑥 빨아들이지.’
……아, 그래. 맘이 급해서 1절도 제대로 안 하고 2절 3절로 건너 뛰어버렸구나, 내가.
예원은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았다.
“흐음,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죄송해요. 제가 첫날부터 너무 스파르타로 달리려고 한 것 같아요. 그럼 오늘은 첫 날이니까, 쉬엄쉬엄하면서 진행해볼게요. 됐죠?”
“……그래주면 고맙고요.”
그가 비로소 안도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가만 있자. 흥미 위주의 교육이라면 뭐가 있을까…….’
잠시 생각하던 예원은 어느 순간 번쩍 눈을 떴다.
그래, 그거라면…….
“사장님. 혹시, ‘라떼아트’라고 들어보셨어요?”
“네. 근데 정확히 어떤 건지는 잘 모르는데.”
후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예원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스륵 말려 올라갔다.
“그럼, 제가 지금부터 보여드릴게요. 그게 어떤 건지.”
당신에게 내가, 이제부터 신세계를 보여주지.
야심차게 말을 마친 예원은 먼저 능숙한 손놀림으로 에스프레소 샷을 뽑았다. 카푸치노잔 두 개로 각각 황금색의 샷이 또로록 떨어졌다.
그 다음은 우유 데우기였다. 우유를 담은 은색 피쳐(우유를 데우는 용기)를 손에 잡은 예원은 머신 옆에 달린 봉을 그 안에 넣더니, 칙칙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운 거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피쳐를 바닥에 내려놓고 탁탁 치자, 큰 기포들이 사라지며 금세 벨벳처럼 매끈해지는 우유가 보였다.
알맞게 데워진 그것은 이내 그녀의 유려한 손놀림에 의해 천천히 샷 속으로 섞여들었다.
양이 반쯤 채워지고 난 후, 피쳐의 주둥이는 그녀의 붓이 되었다.
우유 줄기가 하얀 선으로 변모해 커피잔 위를 빼곡히 메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와.”
그 일련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민혁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저 손목만 몇 번 움직인 것 같은데, 결이 세세하게 나 있는 정교한 하트가 그의 눈앞에 뚝딱 완성돼 있었다.
하나를 완성한 그녀는 바로 다른 하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건 또 만드는 방식이 다른지, 이번엔 거품을 막고 우유만 흘려 넣더니 커다란 숟가락 같은 걸로 우유거품을 떠 올린 뒤 시나몬 파우더를 뿌려냈다.
눈 깜짝할 새, 완벽하게 제조된 두 가지 카푸치노가 그들의 앞에 자리했다.
“이렇게 아트로 그려서, 거품을 촉촉하게 해서 나가는 건 웻 카푸치노고요. 이렇게 상대적으로 거친 거품을 얹어나가는 게 드라이 카푸치노예요. 방식만 약간 달라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각각의 잔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특히 오른편의 드라이 카푸치노 쪽을 강조했다.
“사장님은 아마 이쪽이 익숙하실 걸요. 그, 현빈 나오는 드라마 보셨죠? 거기서 나온 게 이 드라이 카푸치노예요. 여자들이 입술에 거품 묻히고 그러는 커피.”
“……아아.”
“이것부터 한 번 드셔보세요.”
예쁜 하트가 그려진 웻 카푸치노가 선뜻 그에게 내밀어졌다.
모양이 예뻐서 그런가, 보기엔 무척 달콤하고 맛있을 것 같았다.
잠깐 주저하던 민혁은 마지못해 그를 받아들었지만, 이내 인상을 써야만 했다.
“……이거, 너무 쓴데.”
그 꼴을 보고 있던 예원이 푸흡 웃었다.
“당연히 쓰죠, 그럼. 시럽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들어갔는데. 게다가 카푸치노는 거품이 많은 대신 우유가 적게 들어가서 더 진하다고요.”
금세 웃음기를 거둔 그녀는 진지하게 덧붙였다.
“근데,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기분 좋은 단맛이 느껴져요. 우유가 갖고 있는 고유의 단맛이라고나 할까. 다시 한 번 드셔보세요.”
“…….”
민혁은 속는 셈치고 미적미적 한 모금을 더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그 맛을 음미했다.
그러고 나자, 그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오, 그러네.”
과연, 무지막지한 쓴맛의 뒤로 묵직하면서 세지 않은 단맛이 올라왔다.
“원래 처음엔 라떼나 카푸치노 같은 걸로 조금씩 커피의 맛에 대해서 알아가는 거예요. 처음부터 에스프레소 같은 걸로 시작하면 쓰다고 질색하고 절대 안 마시게 되거든요.”
“……그렇구나.”
항상 어딘가 헐랭하다 싶던 여자는 머신 앞에 서자 또다시 프로페셔널한 바리스타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선사하는 커피 한 잔의 마법이, 그는 신기하고 또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 라떼아트라는 거…… 한 번만 더 보여주면 안 돼요?”
