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61국 - 달콤한 지옥
창연 기원의 아르바이트생 이주은은 오늘도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기원에 출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좋은 아르바이트란 말이야.’
처음에 아르바이트 제의가 들어왔을 때는 기원 아르바이트라고 해서 과거 영화 속에서 보던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의 기원이 떠올라 거부감이 든 적도 있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완전 바보 같은 걱정이었다.
사장님은 착하고, 이주은이 해야 할 일만 제대로 한다면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각종 수당을 주지 않기 위해 편법을 쓰지도 않고. 월급도 제때 챙겨준다.
손님들도 대부분이 단골들이기 때문인지 흔히들 말하는 진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엇보다 사장님의 딸(아니다)인 김수정이 너무 귀여웠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는 김수정의 존재야말로 최고의 복지였던 것이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풀타임으로 뛰어야 하는 아르바이트기 때문에 복학 이후에는 계속 이 일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평생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니….
언젠간 김수정과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자 살짝 울적해진 이주은은 평소와는 다른 기원의 모습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한눈에 봐도 꽤 많은 수의 택배 상자가 기원 앞에 쌓여있었다.
‘뭐지?’
기원에는 택배 보관함이 따로 있어서 웬만한 물건들은 거기 두고 갈 텐데?
상자들이 통행에 방해가 될 정도로쌓여있던지라 이주은은 우선 상자들을 기원 안쪽으로 치웠다.
그렇게 상자들을 모아두자 상자를 뚫고 나오는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이주은의 코를 간질였다.
내용물은 초콜릿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이 밸런타인데이구나.’
2월 14일, 여성이 신경 쓰이는 남성에게 초콜릿이라는 핑계로 넌지시 마음을 건네는 날.
요즘 워낙 바쁘게 살고 있다 보니 완전히 잊고 살았다.
절대로 주변에 초콜릿을 줄 만한 남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정말로….
‘아, 그래도 미리 알았으면 사장님 줄건 사 왔을 텐데….’
잠시 정도찬이 그런 걸 은근히 신경 쓰면 어쩌나 싶었던 이주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주변에 여자가 많을 것처럼 생긴 사람이었고, 거의연예인이나 다름없는 프로바둑기사였다.
자신이 아니라도 초콜릿을 줄 사람은 많겠지.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왕 정리하는 거 택배함에 있는 물건들도 같이 정리하자 싶었던 이주은은 별생각 없이 건물 뒤편 택배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산더미만큼 쌓여있는 초콜릿의 산이 이주은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이주은의 사고가 멈췄다.
‘뭐지?’
자신이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이주은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아주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어디 만화에서나 볼 만한 초콜릿의 산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다음 이주은이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사장니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달콤한 지옥의 문이 열렸다.
#
격렬한 싸움이었다.
초콜릿 군단의 기습에 장렬히 맞서 싸운 이주은과 정도찬은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초콜릿을 멍하니 바라봤다.
먼저 정신을 차린 정도찬이 입을열었다.
“여기서 영화를 찍어도 되지 않을까?”
“무슨 영화요?”
“그 있잖아요…. 골든 티켓인지 황금 티켓인지 뽑으면 공장 견학가게 해주는 사행성 짙은 영화.”
“아…. 그 영화요?”
자세한 건 저작권이 걱정되어 언급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그 공장이 연상될 정도로 많은 양의 초콜릿이었다.
“그런데 이제 어쩌죠?”
“그걸 사장님이 저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아이고….”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이주은 역시 뚜렷한 방법은 없어 보였다.
‘마음은 참 고마운데 말이지….’
정도찬 역시 사람인지라 자신의 팬들이 그를 생각해서 이렇게 많은 초콜릿을 보내줬다는 사실 자체는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많은 초콜릿을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는 말인가.
“초콜릿 유통기한이 어떻게 되더라….”
“제가 아까 찾아봤는데 생 초콜릿 같은 건 일주일밖에 안 된대요.”
“아이고….”
하필이면 가장 많이 있는 녀석의 유통기한이 가장 짧았다.
팬들 역시 자신들 나름대로 정도찬에게 좋은 초콜릿을 선물해주고 싶어서 고가의 초콜릿을 고른 경우가 많았는데, 고가의 초콜릿은 웬만하면 생 초콜릿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다.
정도찬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주은 씨…. 혹시 초콜릿 좋아해요?”
“......싫어해요.”
초콜릿은 지방함량이 높은 고열량 식품!
안 그래도 요즘 조금씩 늘어나고있는 몸무게가 신경 쓰이는 이주은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저 좀 살려주는 셈 치고 조금만 가져가 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말하는 정도찬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이주은은 어쩔 수 없이 공산품 생 초콜릿 몇 상자를 챙겼다.
상자 안에 있던 편지를 정도찬에게 건넨 이주은은 물었다.
“편지는…. 어떻게 하실 거에요?”
“답장해드려야죠….”
이주은은 자신이 당사자가 아닌데도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저 많은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해야 하다니.
‘프로바둑기사도 극한직업이구나.’
평소에 정도찬이 하는 일을 보면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단번에 인식이 바뀌는 느낌이었다.
