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총천연색의 향연
2018.06.22.
그 시각.
‘카페 에덴’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커피숍, ‘카페 빈’에서는 눈에 띄게 훤칠한 한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굿 이브닝.”
“……어머.”
‘카페 빈’의 젊은 사장, 최우진이었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그동안 별 일 없었죠?”
“그럼요. 언제나처럼 제가 잘~ 관리하고 있었죠, 하하. 공항에서 방금 막 오신 거예요?”
“네.”
“어휴, 피곤하시겠다. 바로 댁으로 가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여기 사정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카페 에덴’이 있는 오른편을 힐끗 쳐다보던 그가 넌지시 물었다.
“근데, 오늘 좀 바빴나 보네요?”
“아, 네. 주말인데다가 옆에 에덴도 쉬어서 그런가, 유독 좀 바빴던 것 같아요.”
“……에덴 오늘 쉬었어요?”
“네. 오늘만요.”
그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거긴 정기휴일을 제외하고는 웬만해선 쉬는 일이 잘 없는 곳인데, 웬일일까.
“갑자기 왜 쉰대요? 무슨 공사라도 하나?”
“아아, 그런 건 아니고요. 오늘 결혼식 있다고, 거기 가느라고 다들 쉬는 거라던데요?”
“결혼……식이요? 누구……?”
직원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 예전에 매니저였다가 최근에 점장 다신 분이요. 이름이, 홍…… 뭐랬던 것 같은데.”
순간, 우진의 눈이 잔뜩 커졌다.
“……홍예원 씨요?”
“아, 네. 그분이요. 3시 예식이라 그랬으니까, 지금쯤이면 아마 다 끝났을 거예요.”
말도 안 돼.
우진의 얼굴은 금세 딱딱하게 굳었고, 그런 그를 본 직원은 아리송한 표정을 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고작 4개월이었다. 그가 외국에 나가 있느라 자리를 비웠던 시간이.
그런데 그 짧은 새 그녀는 결혼을 결정하고 식까지 치렀다니!
그로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소식이었다.
“…….”
순식간에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머릿속.
어쨌거나, 그렇게까지 결혼을 급하게 결정했다면…… 신랑은 오래 알고 지냈다는 그 남자친구인 걸까.
“근데 신랑은…… 누구래요?”
“신랑이야 당연히 현민…… 아, 사장님은 모르시겠구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직원은 폭탄과도 같은 말을 던졌다.
“그분, 배우 현민혁이랑 결혼하셨어요. 몇 달 전에 에덴 사장이 현민혁으로 바뀌었거든요.”
“……네?”
“잠시만요.”
직원이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요리조리 조작하더니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보세요!”
거기엔 일부 모자이크 처리가 된 남녀의 어깨동무 사진과 함께, 최초로 보도되었던 민혁과 예원의 열애 기사가 띄워져 있었다.
우진은 그것을 무심결에 받아들고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이거,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군.’
아니, 어쩌면 기가 막힌 ‘인연’인 건가.
하. 그의 입가에 문득 실소가 걸렸다.
* *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와…….”
제주공항을 나온 예원은 자연스레 탄성을 터뜨렸다.
숨을 들이쉬자마자 폐부로 깊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공기.
비행기를 타는 내내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어쩐지 짭짤한 소금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고, 또 눈길을 조금 돌리자 열대지방에서나 볼 법한 나무들이 죽죽 늘어서 있고.
‘와, 저게 그 말로만 듣던 야자수인가? 진짜 신기하게 생겼네.’
역시 제주도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저런 걸 보니 정말 외국에라도 온 것 같…….
“그만 가죠. 늦었어요.”
지는 않네.
‘에이씨.’
남자의 싹수없는 한마디에, 그녀의 입가에선 금세 미소가 싹 사라졌다.
“……네.”
티 나지 않게 입술을 비죽이던 예원이 그를 따라 준비된 차량에 얌전히 올라탔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기사의 말과 함께 차가 부드럽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괜스레 엉덩이를 구르며 자리를 잡은 예원은 불현 듯 옆에 앉은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어쩐지 평소보다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남자.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조각처럼 잘 뻗은 콧날에 어슴푸레한 달빛이 간헐적으로 내려앉는 모양을 그녀는 홀린 듯 지켜보았다.
‘미안한데, 실례 좀 하죠.’
뜬금없는 말과 함께 덜컥 들이닥쳤던 입맞춤.