“네? 왜요?”
“……그냥, 보고 싶어서.”
참내, 이게 그렇게도 신기한가.
“뭐, 좋아요. 원하신다면.”
그녀는 새로 샷을 뽑아서, 이번엔 라떼를 만들어주었다.
아트의 모양도 조금 달랐다. 큰 하트 안에 쏙 들어가 있는 작은 하트를 보며 그는 다시금 감탄했다.
“이야…….”
급기야, 피쳐를 들어 그녀의 손목스냅을 살짝 흉내내보기까지.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은 예원은 겸손하게 설명했다.
“사실 이 정돈 진짜 기본이에요. 이걸로 튤립도 그리고, 백조도 그리고. 대회 같은 데선 인디언 같은 것도 그리고. 라떼아트의 세계는 진짜 무궁무진하거든요.”
민혁의 고개가 수긍한다는 듯 끄덕여졌다.
“근데, 이거 할 때 무슨 생각해요?”
“……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리길래 이렇게 되는지, 궁금해서.”
이건 뭐, 김연아더러 점프할 때 뭔 생각하냐고 물어보는 것 같잖아.
뜬금없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귀여운 질문이라서, 그녀는 픽 웃고 말았다.
“글쎄요.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생각 같은 걸 할 여유는 없는데. 그냥 연습하다 보니까 저절로 나오는 거예요.”
“…….”
“뭐, 대신…… 커피를 만들 때마다 늘 하는 생각은 하나 있죠.”
예원이 무의식적으로 머신 윗부분을 척 짚었다.
어느 새 한껏 진지한 표정이 된 여자의 옆모습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머신 앞에 서 있을 때, 전 항상 최대치로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안 좋은 일이 있어도, 혹여나 진상손님을 만나도…… 내가 만드는 음료나 커피엔 최대한 내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하고, 최대한 웃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뭐 자기암시 같은 걸 수도 있지만…… 그래야지, 커피도 한층 더 맛있어지는 것 같거든요. 왠지 모르게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입가엔 뭔가 형용할 수 없는 자부심 같은 게 담겨있는 듯했다.
잠시 할 말을 잃은 그는 한 쪽 팔을 바에 기댄 채, 그 모습을 계속해서 홀린 듯 쳐다보았다.
저만의 소신을 이야기하는 여자의 모습은, 평소보다 유독 반짝반짝거렸다.
“내가 만든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잔 하나를 단숨에 싹 비워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내가 행복하게 만든 커피니까, 이 커피를 마신 손님도…… 나만큼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
“뭐, 그런 생각들을 해요. 별 거 없죠?”
그렇게 씩 웃어보인 여자는 예쁘게 봉긋 솟아올라 있는 드라이 카푸치노를 한 입 머금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두툼한 거품이 여자의 입술위로 얹혀 있었다.
분홍색의 혀가 윗입술을 살그머니 훑고 지나갔지만, 거기엔 여전한 우유 거품의 궤적이 남았다.
순간 그는 이상하게도, 그것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묻었어요.”
“네?”
“……거품이요.”
머리보다 행동이 먼저 튀어나갔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의 윗입술 언저리를 닦아낸 것이었다.
우유거품이 묻은 그의 엄지는 미처 떼어지지 못한 채 그녀의 볼 근처를 배회했다.
이윽고, 그의 손바닥이 사과 같은 볼을 살짝 감싸 쥐었다.
“……?”
예원은 급격히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걸로 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눈을 내리깐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서서히, 서서히. 두 사람의 사이의 간격이 좁혀지고 있었다.
“…….”
그렇게 잠시.
민혁이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것은, 그녀로부터 불과 채 몇 센티미터가 남아있지 않은 시점에서였다.
‘……!’
그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바로 입술이 닿을 수 있는 거리.
일을 저질러놓은 건 그 장본인이면서도, 민혁은 오히려 예원보다도 더 당황스러운 얼굴로 변해있었다.
‘……어, 어떡하지?’
심장이 쿵쾅쿵쾅 맥동했다. 순전히 본능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든 얼른 수습해야 한다. 그는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먼저 접근을 한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요며칠 한창 촬영이 있었으니, 키스신을 연습해본 거라고 할까?
그래, 그게 제일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가 가진 배우라는 직업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고 있는 여자니까. 그 정도쯤이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을 테고.
결국, 결심한 그는 머뭇머뭇 입술을 떼어냈다.
“어, 이건…….”
그때였다.
─촉.
그가 입을 열기 무섭게, 물기어린 마찰음이 그들 사이로 메아리처럼 퍼졌다.
여자의 보드라운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덥석 베어 물고 떨어진 것이었다. 마치 선수를 치기라도 한 것처럼.
“……!!!”
순간 뇌가 정지하는 느낌이 들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민혁은 그 자세 그대로 동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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