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12화 (12/102)

12화. 내가 도와줄게, 복수할 수 있도록

2018.05.15.

‘……이용당해 주겠다. 그날 밤처럼.’

그 말에 예원은 잠시 멍해졌다. 자연히 그 날 밤의 일이 떠올라서였다.

그 날 밤의 공기, 저를 품안으로 끌어당기던 남자,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던 전민혁의 얼굴까지도.

이상하게 마음이 숙연해졌다.

“남자친구가 홍예원 씨 몰래 바람 피웠다고 했죠. 이렇게 혼자 속상해할 거면서, 왜 가만히 놔뒀습니까? 머리채라도 뜯어놓고 오지.”

……그러게요. 왜 가만히 놔뒀을까.

그 상태 그대로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리던 예원은 잠시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실은요…….”

“…….”

“확, 고자로 만들어버릴까 했거든요.”

솔직히 말해 강세찬은 그녀의 제 1타깃이 아니었다.

그놈이 누굴 좋아하건 말건 나쁜 놈이건 말건. 그딴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전민혁’이 그녀를 배신했다는 사실. 그거 하나뿐이었다.

“근데요.”

“…….”

“너무…… 불쌍하더라구요, 걔가.”

이렇게 당신에게 진짜 이유를 설명하지도 못할 만큼,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도 없는 비밀을 품고 있는 그 애가 불쌍해서.

이제껏 내가 마음 다 바쳐 사랑했던, 그래도 날 많이 아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던 그 애가…… 가여워서.

……차마 아무 짓도 할 수가 없었던 거였다.

입술을 꾹 다문 예원의 눈엔 어느샌가 눈물이 핑 돌았다.

“홍예원 씨.”

“…….”

“……설마 웁니까, 지금?”

반면 그 내막을 전혀 모르는 민혁은 그런 그녀가 그저 어이없게 느껴졌다.

불쌍하긴 개뿔이. 이게 지금 일방적으로 차인 여자의 태도인가?

“……그렇게 안 봤는데, 홍예원 씨 참 동정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네요. 맘이 아주 태평양이네.”

“…….”

“지금 불쌍하게 여겨져야 할 사람은 그쪽이 아니라 당신이에요. 복수 같은 건 꿈에도 안 꿔본 겁니까? 그만큼 좋아했어요?”

‘네, 좋아했어요. 다시 한 번 그렇게 해보라고 하면 절대로 못할 만큼, 그렇게 좋아했어요.’

차마 입 밖으론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예원은 담담히 속으로 삼켰다.

“전 이제 결혼 같은 거 안 할 거예요. 이대로 죽을 때까지 혼자, 호호할머니로 살 거라고요.”

평소엔 바락바락 당당하다가도, 유독 그 남자에 한해선 병아리만도 못하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여자.

‘……미련하기는.’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또한 짜증도 일었다.

물론 그 이유는 단순했다.

‘나도 그때, 저렇게 한심해 보였으려나.’

어리석은 여자의 모습 위로,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지난날 자신의 모습이 마치 환영처럼 겹쳐 보였으므로.

“부럽네요. 고작 스물일곱에 벌써부터 노년의 계획이 그렇게 쫙 세워져 있다니.”

“…….”

“좋은 말로 할 때 정신 차려요. 그딴 놈 때문에 대체 왜 웁니까? 철저히 복수를 해도 부족할 판에, 웬 청승이냐구요.”

스스로에게 되뇌기라도 하듯, 그가 예원을 매섭게 다그쳤다.

하지만 살짝 훌쩍이던 그녀는 이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복수를…… 어떻게 하는데요.”

“……그걸 지금 나한테 묻고 있는 겁니까?”

대답도 없는 걸 보니 그런 모양.

‘하, 참.’

그야말로 얼척이 없었지만, 이내 민혁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마침내 그가 뭔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탁 튕겼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네.”

생각을 끝낸 민혁이 별안간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한껏 숙여져 있던 예원의 고개도 저절로 위로 향했다.

“……?”

촉촉해진 여자의 눈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자, 민혁은 부러 상체를 낮춰 테이블을 짚고는 단단한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홍예원 씨. 지금부터 내 말, 똑똑히 잘 들어요. 알았죠.”

“…….”

“원래 그런 남자들의 심리는 똑같아요. 나 갖긴 싫고, 남 주긴 아깝고. 차라리 누구의 것도 아니면 괜찮은데, 그게 남의 손에 쥐어지게 된다면…… 그 꼴은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죠. 당연히 화도 날 거고.”

“…….”

“만약 홍예원 씨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우리 결혼식은 아마도 다음달, 아니면 늦어도 그 다음 달이 될 겁니다. 난 우리 결혼식을 최대한 성대하게 치를 작정이에요. 웬만한 사람들은 다 한 번쯤 부러워할 수 있게.”

이후 잠시의 텀을 둔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그 날…….”

“…….”

“그 남자, 초대해요. 거기로.”

“……네?”

민혁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바람난 여자랑 오든 혼자 오든 그건 내 알 바 아닌데. 어쨌든 꼭 오라고만 전해요. 그리고 와서, 웨딩드레스 입고 현민혁 옆에 서 있는 당신. 꼭 보라고 해요.”

