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0화 〉68국 - 그만 좀 괴롭혀 (70/75)



〈 70화 〉68국 - 그만 좀 괴롭혀

사실 바둑 리그의 팀은 하나의 팀이라기보다는 다섯 명의 개인이 모여있는 느낌에 가까웠다.

이는 물론  시즌이 끝나면 바로 해체된다는 바둑 리그만의 극단적인 시스템에서 기인한 느낌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바둑이라는 게임 자체부터가 특수한 룰을 가진 대국을 제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생긴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나마 과거에는 수를 연구한다는 느낌으로 팀원끼리 모여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고는 하지만 바둑 학원에서조차 인공지능 다운로드 방법부터 가르치는 시대가 된 지금 이렇게 구닥다리 식으로 모여 연구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모여서 토론하고 의논할 시간에 기보  번 더 분석해보는 것이 남는 장사였으니까.

하지만 어느 시대이건, 구닥다리 낭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 법.

정도찬의 친구, 이재영 협회 6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정도찬은 오랜만에 기원에 찾아와 수 연구를 하자는 이재영에게 물었다.

갑자기 거대한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팀 정해졌다고 하지 않았나?”
“어, 큰일 없으면 올해도 로드셀에서 지명할 듯.”
“난 GSG 팀장인데 너랑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뭐지? 무엇을 암시하는 거지?”
“아니…. 다음 달부터는 적이니까….”

이재영은 황당하다는 듯 정도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염병하네, 헛소리하지 말고 하던 거나 마저 해.  또 뭐라고.”
“갑조리거들은 이런 거 신경 안 쓰나?”
“신경 쓰고 안 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팀이라는 의식 자체가 희박하지.”
“말로는 들어봤는데 그 정도야?”
“흐음….”

이재영은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던  돌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갑조리그 대국료 책정 방식은 알지?”
“기본 계약이 승리  500만 원, 패배 시 300만 원이잖아.”
“잘 아네, 결국 중요한 건 그거야. 극단적으로 말해서 팀이 전패해도내가 전승하면 내 평가하고 내 대국료는 높아지는 거니까.”
“팀 성적에 연연하지는 않는다는 거구나.”
“그런 셈이지, 그래서 오히려 약팀에 들어가는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어, 원투펀치가 확실한 강팀에서는 출전 기회 자체가많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복잡하네….”

사실 정도찬은 하윤서를 영입한 순간 다 이긴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나머지  명을 9단으로 꽉 채워도 오히려 포인트가 남는 상황이 되었고, 9단 세 명에 정도찬, 하윤서라는 조합은 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이상한 강팀이 될 것이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9단이라고 다 같은 9단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2단인 정도찬이 TH 배에서 상위 단급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것은 예외 중 예외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6단의 벽을 넘은 프로들, 즉 갑조리거들 사이에서는 단급이 무의미한 경우가 많았다.

한창 하락세인 9단과 한창 상승세인 8단. 둘이 붙으면 누가 이길 것인가?

아마 투표를 하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8단에게 하지 않을까?

당장 TH 배 32강 때만 해도 8단인 이택윤이 9단인 유은우와 한예준보다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으니….

게다가 실력이 확실한 9단이라고 해서 정도찬이 무조건 뽑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생팀 특혜로 지명 순번을 정할  있는 정도찬이었지만. 소위 말하는 검증된 9단들은 지명 순번이 한 바퀴 도는 순간 싹  사라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어렵다 어려워…. 어디서 실력은 좋은데 아무도 모르는 9단  떨어지나?”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진작 갑조리그 끌려갔지.”
“어휴….”

정도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빨리 팀을 짜고, TH 배에 집중하고 싶었는데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냥 미친 척하고 너하고 휘운이하고 세연이 뽑고  같이 망해볼까?”
“그런  했다가는 성적은 둘째치고 인맥 바둑이라고 욕 엄청 먹을걸?”
“돌겠네 진짜….”

정도찬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

어쩌면 4강 A조의 마지막 대국이 될 수도 있는 제3국.

정도찬을 상대하는 안기우의 전략은 한결같았다.

초속기.

그가 가장 잘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 부딪힌다.

안기우의 도발에 정도찬은 기꺼이 응했다.

한 수만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반상 위에서.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둘 것이었다는 듯, 정도찬과 안기우의 착수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대충 손바람을 타며 두고 있지는 않았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최대한 많은 수를 읽는다.

숨 막힐듯한 침묵 속에서, 오직 착수음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퍼졌다.

그렇게 계속 바둑을 두던 두 사람은 동시에 깨달았다.

 일정한 간격의 착수를 먼저 멈추는 쪽이 패자가 되리라.

