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64국 - FLEX
4강 둘째 날의 대국에서도 승리를 거둬 앞으로 결승 진출까지 단 1승만 남겨둔 정도찬은….
“5분만…! 5분만 있으면 된다니까요?”
“왜, 왜 이러세요!”
개진상을 만났다!
기분 좋게 승리를 거두고 대회장을 나왔다가 날벼락을 맞은 꼴인 정도찬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 놓아줄 생각을 안 하는 여성을 향해 말했다.
“저 종교 믿을 생각 없고요, 뭐 사지도 않을 것이고, 복이 있지도 않고 도 같은 것도 몰라요!”
“그,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졸지에 잡상인 취급을 받게 된 GSG 회장의 손녀, 유연아는 얼굴을 붉혔다.
물론, 조금, 아주 조금 절차와 양해를 무시하고 접근했다고는 하지만 잡상인 취급이라니!
원래 계획은 이러지 않았다!
홀연히 정도찬의 앞에 나타나서 ‘5분만 주세요.’라고 딱 멋있게 붙잡고.
정도찬이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면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으로 그를 설득할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바로 계약서에 도장 쾅! GSG바둑팀 창단! 유연아 자신은 단장 발령!
모든 게 다 완벽했던 시나리오인데….
갑자기 자신의 앞을 막아선 유연아를 보고 정도찬이 기겁을 하면서 피하려고 해 모든 것이 꼬여버렸다.
도망가려는 정도찬의 손목을 얼떨결에 잡아채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이상한 오해를 하게 된 것 같고.
일단 정도찬을 진정시킬 필요성을 느낀 유연아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GSG에서 나왔어요!”
“GSG? 거기 백화점이잖아요?”
‘역시 잡상인이잖아!’라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정도찬의 모습에 유연아는 살짝 울컥했지만 여기서 화를 내 봤자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백화점 사장 딸이에요. 이제 제가 누군지 좀 알겠어요?”
“아... GSG백화점 사장 따님이셨구나~”
이 바보 같은 인간이 드디어 자신을 알아봤다고 생각한 유연아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딱 5분만 줘요. 당신을 완벽하게 설득해줄 테니까.”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정도찬은 정장의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네, 여기 방송국 지하주차장인데요. 여기 이상한 여자가….”
“......?”
“네, 자기가 무슨 GSG백화점 사장 딸이라는데요.”
상황을 파악한 유연아가 빼액! 소리 질렀다.
“누굴미친 사람 취급하는 거예요!”
“갑자기 화내기 시작했는데 최대한 빨리 내려와 주실 수 있으신가요?”
“당신 때문에 화내는 거잖아!”
“네, 감사합니다.”
정도찬은 인사까지 마치고 통화를 종료했다.
그걸 또 기다려주고 있던 유연아는 정도찬에게 따졌다.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군요?”
“사람 불렀으니까 문제 생기기 전에 나가세요.”
정도찬의 말에 유연아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부른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데 몇 분이나 걸릴까요?”
“글쎄요, 방송국이 워낙 넓다 보니 5분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잘됐네요, 그럼 그 5분만 나한테 줘요.”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이 필요하니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이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정도찬은 이내 그것이 한소율이 자신을 설득할 때 했던 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때도 이 말 듣고 설득당했는데.’
어쩐지 이번에도 똑같이 당할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정도찬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유연하는 그제야 자기소개를 할 수 있었다.
유연아는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유연아라고 해요.”
정도찬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다름 아닌 얼마 전 한소율이 정도찬에게 전화해서 경고를 한 사람의 이름이었으니까!
‘한소율 연맹장이 따로 전화까지 해서 경고를 했을 정도면…. 신분은 확실한 거네.’
그렇다면 아까 헛소리라고 치부한 GSG 회장의 손녀딸이자 GSG백화점 사장 딸이라는 말이 진짜였다는 말인가?
눈앞의 아가씨가…. 소위 말하는 재벌가 아가씨라고?
‘뭐야, 나 또 사고 친 거야?’
순간 잠시 불안해졌지만 정도찬은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한소율이 직접 전화까지 해가며 경고를 한 이상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니, 본론이 나오기 전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GSG는 바둑팀 창단에 큰 관심이 있어요.”
“그런 이야기라면 제가 아니라 한소율 연맹장님이나 유시운 협회장님을 찾아가셔야죠.”
“당연히 찾아갔죠, 그런데 한소율 연맹장은 당신이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바둑리그 참가는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대회 참가 역시 어찌 보면‘개인적인 사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말 하면 재수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일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죠. 돈으로 해결이 되지않는다면 그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돈이 부족한 거고요.”
“이런 말 하기 죄송한데 진짜 재수 없긴 하네요.”
정도찬의 몸쪽 꽉 찬 돌직구에 잠시 할말을 잃은 유연아였지만 금방 정신을 되찾은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당신의 개인적인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해결해줄게요.”
“그러니까 새로 만들어질 GSG팀에합류해달라 이런 말인가요?”
“말이 잘 통하니까 좋네요.”
정도찬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안 될 것 같습니다.”
“조건…. 정도는 들어보는 게 어떤가요? 최고의 대우를 약속할 수 있는데.”
정도찬은 서류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려는 유연아를 제지했다.
“대우의 문제가 아니에요, 개인적인 사정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그 개인적인 사정을 저희가!”
정도찬은 유연아의 말을 끊었다.
“TH 배 전국 기전에서 우승하면 몽백합배 세계 기전에 출전할 수 있습니다.”
“전국 기전 우승자가 세계 기전 예선 시드를 얻는 것 정도는 저도알아요.”
