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4화 〉62국 - 이번만 봐 준다. (64/75)



〈 64화 〉62국 - 이번만 봐 준다.

바둑계에는 선수의 팬은 있어도 팀의 팬은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바둑 리그의 특이한 성질에서 비롯된 말이었는데.

팀장 겸 감독을 제외한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매년 팀원의 구성이 바뀌는 구조인 현 바둑 리그에서 ‘선수’의 팬이 생길 수는 있을지언정 ‘팀’의 팬이 생기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바둑 리그의 규모를 확장하는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

기업이 스포츠에 후원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목적은 홍보이다.

현행바둑 리그에서 기업이 확실한 홍보 효과를 누리기 위한  가지 방법이 있었으니.

첫째는 유명한 팀장을 섭외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나마 유명한 선수들이 자신의 팀에 지명되는 것을 기도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자기  내고 그저 두 눈 감고 기도하고 싶어 하는 기업은 거의 없었고, 덕분에 확실한 팀장이 없다면 팀을 운영하지 않겠다고 생떼를 부리는 기업 역시 있었다.

현행 바둑 리그의 8개 팀은 실력과 인기를 겸비한 6명의 팀장과 그저 바둑이 잘 되었으면 하는 2명의 바둑 팬 회장 덕분에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한소율은 아주 예전부터 바둑 리그의 10개 팀으로의 확장을 원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팀이  개 더 있으면 갑조리그에 그만큼 많은 자리가 생긴다.

6단의 벽이라고 불리는 통곡의 벽을 조금이지만 낮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홉 번째 팀이 될 AT 모바일은  기왕 김덕수에게 타이틀을 넘겨줘 무관의 신분이 된 김윤수 연맹 9단을 팀장으로 지명했고, 김윤수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열 번째 팀이 될 가능성이  GSG가 조금 무리한 조건을 걸면서 시작된 것이다.

GSG의 회장 손녀이자 GSG바둑팀의 네이밍 스폰싱 전권을 가진 유연아는 오늘의 미팅에서도 단 하나의 요구조건을 고수했다.

“정도찬을 우리 팀에 주세요.”

GSG측에서 용병 카드를 하나  달라,지명권에서 특혜를 내놓아라, 등의 혜택을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있던 한소율로서는 뒤통수를 맞은듯한 느낌이었다.

‘도찬 씨가 잘해도 너무 잘했어.’

장사치는 기본적으로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이다.

누가 봐도 저평가 우량주인 정도찬이 눈에 띄었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다른 팀들도 정도찬 정도찬 노래를 부르는데….’

한소율이라고 정도찬이라는 좋은 바둑기사를 왜 갑조리그에 출전시키고 싶지 않겠는가.

문제는 스케줄이었다.

TH 배 전국 기전에 참가하고 우승한다면 5월의 세계 기전인 몽백합배에 참가, 만약 몽백합배에서도 우승한다면 8월의 기왕전에 참가하는 것이 정도찬의 계획이었다.

입단 후 최단기간 9단 승단과 타이틀 획득을 동시에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갑조리그에 발이 묶이게 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게다가 몽백합배는 중국에서 열리는 세계 기전이니까 국내 기전인 갑조리그와 병행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그러니까 결국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한소율은 최대한 사무적인 말투로 유연아를 응대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정도찬 2단은 개인 사정상 갑조리그 출전이 어렵습니다.”

유연아는 짜증 난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 개인 사정이 뭐냐고요.”
“개인 사정이니까요. 제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아…. 제 말을 들어주실 생각이 없으시군요.”
“그럴 리가요, 우리 한국바둑연맹은 언제나….”
“집어치우죠. 정도찬 2단을 직접 만나게 해주세요.”

한소율로서는 절대 들어주고 싶지 않은 부탁이었다.

정도찬 그 인간은 자신이 갑조리그에 참가만 하면 갑조리그 팀이 두 개나 늘어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위인이 못 되니까!

정도찬이 이 여우 같은 인간을 상대로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선수 개인의 프라이버시인지라.”
“프라이버시라…. 프라이버시는 중요하니 어쩔  없죠.”

유연아는 한소율을 노려보며 경고의 말을 전했다.

“지금까지는 정도찬 2단이 연맹과 더 친밀한 것 같아서 연맹으로 찾아왔지만, 앞으로는 협회로 찾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만 기억해 주세요.”
“부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말만 남긴  유연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협회로 가고 싶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협회는 바둑 리그의 규모를 늘리는 것에 반대하는 처지에 서 있었다.

팀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바둑 리그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보들이었으니까.

그러니 결국 이 싸움의 명분은 연맹에게 있었다.

질적 어쩌고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지껄이는 협회와는 다르게 연맹은 ‘자리를 늘린다.’라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좋아, 그럼 정리해보자.’

최선의 시나리오는 유연아가 정도찬을 포기하고 다른 특혜만으로 만족하는 것.