그 순간, 예원은 옆에 장식으로 놓여 있던 얼음조각처럼 얼어버리고 말았다.
대충 시늉만 하고 끝낼 줄 알았던 건 철저한 오산이었다.
그렇게 예원의 입술을 베어 문 그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그녀의 입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지켜보던 사람들마저도 깜짝 놀랐을 정도로.
비로소 입술이 떨어지고 난 뒤, 예원의 모습은 가히 볼만했다.
사과처럼 온통 발개진 얼굴에 놀람으로 굳어버린 입꼬리.
아까 전의 그녀는 누가 보아도 수줍은 새 신부 그 자체였던 것이다.
“…….”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얼굴이 또다시 자연스레 붉어진다.
예원은 저도 모르게 제 입술에 손을 뻗어 만지작거렸다.
아직까지도 그 감촉과 온기가 입술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기분 진짜 이상하네.’
그도 그럴 것이, 전민혁과는 그런 진한 키스를 나누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기껏 해봐야 귀여운 뽀뽀 정도? 그마저도 예원이 기습적으로 시도 해 본 몇 번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그건 원론적인 의미에서 ‘첫 키스’나 다름없는 거였는데.
그런 첫 키스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다니. 도저히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 남잔 어쩌자고 나한테 그런 짓을!’
평소 같았다면 당장 발끈하고 나섰겠지만, 그러고 나서 또 온갖 식순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차마 그럴 틈도 없었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은 기내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는 남자를 보며, 예원은 어둠 속에서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뭔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어 보였다.
* * *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그들은 곧 엄청난 규모의 리조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텔동과 풀빌라동으로 분리돼 있는 그곳에선 전체적으로 고풍스럽고 로맨틱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물론,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큼지막한 개인 수영장이 딸린 풀빌라 쪽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쪽입니다.”
대한민국에 이런 데가 다 있었다니. 정녕 별천지가 따로 없다.
심란한 와중에도 예원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객실 사이즈 자체가 어찌나 거대한지, 어림잡아 10인 가족 정도는 거뜬히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공손한 인사를 마친 직원이 자리를 뜨자, 남자는 그제야 예원을 돌아보았다.
“홍예원 씨.”
“……네, 네?”
지레 놀란 예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흠, 하고 입술을 다물던 그는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저쪽 방이 좀 더 커 보이니까, 예원 씬 저쪽 방 써요. 난 이쪽 방 쓸 테니까.”
“…….”
“낮에 청소하러 올 때 빼면, 우리가 부르지 않는 한은 아무도 여기에 얼씬 안 할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편하게 지내요.”
“…….”
“그럼, 난 이만 먼저 들어가 볼게요.”
……잠깐만. 저게 다야?
“저기, 사장님!”
예원에게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방으로 향하려던 그가 저를 슬쩍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왜요. 무슨 할 말 있습니까?”
“아, 그게…….”
이걸 이렇게 직접 물어야 하는 현실이 통탄스럽지만, 그녀로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실 말씀이…… 그게 전부인가요?”
예원의 물음에, 나른하게 내려앉아 있던 민혁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뭐가, 더 필요합니까?”
“……그야 당연히!”
후우. 릴렉스,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예원은 한 템포 쉰 뒤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까, 결혼식에서요. 오늘 그…… 그 ‘행동’에 관해서, 뭐라도 할 말이 있으실 거 아니에요?”
“…….”
“엄연히! 저랑 합의 안 된 거였잖아요…… 그건.”
그뿐이었으면 차라리 다행이게.
‘그건 내 첫 키스였다고, 인간아!’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씨.
예원이 조용히 씩씩거렸다.
“…….”
하지만, 정작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민혁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서로의 요청에 최우선으로 협조한다.’”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본인이 쓴 조항인데, 잊었습니까?”
“……네?”
예원의 눈이 얼떨떨하게 깜빡였다.
지금 여기서 갑자기 그게 왜 나와?
“그 상황에선 안 하고 뻐팅기는 게 더 이상해보였을 겁니다. 우리, 남들 눈엔 열렬히 사랑해서 초단기간에 결혼한 커플이에요. 일반적인 부부라면 그런 요청에 당황하거나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죠.”
“…….”
“물론 갑작스럽게 그랬던 건 미안하지만, 그래서 미리 양해도 구했잖아요.”
양해?
실례 좀 하죠, 가 언제부터 양해의 의미가 되었지?
