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69국 - 수어사이드 스쿼드 (71/75)



〈 71화 〉69국 - 수어사이드 스쿼드

오늘도 해설을 위해 방송국 복도를 걸어가던 유진화를 향해 누군가가 추임세를 넣었다.

“A Yo! MC에보!”
“와썹 브로~”

능글맞게 호응하는 유진화의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자지러진다.

유진화는 겉으로는 함께 웃으며 속으로는 한숨 쉬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이러고 다녀야 하나….’

그 빌어먹을 영상이 퍼진 이후 이런 일이 부쩍 늘어났지만, 유진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좋게좋게 대응했다.

하지만 유진화라고 마냥 좋아서 이렇게 다 받아주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한세빛의 전담 해설자 취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런 식으로 하나의 밈이 되는 것에는 이골이 난 유진화였고.

그러므로 이런 경우, 특히 이번처럼 별명이 생긴 경우에는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더 오래 간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지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쪽팔린 일이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 흑역사로 박제되는 일이 없어지고, 아무리 싫은 별명이라도 본인이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면 금세 잊히는 법이다.

지금이야 영상이 한창 유행을 타고 있으니 쉽게 잊히지는 않겠지만 원래 유행이라는 것은 돌고 도는 법.

결국, 바둑팬들은 다른 장난감을 발견할 테고, 그때쯤이면 이번 일도 순조롭게 잊힐 것이다.

그러다가 예능 같은 곳에서 가끔 자료화면으로 써먹기나 하겠지.

그때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면 인생에서 흑역사 하나가 삭제되는 것이다.

그래, 평소라면 그렇게 돼야 했었다.

유진화는 해설을 준비하며 오늘 함께 해설하게 될 캐스터에게 푸념하듯 말했다.

“댓글 모음 같은  처음 만든 사람은 지옥에가지 않을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여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부관참시라는 말이 이렇게 어울리는일이 또 있을까.

이제는 좀 잊혔나 싶은 영상들을 기어이 끄집어내서, 그것도 댓글까지 정성스럽게 합성해서 올리는 꼴을 보아하니 이번에는 싫어도 오래 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진화는 슬쩍 스마트폰을 꺼내 영상들의 조회 수를 확인했다.

‘몰라, 이거 뭐야, 무서워.’

대충 영상들의 조회 수를 합쳐보니 오백만 이상.

1일 1 진화 같은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고려해도 무서울 정도의 조회 상승세였다.

지금까지 쌓이고 쌓인 게 결국 터져서 이 사달이  것이다!

뒤에서 유진화의 스마트폰을 살짝 훔쳐본 캐스터가 부럽다는 듯 말했다.

“이야…. 역시 인기 해설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아니 나는 그만  달랐으면 좋겠는데….’

그런 유진화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캐스터는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인지도가 생명이잖아요. 저도 이렇게 유명해지면 좋을 텐데….”

‘아니야…. 그거 별로 안 좋아.’

처음에는 유진화도 정상적인 유명세를 치렀다.

한세빛의 대국을 그나마 제대로 해설할 수 있는 유일한 해설자라는, 나름 멋있는 타이틀.

괜찮은 언변, 꾸며놓으면 볼만한 외모까지.

처음 몇 달간의 적응기에는 해설 똑바로 하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적응한 이후에는 해설 실력으로도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해설자 취급이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기어이 승단점수를 다 채워 9단이 된 다음 시즌, 9단치고는 실력이 부족했던 것인지 그 어떤 팀도 그를 지명하지 않았다.

게다가 메이저 기전들에서는  보여주기도 전에 줄줄이 탈락.

결국, 실직자 신세가 된 유진화는 선택해야 했다.

다른 일을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다음 시즌까지 절차탁마해 갑조리그 합류를 노려볼 것인지.

당연하게도 아직 배가 고팠던 유진화의 선택은 후자였다.

하지만, 백수 신세가  그에게 인력난으로 고생 중이던 바둑 TV의 국장이 마수를 뻗쳤으니….

‘어차피  년 동안 할 일도 없지 않으냐?’이라는 팩트 폭력부터 시작해서 ‘상위 리그 해설하다 보면 그동안 안 보이던 게 보이지 않겠느냐?’이라는 그럴싸한 설득까지.

