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67국 - 윤서라고 불러주세요.
‘이다음, 이다음은 어떻게 하지?’
하윤서의 눈이 바쁘게 ‘밀당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블로그 포스트를 훑으며 지나갔다.
그렇다. 하윤서는 무려 정도찬을 상대로 ‘밀당’을 시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공식전이 싫다. 양산형 프로들과 대국을 두고 싶지 않다. 이런 건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정도찬과 한 팀이 되면 바둑 리그가 진행되는 일 년 내내 정도찬에게 대국을 요청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것 아닌가!
대국이 복사가 된다고!
그리고, 한창때의 남녀 프로기사가 대국을 즐기다 보면 ‘실수’로 교통편이 끊기는 늦은 시간까지 연습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된다면 또 어떤 ‘실수’를 하게 될지 모르지 않는가?
게다가 최대 걸림돌인 신세연 그 여자는 얼마 전 여자바둑 최강자전의 우승으로 특별 승단, 7단이 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가성비에 사망 선고를 받은 셈이었으니 정도찬이 생각이 있다면 같은 팀으로 지명할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되는 상황이었다.
즉 이번 바둑 리그에서 정도찬과 한 팀이 되면 무주공산에 깃발을 꽂으러 가는 것과 같은 상황!
하윤서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도찬 오빠는 내 소중함을 좀 알아야 해!’
하윤서 자신이 너무 적극적으로 당기기만 하니까 정도찬은 자신이 곁에 있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팀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직접 얼굴 보고 하는 것도 아니고, 전화도 아니고, 하다못해 메시지도 아닌, 인터넷 바둑 채팅으로 할 수가있는단 말인가!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 무심했다.
문제는 그 무심함에 살짝 화가 난 하윤서가 홧김에 정도찬의 제안을 거절해버렸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윤서도 거절해놓고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지금 당장 사과하고 들어간다고 할까?’
‘아니야 사과는 내가 아니라도찬 오빠가 해야지!’
‘그래도 이대로 가다가 도찬 오빠가 다른사람을 구해버리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 가성비 좋은 사람은 없어!’
‘그런데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있으면 어쩌지?’
‘설마 도찬오빠가 날 버릴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결론은….
‘사과해야겠다….’
원래 이런 싸움은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싸움이다.
하윤서는 어떻게 해야 최대한 자연스럽게 사과하고 정도찬의 팀에 합류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인터넷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웃긴 이야기지만 더는 실수하고 싶지 않은 그녀에게 있어서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런 와중에 하윤서의 눈에 한 블로그포스트가 들어왔으니….
‘밀당하는 법.’이라는 간단한 이름의 포스트였다.
어째서인지 그 포스트의 글귀가 계속 눈에 밟혀서 하윤서는 그것을 읽어나갔다.
“상대방 말을 다 들어주면 호구….당길 땐 당기더라도 밀 때는 밀어야 한다…?”
하윤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 자신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었는가?
우선 정도찬과 처음 만났을 때 고백을 했는데 당연히 이는 당긴 것이다.
사제동행전때 연습을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준 것, 이것도 당긴 거나 다름없고.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같이 고르러 간 것, 이것도 당긴 거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준비 중인 깜짝 밸런타인데이 이벤트도 당기는 거였고!
‘지금까지 죽어라 당기기만 했잖아?’
하윤서는 자기반성을 시작했다.
이렇게 당기기만 했으니까 도찬 오빠가 자신의 매력을, 소중함을 몰라주는 것이다!
시대는 미는 것을 원하고 있다!
‘그래, 차라리 잘 됐어! 이번에 제대로 한번 민 셈 치자!’
라고…. 간단하게 생각하기에는 정도찬이 던진 떡밥이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바둑 리그 시즌 내내 정도찬에게 달라붙어 있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이렇게 놓치는 것은 아까웠다.
결국 하윤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날밤을 새우고 말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정도찬이 하윤서의 집에 방문하기 전까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결국 정도찬이 먼저 방문한 것이다.
집에 방문한 사람이 정도찬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하윤서는 모종의 쾌감마저 느꼈다.
‘밀당 대다네!’
지금까지 죽어라 당길 때는 꼼짝 않던 정도찬이, 한번 밀고 나니까 무려 자신의 집까지 찾아온 것 아니겠는가!
역시 뭐든 과유불급이었다. 하윤서 자신은 너무 당기기만 해서 정도찬을공략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어떡하지?’
정도찬이 집까지 찾아와줬으니까 못 이기는 척 팀에 합류해야 하나?
하윤서는 재빨리 블로그 포스트를 읽었다.
지금 이 순간, 이 블로그 포스트는 하윤서에게 있어서 법전이자 성전이었으니….
하윤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글을 읽어내려갔다.
“밀당이 통한다는 느낌이 들면….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 이후로는 즐겨라….”