예원은 기가 막혔다.
“다 끝난 얘기에 굳이 내가 따로 덧붙일 말이 있나 싶은데요. 그리고.”
그 특유의 무심하면서도 강렬한 눈빛이 예원에게로 향했다.
“어차피 다 연기인데, 그 한 번이 큰 문제라도 됩니까?”
“……뭐, 뭐라고요?”
저 남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 남자가 우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그땐 그 남자가 절대 잊지 못할 한 방이 필요한 타이밍이었어요. 난 내 임무에 충실하기로 했고,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
“이거면 설명이 됐습니까?”
언뜻 듣기엔 꽤 일리가 있는 말.
하지만 그녀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거라면 대충 시늉만 해도 되는 거였잖아요!”
“…….”
“그, 근데 왜…….”
왜 진짜 키스를 했냐고. 그것도 그렇게 찐하게!
“아님…….”
어쩌지. 물어볼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사장님 혹시,”
“…….”
“저 좋아하세요?”
아까부터 내내 속에만 맴돌고 있던 그 말을 바깥으로 토해내고야 말았다.
두근, 두근.
심장이 벌렁대기 시작했다. 마치 해선 안 되는 일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잠시 뒤, 그녀의 심장은 금세 푸시식 식어버렸다.
“…….”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남자의 입가에 돌연 피식, 웃음이 떠오른 것이었다.
“……왜 웃으세요?”
뭐야, 저 기분 나쁜 웃음은?
예원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아닙니다.”
금세 웃음을 지운 그는 예의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홍예원 씨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뒤엔, 꼭 이 말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난 게이인데.]
예원은 그것을 단박에 알아채고 입을 딱 벌렸다.
‘……아?’
일순 정수리가 용광로마냥 뜨거워졌다.
민망함과 부끄러움도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그럼, 정말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갯짓을 한 뒤 유유히 걸어가는 그를 예원은 그대로 선 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렇게 잠시 뒤.
그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예원은 곧바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허!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아오, 쪽팔려, 씨!
* * *
그 시각, 서울.
“짠!”
크으.
맥주를 시원스럽게 한 모금 들이켠 지영이 편의점 간이테이블 위로 캔을 탁 내려놓았다.
“아, 기분 이상하다. 홍예원이 시집을 가다니.”
“…….”
“어때. 지원이 넌 실감이 좀 나?”
“……아니요. 아직.”
결혼식이 끝난 후, 지영과 지원은 집에 가기 전 둘만의 조촐한 뒤풀이를 하는 중이었다.
물론 지영의 몫은 맥주, 지원의 몫은 캔커피였지만.
“시간 참 빠른 것 같아. 난 언제까지고 스무 살일 줄 알았는데, 이제 또 해 바뀌면 금방 스물여덟이고. 지원이 너도 이제 곧 열아홉이잖아. 벌써.”
“…….”
“그러고 보니까 너 대학생 될 날도 이제 진짜 머지않았네. 캬, 빠르다, 빨라.”
“……그러게요.”
이제야 그렇게 되었네요. 이제야.
그가 속으로 말의 끝을 맺었다.
지영에겐 어떨지 몰라도, 지원에게 있어 시간은 언제나 더디게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눈앞의 여자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될 날이 올는지.
생각 같아선 그녀의 시계를 잠시 멈추고, 제 시계만 몇 배속으로 빠르게 돌려보고픈 심정이었다.
“근데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옛날에 너 과외 끝나면, 나랑 너랑 예원이랑, 이렇게 셋이서 여기 앉아가지고 같이 얘기하면서 놀고 그랬잖아.”
“……아, 네.”
옛 생각을 떠올린 지영이 피식거렸다.
“그때 너 진짜 웃겼었는데. 나랑 예원이랑 맥주 마시고 있으니까 너도 끝끝내 그거 마시겠다고 고집부리고. 하다못해 커피라도 마시겠다고 우기는데 그게 얼마나 귀여웠는지 알아?”
“…….”
“아무것도 안 된다니까, 결국엔 다 포기하고 타협한 게 ‘커피우유’였지, 아마?”
지영은 문득, 왠지 모르게 씁쓸해 보이는 미소와 함께 캔 커피를 들이켜고 있는 지원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얘가 언제 이렇게 컸지, 정말.’
어릴 적, 또래 여자애들 못지않게 예쁘장했던 지원에게선 어느새 남자의 향기가 솔솔 풍겼다.