각자 초속기라는 족쇄를 스스로 찬 상태에서 치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단순히 대국을 관전하는 사람들마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마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장 고생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한세빛 전담 해설자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정도찬의 입단 이후로 묘하게 정도찬의 경기 해설 빈도가 늘어난 유진화 9단이었다.

한세빛의 대국을 해설하며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그만이 정도찬과 안기우의 초속기 대국을 제대로 해설할 수 있을것이라는 내, 외부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부응하듯 유진화 9단은 속사포 해설로 화답했다.

“아 정도찬 2단 이 수는 한번 제대로 싸워보자는 거죠, 안기우 8단도 피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좌하귀의 형세는 정도찬 2단이 유리해 보이는데요 이대로 싸워도 되는 걸까요? 아, 말씀드리는 순간 안기우 8단 바로 손을 빼고 우변을 확보합니다. 대단하네요. 이런 초속기 바둑을 두는 와중에 날카로운 가치판단을 보여….  정도찬 2단 저쪽이 더 크다고 판단했나요?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게 해설이야 랩이야 ㅋㅋㅋ
현기증 나니까 빨리 비트 달라고 ㅋㅋㅋㅋ
느슨해진 한국 힙합씬에 긴장감을 주는 MC에볼루션 ㄷㄷ
MC에볼루션 ㅇㅈㄹ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진짜 멘트를 쉬질 않네 진화형! 숨셔 숨!
아 ㅋㅋ  쉬는 순간 방송사고라고 ㅋㅋㅋㅋㅋ

물론 해설을 너무 잘해버려서 정도찬과 안기우의 대국보다 유진화의 해설이  주목받는 부작용이 생기기는 했지만….

저번 1국이나 2국처럼 해설자가 대국을 따라가지 못해 침묵하는 방송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들 전체적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와중에도 두 사람의 대국은 점점 치열해져 갔으니….

미묘한  사이로 승기를 본 정도찬은 바로 안기우의 행마를 끊어버리는 초강수를 두었다.

  하나 죽을 때까지 싸워보자는 신호와 다름없었다.

그 기세에 잠시 움찔한 안기우였지만, 이미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탄 상황, 이제 와서 손을 빼봤자 자신의 패배가 확실해지기만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안기우는 자신의 행마를 끊기 위해 무리하게 움직인 정도찬의 대마를 다시 끊으며 응징했다.

하지만…. 조금 더 수순이 진행되자 일정한 리듬이 유지되던 두 사람의 착수음에 조금씩 불협화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안기우의 눈에도 승패가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수 부족하네.’

아무리 계산해봐도 수상전에서 이기기 위한 한 수가 부족했다.

사실 아까부터 불안하긴 계속 불안했다.

아마 정도찬은 끊으러 들어온 순간부터 이것을 보고 있었겠지.

그 순간부터 이것을 본 정도찬은 확신이있었으니까 자신 있게 초강수를 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한 자신은 계속 끌려다닐 수밖에 없던 것이고….

결국, 일정한 속도로 울리던 착수음이 멈췄다.

안기우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잘 배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TH 칼텍스  전국 기전 4강
A조 제3국
흑 정도찬 백 안기우
184수 흑 불계승

정도찬 결승 진출.

#

정도찬이 8강에서 차윤석 9단을 셧아웃했을 때 보다는 파급력이 적었다.

바둑 팬들 사이에서 ‘정도찬이가 차윤석도 3:0으로 이겼는데 안기우 정도는 이기겠지’라는 인식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번의 3:0 승리, 심지어 그 승리가 전부 안기우가 자신 있어 하는 초속기 대국에서 거둔 승리였기 때문에 정도찬의 평가는 다시 한번 상승했다.

32강에서 정도찬에게 지명 당한 이택윤 8단은 벌써 ‘피해자’ 소리를듣고 있었고, 이번 대회에서 유일하게 정도찬에게 1승을 거둔 정휘운은 ‘사실상 4강’ 같은 소리를 듣고 있을 정도로 정도찬의 평가가 높아지고 있을 때.

하나의 너트뷰 영상이 업로드되며 모든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유진화 9단의 해설에 비트를 입혀보았다]

유진화가 정도찬과 안기우의 초속기 대국을 해설하는 영상에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비트를 합성한 단순한 영상이었지만 이 영상이 온갖 바둑 커뮤니티에 퍼지기 시작하며 영상의 조회 수가 말 그대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유진화를 놀리는데 도가  짓궂은 바둑 팬들이 이런 영상을 그냥 둘리가 만무했고.

이 영상이 각종 밈으로 쓰이며 결국 유진화의 별명 리스트에 MC진화, MC에볼루션 등의 별명이 추가될 때쯤….

“유진화 9단이 현역이었던가?”

정도찬이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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