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내 여자한테서 떨어져, 이 자식아
2018.04.24.
……자, 잠깐.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방금 제 입으로 말해놓고도 예원은 제가 저지른 짓을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절대’ 그렇게 불려서는 안 될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홍예원 씨?”
이제 막 주차를 마치고 오는 길이었던 듯한 사장은 그녀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훤칠하게 빠진 저 용모가 이리도 반가울 일인지.
그의 입장에선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겠지만 할 수 없었다.
전민혁 앞에서 또 한 번 자존심을 망가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 기왕 엎질러진 물, 어디 한 번 갈 때까지 가보자고.’
이래도 망신, 저래도 망신이라면 차라리 재수 없는 사장 놈한테 망신당하고 말지.
얼굴에 코팅철판을 씌우기로 한 예원은 그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가 덥석 팔짱을 꼈다.
“민혁 씨!”
역시나, 예기치 못한 스킨십에 놀란 듯한 남자의 팔은 로봇처럼 딱딱해졌다.
하지만 예원은 그를 애써 모른 척하며 발랄하게 말했다.
“인사해, 전민혁. 이 사람이 내 남자친구야.”
물론 전민혁은 그 과정을 처음부터 다 지켜보고 있었고, 잠깐 동안 박제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다만 갈피를 잃은 눈동자만은 예원과 그 옆에 선 멀끔한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꼭 뭔가를 떠올리려는 것처럼.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표정이 변한 그가 입을 딱 벌렸다.
“ㅎ, 현민혁……?”
그 말에 예원은 번뜩 깨달았다.
‘헐, 맞다. 이 사람 연예인이었지!’
거기다 이 사람이 그냥 연예인인가. 몸값만 해도 이 카페 한 채에 육박할 것 같은 인물이다.
자고로 연예인이란 누구보다 남의 이목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자칫 이상한 소문에 휩싸이기도 딱 좋은 직업이었다. 그 앞에 ‘유명’이란 두 글자가 붙는다면 더더욱 그랬다.
즉, 누가 이 모습을 보기라도 했다간 엄청난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다는 얘기……!
‘하…… 하하하……. 젠장!’
억지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 생각을 왜 조금 더 빨리 떠올리지 못 했을까 하니, 금방 답이 나왔다.
요사이 그녀에게 현민혁이란, 유명 연예인이라기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초짜 사장’으로 더 익숙한 사람이었으므로.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수습을 해야 하는데. 뭐라고 하지?
‘어…… 그냥 닮은 사람이라고 할까?’
그래, 그 편이 괜찮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진실은 알 수 없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민혁에겐 사장이 바뀌었단 얘기를 한 적도 없었다. 모든 상황을 미루어보았을 때 딱 적절한 방법이었다.
“저기, 그게…….”
치열한 고민 끝에 어렵사리 입을 떼려고 한 순간.
예원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네, 맞습니다.”
그녀가 낀 팔짱을 탁 풀어낸 남자가, 별안간 그녀의 앞으로 척 나선 탓이었다.
“우리 예원 씨…… 친구 분이신가 보죠?”
“…….”
“반갑습니다. 현민혁입니다.”
선뜻 악수까지 청하는 남자를 보며, 민혁은 무척이나 놀란 기색이었다.
“……아, 예.”
당황한 것은 비단 그 뿐만이 아니었다.
‘뭐, 뭐야? 왜 저래?’
‘우리 예원 씨’같은 호칭은 또 뭐고!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예원은 당혹스런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좀처럼 파악이 되질 않았다.
그 사이, 악수를 마친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의 곁에 돌아와 있었다.
“예원 씨 친구 분을 뵙는 건 처음이네요. 그렇잖아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궁금했거든요.”
“…….”
“그건 그렇고, 이 늦은 시각에 이곳까진 웬일이신지.”
착잡함과 놀라움이 겹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의 단단한 팔이 어깨 위로 내려앉는 것을 깨닫지 못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 사람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별안간 당겨지는 힘에 몸뚱이가 홱 딸려가고 나서야,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
바짝 붙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두터운 목소리가 귓전을 댕댕 울렸다.
쏙 가둬진 것이었다. 다름 아닌 그의 품안에.
“……!”
저절로 숨이 멈추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남자의 목울대가 울렁이는 것이 눈앞에서 바로 적나라하게 보였다.
진한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 주변을 간질였고, 옷자락에선 또한 어딘가 매캐한 냄새도 배어났다.