‘선생님, 선생님’ 하며 과외선생인 저를 학교 선생님만큼 깍듯하게 따르던 그 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보다 더 커진 키, 짙어진 눈빛, 진중한 목소리. 보다 남자다워지고 선이 굵어진 이목구비까지.
모든 것이 지영에겐 그저 낯설기만 했다.
“…….”
하지만, 달라진 그 또한 지원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하나뿐인 절친의 동생 홍지원.
그런 그에게 새삼 내외하게 되는 자신이 우스워서, 지영은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아무튼, 예원이 걘 그때도 자나 깨나 네 걱정뿐이었어. 그래도 네가 이만큼 잘 커줬고, 걔도 좋은 신랑 만나서 결혼했으니까. 이제 발 뻗고 편히 잘 일만 남았지, 뭐.”
“…….”
“그나저나 지원이 넌 앞으로 뭐하고 싶어? 넌 공부도 잘하니까, ‘사’짜 직업 뭐 그런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시종일관 조용히 있던 지원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누나.”
“응?”
“솔직히 말해도…… 돼요?”
지영과 눈을 맞춘 그가 천천히 덧붙였다.
“우리 누나는 당분간 좀 몰랐으면 좋겠는데.”
“……어?”
지원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살짝 얼떨떨하긴 했지만 지영은 얼른 대답했다.
“어어, 그럼. 예원이한텐 말 안 할게. 걱정 마.”
“…….”
“뭐……하고 싶은데?”
속으로 대답을 고르는 듯, 지원의 입매가 살짝 일자를 그렸다.
‘뭘 말하려고 쟤가 저렇게 뜸을 들이지.’
맥주를 들이켜는 지영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 * *
한편, 민혁이 일러준 방으로 들어온 예원은 아직 짐도 풀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뱃속에선 우렁찬 뱃고동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루 종일 특별히 먹은 게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러나 하찮은 식욕 같은 건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원래 사람이 창피를 당하면 있던 입맛도 뚝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내가 도대체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그 사람 눈에 난 어차피 예쁘장한 나무토막과 다를 바가 없을 거란 걸 알면서.
미쳤어……. 돌아도 제대로 돌았어, 홍예원!
“아이씨.”
하지만, 짜증스럽게 자신을 자책하던 예원은 곧바로 다른 생각에 이르렀다.
‘……아니지. 오해의 빌미를 먼저 제공한 건 그 남자잖아. 그러니까 누가 멋대로 그런 짓을 하래? 사람 오해하게 말이야.’
곰곰이 생각하고 있자니, 이번 일은 이렇게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는 판단이 슬그머니 들기 시작했다.
‘그래, 가만히 있다간 이런 일이 또 발생할지도 몰라.’
미리 확답을 받아야 해. 아니면 주의라도 줘야 한다고.
결심을 마친 예원은 지체 없이 튕겨져 일어나 뚜벅뚜벅 그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후우.”
하지만, 코앞까지 다다르자 다시 스르르 꼬리를 감추고 마는 자신감.
예원은 굳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딘가에서 듣기로 결혼생활에서 주도권을 먼저 쥐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던데.
이대로라면 주도권을 남자에게 완전히 뺏기게 될 것은 자명하다.
즉, 지금의 결단이 곧 앞으로의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위한 초석이나 다름없다는 것!
‘좋아. 다시 한 번 침착하게.’
예원은 문가에 대고 똑똑, 노크를 했다.
“저기요, 현민혁 씨.”
“…….”
“현민혁 씨?”
뭐야. 왜 대답이 없어?
그러고 보니 닫혀있는 줄 알았던 문도 살짝 열려 틈이 있었다.
혹시나 하고 밀자 적은 힘에도 스륵, 밀리는 문.
뭐지, 들어가도 되나?
‘에이, 노크했으니까 괜찮겠지 뭐.’
난 충분히 기척을 냈다고.
잠시 망설이던 예원은 문고리를 잡고 조심스레 밀었다.
그때였다.
“현민혁 씨…… 히익!”
그녀의 눈앞에 난데없이 펼쳐진 총천연색의 향연.
단언컨대 머리털 나고 처음 맞닥뜨린 광경에 예원의 눈은 단숨에 휘둥그레졌다.
‘저, 저 남잔 왜 벌써 자고 있는 거야……!?’
그것도,
호, 홀딱 벗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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