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65국 - 누구나 다 계획이 있다.
결국, 정도찬의 설득에 성공한 유연아는 바로 한국기원으로 달려와 한소율의 눈앞에서 계약서를 흔들며 놀리듯 말했다.
“어머? 이게 뭐지? 개인 사정 때문에 갑조리그에 출전 못 한다던 정도찬 2단 계약서네?”
유연아의 도발에도 한소율은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곳 저곳에서 일하며 별 꼴을 다 보던 한소율의 눈에 유연아의 장난 정도는 말 그대로 귀엽게 보일 뿐이었으니까.
“어떻게 정도찬 2단을 설득하셨나 보네요? 힘드셨겠어요.”
“네, 많이 힘들었죠…. 한 5분 걸렸나?”
이번에는 한소율도 살짝 이를 악물었다.
‘정도찬 이 인간이….’
쉽게 넘어가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5분 만에 홀랑 넘어갔다고?
당신 그렇게 쉬운 남자였어?
한소율의 심경이 복잡해지든 말든 유연아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리도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하니 창단 절차를 밟고 싶은데요.”
“그 전에 정도찬 2단과의 계약을 살펴봐도 될까요?”
“싫은데요? GSG와 정도찬 2단, ‘우리’ 둘의 계약인데 왜 연맹이 참견하려고 하는 거죠?”
일부로인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괜히 ‘우리’라는 말을 강조해서 말하니 신경에 거슬렸다.
한소율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팀과 개인의 계약을 사전에 확인하여 불공정 계약을 미리 방지하는 것이 연맹의 의무 중 하나이니 이해 부탁드려요.”
“연맹이 그런 일도 했던가요?”
“그럼요. 그러지 않으면 바둑기사 분들이 저희를 어떻게 신뢰하겠어요?”
한소율이 이렇게 나오자 이번에는 유연아가 당황했다.
‘아직 사인 안 했는데….’
사실 정도찬을 설득한 바로 그 자리에서 사인을 받아내고 싶었지만 정도찬이 생각보다 신중했다.
계약할 땐 하더라도 계약서 검토는 해봐야 한다면서 사본만 가져가 버린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사사건건 방해하던 한소율을 놀리며 팀 창단 시기도 조금앞당기기 위해서 아주 조금 공갈을 친 것인데.
이렇게 계약서를 확인하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는 몰랐다!
“자세한 사항은 정도찬 2단한테 물어보세요. 우리는 최고의 대우를 약속했으니까.”
유연아가 지금까지 여봐라는 듯 흔들어 재끼던 계약서를 갑자기 고이 서류가방에 모시는 모습이 썩 미답지 않았지만 ‘최고의 대우’라는 말 만큼은 사실인 것 같았다.
‘내가 경고까지 했는데 딱 5분 만에 넘어갔다는 걸 생각하면…. 그만큼 좋은 조건이었겠지.’
그래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정도찬이 설득된 그 시점에서 한소율 자신에게 전화라도 한번 걸어줬다면 분명 더 좋은 조건을 받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도찬의 가치는 지금이 최저점이었고, 유연아는 어떻게든 정도찬을 데려가고 싶어서 몸이 달아올라 있었으니까.
몸값을 올릴 거면 얼마든지 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계약 당사자도 아닌 내가 이제 와서 끼어드는 건 명분이 좀 약해.’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웠지만, 한소율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한소율은 유연아에게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 창단 절차를 진행해도 될까요?”
“그럼 저희야 좋죠.”
이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벌써 TH 배 4강도 절반 정도 진행되었고, 결승전 이후에는 지명이 시작된다.
그 사이에 협회 쪽의 동의를 얻어내고, 기존 팀들도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10개 팀 체제의 바둑 리그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여유 있는 일정이 아니었다.
유연아도 자칫 잘못하면 창단이 내년으로 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우려해 정도찬을 설득하자마자 한국기원으로 달려온 것이었고.
한소율 역시 유연아의 태도가 미심쩍었지만 어느 정도는 눈 감고 넘어가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한소율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유연아는 바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괜히 꼬투리 잡혀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소율은….
“이 인간….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자신의 경고를 개무시하고 단 5분 만에 유연아의 꾐에 넘어간 정도찬을 응징하기 위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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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소파 위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정도찬이 오늘따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무엇인가를 걱정하는듯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온갖 사고를 치고 난 후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하는 평소의 정도찬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스승님은 갑자기 왜 저렇게 불안한 모습을 보이시는 걸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김수정은 살금살금 정도찬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말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아...”
‘한숨을 쉬셨어!’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 김수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승님…. 무슨 일 있으세요?”
“수정아,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기원을 부탁한다.”
“......?”
대체 무슨 사고를 치셨길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쪼꼬렛을 보육원에 보내버린 것을 깨달았을 때보다 더 무서워하는걸까?
한소율 연맹장님은…. 만나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정도찬이 유도신문에 걸려서 자백해버린 모양이고.
세연 언니의 쪼꼬렛은 김수정 자신이 어떻게든 구출해서 정도찬에게 반쯤 강제로 먹였다.