마지막으로, 그가 쐐기를 박듯 힘주어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당신이 복수할 수 있도록.”

“…….”

도와준다, 라…….

예원은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는 채로 눈물 젖은 속눈썹을 달싹였다.

꼭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얼굴로, 제 일이라도 되는 양 그녀의 복수를 선뜻 도와주겠다 말하는 남자가 마냥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탓이었다.

정말…… 나랑 기어이 결혼을 할 셈인가, 이 남자는.

“……그렇게까지 해서, 사장님은 대체 뭘 얻고 싶으신 건데요.”

“말했잖아요. 일생일대의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고. 물론, 홍예원 씨가 도와주면 한꺼번에 해결될 일이지만.”

“그치만…… 이건 미친 짓이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는 미친 짓이죠.”

……휴, 말이 안 통해.

회의적인 한숨을 내쉰 예원은 그에게 재차 물었다.

“후회하면 어쩌죠?”

“곧장 빠이빠이하는 거죠. 나한테서 얻어낼 수 있는 건 다 챙기고.”

“……만약, 사장님이 후회하신다면요?”

후회라.

그 대목에서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또 한 번 씩 웃었다.

“난 후회 같은 거 안 합니다.”

그것은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하기보단,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결국 그녀는 더 이상의 질문을 포기했다.

‘……확실해. 이 남자, 분명히 제정신은 아니야.’

예원은 저를 향해 여전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소주 한 잔을 말없이 꺾어 마셨다.

‘나도 왠지…… 제정신은 아닌 것 같고.’

어쩐지,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았다.

* * *

“다녀왔습니다.”

한편 그 시각, 은아의 집안으로는 멀끔한 인영 하나가 들어서고 있었다.

한창 드라마에 정신이 팔려있던 그녀는 방긋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 지원이 왔니?”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온 예원의 동생, 지원이었다.

단정한 교복을 품에 딱 맞게 입은 그의 모습에선 풋풋함과 남자다움이 동시에 풍겼다.

누가 봐도 남매임을 알아볼 만큼 누나인 예원을 쏙 빼닮아 있는 얼굴.

그러나 뚜렷한 이목구비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생머리는 그를 제 나이보다 더 성숙하고 어른스럽게 보이게 했다.

“피곤하지. 안 추웠어?”

지원은 안쓰러운 듯 묻는 이모를 향해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았어요. 아직 그렇게 안 추워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얼른 들어가서 쉬어.”

“네. 이모도 쉬세요.”

“응.”

짧은 인사 후 방 안으로 들어가는 조카의 뒷모습을 지켜본 은아는 다시금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끼익.

제 방에 입성한 지원이 무거운 한숨과 함께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선 교복을 갈아입을 정신도 없이, 피곤한 몸을 곧장 침대에 뉘였다.

등에 닿는 매트리스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하루 종일 앉아있느라 찌뿌둥했던 몸이 그나마 해방되는 기분이었다.

“…….”

지원은 반쯤 뜬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힘들다. 머리도 아프고, 어깨도 쑤신다.

이제 막 고3 생활을 준비하고 있는 그에겐, 이 시간쯤이면 꼭 하루하루 고달픈 날의 여운이 몰아쳤다.

여차하면 금방이라도 잠들어버릴 것 같은 순간.

그런데 그때, 그의 좁은 시야로 누군가의 얼굴이 휙 스쳐지나갔다.

까무잡잡한 듯하지만 은근히 뽀얀 얼굴, 커다랗고 맑아 무척 순수해 보이는 눈, 그리고 도톰한 입술.

흐리멍덩하던 그의 눈빛은 거짓말처럼 금세 짙어졌다.

“…….”

……보고, 싶다.

지원은 습관처럼 바지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너무나도 익숙한 카톡 창을 켠 그가 물끄러미 액정을 올려다보았다.

그간 주고받았던 자잘하고 소소한 대화내용들이 눈에 들어오는 와중에, 그의 엄지는 무의식적으로 여자의 사진을 터치했다.

동그랗게 떠오른 프로필엔 가장 최근에 찍은 것 같은 여자의 귀여운 셀카 사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살이 좀 빠졌나.”

사진발인지 몰라도, 그새 갸름해진 듯한 턱선이 맘에 걸렸다.

여느 사람 같았으면 쉽게 알아보지 못할 미세한 변화였지만 그는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거기서 더 빠질 데가 어디 있다고. 큰일이네.’

요즘은 그녀가 도통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가장 최근에 나눈 연락은 이미 몇 주 전의 날짜로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지난 일수를 곱씹어보던 그의 입술이 지그시 깨물렸다.

연락해 볼까, 말까.

이리 고민해도 보통은 ‘하지 말자’ 쪽으로 귀결되는 일이 많았지만, 오늘만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연락 안 한 지가 이렇게나 오래되었는데, 안부인사 한 번 하는 것이 뭐 그리 이상한 일일까.

사실 이만큼 참은 것도 제 기준에선 용하다 싶은 거였다.

“……후.”

잠시 망설이던 지원은 마침내 두 손을 들어 액정을 꾹꾹 터치하기 시작했다.