순진하게 ‘그릉가?’라며 납득한 유진화는 어느새 해설자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벌써 어영부영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유진화는 유진화 9단이나  사범이라는 호칭보다 유진화 해설이라는호칭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유진화 자신도 그런데, 다른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해설자 유진화가 유명해질 때마다 프로바둑기사 유진화는 점점 잊히고 있었다.

‘뭐…. 다들 이런 식으로 은퇴하는 거지.’

‘나 은퇴합니다!!!’라며 동네방네 떠들고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는 바둑 기사는 많지 않다.

정말 최상위권의, 누구나 역사에  줄을 그었다며 인정받는 바둑 기사나 그런 일을  수 있는 거지.

원래 대부분 프로바둑기사는 그 끝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소리소문없이 은퇴하고는 한다.

누군가는 바둑 학원의 원장이 되고, 누군가는 기원의 사장이 되고, 누군가는 유진화 자신처럼 방송 관련 일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

‘아…. 바둑두고 싶다.’

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것이 아닌, 실전 감각 유지를 위해 억지로 인터넷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무대에서, 제대로 된 상대와 제대로 붙어보고 싶다.

“유 해설님  됐어요!”
“아, 감사합니다.”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유진화는 감았던 눈을 떴다.

거울에 비친 해설자 유진화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의 스케줄을 모두 마친 유진화는 스태프들에게 인사하고는 방송국을 나섰다.

목도 칼칼하고, 다리도 쑤시는 것이 아무래도 오늘은 좀 쉬어줘야   같았다.

해설자 일이라는 것이 쉬워 보여도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만한 극한직업이 또 없다.

앉아서 편하게 해설하면 좋으련만, 그놈의 화이트보드 바둑판 때문에 대국 내내 서서 해설을 해야 하고. 3초 이상 침묵하면 방송사고 취급이니 계속 멘트도 쳐줘야 한다.

저번 정도찬과 안기우의 대국처럼 초속기 바둑을 해설할 때는 말 그대로 쉴  없이 형세를 파악하며 계속 상황을 해설해줘야 하고.

한세빛처럼 어려운 수를 두는 바둑 기사의 대국을 해설하다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해 박제되는 경우도 많다.

그나마 속기 바둑은 일찍 끝나니 버틸 만하지...

국수전 10번기 같은 생각 시간 12시간 이상의 초장고 대국 해설을 맡는 날에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 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은 왜 이렇게 투정 부리면서도 해설자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 1년은 다음 시즌 갑조리그가 시작되기 전까지 새로운 경험을 해본다는 느낌으로 버텼다.

그다음 해에는 이대로 포기하기는 아까우니까 일 년만 더 해보자는 마음이 컸고.

그런데 올해는? 어느새 자신도 해설자로 일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지않은가.

유진화 자신은  일을 그저, 뚜렷한 목적 없이, 관성적으로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의문은 항상 같은 결론을 끌어냈다.

갑조리그에서 지명을 받지 못한 게 벌써 2년인데 과연 올해라고 다를 것인가?

‘이제 이 짓도 슬슬 그만둘까….’

그래도 나름대로 승단점수를 채울 때까지 갑조리그에서 버틴 유진화였고, 공백기 동안 해설로 일하며 번 돈도 있었기에 저금을 까먹지도 않았다.

여기에 9단 연금까지 합치면 평생 먹고살  있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 바둑 두고 싶다.’

“유 사범님! 잠시만요!”

‘마지막으로 메이저 기전에 한  도전해볼까?’

“유 사범님?”

‘작년처럼 해설자 부족하다고 못 나가면 어쩌…. 아니, 아니지, 이제 해설자는 그만두기로….’

“유진화 사범님!”
“......저요?”

유진화는 그제야 누군가 부르던 ‘유 사범’이 자신임을 깨달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유 사범’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진화는 자신을 부른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의외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정도찬 2단?’

입단 이후로 바둑계 이슈랑 이슈는 다 몰고 다니는 폭풍의 눈.