정도찬이 푸념하듯 말했다.
“손님들한테도 좀 나눠드릴까요?”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의외의 말에 정도찬의의문스럽다는 듯 쳐다보자 이주은은 말을 이었다.
“팬들은 이런 거에 민감하거든요.”
이주은 역시 여자인지라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남자 아이돌 덕후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래서 팬들이 준 선물을 함부로 대하거나 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도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인터넷에는 꼬인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나누는 거여도 팬들이 주는 선물을 장사하는데 이용한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아….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정도찬의 처지에서 보면 그는 이기원의 단골들과 친하니 대충 친구들과 나눠 먹는다는 느낌으로 나눠주는 거라고 해도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아이고….”
초콜릿의 산을 보고 있자 곡소리가 절로 나는 정도찬이었다.
“저어는…. 가볼게용!”
“어, 어디 가요!”
“기원 문 열 시간이에요 수고하세요!”
“아니…. 내가 사장인데….”
답이 없음을 느낀 이주은은 기원의 일을 핑계로 1층으로 도망가버렸고, 결국정도찬만이 남아 멍하니 초콜릿의 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단 다른 애들한테도 나눠줄까.’
정도찬은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도찬: [초콜릿 사진]
도찬: 팝니다, 초콜릿, 한 입도 먹지 않음.
잠시 후 메시지를 확인한 것인지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재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찬: 그만 쳐 웃고 초콜릿 좀 가져가
재영: 즐
도찬: 시발련아…. 살려줘
재영: 그러니까 진작 SNS에 이런 건 보내지 말아 달라고 말을 해뒀어야지.
휘운: 쟤 SNS 안 하잖아
재영: ㄹㅇ? 신세연도 인별은 하는데?
세연: [토끼가 화내는 이모티콘]
세연: [왜 나한테 그래! 이모티콘]
휘운: 솔직히 프로가 인별도 안하는건
휘운: 직무유기 아니냐 ㅋㅋㅋㅋ
재영: ㄹㅇ ㅋㅋ
도찬: 아이~ 싯팔!
도찬: 초콜릿 맛 좀 볼래?
도찬: 한번만 더 놀리면 니네 집 초콜릿 공장 되는 거야
도찬: 처신 잘하라고.
재영: ㅈ같은 새끼...
휘운: 아니근데
휘운: 저건 너무 많은 거 아님?
휘운: 뭐가 저렇게 많아?
재영: 너하고 나한테 갈 거
재영: 다 저기로 간 거임 ㅋㅋ
도찬: 무슨 소리임?
재영: 나하고 휘운이한테 못 보내니까
재영: 우리한테 전해주라고 너한테 보낸 애들도 있을 거라고
재영: 나중에 한 번 확인해봐.
재영: 은근슬쩍 초콜릿하고 편지 두 개씩 들어있는 거
재영: 무조건 있다.
도찬: ㅇㅋ
도찬: 그럼 그런것들은 너희한테 보내면 되겠네
재영: ?
휘운: ?
도찬: 다 정리해서 보낼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정도찬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선물 정리를 시작했다.
‘의외로 전부 다 초콜릿은 아니네.’
택배 상자에서는 인형부터 시작해서 옷, 신발까지, 온갖 물건이 튀어나왔다.
물론 가장 많은 건 초콜릿이었지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도찬이 어느 정도 정리를 끝냈을 무렵.
아직 잠이 덜 깬 김수정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
초콜릿 산을 본 김수정의 고개가 좌우로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그러고 있던 김수정은 곧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듯 자신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
하지만 초콜릿의 산은 그대로였으니.
그 모습을 보던 정도찬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수정아, 너 꿈꾸는 거 아니야.”
“......!”
김수정의 눈이 똥그래졌다.
“이게 다 진짜 쪼꼬랫이에요?”
“그래…. 그런데 쪼꼬랫이라고 하는구나….”
“쪼꼬랫은 쪼꼬랫이에요...”
아무래도 초콜릿을 발음하는 것이 아직 어려운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수정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스승님! 이거 먹어도 되는 거예요?”
“어…. 이쪽에 온건 나한테 온 거니까 마음대로 먹어도 돼.”
오히려 좀 먹어줬으면 했다.
“우와!”
김수정은 초콜릿의 동산에 도도도도 달려가더니 평소에는 비싸서 먹어보지 못한 초콜릿들을 골라 챙기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먹어도 되는데?”
“아니에요 이건 애들한테 가져다줄 거에요!”
“애들? 아….”
보육원의 아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했다.
“애들이 이런 거 많이 좋아하니?”
김수정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어서 못 먹죠!”
“그래?”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정도찬은 선물을 다시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보육원에서는 사용하기 힘든 물건들과 편지를 제외한 선물들이 정도찬과 이재영 정휘운의 팬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근처 보육원들에 발송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초콜릿을 처리할 수 있었던 정도찬은...
“이건 언제 다 답장해주지….”
편지 무덤에 파묻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정도찬의 진짜 지옥은 지금부터였다.
남겨둔 수제 초콜릿의 사이에서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한 김수정이 후폭풍을 두려워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체
정도찬은 편지의 답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행복한 밸런타인데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