미처 표현할 수 없는, 애틋한 마음을 가득 담아서.

[잘 지내죠 누나? 아직 마감 안 마쳤……]

그런데 그때, 별안간 전화가 걸려오며 화면이 전환되었다.

‘……에잇.’

일순 산통이 깨져버린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고민영]

……아, 얜 왜 또.

“여보세요.”

[집이냐?]

“어. 왜.”

성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답에, 수화기 너머의 여자애는 이상하리만큼 씩씩거렸다.

[오늘 집에 같이 가자고 했잖아! 치사하게 먼저 가냐?]

그랬나? 왜 기억이 없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던 그가 살짝 입을 벌렸다.

“아…… 미안. 까먹었다.”

[……진짜 신기해. 그 머리로 공부는 대체 어떻게 하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넌 미스터리다, 미스터리.

민영이 혀를 끌끌 차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안하무인으로 유명한 홍지원이 그런 반응 따위에 아랑곳할 리가 없었다.

“왜. 왜 전화했는데.”

[아, 전화하는 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좀 하면 안 되냐? 우리가 고작 그런 사이야?]

그럼 우리가 뭔 사인데.

그는 맘이 급한 나머지 그렇게 되묻고 싶었다.

고민영이든 누구든, 이런 식으로 귀찮게 구는 건 딱 질색이었다. 중요한 용건이 있다면 나중에 또 전화하면 될 일이지.

지금 한창 중요한 타이밍이었는데.

“몰라, 나 바빠. 할 말 없음 끊는다.”

[야, 홍지원……!]

민영의 전화를 미련 없이 뚝 끊어낸 그는 바로 카톡 창으로 돌아가 다시 텍스트 작성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휴대폰은 또다시 부르르 진동하기 시작했고, 지원은 끓어오르는 짜증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 고민영 진ㅉ…….”

어?

그런데, 이번엔 민영이 아니었다. 액정에 뜬 이름의 주인공은…….

[선생님]

그가 방금 전 카톡을 보내려던, 바로 그 상대였다.

“……!”

깜짝 놀란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깐만. 이게 웬 일이지? 설마, 텔레파시?

지원은 금세 떨려오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응, 지원아. 나 지영인데.]

“……네, 누나.”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인가.

지원은 새삼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야자 끝났어?]

“네. 지금 집이에요.”

[어어, 벌써 도착했구나.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

미안하긴. 이런 전화라면 언제라도 받을 준비가 되어있다. 한밤중이든, 꼭두새벽이든.

그의 입가에 절로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아니에요. 근데…… 무슨 일이세요?”

혹시, 누나도 요즘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던 걸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원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뒤, 지영에게서 들려온 말은 영 뜻밖의 것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예원이 땜에 전화했는데.]

“……누나 때문에요?”

[응.]

아. 그런 건 아니었구나.

살짝 실망한 지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뭐지. 누나가 뭘 했길래?’

생각해보면 이전에도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안 그래 보여도 속이 여리고 착해서 ─적어도 지원의 기준에선 그래 보였다─, 절친인 예원의 안위를 무진장 걱정하곤 하던 지영이었다.

집안일이라든지, 친구관계라든지. 나이차가 아홉 살이나 나는 남동생 지원이 누나의 시시콜콜한 고민에 대해 자세히 알 리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지영은 번번이 이런 식으로 연락을 취해 예원의 이야기를 물어봤었다.

그리고 지원은 그때마다 마냥 기뻐했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으므로.

하지만 이번에는 무슨 일 때문인지 감이 전혀 잡히질 않았다.

누나에게 별다른 일이 있었다면 이모가 먼저 알려주었을 텐데.

“무슨 일인데요?”

[음. 혹시 말이야. 혹시…….]

“…….”

[요즘 걔가 만나는 남자, 너 누군지 아니?]

“……누나가 만나는 남자요?”

홍예원이 만난다는 남자면 빤한 것 아닌가.

지원은 아주 당연하다 싶게 물었다.

“민혁이 형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지영에게선 살짝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 아니. 민혁이 말구. 민혁이는 얼마 전에 헤어졌잖아.]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

가히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누나가 전민혁과 헤어지다니?

“……네?”

아차.

지원이 그에 대한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음을 그제야 직감한 지영은 부러 소리를 죽이며 말을 이었다.

[……아, 아직 못 들었구나. 근데 일단 넌 모른 척 하구 있어. 걔가 조만간 직접 말해주겠지.]

“……네.”

[암튼 민혁인 아니고 다른 남자인 것 같은데…… 그냥 넘기려다가 아무래도 느낌이 좀 불안해서. 혹시 넌 좀 알고 있는 게 없나 해서 전화해 봤어.]

지원이 잠시 멈칫했다.

내내 그리워했던 목소리를 듣게 된 건 좋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몹시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요, 뭐가 불안해요?”

잠시 주저하던 지영은 약간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영 이상한 놈한테 잘못 걸린 것 같던데. 아무래도…….]

“…….”

[또라이 같아.]

“……또라이요?”

지원의 눈이 곧장 커다래졌다.

#dar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