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홍예원 씨, 매력 있어요
2018.08.07.
늦은 밤, 대리기사와 함께하는 귀갓길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뒷자리에 자리한 민혁과 예원은 양쪽 끝으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노곤한 몸을 문에 지탱하고 있었다.
창밖엔 눈이 보슬보슬 내렸다. 마치, 그때 그 크리스마스처럼.
하얀 눈송이들이 밤하늘에서 별가루처럼 흩어지는 모양을 지켜보던 예원은, 저와 똑같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슬쩍 훔쳐보았다.
갑자기 막심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오, 아깐 내가 왜 그랬을까. 죽어라, 홍예원. 죽어!’
자기, 자기 하던 때로부터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건만. 쑥스럽고 어색하기가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옆에 앉은 남자의 속내도 통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조용할까. 무어라 따져댈 법도 한데.
‘혹시, 기분 나빴나?’
그래.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는 동의를 구한답시고 조항을 들먹이기는 했지만…… 과연 그걸로 충분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하기야, 홧김에 충동적으로 벌인 일인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하여튼 그 모델인지 나부랭인지만 없었어도!
작게 한숨을 내뱉은 예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는 사이, 운전자만 다른 그의 차는 오늘도 재빠르게 집에 도착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바쁜 기색의 대리기사가 서둘러 떠나고, 집 앞엔 어느 새 두 사람만이 남았다.
‘으, 어색 터지네.’
춥기도 더럽게 춥고.
하지만 예원은 좀처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였다.
그때,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술,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까?”
“아, 네. 그럼요, 이 정돈 끄떡없어요.”
“…….”
“민혁…… 씨는요?”
“나도요.”
또 다시 어김없이 정적이 흘렀다.
“어서 들어가죠. 날도 추운데.”
“……네.”
그리 대답하면서도, 예원은 속으로 치열한 고민을 했다.
‘얘기해, 말아?’
인지상정대로라면 당연히 말해주는 게 옳다.
그런데, 어쩐지 주저되는 부분이 있었다.
괜히 남의 일에 참견하는 기분도 들고.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냐. 그래도 사람이 혹시 모르는 일인데, 미리 경고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일러바치는 거면 뭐 어때? 내가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그래, 말해주자.
예원은 끝내 결심했다.
“저기, 민혁 씨.”
“네?”
집으로 들어가려던 그가 다시금 예원에게 돌아섰다.
“그…… 아까 전에 박해준 씨, 김주성 씨랑 같이 있었던 여자요. 혹시…… 친하세요?”
“……세연이요?”
세연이?
생각보다 친근하게 들리는 호칭에 예원은 살짝 당황했다.
뭐야, 진짜 친한 사인가?
“어…… 네. 그 분.”
예원의 말을 곱씹던 그가 좀 의외라는 눈치로 대답했다.
“친하다기보단…… 그냥 비교적 잘 아는 사이죠. 예전에 광고모델을 같이 한 적이 있어서.”
“…….”
“근데 걔는 왜요?”
아, 그래도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닌 모양이지.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 여자 분, 별로 가까이 지내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왜요?”
잠시 망설이던 예원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그 분이 저한테 충고해주시더라고요. 하루빨리 사장님이랑 헤어지라고. 아니, 사장님 옆에서 떨어지라고.”
“……걔가요?”
“네. 아주 못마땅하게 도끼눈을 뜨고, 제가 무슨 연적이라도 되는 양…… 그러던데요.”
“……걔가?”
“그렇다니까요!”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한 그가 되물었고, 예원은 억울한 듯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지금 생각하니까 진짜 멍청한 여자네. 게이인 남자를 두고 그게 무슨 짓이람.’
어느 새 그녀는 은연중에 그를 게이라 확정짓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일들이 설명될 수 없으니까…….
“좀 이상하네요. 걔가 그럴 이유가 없는데.”
어쨌든, 이야기를 다 들은 남자는 석연찮은 얼굴을 했다.
“……모르죠. 혼자서 삽질하다가 그쪽한테서 큰 상처라도 입었었는지. 아님, 괜히 날 질투라도 했던지.”