“……예원이랑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자리 좀 비켜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전민혁은 어느 새 안면 전체가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살짝 적대적인 물음에, 남자는 그저 젠틀한 미소를 지었다.
“아, 죄송하지만 이거 어쩌죠. 예원 씨가 오늘 좀 피곤해 보여서, 집에 빨리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하면 안 되겠습니까? 시간도 늦었고, 날도 춥네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에둘러 얘기했지만, 결국 그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명료했다.
‘내 여자한테서 이만 떨어져, 이 자식아.’
그걸 알아들은 전민혁의 눈엔 금세 혼란스러운 빛이 가득해졌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예원 씨, 얼른 가요. 빨리 오라고 보챘잖아요.”
“어…… 네, 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럼.”
주객전도.
그를 이 상황에 끌어들인 장본인인 예원은, 이젠 오히려 그의 손에 붙들려가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민혁을 곁눈질하며, 예원은 그를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뭐야, 이거 대체!
* * *
“어디 삽니까.”
“……네?”
“주소 찍어 봐요. 데려다 줄 테니까.”
그의 차안엔 아직 훈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동을 끈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금세 좌불안석 상태가 된 예원은 남자와 내비게이션을 번갈아보고는 우물거렸다.
“아, 아닙니다, 사장님. 괜찮으니까 굳이 안 그러셔도…….”
하지만 차가운 얼굴의 그는 곧바로 맞받아칠 뿐이었다.
“그러다 또 방금처럼 붙잡히려구요?”
“…….”
“태워준다 할 때 들어요, 그냥.”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그 말엔 이상하리만큼 힘이 있었다. 그녀로선 뭔가 거부하기 힘든 힘.
또, 지금 상황에선 그의 말이 백번 옳기는 했다. 또 붙잡혔다가는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으므로.
예원은 결국 순순히 주소를 찍어주고는, 마지못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맸다.
잠시 뒤, 그의 고급 승용차는 무척 안정된 승차감을 선사하며 도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차에 휙휙 부딪치는 바람소리가 선명했다. 오로지 정면만 쳐다보는 그들 사이엔 잠깐 차가운 정적만이 감돌뿐이었다.
“저…… 사장님.”
고민 끝에 예원은 그것을 먼저 깨기로 마음먹었다.
“아깐,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나름 어렵게 꺼낸 말이건만, 그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감사할 필요 없어요. 난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한 것뿐이니까.”
“…….”
“그래도 정 불편하면, 실전 연기연습 한 번 해둔 셈 치죠.”
……아.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는 엄연히 베테랑 배우고, 비슷한 상황을 수십 번이고 연기해봤을 것이었다.
별 것도 아닌 것 갖고 괜히 오버했나.
지레 주눅이 들어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홍예원 씨.”
“…….”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닌 거 알지만, 그래도 한 마디만 하죠.”
그녀가 슬쩍 돌아보자, 그는 잠시의 텀을 둔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조심해요. 남자들이 다 그쪽 맘 같진 않을 테니까.”
“…….”
“남자들은 원래 다 거기서 거깁니다. 맘 단단히 먹고, 상처 받기 전에 단칼에 끊는 게 나아요. 쉽게 믿지 말고, 쉽게 마음 주지도 말고요.”
……물론, 여자도 거기서 거기지만.
“아무튼, 내 멋대로 끼어든 건 미안합니다. 실례된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그는 예원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아까 전 일은 사실, 그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 일에 끼어들어 남자친구 행세까지 하다니. 홰까닥(회까닥) 돌아버리지 않고서야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인데.
그런데…….
‘제발, 누가 좀 도와주세요.’
멀찍이 선 여자의 눈빛이 너무나 애절하게 말하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그런 사달을 벌이고 말았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자신의 부하직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그 순간엔 그러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온몸의 직감이 일사분란하게 일어나, 저를 그 자리로 이끄는 것 같았다.
“…….”
그래도, 내가 좀 심하게 오버를 하긴 했지.
늦게라도 사과를 한 덕에 마음은 조금이나마 편해졌으나, 이상하게도 여자에게선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홍예원 씨.”
의아함에 무심코 그녀를 돌아보던 그는 순간 깜짝 놀랐다.
“……!”
언뜻 본 여자의 흰 얼굴에, 이상한 물기 같은 것이 비쳐있었기 때문에.
“홍예원 씨. 혹시, 웁니까?”
“…….”
“……내가…… 뭐 잘못 말했습니까?”
