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66국 - 딸 바보와 바보
갑조리그에서는 각 팀에게 주어진 35포인트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한 시즌의 성적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포인트는 어떻게 사용하는가?
사실 별 어려운 룰 없이 9단을 지명하면 9포인트를 사용하게 되는 간단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시스템덕분에 갑조리그에는 매년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고는 한다.
바둑 리그 지명식날 각 팀은 팀장을 포함 5명의 바둑 기사를 지명해야 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포인트의 제한 때문에 5명 전원을 9단으로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실력과 비교하면 단급이 낮다고 평가받는 정도찬의 친구들과 같은 바둑 기사들은 가성비를 인정받아 갑조리그에 합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생각해보면 9단이더라도 9단에 걸맞은 실력이 아니라고 평가되면 지명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고.
또한, 이는 정도찬이 1위를 자신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만약 정도찬이 TH 배 전국 기전에서 우승해 특별 승단을 한다고 해도 4단이다.
팀장이 9포인트를 먹고 시작하는 다른 팀들과는 전혀 다른 구상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정도찬은 다른 사람에게는 잘 알려지지않은, 가성비 끝판왕을 한 명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곧 바둑고 졸업을 앞둔, 그리고 졸업 후 집에서 인터넷 바둑이나 두겠다는 히키코모리 니트 예정자 하윤서 초단!
하윤서는 공식전에 나가지 않는다는 흠이 있지만 안티 인공지능이라는 특유의 기풍으로 정도찬마저 흔들어놓은 실력자이기도 했다.
정도찬과 하윤서 두 명이 합쳐 5포인트.
농담이 아니라 다른 팀에서 위장도 정도가 있지! 라는 항의가 들어올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가성비였다.
문제는….
인공지능죽어 : 싫어요.
ehcks2: ?
하윤서는 정도찬의 팀에 합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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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정도찬은 예전에 하윤서를 집에 바래다준 적 있는신세연에게 하윤서의 집 주소를 물었다.
어째서인지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아 보이던 신세연은 결국 정도찬의 부탁에 넘어가 하윤서의 집 주소를 넘겨줬고, 덕분에 정도찬은 하윤서의 집에 방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하윤서는 방에 콕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그런 하윤서 대신 정도찬을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하윤진 6단.
하윤서의 아버지였다.
하윤서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집안 내력이었던 것일까.
삐친 머리가 신경 쓰이는 중년의 사내는 정도찬을 보자마자 의아하다는 듯 인사를건넸다.
“요즘 소문이 자자하신 정 사범님이 여긴 무슨 일로….”
“아…. 하 사범님…. 처음 뵙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하윤서 초단을 만나러 왔는데요….”
숨 막힐듯한 어색함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별일은 없었다고 하지만 하윤진의 처지에서 볼 때 정도찬은 자신의 딸이 공개적으로 고백을 한 사람이었고.
정도찬의 입장에서도 하윤진은 자신의 선배격이 되는 사람이자 자신과 스캔들이 난 아이의 아버지였으니.
그렇게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어색하게 서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이 침묵이 너무나 불편했던 정도찬이었다.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선배님.”
“제가 은퇴한 지가 좀 오래된지라…. 나중에 편해지면 편하게 부르겠습니다.”
정도찬도 어색한 사람에게 벽을 칠 때 비슷한 표현을 사용해서 알고 있지만, 나중에 편해지면 편하게 부르겠다는 말은 ‘아직은 당신이 불편하다.’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정도찬은 자신을 경계하는 듯한 하윤진을 보며 고민했다.
‘역시 스캔들 때문에 날 안 좋게 보시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는 하윤진이 정도찬 자신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으니….
정도찬은 잠시 말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하 사범님도 들으셨을 태지만 저랑 하윤서 초단은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하윤진이 이상하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듣던 말과는 조금 다르네요. 윤서는 졸업하면 정 사범님이랑 결혼하겠다고 하던데.”
“......?”
순간 정도찬의 사고가 멈췄다.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정도찬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졸업 후 결혼…. 어쩌고 한 것 같은데?
충격에 빠진 정도찬을 보며 하윤진은 말을 이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그, 그렇군요. 농담. 하하하…. 다행이네요.”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서 내뱉은 그 한마디가 실수였다.
정도찬의 말실수가 딸 바보 아버지의 역린을 건드려 버린 것이다!
“다행? 지금 우리 윤서랑 결혼을 안 해서 다행이라고 한 건가?”