누누이 생각하는 거지만, 이것이 진짜 결혼이 아니길 천만다행이다.
이런 식으로 머리 아플 일이 얼마나 많은지. 어휴.
“암튼 그 여자…… 뭔가 심상찮아요. 웬만하면 가까이하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앞으로 사장님의 안위를 위해서라도요.”
나름의 충고를 하는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
하지만, 민혁은 문득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본 예원의 인상은 절로 찡그려졌다.
“……왜 웃으세요?”
‘뭐야, 기껏 충고해줬더니.’
그녀가 속으로 꿍얼거리고 있을 때.
이내 웃음기를 거둔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홍예원 씨 지금, 나 걱정해주는 겁니까?”
“……네?”
걱정? 이게 걱정인가.
예원의 눈이 일순 동그래졌다.
아니다. 그럴 리가…….
‘게이 남자친구한테 차이고 질질 짜던 주제에 남 걱정은 무슨. 내가 무슨 정신으로 이 남자를 걱정해준다는 거야.’
내 앞가림부터 잘해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말해두고 싶었다. 기꺼이.
“……아니 뭐 그냥, 걱정 비슷한 거라고 해두죠. 원래 남자들은 그런 거 잘 모른단 말이에요. 바보 같이 여우짓에 당하기나 하고. 또…… 이상한 데 휘말리기나 하고.”
“…….”
“아무튼. 아셨죠?”
난 이 남자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그 여자가 맘에 안 드는 거니까.
‘그래서 말해두는 거야.’
그녀가 속으로 굳게 되뇌었다.
한데 그러는 사이, 남자의 입가에는 빙긋 미소가 걸렸다.
꼭, 그녀의 참견이 썩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이.
“……알았어요.”
“…….”
“참. 나도 말 나온 김에, 부탁 하나만 하죠.”
“뭔데요?”
한 템포 쉰 그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홍예원 씨가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는 사람이라는 건 내가 아는데. 그래도, 오늘처럼 괜히 홧김에 많이 마신다거나 그러지는 마요.”
“…….”
“부탁입니다.”
나직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멈칫하게 된 순간.
‘……부탁?’
그녀의 눈가엔 금세 장난기가 어렸다.
“왜…… 그러면 안 되는데요?”
“…….”
“설마, 지금 저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순전히 재미로 물은 말이었다.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기 위해.
하지만…….
“……네.”
그는 대답했다. 전혀 장난 같지 않은 얼굴로.
“맞아요.”
“…….”
“걱정하는 겁니다.”
흠칫한 예원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번 회식 때 일도 그렇고……. 다른 데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홍예원 씨가 웬만해선 술에 잘 취하지 않는 편이라니까 다행이지만, 그래도 간혹 정말 나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럴 때 그렇게 덥석덥석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안 돼요. 술도 술이지만, 혹시나 거기 누가 또 무슨 짓을 해놨을지 어떻게 알고요. 오늘은 그나마 내 옆이니까 그냥 놔둔 거고.”
“…….”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의 당부를 어색하게 듣고 있던 예원의 얼굴은 한순간 새치름해졌다.
흥, 생각보다 상상력이 뛰어난 남자네.
“……알겠어요. 다 맞는 말씀이시기는 한데…… 근데 솔직히 조금 오버하시는 것도 없잖아 있네요.”
“…….”
“제가 무슨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도 아니고……. 저한테 어떤 미친놈이 그런 짓을 하겠어요?”
하하하.
그녀가 다시 한 번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나 잠시 뒤 이어진 남자의 진중한 대답은, 그녀에게서 웃음기를 모조리 앗아갔다.
“모르죠. 사람 일인데.”
“…….”
“홍예원 씨, 매력 있어요.”
……그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강하고, 씩씩하고, 솔직하고. 또 가끔은 누구보다 마음 여리기도 하고.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매사에 열정적이고.”
조약돌이 던져진 호수처럼, 예원의 눈에 살짝 파문이 일었다.
“예원 씨 같은 사람 흔치 않아요. 매력 있어.”
“…….”
“본인 스스로는 그걸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지만.”
눈 오는 밤하늘. 차가운 공기.
