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빌어먹을 키스신
2018.08.10.
한가로운 오전의 소속사 사무실.
까딱, 까딱. 민혁의 신발코가 무료하게 들썩거렸다.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 있는 그의 휴대폰 안에선, 제주도 바닷가를 배경으로 선 예원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요사이 따분해지거나 심심해질 때면 저도 모르게 들여다보곤 했던 사진.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여자의 얼굴을 살짝 확대했고, 그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이 여자, 보면 볼수록 웃는 모습 하나는 참 예쁘단 말이야.’
항상 이렇게 활짝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드라마에 카페 배경이 자주 등장하는 만큼, 기왕이면 민혁 씨 카페를 촬영장소로 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최근에 민혁 씨 결혼 덕분에 카페 인지도도 상당히 높아졌고, 아예 처음부터 화제성 노리고 상부상조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아, 예. 거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죠? 어때요, 민혁 씨 생각은?”
“…….”
“민혁 씨. 제 얘기 듣고 있습니까?”
“…….”
“민혁 씨?”
“……야!”
옆에 있던 장 대표에게 옆구리를 쿡 찔리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아, 예. 죄송하지만, 뭐라고 하셨죠?”
물에 빠뜨린 솜사탕마냥 잔뜩 풀어진 눈.
그의 얼굴을 확인한 관계자는 넉살좋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사람 무안하게. 집에 있는 와이프 생각이라도 한 겁니까?”
민혁의 눈동자에 일순 당황이 떠올랐다.
“……네?”
지레 놀란 그가 반문하자, 재빨리 그의 눈치를 살핀 장 대표는 얼른 실드에 나섰다.
“하하하, 이 자식이 하여튼. 너그럽게 이해해주십쇼. 아직 신혼이지 않습니까.”
“아유 그럼요, 이해하죠. 아! 그러고 보니 현민혁 씨 부인이 그 카페 점장이시라고 들은 것 같은데. 부부가 같이 카페 운영이라…… 멋있네요.”
“……감사합니다.”
그렇잖아도 결혼 이후 이런 말을 종종 듣곤 하는 그였다.
살짝 고개를 까딱인 민혁이 어색하게 입가를 올리자, 금세 장난스러운 얼굴이 된 스태프는 괜스레 놀리듯 말했다.
“후후후, 결혼이 좋기는 좋은가 봅니다. 통 안 그러던 사람이 내내 그렇게 실실 웃고 다니고.”
……어라.
그 대목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웃었…… 다고요?”
마치 남의 이야기인양 묻는 표정.
“참나. 새삼스럽게 뭘 묻고 그래요, 요즘 내내 그러면서. 신부 얻어서 좋은 건 알겠지만 좀 적당히 티내요. 어디 마누라 없는 사람은 서러워 살겠나, 하하.”
거듭된 남자의 너스레에 민혁은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내가…… 웃었다고?
그것도 미친놈처럼 실실?
‘……그럴 리가.’
내가 어째서 그런 짓을?
“근데 하긴 뭐, 요즘은 팔불출들이 워낙 많아서. 민혁 씨 정도면 양반이죠.”
“…….”
“어쨌든 장소 섭외에는 동의하시는 거죠?”
뒤의 말은 그러려니 했으나, 앞의 말은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떨떠름해진 얼굴을 애써 숨긴 민혁은 나지막이 대꾸했다.
“……예, 아내와 한 번 얘기해보겠습니다.”
그때였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마침 부르르 진동한 것은.
“저, 잠시만 전화 좀.”
“아, 예.”
여유로운 척, 아무 일 없었던 척.
황급히 복도로 나간 그는 숨을 후, 한 번 내쉬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바쁘냐?]
“아니, 괜찮아.”
수신인은 다름 아닌 재하였다.
이놈의 전화가 이렇게 반갑기는 또 오랜만이네.
민혁은 그제야 안도한 표정을 했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들어선.
[다른 건 아니고, 너희 처남 말인데.]
“아, 그래. 얘기해봤냐?”
[어, 방금 구본(구 본부장) 만나고 왔어. 근데…….]
차근차근 재하의 이야기를 듣는 그의 표정이 점점 진지하게 변했다.
* * *
오전 손님들의 수다로 사방이 왁자지껄한 카페 에덴.
혜인이 앉은 테이블 위로 카페모카가 담긴 머그컵 하나가 턱, 놓였다.
“……여기, 드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모자 밑으로 가리어진 얼굴이 예원을 향해 상큼하게 웃었다.
언뜻 보기엔 고양이 같이 살짝 날카로운 인상인데, 웃을 땐 눈이 강아지처럼 휘어진다.
‘……얼굴 크기가 거의 유치원생급이네.’