잠시의 정적 뒤, 여자에게선 그제야 울음기 배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
“너무…… 맞는 말이라서요.”
사실 예원은 그의 말이 뼈에 사무치고 있는 중이었다.
남자는 거기서 거기다.
많은 남자를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아니, 평생을 통틀어 제대로 만나본 남자라곤 전민혁 하나뿐이지만…… 그 말은 왠지 맞는 것 같았다.
사실, 오늘도 잠시 흔들릴 뻔 했다.
게이인 사실을 다 들키고도 저렇게까지 결혼하길 원하는 걸 보면, 저에게만은 남들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감정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서. 그것은 어쩌면 사랑을 초월했던 감정이 아닐까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서야 아예 사랑할 수도 없는 여자를 곁에 붙잡아두고 싶어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하지만 젊은 사장의 말을 들은 그녀는 깨달았다.
저는 전민혁에게 이용당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님을.
또 한 번 그런 식으로 넘어가주면, 그 끝은 지금보다 더욱 비참하리란 것을.
“…….”
터지는 울음을 겨우 끅끅 삼키며 예원은 새삼 다짐했다.
다시는 남자를 쉽게 믿지 않으리라. 누구도 쉽게 좋아하지 않으리라.
평생 흉터가 될지도 모를 상처를, 또 다른 상처로 후벼 파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스스로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
“…….”
그 말을 끝으로 그들 사이엔 어느 새 대화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그의 과도하게 성능 좋은 차는 금세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 놓은 채였다.
“들어가요. 내일 또 출근일 텐데.”
“……네.”
아직 다 마르지 못한 그녀의 촉촉한 눈이 그의 얼굴을 일견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여자는 끝내 그의 눈길을 피했다. 꼭 치부를 들킨 것 같은 표정으로.
“태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축 처진 어깨가 괜스레 그의 맘까지 무거워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잠시 뒤.
민혁은 별안간 운전석 차창을 콩콩,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려야 했다.
“……?”
집에 들어간 줄 알았던 여자가 낸 소리였다.
흠칫한 그가 창을 내리자,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 사장님. 죄송하지만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
“카페 사람들은 아직 모르고 있거든요. 당분간은 그냥, 비밀로 하고 싶어서요.”
비밀이라. 그것은 아마도 남자친구와 헤어진 사실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던 민혁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죠.”
예원의 입가에 바로 안도의 미소가 띠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홍예원 씨.”
그때, 꾸벅 인사하고 집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를 그의 목소리가 잡아챘다.
“네?”
왠지 모르게 주저하는 듯하던 그는 이내 목소리를 틔워냈다.
“……아까, 그 남자 말입니다.”
“…….”
“완전히 헤어진 거, 맞습니까?”
생각도 못한 질문에, 그녀의 눈이 대번 동그래졌다.
“네?”
“아까 그 남자랑, 헤어진 사이 맞냐구요.”
“…….”
“그러니까 내 말은, 홍예원 씨가 지금 싱글이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다시 들어도 어이가 없긴 매한가지였다.
‘지금 저걸 왜 물어보지?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닥 답하고 싶지는 않은 질문.
하지만 이미 치부를 다 들켜버린 마당에, 이 정도 대답하는 것쯤이야 그리 힘든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 일은 이 남자의 공이 크기도 했고.
망설이던 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럼 혹시, 나이는 어떻게 됩니까?”
“저요?”
근데 질문이 어째, 갈수록 이상해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스물일곱……인데요.”
“아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떨어뜨린 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요. 난 서른하납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맥락이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 와중에,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얼마 전에 나한테 술 취해서 했던 말, 기억합니까?”
“……무슨?”
영문을 몰라 되물으려 했지만, 그러자마자 어떤 기억이 불현 듯 그녀의 머릿속을 탁 치고 들어왔다.
아. 그 날 밤!
“홍예원 씨가 날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 딱 1년입니다. 물론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 시간동안만큼은 잘 지내보자구요. 상부상조하면서.”
“…….”
“뭐 어쩌면, 약간 다른 의미로 잘 지내볼 수도 있고.”
‘다른 의미?’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와 달리, 군더더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남자의 얼굴에는 담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그 다음엔 뭐라 물어볼 틈도 없었다.
남자는 그 말만을 남긴 채 쌩 출발해버렸고, 그 자리에 오도카니 남겨진 예원은 그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허, 갑자기 이게 뭔 상황인지…….
“뭐라는 거야, 진짜.”
