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57국 - 야생
오늘도 어김없이 바둑 예능 촬영을 마치고 기원에 돌아온 정도찬은 초토화된 기원의 풍경을 보며 할 말을 잊었다.
기원의 손님들이 하나같이 하얗게 불태운 것과 같은 멍한 모습으로 복기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조용하기는 해도 나름 활기찬 모습이었는데 지금 모습은 마치 큰 전투에서 패배한 패잔병들의 피신처와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뭔 일이 있었던 거지?’
호기심을 이기지못한 정도찬은 카운터에 앉아있던 알바생 이주은에게 물었다.
“주은 씨 오늘은 좀 어때요?”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음…. 별일은 없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요?”
“아…. 그게 수정이가….”
“수정이가 사고라도 쳤어요? 그럴 애가 아닌데?”
이주은은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요즘 수정이가 겨울방학이라 기원에 자주 내려오잖아요? 내려올 때마다 이렇게 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내려올 때마다 이렇게 된다고요? 딱히 시끄럽게 굴거나 귀찮게 구는 아이는 아닐 텐데….”
“그건 저희도 잘 알죠. 그냥 별건 아니고 수정이가 바둑을 너무 잘 둬서 그래요.”
정도찬은 이주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김수정이 바둑을 잘 두는 것은 정도찬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거랑 이 분위기랑 무슨 상관이 있는단 말인가?
정도찬의 표정을 읽은 이주은은 설명을 이었다.
“수정이 실력이 많이 늘어서 이제 손님들이 이길 수가 없거든요.”
“고작 그 정도에 저럴 사람들이 아닌데….”
정도찬이 얼굴을 기억할 정도의 단골들은 바둑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고인물들이다.
이기면 이긴 대로 좋아하고, 지면 진 대로 한 수 배웠다고 좋아하는 그런 인종들이 김수정에게 졌다고 저렇게 침울해할 리가 없는데?
“사실 일대일은 이제 연습이 안된다고 다면기를 뒀거든요.”
“수정이가요? 몇 명이랑 했는데요?”
“원하는 사람 전원이요. 한 일곱 명 정도 있었을걸요.”
“세상에….”
다면기라 하면은 한 명의 고수가 다수의 하수를 상대하여 동시에 여러 대국을 두는 특별 대국이다.
한번 해보면 알겠지만 동시에 여러 국면을 머리에 담아두고 있어야 하므로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수정이 실력이 벌써 그렇게 늘었어요?”
이주은은 황당하다는 듯 정도찬을 쳐다봤다.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시선에 정도찬은 괜히 헛기침했다.
정도찬 역시 잠시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물어본 것이지 딱히 대답을 원하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주은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건넨 정도찬은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지원에게 말을 걸었다.
참고로 한지원은 정도찬의 입단 대회로 칼럼을 쓴 사회부 기자였다.
이 양반은 사회부 기자가 맨날 바둑 칼럼이나 쓰는데도 안 잘리는 게 용했다.
사주 아들이라도 되는 건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물어보겠다는 다짐을 하며 정도찬은 한지원에게 말을 걸었다.
“한 기자님, 제가 잠깐 봐도 될까요?”
그제야 정도찬이 온 것을 깨달은 한지원은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정도찬이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자 한지원은 잠시 바둑판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 사범이 호랑이를 키웠구먼.”
정도찬은 그저 웃으며 대답했다.
“수정이가 좀 뛰어나긴 하죠.”
“뛰어나? 이건 단순히 뛰어나다는 말로는…. 하아….”
한지원은 열변을 토하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지금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는지 깨달은 탓이었다.
그래 정도찬의 입장에서는 김수정을 ‘뛰어나다’라는 단순한 단어로 평가할 수도 있지.
한지원은 자기 나름대로 이해했다.
그사이 복기 중이던 대국의 판도를 읽은 정도찬은 감탄했다.
‘수정이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아직 다른 대국은 보지 않았지만 보나 마나 다른 곳에서도 이것과 비슷하게 두었을 것이다.
겨울방학이 되고, 바둑 공부 시간을 늘리더니 한층 더 성장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김수정의 성장은 가끔 정도찬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마치 콩나물처럼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무럭무럭 자라있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빠른 성장에 정도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질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정도찬은 스승으로서 제자의 성장을 보는 것은 기쁘게 여겼고.
애초에 그런 감정을느끼기에는 둘의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기도 했다.
정도찬이 고민하는 문제는 김수정의 연습 상대가 되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원의 손님들과 연습하자니 김수정이 너무 실력이 좋고, 정도찬이나 그의 친구들은 시간도 시간이지만 수준 차이가 크게 나서 아무리 같이 연습해봤자 지도 대국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수정이가 아는 아이 중에 비슷한 나이 또래면서 수정이만큼 잘 두는 아이는…. 루아 정도인가.’
수정이와 루아 둘이 매일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친하게 지내는 대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루아는 이루아 나름대로 바빠서 김수정과 자주 만나지는 못하니….
‘어떻게 할까….’