뭐 TV로 볼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더욱 현실감이 안 느껴지는 여자였다.
“놀라셨죠? 말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살풋 웃은 혜인이 모카 한 모금을 들이키고는 감탄을 흘렸다.
“와, 여기 커피 진짜 맛있네요.”
“정말요?”
“네. 달달하고 부드러운 게 딱 제 스타일이에요.”
조혜인은 선천적으로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인 모양이었다. 몸매관리가 필수일 여배우가 저런 고칼로리 음료를 아무렇지 않게 홀짝홀짝 마시는 걸 보면.
가히 조물주의 은혜를 입은 것 같은 모습에다, 커피 취향마저 그 남자와 똑같은 것이 어째……
맘에 들지 않았다.
“……맘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저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저를……?”
“아, 실은. 부탁드릴 게 좀 있어서요.”
“부탁이요?”
“네.”
머그컵을 내려놓은 혜인이 설명했다.
“이번에 제가 민혁 씨랑 같이 드라마 들어가는 거 아시죠? 실은, 거기서 제가 바리스타 역할로 나오게 됐거든요.”
“……아, 그래요?”
“그래서 말인데요…….”
여자는 작심하고 온 듯 굳건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곧 있으면 촬영 시작인데, 제가 그쪽으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요. 하다못해 알바 같은 것도 안 해봐서 좀 어설프고요.”
“…….”
“초면에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렇긴 하지만, 홍예원 씨가 일도 많이 해보셨고, 점장까지 하고 계시고 하니까…… 절 좀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제가요?”
“네. 다른 건 필요 없고, 그냥 가끔씩만 촬영장에 놀러 와서 봐주시면 돼요. 아 맞다, 카페 씬 촬영장소도 여기로 컨펌될 것 같다던데……. 혹시 들으셨어요?”
……엥, 갑자기 무슨 촬영?
난데없는 도움 요청도 황당하긴 매한가지였지만, 드라마 촬영 건에 대해선 전혀 전해들은 바가 없었다.
“아뇨? 아직…….”
“아, 아직 논의 중이라 그런가 봐요. 민혁 씨가 곧 말씀드리겠죠.”
예원에게 예기치 못한 불씨를 두 개나 던져준 여자는 여유롭게 그리 말했다.
그런데 듣던 중, 유독 하나가 탁 걸렸다.
‘……민혁 씨.’
단순한 호칭일 텐데도 묘하게 친근해 보이는 말.
그 말에 예원은 왠지 모를 찌뿌드드한 감정이 마음 속 깊은 구석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만나게 된 조혜인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예쁘고, 상냥했지만.
어딘가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민혁 씨랑…… 많이 친한 사이신가 봐요.”
“아, 네. 옛날부터 여러모로 부딪칠 일이 많았거든요. 비슷한 때 데뷔하기도 했고, 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적도 있고요.”
“……그러시구나…….”
무늬만 아내인 제 입장에선 기분 나쁠 것도 없는 말. 그런데 희한하게 더럽고 찝찝한 기분이었다.
그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내던, 그 세연인가 뭔가 하는 여자를 만났을 때보다 더.
예원은 자꾸만 올라오는 이상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의식적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그렇게나 오래 만났으면 당연히 친하겠지.’
어차피 그 남잔 이 여자한테 이성적인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안 친하면 또 뭐 어때?
이 여자가 그 남자랑 친한 척을 하든 말든,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거잖아.
“피차 아무것도 모르고 힘들 때 만나서 그런가, 제가 평소에 참 많이 의지하고 좋아하는 오빠예요.”
“…….”
“워낙 가족 같아서, 키스신 같은 거 찍을 생각이라도 하면 닭살이 확 돋는다니까요, 호호.”
……하지만, 거기선 그녀도 어쩔 수 없이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키스……신이요?”
어머.
예원의 표정을 확인한 혜인은 제가 실수했음을 알아챈 듯 곧장 입을 가렸다.
“아, 죄송해요. 제가 예원 씨 앞에서 괜한 말을…….”
“…….”
“에이, 신경 쓰지 마세요. 키스신이라 해봤자 다 연기인데요, 뭐.”
“……그, 그렇죠.”
근데 난 왜 그 말이, 굳이 나더러 신경 팍팍 쓰라고 하는 말 같을까.
저도 모르게 삐딱해지려는 마음을 예원은 꾹꾹 눌렀다.
“아무튼 예원 씨가 제 커피 선생님 좀 돼주세요. 부탁드릴 분이 예원 씨 밖에 없어서.”
“…….”
“저, 가르쳐 주실 거죠?”
애써 억지미소를 짓고 있는 예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그컵을 든 혜인은 애교스럽게 생긋, 웃었다.