그리고 배경음악처럼 들려오는 남자의 취기 어린 목소리.
그녀의 속눈썹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상하게도, 몸에 미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뭐야, 이거.’
이런 몽글몽글한 느낌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것이 대체 언제적이었던가.
그나마 떠오르는 기억은, 전민혁으로부터 ‘사귀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때도 아마 이런 기분을 느꼈었던 것 같다.
어딘가 간질간질하고, 척추 마디마디가 불편해지는 것 같은…….
아니, 어쩌면. 감흥은 그때가 상대적으로 덜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녀를 간지럽게 했던 이는, 몇 년간 매달려온 짝사랑 상대 전민혁이었으니까.
즉 손끝 하나만 스쳐도 그런 기분이 드는 게 지극히 정상이었단 얘기다.
그런데 지금.
별 생각이 없다 못해 재수 없다고까지 생각했던 ‘사장’ 현민혁에게서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건, 그녀로 하여금 뭔가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넌 게이한테만 반응하는 병에라도 걸린 거니. 별 일이야, 진짜.’
할 수 있는 거라곤 애꿎은 심장에다 대고 타박하는 것 뿐.
“……아, 알고 있거든요? 하긴, 나, 나 같은 여자가 어디 흔해야 말이지…….”
“…….”
“남 주기는 많이 아깝겠……죠.”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런 그녀의 자화자찬을 비웃긴커녕, 오히려 순순히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요. 알면 조심하라고요.”
‘……아, 뭐래, 진짜?’
파도처럼 밀려드는 이 쑥스러움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몸이 달은 예원은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아, 맞다! 저 사장님한테 드릴 거 있어요. 잠깐만요.”
그녀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뭔가를 쑥 빼내 그에게 건넸다.
높이는 낮지만 폭은 넓게 만들어진 선물상자.
갈색의 고급스러운 리본이 사방으로 둘러진 그것은 다른 장식 없이 심플한 모양새였다.
이게 갑자기 웬 걸까.
상자를 건네받은 민혁은 순간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뭐예요?”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네?”
샐쭉해진 그녀는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크리스마스날 생일이었던 거, 왜 말 안 해줬냐고요.”
살짝 놀란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떻게 알았어요?”
흠, 이거 좀 쑥스럽네.
예원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뭐, 네이버에 치니까 생일이니 혈액형이니 별자리니, 쫙 다 나오던데요. 별로 안 어려웠어요.”
“…….”
“좀 늦긴 했지만, 생일선물이에요. 생일선물 겸 뇌물.”
“…….”
“안…… 열어보세요?”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이다.
애초에 선물 같은 걸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금 머뭇거리던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것들을 본 순간,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그 안엔 네모난 모양의 초콜릿과 카라멜, 동글동글한 흰 사탕들이 각각의 칸에 담겨 일렬종대로 쭉 늘어서 있었다.
담음새가 오늘 여자의 행색만큼이나 가지런했다.
“맛있겠죠?”
목을 앞으로 쭉 뺀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설명했다.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초콜릿은 혹시나 녹을까 봐 많이는 못 만들었고요. 이건, 우리 가게 카라멜 마끼아또 베이스 제조법이랑 비슷하게 만든 카라멜. 그리고 이건, 제가 특별히 만든 수제 사탕이에요.”
“…….”
“생일에 뭘 줘야 하나 고민했는데, 단 거 좋아하는 사장님한텐 이런 게 제일일 것 같더라고요. 앞으론 담배 피우고 싶으실 때마다 취향껏 하나씩 골라 드세요. 그럼 훨씬 나을 거예요.”
갑자기 튀어나온 ‘담배’ 이야기에, 그가 의구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어딘가 탐탁지 않은 듯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실은, 저 담배 피우는 사람 싫어해요. 거의 혐오 수준이라고요. 물론 제가 이런 거 간섭할 입장은 아니란 거 아는데…… 그래도 담배는 백해무익이잖아요. 뭐 제 말 하나 때문에 진짜 끊으시리라는 기대는 안 하지만…….”
“…….”