말을 하려면 좀 알아듣게 해보든지. 혼자 실컷 말해놓고는 도망가 버린 남자가 괘씸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치.”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만큼 싸가지가 없진 않구나. 보기완 다르게 마음이 꽤 따뜻한 사람이구나.
비록 커피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중생이긴 해도, 욕심도 있고 의욕도 있으니 잘 가르치면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의 말처럼, 길어봤자 겨우 1년일 뿐인데.
게다가 지금처럼 매장에 잘 들르지도 않는다면야, 그렇게 귀찮을 일도 많이 없을 터였다.
“…….”
휴우, 모르겠다.
마음을 비우기라도 할 것처럼 후련하게 숨을 내뱉은 그녀는 피곤한 몸을 얼른 뉘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제가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오늘의 행동이, 훗날 어떤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지를.
* * *
한편, 한 치 앞의 일을 모르기는 민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감히 예상할 수 있었을까. 살다 살다 행여 제게 이런 일까지 일어나리라고.
“이게…… 뭐냐?”
한여름에 시작한 드라마 촬영은 이제 한창 막바지에 달아있었고, 남자주인공인 민혁 또한 마지막 촬영만을 남겨둔 채 대기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의 앞에는 웬 선물상자가 드밀어져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함께.
“…….”
손의 주인인 새파란 막내 스태프는 민혁의 질문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얼굴도 들지 못한 채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건 아니고…… 조만간 형 생일이시라고 들어서요. 지금껏 잘 대해주셔서 감사하기도 했고, 또 이젠 뵐 일도 거의 없을 것 같아서…….”
“…….”
“별 거 아니지만 받아주세요. 선물이에요.”
딴에 각별히 신경 쓴 상대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이건 뜻밖이다.
민혁은 고급스럽게 포장돼 있는 그것을 다소 어색한 몸짓으로 받아들었다.
“어…… 그래. 생각도 못 했는데, 고맙다.”
기껏해야 이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아직 어린 티가 역력한 막내는 아직 용건이 다 끝나지 않은 듯,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괜찮으시면, 형 연락처라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
“계속 이렇게 뵙고 싶은데.”
“……?”
이렇게 나오는 건 더 의왼데.
민혁은 한순간 새삼스런 눈빛이 되었다.
몇 개월 간 촬영을 진행하면서 지겹도록 본 얼굴. 그런데 지금은 그 얼굴이 어째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뭔가 꼭…… 좋아하는 남자에게 수줍게 고백하는 듯한 얼굴 같다고 해야 할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아닐 수 없어서, 픽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무슨 고백. 게다가 얜 남자잖아?’
해괴한 소릴 너무 많이 듣더니, 네가 드디어 제정신이 아니게 됐구나.
스스로에게 읊조린 그의 시선은 눈앞의 상대를 살폈다.
이름 정도만 알고, 그 외엔 나이도 뭣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그럼에도 민혁이 그를 챙긴 것은 무척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기 일쑤인 촬영현장에선 누구 하나 안 힘든 사람이 없는 법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막내 스태프의 고충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실제로 지난 몇 개월 간 온갖 뒤치다꺼리는 다 이 아이의 몫이었다. 게다가 감독을 비롯해 연기자들에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깨지는 일이 허다했다.
민혁은 타이틀 롤을 맡은 배우로서 그것이 못내 안쓰러웠다.
그나마 일찍 뜬 편이라는 톱스타 현민혁에게도 무명 시절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돌 생활을 접음과 동시에 군대를 다녀왔고, 제대 후 본격적으로 반응이 오기 시작했던 게 네 번째 작품부터였으니 그 전까지는 그도 눈칫밥 얻어먹는 데 나름 도가 터 있었던 셈이다.
불합리한 상황과 짜증나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결코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갈수록 진력이 났다. 연기하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그면서도, 이 바닥 자체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건 모두 그 탓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있는 촬영장에선 그런 일들이 없게끔 하고 싶었다.
내 일터니까. 내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내건 작품이니까.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뻔히 알고도 모른 척 눈 감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꼴에 안 그런 척 뒤에서 먹을 것도 좀 챙겨주고, 가끔 분위기가 살벌해지면 먼저 나서서 중재해주고, 힘이 될 만한 조언들도 많이 해주었다.
같은 남자로서, 몇 살 많은 인생 선배로서. 그가 이 난관을 꿋꿋이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런데…….
“저, 실은…….”
“…….”
“형…… 좋아해요.”
그게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뭐?”
민혁의 눈은 단숨에 팽창하고 말았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