하윤서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침대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좌우로 굴러다녔다.
‘됐어! 이건 거의 넘어온 거야!’
자신이 미니까 정도찬이 바로 반응을 해서 집까지 찾아오지 않았는가!
이건 분명 밀당이 통했다는 증거!
정도찬이 하윤서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증거였다!
‘히히…. 그럼 이제 적당히 즐기다가 못 이기는 척 받아줘야겠다.’
하윤서는 방문 앞에 앉아 정도찬이 자신에게 말을 걸기를 기다렸다.
중간에 아빠 때문에 잠시 소란이 있긴 했지만. 이건 무시하고!
잠시 기다리자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빠였으면 일단 문고리부터 돌리고 봤을 텐데!’
하윤서는 정도찬의 이런 사소한 것까지 배려해주는 배려심이 좋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지금까지 당기기만 했으니까 이제는 자신이 좀 밀어도 될 것이다!
하윤서는 최대한 기분 나쁜 듯 목소리를 깔고 이야기했다.
“누구세요….”
“하윤서 초단? 저 정도찬이에요. 우리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야 당연히…! 안 되죠….”
위험, 위험하다. 자신도 모르게 방문을 열 뻔했다!
이렇게 쉽게 자신을 함락시키려고 하다니! 역시 무서운 남자였다!
하윤서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하윤서! 정신 똑바로 차려! 밀자, 미는 거야!’
“하윤서 초단은 아직 모르겠지만 전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그래요? 열심히 하세요.”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윤서 초단이 필요해요.”
‘하윤서 초단이 필요해요.’
그 말만이 계속 하윤서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중무장한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미, 밀어야 하는데?’
예상외로 정도찬이 너무 세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하윤서는 무장해제되는 자신의 모습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소리치듯 말했다.
“아시잖아요! 전 공식전 안 나가요!”
“공식전에 나가는 게 그렇게 싫어요?”
“네….”
공식전에 나가는 게 싫은 건 사실이었다.
인공지능만 보고 배운 양산형 프로바둑기사들과 대국을 둘 때마다 죽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도찬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는 것이 하윤서의 본심이었다.
그런 하윤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도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윤서 초단이 싫다면 어쩔 수 없죠….”
마치 포기하는 듯한 정도찬의 말에 하윤서는 무엇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전 하윤서 초단이 필요하지만, 그만큼 하윤서 초단을 존중하기도 해요.”
이건 마치 자신을 팀에 데려가는 것을 포기한다는 뉘앙스이지 않은가?
‘뭔가…. 뭔가…. 이상해!’
하윤서는 위기감을 느껴 다시 블로그 포스터를 마지막까지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주의…. 밀당을 잘못 시전할 경우 상대가 우주 끝까지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밀당을 하려면 우선 상대방이 당신에게 반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정도찬이 우주 끝까지 날아가고 있었다!!!
저작권을 걱정하게 만드는, 시간을 조작하는 능력을 갖춘 초록색 돌멩이의 수호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포스트를 끝까지 읽었어야지…. 경고문은 포스트 다음에 나오거든….’
그 모습이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망했다….”
하윤서는 말 그대로 패닉에 빠졌다.
이대로 정도찬을 보내면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을 거라는 공포심마저느껴졌다.
하윤서는 자신을 자책하기 시작했다.
‘내가 뭐라고…. 나 따위가 뭔데 작당하겠다고!’
가진 재주라고는 바둑 두는 것 하나뿐인 바보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면…. 어쩌면…. 정도찬은…. 자신을….
‘평생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패닉에 빠진 하윤서의 사고가 극단적인 곳으로 치달았다.
마음이 급해진 하윤서는 방문을 박차고 나와 정도찬을 끌어안았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장난이었어요….”
“하, 하윤서 초단? 갑자기 왜 그래요?”
정도찬은 크게 당황하여 계속 미안하다고만 말하는 하윤서를 다독였다.
동시에 안도했다.
‘하윤진 6단이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다….’
아마 그가 이 모습을 봤다면 정도찬을 가만히 두지 않았으리라.
물론 아직도 정도찬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후, 조금 진정된 하윤서가 정도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제가 필요하다고 말해주세요.”
“저는 하윤서 초단이 필요해요.”
하윤서는 응석 부리듯 다시 물었다.
“왜요? 제가 왜 필요한데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우리 팀에 하윤서 초단이 필요해요.”
“좋아요.”
“괜찮겠어요?”
지금까지 싫다고 거절하기만 한 하윤서가 갑자기하겠다고 나서니 정도찬은 오히려 그녀가 걱정되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제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들어드릴게요.”
“앞으로 저를….”
하윤서는 정도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윤서라고 불러주세요.”
팀 GSG현재 구성원
팀장: 정도찬(2포인트)
팀원: 하윤서(1포인트)
총합: (3/35) 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