* * *
“홍지원. 밥도 안 먹고 여기서 뭐하냐?”
점심 시간.
여느 때처럼 기타를 품에 안은 채 멍하니 앉아있는 지원을 대식이 깨워냈다.
“……어. 아냐, 아무것도. 근데 웬일이냐.”
“그냥, 함 와봤다.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
씩 웃은 대식이 지원의 옆에 있는 의자에 퍼질러 앉았다.
“그나저나, 새 드러머는 쓸 만하냐? 그 여자애 말이야.”
민영은 결국 동아리원들의 만장일치를 통해 밴드부의 새 멤버로 결정되었다.
아직 영입 초반인 터라 손발이 완벽히 맞아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봐서는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보였다.
“어. 생각보다 꽤 실력이 있더라고.”
“다행이네. 안 그래도 박선웅이 그러던데. 걔 은근 다크호스라고.”
“다크호스?”
“어. 넌 못 봤냐? 드럼만 잘 치는 게 아니고 두루 할 줄 아는 게 많다던데. 키보드도 좀 하고, 베이스도 기본은 되고. 노래도 좀 한다던가?”
“그래?”
지원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실은, 머릿속이 복잡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들어오질 않는 탓이었다.
“근데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거 맞냐? 표정이 영 아닌데. 안 어울리게 왜 자꾸 한숨?”
귀신같은 놈.
지원은 할 수 없이 미적미적 이야기를 꺼냈다.
“저번에 본 오디션 말이야.”
“아, 참. 그거 어떻게 됐냐?”
“……망한 거 같다.”
“뭐? 왜?”
착잡해진 지원이 후,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랑 방향성이 너무 안 맞다나. 요즘은 남자 솔로가수 잘 안 먹힌다고……. 차라리 아이돌 쪽으로 먼저 나간다면 모를까.”
“흐음, 아이돌.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정재하도 그런 케이스였으니까……. 근데 너 춤 젬병이잖아. 거의 목각인형 수준 아니냐?”
“……그러니까 문제지.”
재하가 소속되어 있기도 한 아담 엔터테인먼트는 예전부터 지원이 꼭 들어가고 싶었던 기획사였다.
오디션에도 여러 번 참가해 보았지만 이상하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결국 본의 아니게 매형의 빽을 쓴 셈이었지만, 이번이야말로 절대 돌아오지 않을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는데.
“아. 아니면 차라리 다른 데 오디션을 더 보든가. 거기는 너랑 방향성이 맞을 수도 있잖아.”
“……아냐. 여기 아니면 안 돼.”
“왜? 정재하 때문에?”
“…….”
그럼 그렇지.
안 봐도 훤하다는 듯 대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딱하다 너도. 그놈의 정재하가 뭐라고…….”
“뭐, ‘놈’?”
하지만 지원은 곧바로 눈에 쌍심지를 켰다.
“네가 그분 친구냐? 이 자식이 내 앞에서 감히.”
정재하를 향한 불굴의 덕력.
그것은 늘 그렇듯 대식을 질리게 만들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하늘같은 정재하 ‘님’. 됐냐? 아오, 지긋지긋한 새끼.”
“…….”
“어쨌든 뭐, 그럼 할 수 없네. 너의 가치를 네 스스로 증명해내는 수밖엔.”
“……그걸 뭘로 증명하지?”
“글쎄.”
잠시 생각하던 대식은 이내 무릎을 탁, 쳤다.
“방송 출연 어때? ‘드림스타 코리아’.”
“뭐? ‘드림스타 코리아’?”
“그래. 느그 정재하님이 심사위원 하는 거 있잖아. 지금 예선 접수 받고 있던데, 너 나간다 그러면 그 소속사에서도 당연히 보지 않겠냐?”
“……나 보고 지금 오디션 프로를 나가라고?”
“그래! 뭐 그게 어렵냐? 소속사 사무실 가서 하는 거나, 거기 가서 하는 거나.”
하지만 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 난 별로야.”
“왜, 또.”
“그런 데선 무조건 고음자랑 필수잖아. 나 같은 저음이 무슨 오디션 프로를 나가냐. 저 밑바닥에서 타일 신세나 되기 딱 좋지.”
“그런가? 그래도 네 얼굴 정도면 백퍼 미남 참가자라고 띄워줄 것 같은데…….”
“…….”
“아! 아니면, 고음 되는 애랑 같이 팀으로 나가든지. 듀엣으로다가.”
“듀엣?”
“어. 혼자 나가는 것보다 부담도 덜할 테고. 한 번 찾아봐. 혹시 아냐? 누군가가 널 탑 텐까지 고이 모셔다줄지.”
바로 그때.