그리고…. 해설자의 처지에서 보면 온갖 이상한 짓은 다 하고 다니는 걸어 다니는 자연재해가 그곳에 있었다.

어째서 정도찬이 자연재해 취급받냐고?

인터뷰 도중 폭탄 발언이 터지면 그것을 수습하는 것은 인터뷰어 뿐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폭탄 발언이 터지면 우선 그 자리에서 인터뷰어가1차로 수습하고.

방송국의 작가들이 그것을 기반으로 머리를 쥐어짜 수습할 대본을 만들어 해설자에게 전달하고.

해설자들이 그 대본을 보고 은근슬쩍 언급하며 2차로 수습하는 것이다.

모든 인터뷰와 대국이 생방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참사들이었다.

심지어 폭탄 발언뿐인가?

정도찬의 대국은 해설 난도도 높고 묘수들이 많이 나온다.

그냥 평범하게 해설해도 난도가 꽤 높은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가끔 초속기 대국 같은 이상한 짓까지 하니….

보는 사람들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해설자 관점에서 한세빛의 대국 다음으로 피하고 싶은 대국이 정도찬의 대국이었다.

자기도 해설자로 데뷔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해설자들이 곤란한 짓만 골라서 하는 것인지….

최근 자신이 정도찬의 대국을 맡는 빈도가 은근슬쩍 조금씩 늘어나는 것도 이것의 영향이리라.

아무래도 상대방이 취급 주의 인물이다 보니 유진화의 태도가 자동으로 조심스러워졌다.

“무슨  있나요?”
“아…. 다름이 아니라, 혹시 유 사범님 아직 현역이시면 저희와 함께 하실 수 있을까 해서요.”
“함께 하다니요?”
“아…. 이것부터 설명해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이번 신생팀 GSG팀의 팀장을 맡게 되어서 팀원들을 구하고 있었거든요….”

‘신생팀? 팀장? 정도찬이?’

갑자기 너무 중요한 정보들을 들어버려서 오히려 제대로  사고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 바둑 리그에 신생팀이 생기고, 그 신생팀의 팀장이 정도찬이다…. 이런 뜻인가?

하긴 정도찬이 2단이긴 해도 TH  전국 기전에서 보여주는 실력이나 스타성을 보면 꿩대신닭 정도는 될 인물이긴 했다.

그래, 그래서 신생팀의 팀장이 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나야?’

아니, 아니다. 이런 여유로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건…. 유진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갑조리그 복귀의 기회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입이 먼저 대답을 하고 있었다.

“저야…. 좋습니다.”

대답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치기는 너무 아까웠다.

그의 대답을 들은 정도찬은 상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명 모였으니 한 명만 더 구하면 되겠네요!”
“네 명이라고요? 다른 두 분은 누군데요?”
“아…. 하윤서 초단하고 신재윤 6단이에요. 여기에 저하고 유 사범님, 그리고 1지명으로 한 명만 더 데려오면 크~ 완전 바둑계 리벤저스 아닌가요?”
“......?”

유진화는 자신이 들은 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정도찬의 팀원들을 정리해봤다.

팀장, 여기저기서 사고랑 사고는 다 치고 다니면서 본인은 사고 친다는 자각이 없는 악질 중 악질 정도찬 2단.
팀원1 공식전 대국은 일 년에 한 번 나오는 4년째 초단을 유지 중인 하윤서 초단.
팀원2 자신은  번도 들어본 적 없는이름인 듣보잡 그 자체인 신재윤 6단.
팀원3 2년 동안 갑조리그 지명 없이 해설자 일이나 하던 검증 안  퇴물 9단(나)
팀원4 아무튼 1지명으로 잘하는 사람 데려올 것임. 아무튼 그럼.

이게…. 갑조리그 신생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갑조리그는 대체?

아니 그리고 포인트는 왜 또 이렇게 남겼어? 나중에 남겨뒀다가 엿 바꿔 먹으려고?

유진화가 여러 가지 감정을 담아 정도찬을 바라보자 정도찬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리벤저스는 너무 갔죠?”
“이건 리벤저스가 아니라 자살 특공대잖아….”

 GSG에 들어온 지 단 1분.

유진화는 진지하게 탈주를 고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