하지만 AT 모바일이 전대 기왕 이라는 확실한 카드를 받아간 지금 GSG측에서 웬만한 카드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분명히 ‘쟤는 저거 받았는데 왜 우리는 이것밖에 안 주는 거야!’라는 소리가 무조건 나올 테니까.

그렇다면 전대 기왕에 버금가는, GSG를 만족하게 할만한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진작 바둑 리그에 집어넣었지….’

없다.

그게 문제였다.

애초에 실력과 인기를 겸비하면서 한 기업의 얼굴이 될 만한 갑조리그에 참가 가능한 바둑기사가 일곱 명이나 있는 것이 신기한 것이다!

지금의 바둑리그는심각할 정도로 몇몇 사람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결국, 바둑 리그 자체를 뜯어고쳐야 하는데….’

그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까?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될까?

이놈의 바둑계는 뭐 하나 해결할만하면 다른 문제가 끝도 없이 튀어나왔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순간 극심한 현자타임이 온 그녀였지만 다행히도 일단 당면한 과제부터 해결하자는 의지가 더 강했다.

일단, 생각하기도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가지.

첫 번째, 유연아가 미친 척하고 협회에 쳐들어가고, 유시운 그 늙은이도 미쳐서 정도찬을 GSG팀에 소속시키겠다는 약속을 해버린다.

이 경우에는 가만히 있던 정도찬에게 불똥이 튀어버리는 것이다.

안 그래도 동시 입단 때문에 말이 좀 나왔었는데, 지금까지는 ‘꼬우면 너도 해라.’라는 말이 통했지만 이런 상황이 되고 나서도 정도찬의 이중 소속을 두둔할 수 있을까?

아마 귀찮고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번째, 정도찬이 유연아에게 홀랑 넘어가 갑조리그에 들어가 버린다.

‘진짜 이러기만 해봐라….’

그땐 진짜 가만 안 둘 테니까.

아니지, 혹시? 설마? 싶은 것도 태연하게 해버리는 인간이 정도찬이다.

확실하게 말해두는 편이 좋을지도.

절대 그냥 전화하고 싶어서 전화하는  아니다.

초콜릿은 잘 먹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전화하는 게 아니라고!

의미 없는 자기합리화를 하며 한소율은 핸드폰을 꺼내 정도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도찬 씨?”
[네 연맹장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정도찬의 말에 한소율은 살짝 마음이 상했다.

‘꼭 무슨  있어야 전화할수 있나…. 그냥 전화할 수도 있는 거지.’

그래도 오랜만에 정도찬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였다!

“혹시 초콜리…. 아니, 이게 아니라…. 유연아라는 사람이 찾아가면 무조건 거절해야 해요 알겠죠?”
[갑자기 그게 무슨말이에요?]
“그냥 딱 이것만 기억해요. 유연아, 안돼!”
[그래도 이야기 정도는 들어봐도 되는 거 아닐까요?]
“안돼요!”

순진한 정도찬이라면 아차 하는 순간 그 여자의 간악한 혓바닥에 홀랑 넘어가 버리고  것이다.

[네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꼭이에요? 약속!”
[네 약속할게요.]

아무리 정도찬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말해뒀으면 알아들었겠지.

그런데…. 초콜릿은 잘 먹었을까?

별말 없는 거 보면 별로 맛 없었던 건 아닐까?

물어볼까 말까?

이 단순한 고민이 다른 어떤 정치적인 고민보다  어렵게 다가오는 것은 어째서일까.

한소율은 한번 심호흡을  후에 정도찬에게 물었다.

“제…. 초콜릿 어땠어요? 잘 먹었어요?”
[......?]

당연히 정도찬이 그걸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도찬이더라도 이런 질문까지 들었는데 ‘아 이 사람이 나에게 초콜릿을 보냈구나!’라는 사실 정도는 추론할 수 있는 눈치 정도는 있었으니….

[...네! 맛있더라고요. 달고!]
“그래요? 많이 달았어요?”
[아뇨…. 적당히  게 제 입맛에 딱 맞았어요.]
“시트러스 향이 잘  맞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입에 맞았다니 다행이네요.”
[시트러스?  귤 향 말씀하시는 거구나. 어휴…. 너무 맛있게 먹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요, 그럼 화이트데이 기대할게요.”
[아…. 네! 제가 꼭 보답하겠습니다….]
“아 참, 도찬 씨 제가 말 안   있는데요.”
[넹?]
“제가 보낸 초콜릿은 피스타치오 초콜릿인데요?”
[죄송합니다아!!!!]

쿵, 쿵, 벽에 머리를 박는 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한소율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이번만 봐 드리는 거예요. 알겠어요?”
[넵….]

정도찬은 그래도 자기가 잘못한  아는지 전화를 끊을 때까지 연신 사과했다.

전화를 끊은 한소율은 괜히 핸드폰을 원망스럽게 흘겨봤다.

‘물어보지 말걸….’

괜히 물어봤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바보.”

어째서일까.

초콜릿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괜히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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