달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밴드부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씨. 뭐냐, 홍지원. 밥 안 먹어? 한참 찾았잖아.”
명지고 밴드부의 새로운 다크호스, 민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한참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던 지원과 대식은 짜기라도 한 듯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 왜. 왜 그렇게 쳐다봐?”
그리고 지원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유레카.’
찾았다, 내 듀엣. 내가 찾던 듀엣.
짧은 새 머릿속으로 후다닥 계산을 마친 지원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고민영,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 * *
[……그냥 난 질투가 나서 그랬던 거야.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민혁 씨 하나뿐이라고!]
[…….]
[내가 처음부터 다 설명할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네 설명 같은 거 더 이상 들어줄 생각 없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민혁 씨,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응? 그게 다가 아니라니까!]
[……꺼져.]
[민혁 씨, 제발!]
[내 말 안 들려? 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
.
“헉!”
동물의 반사적인 움직임처럼, 민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재껴진 의자 등받이에 기대있는 채였다.
바깥이 여전히 한겨울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타 있는 밴 안은 마치 열기구 안이라도 되는 양 후덥지근한 공기만이 가득했다.
땀에 젖은 셔츠가 무척이나 불쾌했다.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느슨하게 쥐고 있던 손아귀마저도 셔츠만큼이나 축축해져 있었다.
“…….”
젠장.
또, 그 꿈이다. 잊을 만 하면 찾아오는 개 같은 꿈.
꿈을 꾼 직후는 늘 지금처럼 기분이 더럽기가 짝이 없다.
그놈의 끈덕진 기억은 어쩌면 이렇게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그를 유치하게 괴롭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차안은 온통 어둡고 고요했다.
늦은 새벽 촬영을 끝낸 뒤 잠시 휴식을 취한다고 했던 것이 짧은 졸음으로 이어진 모양이었다.
‘내가 언제 잠에 들었었지.’
조용히 생각할 무렵, 운전석 쪽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왜. 또 꿈 꿨냐?”
폰을 보고 있던 듯한 성환이었다.
흐트러진 호흡을 삼켜낸 민혁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한동안 안 그러는 것 같더니 갑자기 또 왜 그러냐. 부담돼서 그러나?”
“…….”
“……뭐, 그럴 만도 하기는 한데…….”
성환이 혀를 차는 소리가 자그맣게 들려왔다.
성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정말로,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는 괜찮았었다.
이제야 드디어 그 악몽의 소굴에서 벗어난 건가 싶어 설레발을 치기까지 했었는데.
그 빌어먹을 꿈이 다시 빈번히 등장하기 시작한 건 공교롭게도 이 촬영을 시작한 직후부터였다.
정확히 말하면, 조혜인을 불가피하게 하루에 몇 시간씩 마주하고 나서부터.
그만큼이나 그 꿈의 원인을 잘 알고 있는 성환은 뒷좌석을 향해 고개를 꺾고는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많이 힘드냐? 장 감독한테 얘기해서 스케줄 좀 유연하게 조정해달라고 할까?”
“…….”
“너무 부담 갖지 마. 늘 하던 일이잖냐, 상대역만 조혜인일 뿐이지. 그냥, 예쁜 인형이 말하고 움직인다 생각하고 눈 딱 감고 해. 왜 인형 같다, 바비 같다 해대잖아. 다들.”
하긴, 유명해지기 전부터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비주얼로 이름 날리던 조혜인이었다.
연기력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그녀가 그렇게 쉽게 톱 여배우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데는, 그 인형 같은 외모가 팔 할 이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엄연한 사람을 인형취급 하기는 힘든 노릇이었다.
그것도, 한때 뜨겁다 못해 열렬한 감정을 공유했던 여자를 향해서라면.
민혁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다음 촬영은 몇 시래?”
이럴 때 제일의 특효약은, 몸과 정신을 다른 일에 몰아넣는 것.
그가 수년간 몸소 터득한 방법이었다.
조혜인과 맞붙는 장면이라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촬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이 드라마는 아직 초반부 신들 위주로 찍고 있어 혼자만의 연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네 시. 오늘은 그래도 좀 낫다, 야. 눈 붙일 시간도 있고.”
“……그러네. 좀 더 자야겠다.”
“그래. ……아, 참.”
말을 잇던 성환이 불현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근데 민혁아. 실은, 일이 하나 생겼다.”
‘일’이라니.
운을 떼는 것만 들어도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뭐. 뭔데.”
“……저, 그. 맨 처음 나누는 포옹신 있잖아. 너랑 조혜인이랑.”
“어. 그게 왜?”
“그거…….”
잠시 미적거리던 성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키스신으로 변경됐대. 3일 뒤에 촬영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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