예전에는 조금 이름있는 프로바둑기사도 그들의 자녀를 다른 도장에 맡기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 조금 이해가 가는 느낌이었다.
누가 가르치냐 만큼 중요한 것이 누구와 경쟁하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수정의 사정상 다른 도장에 보내는 것은 힘들었다.
애초에 기원에서 내제자로 지내고 있는 것도 누군가 지적하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아웃의 영역에 가까운 일이니까….
그나마 사정을 이해해줄 곳이 창연 도장인데 거긴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니….
‘생각보다 복잡하네.’
시시각각 변하는 정도찬의 얼굴을 보던 한지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 사범,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아뇨, 별건 아닙니다.”
“에이~ 우리가 뭐 하루 이틀 보는 사인가? 내가 이 기원 다닌 게 벌써 3년이야 3년! 정사범도 나 입 무거운 거 알잖아~”
정도찬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게 입 무거우신 분이 사적으로 한 이야기를 냅다 칼럼에 적어요?”
한지원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대답했다.
“에이 그건 우리 정 사범의 그 뭣이냐…. 표현력? 그래! 시적인 표현력과 아름다운 단어 선택이 너무 감명 깊어서 칼럼 쓰면서 좀 참고한 거지.”
“나 참….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저작권료는 나중에 밥 한 끼 사는 거로 퉁 치자고.”
“비싼 거 먹을 겁니다.”
“마음껏 먹어 어차피 법카 쓸 거야 법카.”
지갑에서 은색 카드를 꺼내 자랑하듯 보이는 한지원을 보며 정도찬은 생각했다.
‘이 사람은 진짜 왜 안 잘리는 거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품어온 의문이었지만 정도찬이 알 방법은 없었다.
한지원은 정도찬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뭐가 고민인데?”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집요하게 물어보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 인간도 기자는 기자인가 싶었다.
그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는가.
정도찬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수정이 연습 상대가 없는 것 같아서요.”
“흐음…. 그건 확실히 문제가 있구만.”
한지원 역시 바둑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회부 기자였기 때문에 정도찬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인터넷 바둑을 시키는 건 어떨까?”
“요즘 가정용 인공지능 켜놓고 대국하는 양아치가 많거든요…. 그래서 프로들도 같은 프로만 찾아서 두고….”
“그놈의인공충들은 어디 도움 되는 게 없는구먼.”
한지원이 인공충이라는 비하 발언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정도찬 역시 굳이 정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개인용 바둑 인공지능, 특히 오픈소스 인공지능인 랄라제로가 생긴 이후 급격히 늘어난 이런 부류들은 여러 가지 패악질을 부리고 다녔으니까
바둑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할때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이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실력이 자신의 실력이라고 착각하고는 했다.
대국을 관전할 때도 대국이 끝난 후 대국을 인공지능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닌 실시간으로 따라 두며분석하고, 프로의 수가 블루스팟과 다르면 ‘이렇게 당연한 수인데 왜 그딴 곳에 두느냐’며 비난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면 인터넷 대국 도중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것 정도는 이제 애교로 보일 정도다.
“그래서 수정이를 바둑 학원에 보내볼까 생각 중이거든요.”
정도찬의 말을 들은 한지원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며 펄쩍 뛰었다.
“아니, 지금 수정이를 바둑 학원에 보내겠다고? 수정이를?”
“네, 바둑 학원이면 수정이 또래 아이들이 많을 테니까요.”
한지원은 이제 아예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바둑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불쌍하니까 그만둬.”
“네?”
“정 사범 바둑 학원 다녀본 적 있어?”
“네, 2주 정도 다니다 도장으로 옮겨가긴 했지만요.”
“그러니까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애들 수준이 정 사범이 생각하는 것만큼 높지는 않아. 막말로 여기 손님들이 바둑 학원 다니는 애들한테 질 수준인 것 같아?”
“생각해보니까 그렇네요.”
“그래, 괜히 자라나는 새싹들 밟아 죽이지 말고 다른 길 알아봐.”
김수정은 '적당히'를 모르는 아이이고, 애초에 정도찬도 적당히 두는 법 따위를 가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도찬은 잠시 김수정이 바둑 학원에 다니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했다.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음…. 확실히 이건 좀.’
바둑 학원에는 비슷한 나잇대의 아이들이 있을 테니 그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을까 싶었는데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 사범이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지?”
“그렇네요, 바둑 학원에는 못 보내겠네…. 어쩌죠?”
한지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의기양양한표정으로 말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어때?”
“뭔데요?”
“대신 마음에 들면 나중에 단독 인터뷰.”
“콜.”
맹모삼천지교라고 맹자의 어머니는 훌륭한 교육 환경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했다는데 그깟독점 인터뷰쯤이야.
정도찬의 확답을 받은 한지원은 무슨 엄청난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몸을 앞으로 숙이고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정 사범…. 종묘공원이라고 들어 봤어?”
그 이후 한지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정통파 순혈기사인 정도찬으로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야생의 이야기였다.