신세연이 초콜릿을 만들기 전에 김수정에게 정도찬이 어떤 초콜릿을 좋아하는지 염탐해달라고 부탁했고 둘이 머리를 맞대 정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윤서의 초콜릿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했다.
아직 별일 없는 거 보면 어련히 알아서 잘 먹었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하윤서가 자신의 초콜릿을 먹지 않아서 삐졌고, 그것 때문에 정도찬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여자가 한을 품음이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도 하지 않는가.
개인적인 친분을 떠나가게끔 자신의 스승님이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에게 하는 일을 보면 같은 여자로서 한숨이 나올뿐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스승은 이런 사람인 것을.
김수정은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소파 위에 올라가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정도찬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스승님 괜찮아요! 다 잘될거에요.”
“......?”
정도찬은 순간적인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김수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뭔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것 같은데?’
자신이 물론, 조금, 아주 조금,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위로를 받을 정도로 잘못된 일은 없는데?
“갑자기 왜 그러니?”
“전 언제나 스승님 편이에요!”
“그래…. 고맙다….”
그래…. 자신의 편이라는데 뭘 더 이야기하겠나.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정도찬 자신의 편이라니 아무튼 고마웠다.
사실 김수정의 예상과 달리 정도찬이 핸드폰 앞에서 궁상을 떨고 있는 이유는 한소율 때문이었다.
먼저 연락을 해서 이실직고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한소율에게 전화가 올 때까지 모른 척 있는 것이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정도찬은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그래, 내가 호구 당한 것도 아니고! 받아낼 수 있는 조건도 다 받아냈고! 난 잘못한 거 없…. 진 않지만 그래도 완전히 잘못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속으로 추한 변명을 내뱉던 정도찬은 결국 한소율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정도찬의 핸드폰이 먼저 울리기 시작했다.
“망했네.”
한소율의 전화였다.
정도찬은 전화를 받자마자 머리부터 박았다.
“죄송합니다아….”
[요즘 도찬 씨랑 전화할 때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듣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이죠?]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어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도 하고. 그래서 조건은 괜찮은 것 같아요?]
“총액 20억 규모의 계약이에요.”
정도찬은 한소율에게 구체적인 계약을 설명해줬다.
정도찬에게 설명을 들은 한소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쩐지 자신이 개입하지 않았는데 후하게 쳐준 것 같더라니….
[어쩐지 이상하게 총액은 높더니만 인센티브로 떡칠을 해놨네요. 이야기 들으면서 이상한 거 못 느꼈어요? 이런 계약은 원래 기본급을 높이는 쪽이 남는 장사에요.]
“그래요?”
[그리고 애초에 상금에 10억 더하는 것도 도찬 씨가 다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승 시2억 정도의 인센티브라고 계산하는 게 맞죠.]
“그것도 그렇네요.”
[도찬 씨의 승률이 50%고 팀이 우승을 못 한다고 가정하면 도찬씨가 받을 수 있는 돈은 7억…. 정도네요?]
한소율은 순간 이것이 1년 연봉임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다. 라고 생각해버렸다.
‘뭐지 왜 이렇게 후하지?’
진짜 엄청 세게 질렀네?
전액 인센티브인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정도찬이 1인분 역할만 해줘도 역대급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계약이었다.
우승 상금에 10억을 더하는 것도 엄연히 정도찬의 계약서에 있는 내용이었으니 ‘정도찬의 계약으로 인해 바둑 리그의 상금이 올라갔다.’라는 식으로 여론몰이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잘만 활용하면 정도찬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을 더할 수 있다.
심지어 특약으로 팀이 1위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타 대회 참가도 허락받았으니….
‘진짜 괜찮은, 아니 좋은 계약인데?’
유연아라면 당연히 후려칠 거라고 생각했던 한소율은 조건이 너무 괜찮아오히려 어안이 벙벙한 느낌이었다.
“연맹장님?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한소율은 정도찬의 물음에 정신을 차렸다.
[아뇨, 그건 아닌데…. 계약 잘 했네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덜컥 사인부터 하지 말고 저한테 꼭 이야기해주세요.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한소율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아주 우리 엄마라니까….’
그래도 싫지만은 않았다.
결국,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으니까.
한소율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정도찬은 적당한 타이밍에 한소율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그 모습이 부모님의 잔소리를 회피하려는 아이의 모습 같아서 한소율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몽백합배까지 1위 유지할 자신은 있어요?]
“그거야 당연하죠.”
정도찬 역시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기에 이런 조건을 먼저 제안한 것 아니겠는가.
정도찬 자신이 TH 배에서 우승해 4단으로 승단한다고 해도, 정도찬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가성비를 자랑한다.
게다가….
“저한테는 필살기가 있거든요.”
정도찬은 이 순간 집에 틀어박혀서 인터넷 바둑이나 깔짝이고 있을 고졸무직백수(진)을 떠올렸다.
위장단급 맛 좀 봐라!
정도찬에게는 이미 다 계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