존댓말을 하겠다던 하윤진의 말투가 순식간에 반말로 바뀌고, 세상 다 산 듯 유했던 눈은 순식간에 도끼눈이 되어 정도찬을 위협했다.
그의 급발진에 정도찬은 내심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딸 가진 아버지들은 다 이런가….’
자신의 스승인 신창연도 신세연에게만큼은 묘하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하윤서의 아버지인 하윤진도 딸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 자체가 바뀌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루아의 스승인 한세빛도 자기 제자자랑은 어디 가서 안 꿀리는 양반이고. 정도찬 그 역시 스스로 자각은 없지만 몇 번의 인터뷰 때문에 팔불출 이미지가 강했다.
어쨌든 제자 사랑이 나라 사랑인 정도찬은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아뇨, 아뇨,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그럼 뭔가? 윤서랑 결혼하는 게 좋다 이 말인가?”
“아뇨…. 그게 아니라….”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가드 불가 기술?
긍정해도 부정해도 그 끝에는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정도찬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
‘누가 바둑 기사 아니랄까 봐 수 싸움이….’
그렇게 곤란해하던 정도찬을 구해준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정도찬이 온 것을 눈치채고 방문에 딱 달라붙어 둘의 대화를 엿듣고있던 하윤서가 방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어 빼액! 소리 지른 것이다.
“아빠! 내가 도찬 오빠 괴롭히지 말랬잖아!”
하윤진은 익숙한 듯 능글맞게 대답했다.
“괴롭혀? 내가? 누굴? 정 사범, 내가 자네 괴롭혔나?”
당신이! 나를! 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눈앞의 하윤진이 너무 무서웠다.
원래 폭력은 법보다 가까이에 있는 법.
정도찬은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대답했다.
“아뇨 그런 적 없습니다.”
“거봐라.”
하윤서는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는 눈빛으로 정도찬을 쳐다봤고, 정도찬은 애써 눈을 피했다.
“아빠 미워!”
하윤서는 다시 방문을 쾅- 닫고 방에 틀어박혔다.
그 모습을 보던 하윤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딸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아하하….”
어쩐지 나중에 수정이가 커서 저런다고 생각하니 하윤진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정도찬이었다.
‘아니 우리 수정이는 착해서 안 그럴 거야.’
과연 그럴지는 커봐야 아는 법이었다.
“그래서, 농담은 이쯤 하고. 요즘 한창 바쁘신 분이 이런 곳까지 온 이유가 뭔가?”
‘농담이었구나….’
아니, 진짜 농담 맞나?
잘못 대답했으면 죽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정도찬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하윤서 초단을 저희 팀으로 지명하고 싶어서요.”
“지명? 권한은 있고?”
“네, 제가 팀장이거든요.”
하윤진은 살짝 놀란 듯 물었다.
“미안한데 정 사범 지금 단급이 어떻게 되시는가?”
“2단입니다.”
“TH 배 우승하면 4단이구먼. 4단에 팀장이라…. 내 경력이 그리 길지 않지만 4단이 팀장 자리를 맡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부끄럽지만, 제가 최초가 맞을 겁니다.”
고작 4단에 불과한 정도찬이 한 팀의 팀장을 맡는 것은. 10개 팀으로의 체재 전환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GSG의 유연아가 정도찬을 이렇게까지 강하게 원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하윤진은 살짝 감탄하며 말했다.
“정도찬, 정도찬, 말로만 들어봤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구먼.”
정도찬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었다.
하윤진은 그런 정도찬에게 진지하게 부탁했다.
“우리 윤서좀 잘 부탁하네.”
“네?”
“애가 지금까지 배운 게 바둑뿐이니 저걸로 먹고살아야 할 텐데 도통 뭘 할 생각을 안 한단 말일세…. 내 말은 잘 듣지도 않고.”
“아…. 네….”
정도찬은 순간 하윤진의 태도가 마치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부모님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보니 둘의 처지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하윤서는 졸업 후 계획이 뭐냐는 질문에 무려 ‘인터넷 바둑’이라고 대답해 정도찬의 정신을 날려버린 전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말이 장난이라고 생각해서 정도찬이 가끔 하윤서를 보며 고졸 무직 백수 예정자라고 놀리긴 했지만, 그게 농담이 아니라 진짜가 될 수도 있다는 건가?
정도찬 역시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하윤서 초단의 백수 탈출을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믿겠네.”
정도찬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