“몽백합배에서 우승하면 기왕전에 도전할 자격이 생기지요.”
“그거야…. 세계 기전에서 우승하면 9단으로 승단하니 당연한 말이잖아요.”
유연아는 지금 누구를 바보로 아느냐는 듯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정도찬을 쳐다봤다.
정도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기왕전에서 우승하면 타이틀 도전권을 얻을수 있고요, 도전기에서 이기면 그때부터는 제가 기왕이에요. 혹시 GSG정도 되는 기업은 기왕의 자리도 돈으로 살 수 있나요?”
유연아도 마냥 당해줄 생각은 없었기에 반박했다.
“정 사범님은 혹시 공매도라는 말 들어봤어요?”
“주식 같은 거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공매도는 말 그대로 ‘없는 것을 판다’라는 뜻이에요. 정 사범님이 저에게 한 제의가 완벽한 공매도의 예가 되겠네요. 정 사범님이 기왕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제가 왜 그것에 대한 대가를 고려해야 하는 거죠?”
정도찬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제가 평생 바둑만 두고 살아와서 잘 모르기는 하는데, 경제학에는 기회비용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요?”
“뜻이 조금 다르긴 한데…. 뭐 맞는 말이긴 하네요.”
유연아가 수긍하자 정도찬은 시계를 보며 말했다.
“말씀하신 5분 지났으니 이제 가봐도 될까요?”
정도찬이 정말 등을 돌려 가버리려고 하자 유연아가 급히 말했다.
“중국 갑조리그에 용병으로 가는 프로바둑기사들은 10만 위안 빵이라는 걸 하죠?”
10만 위안 빵이라는 것은 승리 시 대국료 10만 위안, 패배 시 대국료 0위안의 모 아니면 도식계약이었다.
10만 위안을 원화로 환산하면 약 1800만 원이다.
상금이 아니라 고작 대국 한 번의 대국료가 1800만 원인 것이다.
물론 전패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온다면 시즌 내내 대국료를 한 푼도 받지 못하겠지만.
무려 해외에 지명까지 받아서 가는 사람들의 실력이 녹록할 리가 없었으니, 중국 갑조리그에 지명된 사람들이 대국료로 몇억씩 받아오는 것은 이제 뉴스도 되지 못할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정도찬이 이 계약을 모를 리가 없었기에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유연아가 마지막 거래를 걸어왔다.
“10만 위안이면 대충 1800만 원이죠? 전 200 더 얹을게요. 2000만 원 빵 어때요?”
현행 8개 팀의 바둑리그의 경기 수는 56경기.
그렇다면 정도찬이 전승했을 때 받는돈은 대충 계산해봐도 11억 이상.
게다가 만약 GSG가 창단해 팀의 숫자가 늘어나면 경기 수도 늘어날 것이다.
여기에 포스트시즌까지 진출한다면?
이건 대충 생각해봐도 말 그대로 한국 바둑리그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의 역대급 대우였다.
제안을 받은 정도찬이 ‘이건 너무 과하다.’라는 생각을 해 버릴 정도였으니….
유연아는 아예 쐐기를 박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바둑리그 우승 상금이 3억이었던가요?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3억은 너무 짠 것 같지 않아요? 한 명이 받는 것도 아니고 여섯 명 이상이 배분해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그래요? 프로바둑기사들은 다 소탈한 건가? 어쨌든 저희가 창단하면 대회 상금도 더 얹을 거예요.”
정도찬은 굳이 얼마를 더 쓸 생각이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조금 마음이 불편했다.
‘나를 돈으로 살 생각인가?’
“우승 상금에 10억 더 얹으면 대충 한 사람당 2억은 가져갈 수 있나요?”
라고 꾸짖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리그의 위상은 상금과 비례한다.
10억을 추가하면 바둑리그의 우승 상금은 13억.
말 그대로 대회의 격이 달라질 수 있는 금액이었다.
“10팀 바둑리그 출범, 1승당 2천만 원, 우승 상금 10억 추가, 여기에 팀장 자리까지. 어때요. 이 정도면 그 ‘기회비용’을 충당하고도 거스름돈이 남을 것 같은데.”
유연아는 정도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때요 딜?”
하지만 정도찬은 유연아의 손을 잡지 않고 새로운 거래를 제안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충분히 챙겨드릴 만큼 챙겨드린 것 같은데…. 좋아요. 말해 봐요.”
“몽백합배가 시작되기 전에 팀 순위가 1위이고, 승점에 여유가 있다면 몽백합배 출전을 허락해주세요. 같은 조건으로 기왕전도요.”
“흐음….”
유연아가 생각에 잠겼다.
유연아는 딱히 정도찬이 만들 팀이 강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정도찬이 TH 배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갑조리그의 ‘검증된’ 팀장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니까.
또한, 팀을 짜는 것도 프로 입단 2년 차인 정도찬에게 불리한 게임이 될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유연아가 오직 정도찬, 죽어도 정도찬을 외치고 있는 이유는 그가 가진 스타성 때문이었고.
정도찬이라는 프로바둑기사의 가치는 지금이 가장 저평가되어있다는 판단이 서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나한테 불리한 조건도 아니야.’
몽백합배나 기왕전에 나간다고 해도 정도찬은 엄연히 GSG소속으로 참가하는 것이다.
즉 공짜 광고나 다름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었던 유연아는 정도찬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팀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다는 조건이라면 좋아요.”
정도찬은 유연아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팀명은 뭐로 할까요?”
정도찬의 갑조리그 진출이 확정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