“암튼 노력하시라는 의미에서 드리는 뇌물입니다. 이래도 별 효과 없거나, 끊을 맘이 안 드시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여자 특유의 톡 쏘는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덧붙여졌지만, 거기엔 은근한 걱정과 기대가 담겨있는 것이 같았다.
누군가에게서 이런 간섭을 받아본 것이 얼마만인지.
왠지 모르게 벅찬 감정이 들었다.
그것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서, 그는 그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익숙하지가 않았다. 이런 일은.
“……고마워요.”
눈치가 빠른 여자답게, 예원은 그런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아니에요. 이 정도 갖고 뭘.”
“…….”
“아참, 다음 주에 첫 수업 있는 거 아시죠? 이번엔 바쁘다고 해도 절대 안 봐드려요. 이미 여러 번 봐줬잖아요. 엄연히 계약 사항인데, 좀 지키자고요.”
“……알겠습니다.”
달콤한 과자들에게서 눈을 뗀 그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녹아버릴 듯 따스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 시선에 어느 새 정수리가 뜨거워지는 것 같아, 예원은 황급히 집을 가리켰다.
“……이제 얼른 들어가요. 집 놔두고 밖에서 이게 뭔 짓이야.”
“……네, 그래요.”
조금이라도 더 지체하다간 민망함에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은 순간.
그녀는 얼른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예원 씨.”
“……네?”
뒤편에서, 다시 닫은 상자를 옆구리에 낀 민혁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
“와줘서 고마웠어요.”
……뭐 그 정도쯤이야.
“……민혁씨도요.”
그녀의 대답에 담백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금세 그녀의 앞을 가로지르더니 먼저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갔다.
예원은 잠시 동안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깜빡하고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양치질 잘하란 소리를 빼먹었네.”
그게 핵심이었는데……. 이런 건 꼭 나중에서야 생각이 난다니까.
예원은 자신의 코트자락에 내려앉은 눈을 무의식적으로 탁탁 털어내며, 방금 전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뭐라도 준비해놓길 잘했다.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래도, 선물이 맘에 안 드는 건 아닌 모양이지.’
뭐, 선물한 보람은 있네.
가볍게 픽 웃고 만 예원은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지영이 부려준 마법은 이제 끝이 났다.
이젠 딴 세상의 이야기 대신, 그녀만의 따뜻한 침대가 예원을 맞아줄 차례였다.
* * *
월요일 아침, 카페 에덴.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는 뭔 그래서야. 그냥 그러고 끝냈지.”
주말 새 세연인가 뭔가 하는 여자와 예원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 들은 지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숨을 터뜨렸다.
“허, 별 웃기는 기집애가 다 있네. 하여간 언제나 나대는 건 듣보잡들이라니까.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
“에휴. 어쩌겠냐, 최고의 인기남이랑 결혼한 네가 잘못이지. 그냥 대충 너그럽게 이해해. 불쌍하잖아.”
“……어, 알아.”
안 그래도 그러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자꾸만 잊히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홍예원 씨가 겪고 있는 일들은, 뭐랄까……. 한여름 밤의 꿈같은 거예요. 원래대로라면 절대 겪을 수 없고 빠져들 수도 없는 허황된 꿈이요.’
꿈이라.
……내가 언제부터 꿈속에서 살고 있었더라.
“아무튼 그럼 조혜인은 안 왔나보네?”
“어, 안 보이더라고.”
“의외네. 조혜인 은근 그런 거 잘 챙기던데.”
“바쁜가 보지, 뭐. 아님 신랑 쪽이랑 별로 안 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예원에 반해, 지영은 뭔가 미심쩍은 듯했다.
“설마 진짜 민혁 씨 때문에 안 온 건가. 그런 거면 더더욱 이상한ㄷ…….”
그런데 그때, 지영의 말소리가 돌연 우뚝 멈추었다.
“뭐야. 왜 그래?”
의아해진 예원은 지영의 시선이 향한 곳을 좇았다.
그리고 덩달아 놀라고 말았다.
출입구 바로 앞에, 놀라울 만큼 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한 명 서 있었기에.
“안녕하세요. 혹시, 홍예원 씨 되시나요?”
……다름 아닌 그 여자였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